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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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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몰린 신라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9월에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별 성과 없이 회군하자 가장 낭패한 것은 신라였다. 당 태종의 친정(親征)으로 고구려가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국력을 기울여 (11회 도판 5)을 세우며 3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었는데, 정작 당 태종은 수십만 군사를 몸소 지휘하여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공격하고도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채 물러나게 되었으니 신라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건립 의미가 불확실하게 되어 국민적 결속력이 금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덕여왕 측근의 진골 세력은 반(反)진골 세력을 회유하고 단속하기 위해 반진골 세력의 핵심이자 석(昔)씨 계열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그 해 11월에 수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황룡사구층탑을 완성해내는 것으로 겨우 민심을 다잡아간다.

그러나 여왕 15년 3월에 수도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이 다음 달인 윤 3월에 용동성 일대 점령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신라의 위기감은 극도에 다다른다. 결국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상대등 비담이 보수 계열의 반진골 세력을 이끌고 그들의 근거지인 왕성 동쪽 명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공격해 들어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한다.

이는 선덕여왕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 세력이 몹시 강성하여 일시 왕성의 안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니 당시 신라의 민심이 얼마나 불안하였던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탁월한 기지와 지휘력을 발휘해 결국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비담 일당을 1월17일에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짓는다. 이때 비담 등 반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당했다 하니 오히려 이 반란 사건을 계기로 진골귀족들은 신라 불국토 사상을 거침없이 펼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사실상 진골세력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결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진골 세력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골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선덕여왕을 잃은 것이다. 반란군과 대치하던 중에 큰 별이 왕성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여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반란 구호에 상심한 데다 별이 떨어지는 흉조가 겹치자 낙담하여 1월8일 68세 쯤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에 김용수(金龍樹)와 김춘추 부자를 중심으로 한 김알천(金閼川) 김술종(金述宗) 김유신 등 왕실 측근 진골 세력은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에 출현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굳게 믿어 최초로 보위에 오르게 한 여왕인데 국가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이를 잘못 수습하면 민심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질 염려가 있었다. 더구나 황룡사구층탑을 이제 막 건립해 놓고 그 공덕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구한(九韓)으로부터 조공받는다고 선전하지 않았던가.

새 미륵보살의 탄생

이에 신라에 하강했던 미륵보살은 그 역할을 끝내고 수미산 위에 있는 도리천(利天)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미륵보살 화신이 이를 계승하여 신라를 이끌어간다는 내용의 후계 구도를 마련하는 듯하다. 그래서 선덕여왕을 장사 지낸 낭산(狼山)을 도리천이라 하고 뒷날 그 아래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어 이를 현실로 증명해 보인다(도판 1).

이 내용은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이 미리 세 가지 일을 알다(善德王知幾三事)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왕이 병이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에 죽을 터인데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가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이냐고 아뢰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돌아가니 여러 신하가 낭산의 양지에 장사지냈는데 10여년 뒤에 문무대왕이 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하였으니 이에 대왕이 신령스러웠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뒤를 이을 미륵화신으로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인 승만(勝曼) 군주(郡主)를 지목하니 이분이 진덕여왕이다. 승만군주 역시 미륵선화인 원화로 뽑혀 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왕력의 제27대 선덕여왕조에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그런 까닭으로 여왕이 섰다. 왕의 배필은 음(飮) 갈문왕(葛文王)이다”라고 하여 선덕여왕에게 음 갈문왕이라는 부군이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책 권1 ‘선덕왕지기삼사조’에서는 당 태종이 나비 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낸 것이 짝없는 자신을 기롱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선덕여왕은 분명 자신이 출가하지 않은 처녀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력의 기록은 성골 남자가 끊어져서 여왕을 세웠다는 일연의 이해 한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덕여왕조에는 배필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이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어떻든 이때 진덕여왕의 나이도 60세 가까웠을 듯하니,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으로 거의 같은 시기인 진평왕 22년(600) 전후한 시기에 원화로 뽑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을 이었다.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의해 신라 개국 이래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였고 화랑의 구심점을 이루면서 민심을 규합하여 힘겹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응하다가 반란을 만나 공방전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 충격으로 갑자기 돌아갔는데, 창졸간에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총공세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전 해에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소득없이 회군하여 고구려의 기세가 한없이 높아진 데다 신라는 당 태종의 부탁을 받고 3만 군사로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적은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고구려를 괴롭힘으로써 고구려를 말라죽게 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이 해 2월에 확정한다.

그래서 3월에는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대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한다. 한편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고종 때 태종의 이름인 세민을 피휘하기 위해 세자를 떼어 이적으로 개명하게 함)은 요동도 행군대총관이 되어 군사 3000여명을 거느리고 육로로 진격하게 한다.

