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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향응에서 육체적·정신적 학대까지

  •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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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급제자가 분관되는 사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중에서도 예문관이 면신례 기율이 가장 셌다. ‘징구’가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일 뿐만 아니라, 면신연과 허참연도 승문원에 비해 배나 된다. 또 다른 관에는 없는 중일연(中日宴)이란 것이 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다. 이런 술판이 벌어지면, 마시고 취하면서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목청껏 노래하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였다.

성종 6년 예문관 검열(정9품)에 제수된 조위(曺偉)가 행한 면신례를 당시 실록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가관이다. 유밀과에다 소까지 잡아 잔치를 벌이는데, 예문관 참하관인 선배 검열과 봉교(7품)·대교(8품) 등 현직 한림은 물론이고 이미 다른 관직으로 승진해 간 한림 역임자가 선생(先生) 자격으로 참여한 뒤 기생까지 동원하여 풍악을 울리면서 흥건히 취하게 놀았다.

면신례를 주관하는 상관장(上官長)은 상석에 앉고 초청된 선생들은 정승일지라도 여러 관원 사이에 끼여 앉는다. 그리고 각각 기녀 한 사람씩 끼고 앉는데, 신래와 짝을 이루는 기생을 흑신래(黑新來)라 이름한다. 상관장은 양쪽에 기생 둘을 앉힌 채 잔을 돌리고 춤추며 신래를 희롱하는 갖가지 놀이를 벌인다. 이러한 한림들의 잔치가 동이 틀 무렵 끝나면 반드시 고려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노래가 곁들여진다. 한림별곡이 그것인데, 고려시대 한림들이 부르던 노래로, ‘고려사악지’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위의 면신연에 흥을 돋우기 위해 참석한 기생이 매를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급기야 이 사건은 임금에게 보고됐는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에 성종이 보인 태도도 흥미롭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은 당연히 기생이 죽은 일이지만 또 하나는, 농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 사사로운 도살은 금지하던 농경사회에서 신참인 조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소를 잡아 음식을 장만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면신례의 폐단이 매우 컸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성종은 면신례가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임을 인정하고 불문에 부쳐버렸다. 단지 가뭄으로 인해 금주령이 내려진 시기에, 더구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사관들이 금주법을 어겼다는 것만 가볍게 처벌하고 넘어갔다. 또 성종은 재위 8년에 친히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석전(釋奠)을 행한 뒤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한 적이 있는데, 사관(四館)에 명하여 신래(新來)를 불러 직접 희학(戱謔)할 정도였다. 이미 면신례가 친숙한 풍속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가학

아무튼 면신례에는 신래를 괴롭히는 갖가지 방법의 침학(侵虐)과 희학(戱謔)이 동원된다. 침학에는 주로 과도한 경제적 부담이 따르며, 희학에는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수반된다. 앞에서 말한 징구는 침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 밖에 초도(初度)라는 게 있는데, 신참에게 강제로 숙직을 맡기는 것으로 열흘에서 한달 가량 연속해서 근무해야 하는 고역이다.

희학은 연회 도중에 벌주와 함께 진행된다. 즉석에서 간단한 게임이나 내기를 하는데, 고참이 질 경우에는 벌주가 없지만 신참이 지면 벌주와 함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때 신참은 자신을 난잡한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끔찍한 신고식을 참아야 한다.

이는 조선조 성종 당시 대학자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그 실상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예를 들어 신참의 의관과 몸을 숯검댕으로 만드는 ‘거미잡이’라는 게 있다. 이는 신참에게 시커먼 부엌 벽에서 양 손으로 거미잡이 시늉을 시킨 뒤 손 씻은 물을 강제로 먹이는 것이다. 또 방 안에 긴 서까래 같은 나무를 두고 들게 하는 경홀(擎忽)에서 신참이 들지 못하면 무릎을 꿇게 해 선배들이 차례로 구타하기도 하고, 사모관대를 한 채로 연못에 집어넣어 고기잡이 흉내를 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한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군사정권하의 군대 신고식을 방불케 하는 장면도 벌어진다.

이렇게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侵虐)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하여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 60에 처한다”는 규정이 조선의 법률책인 ‘경국대전’에 실릴 정도라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이 집권한 이후에도 몇 차례 신참을 희학(戱謔)하는 행위를 금하는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신참을 침학하는 방법 또한 난침(亂侵), 간방(看訪), 허참(許參), 복지(伏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 세종 5년 성균관·교서관 박사 이하 참하관들이 신래를 불러 잡희(雜戱)를 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죽음을 부른 신고식

그러나 이런 왕명이 있는데도 조선의 신고식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참들이 육체적·정신적 가학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鄭允和)라는 신래가 죽자 사헌부 지평 유성원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쉬쉬하면서 풍문으로 떠돌던 소문이어서 사헌부가 쉽사리 탄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덮어둘 사안도 아니었다.

