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회초리로 우리말 가르친 자식 하버드생 안부럽다”

  • 윤주환 JW-YUN@HOTMAIL.COM

    입력2006-10-04 0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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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미국에서 28년째 살고 있는 재미동포 윤주환씨(58)의 자녀교육기다. 윤씨는 미국에서 태어난 수진(현재 뉴욕 거주·25), 희진(고려대 동양사학과 재학중·23 ), 원진(고려대 경제학과 재학중·20) 3남매가 당당한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회초리를 들면서까지 한국어를 가르쳤다. 남들이 다 미국 유학을 가지 못해 안달일 때, 윤씨는 세 자녀를 모두 한국 대학으로 유학 보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게 한 독특한 교육관을 갖고 있다.》
    1972년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경영대학원만 졸업하면 곧 귀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소 희망하던 좋은 직장을 잡는 행운을 만나 그냥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제일 더운 애리조나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제일 춥다는 미네소타의 3M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한국으로 돌아가 살려고 생각했지만 사업상 1년 뒤, 1년 뒤 하고 미루다 어느덧 28년이란 세월이 지나버렸다.

    이렇게 나는 미국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했지만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에서 살게 된 것뿐이다. 그래서 걱정이 있다면 나중에 이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살고 싶어도 한국어를 모르고 또 한국문화가 낯설어 돌아갈 수 없게 될 경우 부모를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아이들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한국에서 공부할 기회도 주어서 나중에 스스로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철저하게 가르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세 아이가 한국이나 미국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당당한 세계인으로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게 우리 부부의 첫째 교육 목표였다. 세속적인 출세나 성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두 딸과 아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래서 외국인이나 한국인 모두 쉽게 부르고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평 윤가 27대손의 돌림자 진(鎭)을 따라 큰딸은 수진(秀鎭), 작은딸은 희진(希鎭), 막내아들은 원진(源鎭)이라 지었다. 영어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유난스럽게 한 것은 한국어 교육이었다. 회초리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걸림돌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즉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거꾸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냥 막연하게 너희는 한국사람이니까 반드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만으로 한글을 가르치기는 매우 어려운 여건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희생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장차 하버드나 프린스턴 같은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것에는 처음부터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하버드 대학생보다는 한국어를 잘하는 평범한 주립대 학생이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사업상 자주 집을 비우는 까닭으로, 집 근처 드루 신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 부부를 모셔 한글을 배우도록 했다. 아이들에게는 한국어 공부 때문에 학교 성적이 떨어지거나 일류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면, 그런 것은 얼마든지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어 교육의 목표는 한국 신문을 읽는 수준이었다. 어느 외국어를 배우든 신문을 읽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왜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국에 갔을 때 길가 간판을 줄줄 읽을 수 있게 되자 비로소 한국어를 배우면 생활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눈치였다.

    한국어를 제대로 알려면 한자도 필수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교재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상용한자 1800자를 가지고 자주 사용하는 두 자 단어를 만들어 직접 가르쳤다. 나는 여섯 살 무렵 천자문을 한번 배웠는데, 그것도 손으로 쓰면서 배운 것이 아니고 다만 입으로 외서 배운 것뿐인데도 나중에 한자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런 나의 경험을 살려 아이들에게 상용한자 1800자를 큰 소리로 한 번만 외게 했다. 금방 잊어버리더라도 장차 언젠가 다시 한자를 배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회초리로 키우기

    지금까지 나는 남을 때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를 들게 됐다. 매를 들어서라도 자녀에게 가르칠 것은 꼭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조용히 타일러서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린 자녀들에게는 하나하나 말로 이해시키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럴 경우에는 매를 들어서라도 무조건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회초리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Spare the rod, spoil the child)’는 말은 동양이 아니라 서양 속담이다. 서양에서도 엄격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큰딸과 둘째 딸은 평소 말썽도 부리지 않고 공부도 잘해서 매를 들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한글 숙제를 안 해서 매를 맞았을 뿐이다. 큰딸 수진은 캘리포니아 킹스캐니언에서 산 매(두께 1.5cm × 너비 8cm × 길이 36cm), 둘째 딸 희진은 오리건 국립공원에서 산 매를 사용했다. 미국 관광기념품점에서 그런 매를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미국에서도 자녀교육을 위해 매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매를 들 때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으면 날마다 칭찬만 하고 살겠지만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고 말해줬다. 또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숙지시킨 후 몇 대를 맞아야 한다고 미리 말해주고 볼기만 매우 아프게 때렸다.