수전에 능한 군사만 가려 뽑은 수륙양군은 7월에 고구려 영내에 들어가는데 여러 성을 산발적으로 공략함으로써 백성들이 농사에 종사할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8월에는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칙명을 내려 강남 12주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큰 배 수백 척을 건조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이므로 당 태종은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등극 소식을 접하자 2월에 곧바로 진덕여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그 지위를 인정한다. 2월에 진덕여왕은 친(親)진골 귀족의 수장인 김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아 친진골 내각을 구성하여 이들에게 정치를 맡기니 국가의 중대사는 김알천, 김임종(金林宗), 김술종, 김무림(金武林, 자장율사의 부친), 김염장(金廉長), 김유신 등 6인의 원로들이 합의체 형식으로 처리하게 된다. 드디어 그 해(647) 7월에 연호를 태화(太和)라 고쳐 진덕여왕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간다(‘삼국사기’ 연표와 김유신 전에는 다음해인 648년 무신에 개원하였다 기록했다).

진덕여왕은 타고난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약 175cm)이나 되고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었다 한다.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타고나는 32상 중의 한 상호에 해당하니 이런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진덕여왕도 일찍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지목돼 원화로 뽑혔던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 장군 우진달의 공격을 받아 7월에 석성(石城)과 적리성(積利城)이 함락되는 대당전을 치러야 했으므로 신라를 응징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의 위기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고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을 보내 현재의 경북 개령, 인동 일대인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3성을 공격해와 김유신이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으로 막는데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백제의 3000 군사를 당적할 수 없었다. 이에 비녕자(丕寧子)로 하여금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싸우다 죽게 하니 함께 싸움터에 나와 있던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소년 낭도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적진으로 달려들어 맹렬하게 싸우다 뒤따라 전사한다.

비녕자의 부탁으로 거진의 출진을 말리려고 말고삐를 놓지 않다가 거진의 칼을 맞아 팔이 잘린 종 합절(合節)도 주인 부자가 차례로 싸우다 죽자 뒤따라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보고 군사들이 감격하여 비로소 사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래서 겨우 백제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당 태종의 집요한 고구려 침공

한편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친 자신감으로 기고만장해 있다가 당나라가 물량공세에 의한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꿔 소규모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지속적으로 침략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크게 당황한다. 그래서 이해 12월에는 보장왕의 둘째 왕자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죄사로 보내 당 태종의 체면을 살려주며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정관 22년(648), 즉 진덕여왕 2년 무신 정월에 돈황 출신 서역계 사람으로 자신의 친딸 단양(丹陽) 공주의 부마가 된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 ?∼653년)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아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내주를 출발하여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한다. 그리고 4월에는 오호도(烏胡島; 산동반도 등주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 열도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섬) 진장(鎭將) 고신감(古神感)으로 하여금 또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계속 침공하게 하니 설만철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泊城)을 함락하고 고신감은 역산(易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다음 회군한다.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는 집요하여 이해 6월에는 고구려가 이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으므로 명년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기로 전략을 세운다. 그리하여 다시 군량선과 병선을 마련하기 위해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에 징발을 면하였던 중국의 남서쪽인 검남도(劍南道) 지역에 선박 건조를 명령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7월에는 좌우부장사(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로 보내서 나무를 베 배를 짓도록 하니 큰 것은 길이가 100자, 폭이 50자에 이르렀다.

이들 배는 물길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산동반도 내주로 집결했다. 이렇게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가 확고하므로 신하들은 감히 이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8학사 중 한 사람으로 사공(司空)의 자리에 있던 방현령(房玄齡, 578∼648년)이 병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 목숨을 내걸고 고구려 정벌의 중지를 간청하는 상표(上表)를 올린다. 방현령의 둘째 아들인 방유애(房遺愛, ?∼653년)는 태종의 고양(高陽)공주에게 장가들어 둘 사이는 사돈간이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부터 중국에 해를 끼쳐 근심거리가 되어 온 것은 돌궐을 비롯한 서북쪽 사막지역의 유목민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고구려는 역대로 정벌하지 못하였으나 폐하는 연개소문이 국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한다 하여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가서 죄를 묻고 요동성을 함락하여 수십 만의 포로를 잡아왔으니 전대의 부끄러움을 씻은 것이며 그 공은 전왕에 비하여 만 배나 큰 것이다.

그러니 ‘주역(周易)’에서 말한 진퇴존망(進退存亡; 나아가고 물러나며 살고 죽음)이 다 때가 있다는 이치와 ‘노자(老子)’에서 말한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음)과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음)의 이치를 깨달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폐하의 위대한 이름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 만하다 할 수 있고 개척한 땅은 그칠 만하다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변경 오랑캐일 뿐이니 인의(仁義)로 대한다거나 상례(常禮)로 꾸짖을 일이 아니다. 만약 멸종시키려 든다면 궁지에 몰린 짐승이 대드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죄없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면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그 가족들의 원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고구려가 신하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거나 백성을 학대했다거나 오래 놔두면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는 3가지 사실이 아니라면 중국을 번거롭게 할 일이 없다. 안으로는 전왕을 위해 부끄러움을 씻어주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해 복수해준다고 하나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게 크겠는가.

