종이책 시대가 거(去)하고 플라스틱책 시대가 내(來)하리라 한다. ‘책은 종이로 만든다’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해 보이던 진리가 이제 더 이상 ‘참’이 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 첨단 테크놀로지 열풍이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할 만한 ‘문학’의 생산과 유통구조마저 한바탕 뒤바꾸어 놓을 기세다.
이제 작가들은 사전에 계약을 맺은 인터넷의 출판 관련 업체에 작품을 제공하고, 독자는 발품 팔아 서점에 찾아갈 필요 없이 좋아하는 작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컴퓨터에서 다운로드 받아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한 체제는 그 그릇에 담을 내용을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규정하려 들 것은 뻔한 일. 성급한 평자(評者)들은 작가들이 소위 엔(N) 세대에 영합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제 ‘문학이 가벼워졌다’는 비판적 담론을 내놓는 사람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발표공간과 유통구조와 독자들의 입맛이 어떻게 변했든 문학은 문학이다. 이런 시기에, 한국 현대문학사의 저만치 윗자리에 이름을 걸어놓고 있는 ‘천승세’라는 일견 낡아보이는 코드를 디미는 이유는 모든 게 바뀌어도 문학 생산자로서의 ‘정신’만은 바뀔 수 없다는, 그리고 그 정신의 실천자로 천승세만한 작가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모름지기 소설이란 ‘포유동물의 절규’라고 정의한다. 포유동물의 육친애적인 사랑 없이 감히 소설에 범접 말라고 당당하게 경고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의 애기봉 입구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그의 집이 있다. 평생을 셋방살이로 전전해오다가 1988년에 그곳으로 이사하여 처음 가져본 자신의 집이다. 아니 그의 집이 아니다. 낡은 농가주택으로 보이는 방 둘짜리 자그마한 양옥집의 현관 밖 기둥에는 ‘이철진’이라는 낯선 문패가 달려 있다. 이철진은 부인의 이름이다. “이나마 처가식구의 도움으로 장만한 터에 거기다 ‘천승세’라는 이름표를 달 이유가 없어서”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5년, 내가 ‘포유동물의 육친애적인 사랑 없이 감히’ 소설을 써보겠다고 갓 등단했을 때,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이었고, 뒤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군사정권의 폭압통치에 대한 항거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자고나면 글 쓰는 놈 한두 놈이 감쪽같이 잡혀가기 일쑤였고’(천승세의 표현), 따라서 그 진보적인 문학단체 사무실에서는 일년 내내다시피 항의농성이 이어졌다. 그 농성장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독재권부에 대한 그의 질타의 목소리도 거침이 없었지만, 동료나 후배 문인들에 대한 비판에도 가차가 없었다. 당연히 천 선생에 대한 내 첫인상은 ‘무섭다’였다. 나는 그를, 그의 작품 ‘砲大領’에 나오는 바로 그 예비역 포대령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서운 포대령’과의 만남
얼마 뒤, 임진강변의 ‘반구정’에서 작가회의의 분단현장 탐방 행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빵떡 모자를 머리에 인 근사한 모습으로 소형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잔을 사양하는 천승세’를 이전에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그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해서 살기 시작하던 88년 무렵에 나도 김포읍 들머리 사우리라는 동네에 이삿짐을 풀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차를 얻어타는 행운을 얻었다. 주말이었던 탓에 서울 쪽으로 돌아오는 통일로에는 승용차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뒷감당 생각 않고 마셔댄 막걸리였다.
“선생님,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차를 잠깐 갓길에 세우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운전이 서툴러서 한 번 행렬을 이탈하면 다시 진입 못 해.”
“금방 터져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말이야. 지금 차들이 서행하니까 내리자마자 앞으로 50미터쯤 전력질주해서 오줌 싸고 재빨리 올라타라구. 텔레비전에서 맥가이버 하는 것 봤지?”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려 이만하면 됐다싶게 내달린 다음에 소변을 보았는데, 고춤을 추스리고 났을 때 그의 승용차는 30여 미터쯤이나 앞으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 한바탕 달음박질을 해야 했다. 그는 헐떡거리며 올라탄 나를 보고 사람좋게 껄껄껄 웃었고, 나도 그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무서운 포대령’으로부터 예편시켜 주었다. 여기까지가 선생과 사적으로 친분을 나눴던 기억의 전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글이 잘 안 돼요. 일어나서 밥 먹고 책도 뒤적거리고 세상 한탄도 하다가 낚시도 가고….”
─9년 전에 발간한 자선(自選) 단편집 ‘혜자의 눈꽃’ 서문에 “세상의 여러 가지 형편이 소설을 짓기엔 마뜩찮은 건덕지로 싸발랐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가 그랬다면 요즘의 세상 건덕지는 어떻습니까?
“문학정신의 퇴행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종시대예요. 컴퓨터문학이다 뭐다 해서 소설도 아닌 것들이 나와 설치고…. 단편소설의 멸종 상황은 이미 드러난 것 아닙니까. 단편이 얼마나 어려운 건데요. 장편은 일기 쓸 수 있는 능력만 가지면 누구나 흉내낼 수 있어요. 하지만 단편은 얼개에서부터 문장 운영, 게다가 자기 문장을 스타일화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어렵냔 말이야. 요즘 그런 단편 구경할 수 있습니까?”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보세요?