    큰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서 매를 맞는 아이는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따져 아내를 놀라게 했다. 나는 곧 큰딸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동양 부모는 매를 들고 서양 부모는 매를 들지 않는다. 그 대신 서양 부모는 자녀들이 잘못하거나 부모 말을 안 들으면 온종일 방에 가두거나, 영화구경갈 때 안 데리고 가거나, 온가족이 외식하러 갈 때도 혼자 집에 남겨 놓고 간다. 너는 동양식과 서양식 중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네가 서양식을 원하면 앞으로 그렇게 해주겠다.”

    큰딸은 동양식으로 매를 맞는 편이 더 좋다고 했다. 그 후부터는 안심하고 때렸다.

    둘째 딸은 언니가 매맞는 것을 보아서인지 훨씬 덜 맞으면서 자랐다. 막내는 웬만한 일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데다 어쩌다 잘못했을 때 간단한 주의를 주거나 조금만 꾸지람을 해도 곧 시정했기 때문에 맞을 일이 거의 없었다. 막내가 아들이라서 일부러 안 때린다고 두 딸이 항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막내도 초등학교 때 무언가 큰 잘못을 해서 매를 맞게 됐다. 막내의 매는 목재상에서 사온 둥근 나무 몽둥이(반경 1인치 × 길이 20인치)였다. 두 딸은 평소 매를 안 맞는 동생이 이번에는 맞게 됐다면서 내 옆에 서서는 정말 아버지가 막내를 때려주는지 그리고 얼마나 아프게 때리는지를 감시했다. 막상 매우 아프게 볼기 석 대를 때리니까 두 딸은 아무 말도 않고 쳐다만 보았다. 그 후 막내가 또 잘못을 해서 내가 몽둥이를 찾으면 두 딸은 그것을 감추고 동생을 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나는 누나가 남동생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못 이기는 체 몽둥이를 거두곤 했다.

    이처럼 자녀들에게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할 것은 꼭 가르쳐야지 서양식으로 그냥 방임하는 것은 귀여운 자녀를 도리어 망치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들이 매를 맞아가며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자 매를 들면서까지 한국어를 가르쳐준 부모를 진심으로 고마워하게 됐다. 그때의 몽둥이 3개는 아이들이 결혼할 때 주려고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운전연습과 캠핑으로 대화하기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디를 가자고 하면 항상 잘 따라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커서 중학교 3학년쯤 되니까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이 우리집 아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한다고 자랑하는데, 옆에서 부모가 지도해주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려고 궁리해낸 것이 고속도로 운전연습이었다. 나는 평소 아이들에게 고속도로에 혼자 차를 몰고 나가려면 적어도 아버지와 고속도로 운전연습을 3번 이상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연습 전날 밤에는 아이들에게 꼭 해줄 말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메모를 해두었다.

    보통 토요일 아침에 우리는 왕복 6∼8시간쯤 걸리는 고속도로 주행연습을 했다. 이때는 절대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틀지 못하게 했다. 장거리 운전을 단둘이 하니까 아이도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면 지루하니까 아버지의 말을 듣다가 가끔 자기 의견도 낸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세 차례 정도 연습을 하고 나면 꼼짝없이 아버지가 준비한 강의를 다 들어야 한다. 강의는 주로 자기 언행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돼야 하며, 근검한 생활을 하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 가서 살아도 보통 이상으로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전공이나 직업 선택보다 먼저 책임지는 사람과 근검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매주 토요일이면 골프장에서 살았고, 일요일이면 한국이나 다른 데서 온 손님들의 관광 안내차 집에 없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주말인데도 항상 집에만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캠핑 장비 전문점에 들렀다가 장비들이 너무 좋고 간편한 데 놀라 캠핑장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중단하고 주말이면 온 가족이, 어떤 때는 어머니까지 모시고 캠핑을 떠났다.

    미국에는 사설 캠핑장이 많다. 수영장·매점·세탁실·호수 등이 있고, 텐트를 치는 장소는 땅이 고르게 정돈돼 있으며 수도와 전기시설도 있어 불편함이 없다. 텐트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코드를 꽂으면 영락없이 따뜻한 온돌방 같다.

