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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소설가 천승세

한국문단의 영원한 ‘신인’

한국문단의 영원한 ‘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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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진 자들의 폭력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치를 떨었던 사람이 그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천승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뒷골목을 주름잡고 다니는 그의 일탈 역시 가진 자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던 부친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 껄렁거리고 다니던 ‘불량 학생’ 수준을 넘어 외지에 원정 싸움을 다닐 정도로 알아주는 목포깡패였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을 때려놓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날 “얻어 맞은 녀석이 병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고”, 어미를 잃고 죽어 있는 까치집의 까치새끼들을 보고는 그답지 않게 ‘슬프고 이상해서’ 시를 끄적거리기도 했다는 그의 복잡한 내면구조다.

“러시아 문학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시 쓰는 공부를 제법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직한 시를 썼는데, 공부를 할수록 자꾸 지식이 개입해서 정직성은 걸러져버리고 시가 난해해지고 유식해져요. 그래서 만족을 못 하고 포기해버렸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의 가회동 집에서 모친인 소설가 박화성과 함께 살게 된다. 말이 함께 사는 것이었지 서울에 올라와서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던 그를 당대의 문사였던 어머니가 곱게 여길 리 만무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1957년 12월 초순, 어머니 박화성이 강릉의 친척집에 가느라 집을 비웠다. 어머니도 없겠다, ‘니기미, 소설이나 한 번 써봐?’ 그는 원고지를 꺼낸다. 신춘문예 마감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뭘 쓸 것인가. 좋다, 목포에 살 때 박 아무개라는 여자와 밤중에 논바닥에서 질펀한 사랑을 나누다 분뇨 구덩이에 빠져버렸던 사건을 소재로 삼기로 했다. 남자를 도살장의 백정으로, 그리고 여자를 점례로 비틀어서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냈다. 소설 습작 한번 안 해본 상태에서 단 한 자의 추고도 없이 8시간 만에 단편 하나를 완성해서 신문사에 보냈다. 그의 에세이집 ‘번데기가 자라서 하늘을 난다’에 보면 초고 없이 8시간 만에 단편 한 편을 써 치웠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어느 평론가가 그를 일컬어 “천재병이 들었다”고 비아냥거렸다는데, 그는 “억울하고 절통하다”고 항변한다. 단편소설로부터 3000매짜리 장편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초벌 빨래 마른 빨래를 따로따로 헹궈본 적이 없다.”

12월 31일, 그는 ‘동아일보’를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단편소설 당선작은 그의 작품 ‘점례와 소’였다. 염상섭과 안수길이 심사위원이었다.



강릉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신문을 들이밀며 그가 말했다.

“동아일보 이거 이상한 신문이네. 어머니, 이거 좀 보세요. 참 요상한 일이 생겨버렸어요.”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으며 “장하다”고 했다. 깡패짓이나 일삼고 부자들에 대한 적의를 품고 엇나가기만 하던 그를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감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뒤에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돼버렸다. 더구나 박화성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청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김동리와 박종화의 천승세 쟁탈전

그 당시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이 김동리였고,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학장은 월탄 박종화였다. 신춘문예에 등단한 문인을 학생으로 확보한다는 것은 학교의 자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천승세 쟁탈전이 벌어졌다. 지금이야 서라벌예대 출신 문인들이 수두룩하지만 당시만 해도 단 한 사람의 소설가도 배출해내지 못하던 때였다. 동국대 국문과에서도 입학권유가 들어왔다. 김동리의 강권에 못이겨 2년제 서라벌예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성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김동리 그 양반 욕심이 대단했어요. 번듯하게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해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한테 자신의 추천을 받아서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라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1,2차 추천받는 절차를 거쳤지요.”

1960년, 그는 전도유망한 연극배우였던 이철진을 만나 결혼한다. 당시 어머니는 잘살았지만 천승세는 결혼 후 빈손으로 나와 영등포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부자, 혹은 부(富)에 대한 그의 친화할 수 없는 적의는 여전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질기게도 가난을 옆구리에 끼고 산다. 영등포의 셋방살이에서 김포에 있는 현재의 집까지 37번을 옮겨다녔다.

등단한 지 6년 만에 그는 희곡에 도전하기로 한다.

“공연작품이 태부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6년 동안 활발한 소설창작 활동을 해왔기에 희곡 작품 한 편만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나는 아직 희곡으로 등단한 바 없는데 소설가라는 이유로 거저 먹을 이유가 어딨어요. 정식으로 두드려서 실력대결을 하는 것이 정도 아닙니까.”

태릉에 살던 시절이었다. 싼 방을 고르다 보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그곳까지 흘러들어갔고, 호롱불 아래서 87매짜리 단막희곡을 썼다. 천 선생이 부인 이씨를 향해 “그때 그 희곡 내가 몇 시간 만에 썼지?” 하고 물었고 부엌에서 일하던 부인이 “6시간 만에요”라고 ‘공증’을 해주었다.