“작가들에게 신인정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예술이란 시작만 있지 끝이 없는 겁니다. 소설이 뭔지 알 만하면 죽는 거요. 어떻게 예술에 ‘이만하면 됐다’가 있을 수 있어요. 요새 새끼들 소설집 달랑 하나 내고 나면 신춘문예 예심을 안 하나, 문화센터 강의를 안 하나, 소설에 일가를 이뤄버린 것처럼 착각하는데 틀려먹은 자세입니다. 나는 말이오, 믿는 종교가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남은 피 한 방울이라도 예술혼의 정면궤도에서 성혈을 뿌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게 용기와 격려와 힘을 주시오’ 하고. 왜냐고요? 신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기 때문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신인정신’
문단생활 42년 동안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원로작가가 아직도 신인이라 말한다. 실제로 그의 문학적 궤적을 더듬어보면 그가 ‘신인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얘기타래를 풀어갈 요량으로 “요즘 문학을 어떻게 보느냐?”는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가, “예술혼의 정면궤도에서 성혈을 뿌리며 살아가고 싶다”는 경건하고도 진중한 대답에 접하자 모골이 송연한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낚시 이력이 문학 이력 못지않은 걸로 들었습니다. 낚시의 매력이 뭐지요? 낚시터에 앉아 있으면 강태공이 되십니까?
“천만에. 낚시를 두고 선(禪)이니 수양이니 따위 선비의식을 가지고 말들하는데 웃기는 얘기예요. 고기가 물어줘야 지루하지 않고 좋은 거지. 선비 사(士)나 스승 사(師)자를 떠억 받쳐서 ‘조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동물적인 포획력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말이 ‘낚시꾼’입니다. 나는 지금도 낚아올린 고기는 반드시 먹습니다.”
54년에 처음으로 목포의 저수지에서 민물낚시를 배웠고, 전문적인 바다 낚시꾼이 열 몇 명밖에 안 되던 시절, 7박8일이나 9박10일 일정으로 거문도에 들어가 무인도에서 갯바위 릴낚시를 했을 정도로 그의 조력(釣歷)은 화려하다.
─바다낚시를 하다 민물낚시를 하면 싱겁지 않습니까?
“물론 바다낚시는 역동적이지요. 억세게 차고 들어가는 탄성과 원시적인 완강한 거부, 거기서 열혈의 정열을 느낄 수 있지요. 반면 민물낚시는 기법이 까다롭고 섬세합니다. 그 나름의 묘미가 따로 있어요. 낚시의 경지를 제대로 체험하려면 붕어낚시가 제일이에요. ‘낚시는 붕어낚시로 시작해서 붕어낚시로 끝난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1939년 목포에서 출생했고, 당시 호남의 거부였던 천독근이 그의 부친이며, 유명한 소설가였던 박화성이 모친이다. 삼형제 중 둘째인데 그의 형은 평론가 천승준이며 동생은 서울대 천승걸 교수인 걸로 돼 있다.
─이름이 승세(勝世)인데다 천(千)씨 성까지 붙여놓으면 무시무시한데요?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오셨다고 생각하세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외삼촌이 내 이름을 지었다는데, 원래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건방져서는 못 쓰는 법입니다. 나는 천승세라는 이름 자체가 엄청나게 싫어요. 영철이니 철수니 하는 식의 흔한 이름은 아니더라도, 왜 전화번호부 보면 비슷비슷한 이름들 많지 않습니까. 그런 이름들 속에 민족의 동질감도 배어 있고 좋은 법이오. 그런데 ‘이길 승’에다 ‘인간 세’라니, 이건 도무지 건방진 이름이오. 주변을 보면 꼭 실력 없고 못된 것들의 호(號)가 요란하잖아요. 인생을 더럽게 산 놈들이 무슨 백운이니 청파니 고산이니 하는 고상한 글자들로 치장하지 않습디까. 물론 지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세상을 이기면서 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해서 탐욕의 내포예요. 터무니없는 과욕이 들어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살기도 싫어요.”
─목포에서의 청소년기는 평범하게 보내셨나요?
“요란하게 살았지. 목포고등학교 시절 간신히 낙제를 면할 정도였어요. 공부보다는 당수 4단의 유명한 깡패였어요.”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 주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겠네요?
“깡패 천승세가 글을 쓴다? 상상도 못 했지. 어렸을 때 내 꿈은 체 게바라 같은 혁명군이 되는 것이었어요. 자주독립국가의 명장이 되어서 구국혼으로 전투속에서 산화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온갖 깡패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이상스럽게 문학작품을 읽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주로 러시아문학을 읽었고 훗날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물론 당시 학교에서 문학 한답시고 서클 만들어서 활동하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꼭 비리비리한 놈들만 모여 있어요. 사나이 문학이라는 게 강해야 할 터인데, 신체 자체가 그렇게 약해 빠졌으니 자연히 삶도 비열할 것 같고 정신 연령도 한참 떨어진 것 같아서 상대도 안 했어요.”
천승세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번은 집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또 누군가가 사람을 ‘개 패듯’ 두들겨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가보니 70이 넘어뵈는 이웃 마을의 한 노인이 나무 위에 올라가 오랑우탄처럼 가지에 붙어 있고,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장대로 노인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패고 있었다. 그 중년 남자가 다름아닌 천승세의 부친이었다. 사정을 알고보니 노인의 며느리가 출산을 하다가 과다하게 출혈을 했는데 그 나뭇잎을 달여 먹으면 효험이 있다 해서 나무에 올라갔던 것이고, 천승세의 선친은 자기 땅에 있는 나무에 허락없이 올라간 노인을 그런 식으로 응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부자들에 대한 적의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가난한 집 할아버지가 자식뻘밖에 안 되는 사람한테 장대로 무수하게 얻어 맞으면서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을 보자 부(富)의 폭력에 대한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겁니다. 도대체 있는 놈들이라는 게 뭔가.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이 저 정도로 짓밟혀도 되나 생각하니까 괜히 분하고 눈물이 나서 책가방 들고 공동묘지에 가서 하루종일 드러누워 있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일기도 아니고 뭣도 아닌 글을 끄적거렸는데 그게 처음 써본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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