    낮에는 아이들과 호숫가에서 낚시하고 보트도 타고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다가 오후 늦게는 상추쌈과 불고기를 구워가며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한다. 밤에는 매점에서 장작을 사다가 캠프 파이어를 하며 그 불에 감자도 구워 먹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옛날 이야기를 하고 숲 속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주말을 보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는 고사리와 산나물도 뜯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다 추운 겨울 밤 도토리묵도 만들어 먹었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생활이 바빠지고 개인 활동이 많아지면서 가족캠핑은 그만뒀다. 하지만 요즘도 그때 캠핑을 더 많이 다녔더라면 하는 후회가 앞선다. 그런 재미있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캠핑에 모시고 갔던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아이들도 다 커서 뿔뿔이 흩어져 살다 보니 함께 갈 사람도 없다. 지난해 젊은 한국인 부부에게 그 캠핑 장비를 몽땅 넘겨주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안 가본 데가 거의 없을 만큼 자동차 여행을 많이 했다. 온 가족이 자동차 여행을 할 때 늘 부딪치는 것이 음악이었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했고, 나는 한국음악을 원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한 것이 흘러간 팝송이었다. 먼저 나의 고교시절 유행한 팝송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만 골라 120분 짜리 녹음 테이프 2개에 담아 운전을 하면서 틀고 또 틀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한국노래가 아니고 미국노래라서 좋긴 하지만 너무 느려서 싫다고 또 야단이었다. 하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한국노래보다는 차라리 흘러간 팝송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양보를 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아이들은 공통분모를 찾았다.

    요즘도 어쩌다가 그 옛날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르곤 한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너는 어떻게 오래 전 노래까지 다 아느냐”면서 깜짝 놀란다고 한다. 요즘에는 그때 듣던 노래 테이프가 어디 있는지 찾아달라고 한다. 마지못해 듣던 노래가 이제는 그리운 노래가 된 모양이다.

    나는 곧 그 테이프를 찾든지 아니면 다시 만들든지 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생각이다. 이제는 그 흘러간 팝송이 우리 가족의 세대차를 초월하는 힘이 되고 있다. 온가족이 모였을 때 내가 먼저 “You are my sunshine…” 하고 중얼거리면 아이들이 앞뒤에서 함께 “My only sunshine…” 하고 따라 합창을 한다. 그리고 그 합창이 끝나면 그들이 먼저 “Love Me Tender”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과 감정교류를 하면서 공들여 한글을 가르쳐도 아이들의 어휘력은 더 이상 향상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주 토요일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운다 해도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기껏해야 한국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이라고 한다. 집에서 극성을 부린 덕분에 큰딸의 한국어 실력은 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직접 한국에 가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1988년 2월 세 아이는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낯선 생활에 불안감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면 되고 성적은 관계치 않겠다고 약속해 스트레스를 덜어주었다.

    큰딸은 정신여자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큰딸은 한국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또 성격이 활달해서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러나 아주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간 둘째는 불만투성이였다. 같은 반 남학생들이 관심을 끌려고 치근대는 것을 두고 한국 남학생들은 버릇이 없다고 불평했고, 그것이 확대돼 아예 한국이 싫다고까지 했다.

    막내는 한글을 겨우 읽는 정도였는데 아주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야 할 아이를 2학년에 넣었다. 막내는 한국 생활의 스트레스를 태권도로 풀려는 듯 검은 띠를 받아야 한다며 매일 도장에 나갔다. 세 아이 중 한국어 실력이 제일 떨어졌지만 산수는 항상 100점을 받아와 식구들을 웃겼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우리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막내는 엄마라는 말은 알았어도 어머니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 같다. 어느 날 학용품을 사며 문방구집 아주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단다. 옆에 있던 둘째 딸이 집에 와서 동생이 문방구집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 창피했다면서 다음부터는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큰딸이 그것도 틀렸다며 언니라고 불러야 옳다고 해서 온 식구가 웃고 말았다. 어쨌든 그해 추석은 처음으로 온 식구가 고향으로 성묘를 가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그렇게 10개월간 한국 생활을 하고 겨울방학이 되어 잠시 미국으로 왔는데, 나의 사업상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큰딸은 좀 서운해했고, 둘째는 다시 한국에 가지 않게 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로부터 2년쯤 지났을 때, 하루는 둘째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한국에 가서 1년만 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달라는 엉뚱한 요구였다. 속으로는 매우 반가웠지만 “지난번 서울 가서 살 때 한국이 싫다고 얼마나 투정을 부렸는지 기억하느냐”며 일단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자기는 한국과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싶은데 1년만 보내주면 아무 불평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며 꼭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해서 둘째는 혼자 서울 이모집에 가 있게 됐다.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 서울행이었기 때문에 약속대로 아무런 불평 없이 1년간 개원중학교를 잘 다니고 태권도 초단인 검은 띠까지 따 당당하게 돌아왔다.