원컨대 폐하는 황조(皇祖, 노자가 이씨의 시조라 하여 이렇게 일컬었다) 노자가 말한 지족(知足)의 가르침을 받들어 만대에 우뚝 솟은 이름을 지키시오. 퍼붓듯이 은혜를 베풀고 관대한 조칙을 내려 봄기운에 따라 못물이 펼쳐가듯 고구려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시오. 물결을 헤쳐나갈 배들은 불사르고 응모한 군중을 헤쳐버리면 자연이 중국과 오랑캐가 경축하며 서로 의지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편안해 질 것이다.’

당 태종은 이 표문을 읽고 방현령의 며느리가 된 자신의 딸인 고양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위중한데 아직도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있구나.”

방현령의 죽음을 앞둔 최후 충간이 당 태종의 마음을 상당히 흔들어 놓았던 듯하다. 그래서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려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나간다.

신라 태종이 당 태종을 만나다

이에 가장 다급해진 것은 신라였다. 그래서 동지사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에서는 윤 12월에 김춘추를 특사로 파견하여 고구려 정벌을 계속해줄 것을 간청한다. 이때 김춘추는 18세가 된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 631∼665년)을 데리고 갔는데, 당 태종은 김춘추가 실제로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광록경(光祿卿) 유형교(柳亨郊)를 보내 성대히 맞아들인다. 그리고 김춘추의 영웅다운 생김새에 반하여 더욱 이를 후대한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45세였다.

김춘추가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나아가서 석전(釋奠; 공자께 드리는 제사) 의식 및 강론하는 것을 보고싶다 하니 당 태종은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김춘추가 학식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문장 실력과 글씨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전 해인 정관 21년(647) 7월에 스스로 짓고 써서 돌에 새겨놓은 최초의 행서비(行書碑)인 (도판 2)과 (도판 3)의 탑본과 자신이 칙명을 내려 새로 편찬하도록 하여 근일에 갓 간행해 낸 ‘진서(晋書)’ 한 벌을 선물하여 자신의 문예 실력을 과시한다.

사실 이제까지 비문 글씨는 전서나 예서·해서 등 해정한 글씨로만 써왔던 것인데 당 태종은 과 을 자유분방한 행서체로 써내 최초의 행서비 형식을 창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서비 형식이 창안되자마자 바로 그 다음 해에 당 태종 본인의 손에 의해 김춘추에게 선사됨으로써 신라에 직접 전해지게 되었다.

김춘추가 마음에 든 당 태종은 연회를 베풀어 환영하며 많은 금과 비단 등을 선물로 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한다. 이때 김춘추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신의 본국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으나 중국 섬기기를 여러 해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마음대로 침략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대거 침입해 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여 조공하러 다니는 길조차 막아 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가 군대를 빌려주어 흉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될 터이니 배타고 와서 직분을 다하는 것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

당 태종은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며 군대 20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김춘추는 또 의복을 당나라 제도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당 태종은 당장 내궁으로부터 김춘추와 그 일행이 입을 수 있도록 품계에 맞는 옷을 내다 입히도록 한다. 김춘추가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며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심한 대목이다.

기분이 좋아진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특진(特進)이라는 최고위 벼슬을 내려 변방 국왕 이상의 예우를 하고 이제 겨우 18세밖에 안된 김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내려준다. 그리고 정관 23년(649) 2월 계사일에 김춘추가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3품 이상의 조관은 모두 나와 전별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린다. 일찍이 볼 수 없던 파격적인 예우였다. 김춘추는 감격한 나머지 “신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으니 폐하를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하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당장 김문왕으로 하여금 남아서 당 태종을 숙위하도록 한다.

김춘추가 당 태종을 격동시켜 고구려 침략을 부추기려고 당나라에 간 사실을 안 고구려는 서해 바다에 순라선을 배치하여 중국에서 돌아오는 김춘추를 잡아 죽이려 한다. 결국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 소속의 순라선에 김춘추 일행이 탄 배가 붙잡히고 김춘추는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온군해(溫君解)라는 시종이 김춘추와 의관을 바꿔 입고 대신 죽으매 김춘추는 그 틈을 타 작은 배에 몸을 숨기고 위기를 겨우 모면하여 환국한다. 온군해의 용모가 김춘추와 비슷하여 고구려 군사가 속아 넘어 갔다니 이것도 미리 대비했던 계책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뒷날 신라의 태종이 되는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인 이세민과 직접 면대하여 외교 교섭을 벌이고 의도했던 외교적 성과를 만족할 만큼 얻고 돌아오게 되니 신라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오르고 고구려와 백제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20만 원병이 곧 파견되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삼국을 진동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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