당시 정윤화는 승문원에 배속된 다른 9명의 신참과 함께 신고식에 참여했는데, 마침 종기가 나 고생하던 차에 면신례로 인한 피로가 겹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승문원 박사(정7품) 강폭(姜幅)·신자교(申子橋), 정자(정9품) 신의경(辛義卿)은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당하고, 저작(정8품) 윤필상(尹弼商), 부정자(종9품) 권제(權悌)는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단지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신고식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비 신분에서 관료로 초입사(初入仕)하는 과정의 통과의례에 이처럼 가혹한 방법이 동원돼 사람 목숨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신래를 갖가지 방법으로 골탕먹이는 풍속은 분명 성리학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면신례는 관직에 초입사(初入仕)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른 관직으로 옮겨가거나 승진해 갈 경우에도 반드시 치르는 것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관직이 이조·병조 낭관(4, 5품)이나 사헌부 감찰(6품)인데, 이런 관직으로 진출할 때는 처음 관직에 들어설 때와 같이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조·병조의 낭관은 각기 문·무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고, 감찰은 백관을 규찰하는 등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핵심 요직이었다. 요직이니만큼 선·후배간 규율이 엄격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삼관의 신고식에 버금가는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를 들어 사헌부 감찰(6품)이 되어 새로 온 자는 관직에 제수된 이후 비록 수십 일이 지났다 하더라도 면신례를 할 때까지 반드시 날마다 음식을 베풀어 선생(先生)·구주(舊住)를 기다려야 했다. 선생·구주가 된 자는 번갈아 드나드니 잔치하고 맞이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예 면신연(免新宴)은 이 수(數)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또 새로 감찰이 된 자를 신귀(新鬼)라 부르며 희롱하고, 또 몽둥이로 때리는 등 육체적인 가학도 허다했다.

이러한 형식의 면신례가 다른 관직에도 파급되더니, 급기야 그들이 부리는 아전이나 종들도 신참이 들어오면 면신례를 치르게 하는 등 조선사회가 신고식 천지로 변하게 되었다.

또 아직 관직에 들어서지 못한 생원·진사들에게까지 신고식 문화가 파급돼 새로 생원·진사가 된 자에게 침학하는 풍속도 생겼다. 이를 접방례(接房禮)라 했는데, 음식을 차리고 주악(奏樂)을 동원하는 방법이 면신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참을 따지는 방법

조선 관료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먼저 관직에 들어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뜻을 굽혀 예를 갖추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는 신·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위계질서를 잡는 관료주의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같은 과에 급제한 동기생들은 동방(同榜) 급제라 하여 매우 돈독한 사이가 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철저히 지키는 유교 사회에서도 동기생끼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가 됨은 물론이다. 이 역시 동기생과 선·후배를 따져야 하는, 위계질서가 굳건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고시파들이 법원이나 검찰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철저히 따지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성종 8년 3월에 문과에 급제한 이세좌는 당연히 유가(遊街) 행차에 나섰다. 급제는 그때 했지만, 그는 이미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으로 있었다. 이세좌의 유가 행차에는 당연히 사간원 나장들이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앞장서서 벽제(除; 거리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행위)하던 나장들이 길 가던 주부(主簿; 종6품) 최융(崔融) 등 몇 사람이 행차 앞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종자들의 머리를 휘어잡고 욕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이세좌의 당시 관직이 대사간(정3품)이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대사간이란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이다. 조선조 관료사회에서는 간쟁과 탄핵을 맡은 대간이 길을 갈 때면 정승도 말에서 내려 예우해주어야 한다.

이세좌가 급제하기도 전에 이런 관직을 차지한 것은 그의 가문이 번성한 덕분이었다. 올림픽공원이 있는 둔촌동 일대에서 살던 광주 이씨 집안은 당시 최고 문벌임을 자랑했는데, 둔촌동이라는 이름 역시 그의 증조할아버지 호인 둔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무튼 이세좌는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문음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누차 승진을 거듭하다가 이제사 급제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시는 종들도 종6품의 주부들을 눈 아래로 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초임 급제자들이 몰려 있는 사관(四館)이 상급 관청인 예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나라 풍속에 처음 과거에 오른 자는 비록 당상관을 역임한 자라 할지라도 유가하는 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예를 행해야 하는 것이 관례인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과 선배에게 오히려 행패를 부렸으니 사관에서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관에 들어온 권지들은 근무나 승진에서 선배와 후배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런 판국에 이세좌는 당상관이란 이유로 사관에 분관되지도 않은 채, 유가 도중 자기보다 하급 관료의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모욕을 주었으니, 사관 소속 관료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사관에서 올린 첩정(牒呈)을 접수한 예조에서도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어서, 성종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도 결국 주무부처인 형조로 넘겨 이세좌를 국문(鞫問)하게 했는데, 대신들의 의견 또한 엇갈렸다.

이세좌는 우의정 이인손의 손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큰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5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여 당대 최고 관직에 있으니, 당시 어느 가문도 무시할 수 없는 명문거족이었다. 이세좌 문제를 놓고 심의하던 대신 중에는 그의 백부와 숙부들도 있었으나, 이들 역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세좌의 숙부 이극증(李克增)과 이극돈(李克墩)은 “비록 신래(新來)지만, 간관이므로 벽제하는 것이 마땅한데 성내는 자가 잘못이다”고 말했다. 간쟁을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간관들에게 그만한 예우를 해주기 위해 비록 하급직 간관의 행차라도 마주친 정승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관례인데, 간관의 수장인 대사간 정도의 행차라면 벽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신래가 아닌 대사간이라는 직위를 내세운 것이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신진세력이 날뛰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원로 대신이 많았기에 이 주장이 먹혀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백부 이극배(李克培)는 이세좌의 잘못을 지적했다. 신래라는 위치에 무게를 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을 밝히는 사람, 조카의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이극배였던 것이다. 5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품을 바탕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는 동안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던 그다.

결국 형조에서 법조문을 그대로 적용하여 볼기 40대를 쳐야 한다는 안을 올리자, 성종은 이세좌의 벼슬을 낮춰 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10여 일 이후의 실록 기사에 그가 대사간 직책을 계속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그의 좌천은 얼마 안 돼 원위치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신참과 고참을 따지기 모호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나중에야 급제하는 경우가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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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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