    93년 밀번고교 졸업을 며칠 앞둔 큰딸은 이미 주립대 입학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별안간 그애도 한국에 가서 대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또 절대 그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허락을 했다. 그리고 “네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것보다 더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칭찬해 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행여 내가 큰딸의 의사를 아예 무시하고 강제로 한국 대학에 보내는가 싶어 우리 가족을 만날 때마다 질문공세를 폈다. 그러나 큰딸은 아버지가 평소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결정은 스스로 했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렇게 큰딸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니까 둘째와 막내도 의무적으로 한국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심 아이들이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나에게 뜻밖의 큰 수확이었다.

    큰딸의 경우 한국 대학에 특례입학 자격이 주어졌지만 중학교 1학년 수준의 한국어 실력으로 3대 1이 넘는 입학 경쟁을 뚫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큰딸은 1차 대학에 떨어지고 성신여대 사학과에 들어갔다.

    교포 2세의 한국어 고민

    큰딸의 대학입시를 보면서 나는 한국 특례입학제도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꼈다. 내 딸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12년간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재미동포 2세 외국인 학생이 아무리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해도,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중고등학교 때 외국에서 2~3년간 살고 귀국한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자녀들과 경쟁해 특례입학시험을 보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외국인이 잠시 외유를 한 한국인과 겨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큰딸이 입학 시험을 볼 때는 고려대 문과의 경우 수학1과 일반수학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일반수학을 다 배우지 않고(2차 함수까지만 배우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도 있고 또 수학1은 이공계 대학을 가고자 하는 일부 우수한 학생들만 배운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입시과목을 그렇게 선정한 한국 대학에 문제가 있었다.

    그 후 고려대 총장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만날 기회가 있어 그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문과 계통 특례입학시험 과목에서 수학이 빠진 것으로 알고 있다.

    1차 지원에 떨어진 큰딸에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일류대학에 가면 밤새워 공부해도 겨우 C학점이 나올까 말까일 테니 적절한 수준의 대학에 가는 것이 좋다고 위로해줬다. 또 학점은 상관하지 않을 테니 대학에 다니는 동안 한국 신문을 완전히 독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국어를 익히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를 사주면서 세 번만 읽으라고 했다. 모름지기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동서양 사상사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둘째는 언니의 시행착오를 보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11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가서 정신여자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여고를 졸업한 후 96년 고려대 동양사학과에 들어갔다. 본래 한국사학과를 보내려고 했는데 학부에서 동양사를 배우고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다. 그런데 동양사를 공부하려니까 한자 실력이 필요했다. 둘째는 휴학을 하며 다시 한자 공부를 하고 있다.

    막내는 미국에서 6학년을 마치고 아주 중학교 1학년 2학기에 전학해 2년간 다닌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밀번고등학교 9학년에 들어갔다. 밀번고는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립고교로, 전학년에서 수학과 물리과목에서 항상 수석이던 막내의 성적이라면 아이비리그 대학은 문제없다고 했다. 하지만 막내는 11학년을 마치고 미련없이 한국으로 가서 나의 모교인 중동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들어갔고 지금은 고려대 경제학과에 다니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서울로 가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집에서 항상 한국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고,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꾸준히 배운 것, 그리고 온가족이 서울에서 1년간 살면서 서울 생활이 좀 불편하더라도 살 만하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바람은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면 좋겠다는 것이지만 딱히 그들에게 어디에서 살라는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사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 사항인 것이다.