‘물꼬’라는 작품이었다. 어렵사리 청량리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경향신문사에 작품을 우송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1월2일자 신문을 사보고서야 신춘문예 당선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끼니가 걱정스럽던 시절이라 어렵사리 버스비를 구해서 세 번씩 갈아탄 다음에 경향신문사에 도착했다.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자는 ‘김미수’였다. 천승세가 이름을 감추고 써보낸 가명이었던 것이다. 그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조태일이 ‘아침선박’이라는 작품으로 시 부문에 당선되었고, 염무웅이 평론에 당선되었다. 훗날 조태일은 천승세를 만날 때마다 “등단 동기인데 뭘 그러십니까”라며 농을 걸어오곤 했다.

만취상태에서 쓰는 시(詩)

셋방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태릉에서 구파발 단칸방으로 옮겼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라 인근 전파사에서 전선을 끌어다가 비둘기집 모양의 스피커를 벽에 붙여놓으면 KBS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 베니어판 상자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천승세는 귀가 번쩍 뜨였다. 국립극장에서 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장막 희곡을 공모한다는 뉴스였다. 그의 도전의욕이 꿈틀거렸다. 좋다, 장막극에 도전해보자.

“자식이 둘이었을 땐데, 못 먹어서 몸이 말이 아니었어요. 사흘 만에 376매를 완성했는데, 영양실조에다 사흘을 불철주야로 써갈겼더니 이상스럽게도 손가락이 짧아지더란 말입니다.”

만선이 이 미친 놈아아!

(스산한 바람 무대 휩쓸며 지나가고 장대줄에 걸린 생선대가리 건들거린다. 급히 막(幕).)

마지막 문장을 쓰고 그는 탈진해서 쓰러져 버렸다. 마감날 부인 이씨가 불광동 우체국으로 가서 부쳤다. 이번엔 이진숙이라는 가명이었다. 그는 그 작품 역시 ‘파지 한 장 안 내고’ 써치웠다고 했다.

발표하던 날, 그 비둘기집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국립극장 100만원 현상모집 당선작에 이진숙의 ‘만선’이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녹번동에 살던 소설가 홍성유가 흰고무신을 신고 달려와서는 “이진숙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낸 사람 당신이지? 당신은 천재야, 천재!”라며 흥분했다.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 좀 여유가 생겼겠습니다.

“100만원이면 후생주택 두 채를 살 만한 돈이었어요. 그런데 빚쟁이가 시상식장까지 따라와서 대기하다가 몽땅 빼앗아가버렸어요. 추석날 찐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궁핍했는데.”

그의 신인정신 고집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990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펼쳐 읽던 문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시 春蘭’외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인의 이름이 천승세였던 것이다. “이 천승세가 혹시 그 천승세 아니냐?”는 전화가 쇄도했다. 문단 데뷔 30년이 넘은 소설가 천승세가 신인투고 작품으로 시를 보냈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창작과 비평사의 이시영 시인이 나한테 전화를 해왔어요. 이번 편집회의에서 선생님의 시를 싣기로 했으니 10편만 보내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미친 소리 말라고 했어요. 신인들은 등단하기 위해서 명을 걸고 다투는데 시로 등단한 적이 없는 천승세가 뻔뻔스럽게 어떻게 그냥 실을 수 있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정 그렇다면 신인작품으로 실어달라고 했지요.”

창비에서는 예우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고, 천승세는 소설이나 희곡이라면 모를까 시를 공짜로 먹을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시작품 하단에 ‘신인’이라는 활자가 찍혀 나갔다.

천 선생의 시작(詩作)에 얽힌 얘기는 문단에 꽤 알려진 일화다. 그는 맨정신으로 시를 써본 일이 없다. 만취상태에서 시를 쓴다. 그러나 혼자 쓰는 게 아니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이규배 시인과 함께 쓴다. 정확히 말하면 ‘천승세는 입으로 쓰고 이규배는 손으로 쓴다.’ 한밤중, 이규배의 집 전화벨이 울린다.

“규배냐? 나다.”

“선생님,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지금 내 머리속에서 시가 한 수 써져버렸다. 받아 적어라.”

“부르십시오.”

이런 식이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소설은 좋은 의미의 협잡이 가능합니다. 매수를 채우기 위해서 원고지 몇 장 정도는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어요. 또, 이번엔 이런 소설 한 번 써보자, 하는 식의 작의(作意) 자체가 불순하되 먹히는 장르예요. 그러나 시는 달라요. 시는 그 자체가 삶의 노래예요. 서양의 명곡이라는 것들 들으면 옆에서 누가 때려도 눈물 안 나지만, 실연당한 사람이 ‘대전발 영시 오십분’ 어쩌고 하는 유행가 들어봐요. 눈물 납니다. 요즘 시들 보세요. 전체적인 시적 사유의 통일성도 없이 행행마다 전연 의미가 다른 문장들을 억지로 꿰맞춰서 만든 시가 대부분이에요. 멀쩡하게 깨어 있으면 잘 쓰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식이 개입돼서 정직한 삶의 노래가 나올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만취상태에서 쓰는 거지.”

그러나 요즘 천 선생은 그 좋아하던 술을 삼가고 있다(내가 찾아가던 날 결국 소주를 입에 대고 말았지만). 진찰 결과 폐포(肺胞)에 심각한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 정도면 계단 몇 개를 오르내리기도 힘들어해야 하는데 팔팔하게 돌아다니시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고개를 젓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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