    한국 대학 유감

    아이 셋을 모두 한국 대학에 보낸 우리에게는 한국 대학과 교수들에 대해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큰딸이 서울대를 지원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 시험과목이 한국어, 영어, 수학(일반수학 및 수학1), 한국역사였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면접이면 충분한데 한국사까지 들어 있어 포기했던 것이다. 둘째 딸과 아들은 한국에서 잠깐잠깐 학교를 다닌 경력 때문에 서울대 입학자격에 미달됐다. 그래서 둘째 딸과 아들은 고려대로 보냈다.

    하지만 입학 후에도 아이들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한번은 큰딸이 강의 도중 이해가 잘 안 돼 질문을 했더니 교수가 엉뚱한 질문으로 강의 리듬을 깼다고 나무라더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교수는 “다른 학생들은 다 미국으로 유학 가려고 아우성인데 너는 왜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왔는지 이상하다”면서 마치 미국에서 대학 다닐 실력이 못 돼 한국으로 쫓겨온 문제 학생인 양 사정없이 F학점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재미동포 2세 한국계 시민권자는 미국인으로 봐야 옳다. 겉모양이 한국인이니까 ‘한국 사람이 왜 그리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타박을 줄 게 아니다. 다른 한국 학생들과 똑같이 비교 평가하는 것도 잘못이다.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은 영어가 매우 서툴지만 미국 대학이 잘 지도해서 대부분 무사히 졸업시키고 있으며,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한국어를 열심히 가르쳤어도 대학입학 무렵 큰딸과 둘째 딸의 한국어 실력은 초등학교 졸업생 수준 이었으니 대학강의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재미동포 2세 자녀가 한국어를 완전히 습득하려면 적어도 초등학교 때 1년, 중학교 때 2년 하는 식으로 띄엄띄엄 한국에 보내는 것은 큰 효과가 없고 최소한 3~4년 이상 계속 한국에 머물면서 공부를 해야 성과가 있다. 큰딸처럼 서울 가서 1~2년 공부한 한국어로는 대학강의를 듣고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 대학교가 해외동포 2세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특례입학제도를 실시하면서 정작 서비스는 하지 않는 것은 정원외 입학으로 등록금이나 받아 챙겨서 학교재정이나 충당하자는 것 이외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대학평가를 할 때는 그 대학 입학생 중 몇 %가 졸업장을 받는지도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미국 일류대학교는 자기들이 선발한 신입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세심한 신경을 써서 자기들이 그 학생을 선발한 것에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애쓴다.

    그러나 한국 대학교는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학업을 잘 마치고 돌아갈 수 있게 계속 지도해줘야 하는데 입학만 시켜놓고 등록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대학 당국에서 외국인 유학생 각자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매학기 성적은 어떤지 전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독일 교수들은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공부가 끝나면 독일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먼저 묻는다고 한다.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학생들은 빨리 학업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도록 온갖 협조를 한다고 들었다.

    한국 교수들도 백인 유학생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친절한 것 같은데, 재미동포 2세 외국인 유학생들은 아예 한국인으로 취급해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는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어렵게 한국 대학을 택한 재미동포 2세들은 도중 하차하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학점으로 졸업해 나중에 미국 대학원 진학시 대학 성적 불량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재미동포 2세들에게 한국 교육 기관이 좀더 따뜻한 시선을 가져주기 바란다.

    우리집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면 용돈은 스스로 벌어 쓴다. 그래야 돈이 귀한 것도 알고 절제하면서 쓸 줄도 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니다 보니 대개 영어회화 강사로 일했다.

    큰딸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강의 요령이 좋아 인기 강사가 됐지만 그것을 싫어했다. 학원측에서는 같은 네이티브 스피커인데도 피부가 하얀 영어강사에게는 강의료를 많이 주고 자기에게는 적게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뒤늦게 인종차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큰애는 한국의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미국인 강사들은 미국에서 변변한 고등학교나 대학도 못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자기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서 큰딸은 영어회화 강사를 그만두고 여러 가지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다. 본래가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일벌레라 아주 좋은 조건으로 오라는 데가 많았다.

    큰딸은 올해 3월16일 한국에서 잘 나가는 어느 인터넷 회사의 미국지사 책임자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아침 업무 상담차 혼자 맨해튼으로 떠나는 늠름한 딸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큰딸이 대학 진학할 때 사학과가 아니라 영어를 자주 이용할 수 있고 활달한 성격에 잘 어울리는 경영학과를 보냈더라면 공부하기가 좀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본래 사회학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성신여대에는 사회학과가 없어서 한국 역사와 문화를 많이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 사학과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그가 한국 대학을 졸업한 것 이상으로 한국 신문을 완전히 독해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며 또 그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또 한국에서의 경험이 앞으로 여성사업가로 성공하는 데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큰딸과 상반된, 조용한 성격의 학구파다. 지금은 고려대 동양사학과를 휴학하고 ‘명심보감’과 ‘동몽선습’ 등을 읽으며 한문 공부를 하고 있으며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장차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사를 강의하여 한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것이 둘째 딸의 희망이요 목표다.

    막내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과 과학을 잘해서 자연과학을 전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9학년 때 뜻밖에도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싶은데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너처럼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자연과학을 하지 않겠다면 고등수학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막내는 10학년 때 선택과목으로 경제학을 한 학기 공부해 보더니 그것을 전공하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현재 막내는 고려대 2000학번 신입생으로 몇 과목 청강만 하고 학원에서 한자와 중국어 공부를 하며 매일 한국 소설을 읽고 있다. 두 딸이 대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아들은 1년 재수하는 셈치고 한국어 공부를 더 철저하게 한 다음 2001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대학 강의를 듣는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의 1차 목표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명문 대학원으로 진학해 국제경제학을 전공하는 것이다.

    2세들의 국제결혼

    많은 재미동포들의 자녀에 대한 마지막 걱정은 결혼 문제다. 나는 자녀의 결혼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이들에게 건전한 결혼관이 정립됐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나머지는 스스로 현명하게 판단하고 결정할 줄 믿는다.

    미국 같은 다인종사회에서 재미동포 2세들의 국제결혼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녀들의 국제결혼이 싫으면 어려서부터 한국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데 많은 재미동포들이 자녀를 완전히 미국식으로 키워놓고 그들의 결혼만큼은 한국식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들은 겉모양만 한국인이지 사실상 미국인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와 영어에 익숙한 재미동포 2세들은 타인종과 국제결혼을 하면 대부분 아주 행복하게 잘 산다. 그들 부부끼리만 사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녀가 태어나 성장하고 학교를 다니게 될 때 겪는 민족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방황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 자녀들이 영어나 미국 문화에 적응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갓 미국에 와서 서툰 영어와 낯선 문화로 고생하는 교포 1세나 1.5세보다 민족 정체성으로 인한 마음고생이 더 심할 수 있다.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잃은 사람은 향기를 잃은 꽃이나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해외의 한국 동포들이 자녀를 미국 일류대학까지 졸업시키고 또 많은 재산을 물려준다 해도 그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자녀를 모두 잃는 것과 같다. 결국에는 후손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극성스럽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또 한국 대학으로 유학까지 보내니까 주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질문도 많다.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온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 살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사람,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고압적으로 키워서 그들의 장래를 망친다고 말하는 사람, 자녀를 한국에서 살게 하려고 부모가 너무 억지를 쓴다는 사람 등 반응이 다양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재미동포 2세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것은 한국 가서 살려고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를 굳건히 하여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그들의 인생을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하려는 데 있다. 그들이 어쩌다가 한국에서 살게 되더라도 조국을 위하여 매우 유용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큰딸의 활약

    최근 미국으로 돌아온 큰딸은 좋아하는 폴크스바겐 자동차도 사고, 맨해튼 가까운 데에 아파트를 얻고, 현지 법인 회사를 설립하고, 또 여러 가지 활동으로 매우 분주하여 전화만 자주 할 뿐 얼굴 보기도 힘들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자기 혼자 지사장이며 업무부장이며 비서일을 수행하는 1인 3역이란다. 나이가 제일 어린 한국 회사 미국 지사장이겠지만 그가 하는 업무 수행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한국과 미국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 간부들도 미국에서 그만큼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큰딸은 무슨 일이든지 머뭇거리지 않고 잘 헤쳐나간다. 본래 일벌레인 그에게 딱 맞는 직장이 나타난 것 같다. 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새 자동차가 몸살이 날까봐 걱정일 정도다. 나이 어린 큰딸이 너무 무거운 책임을 맡지 않았나 걱정도 되지만, 그의 성격이나 평소 능력으로 보아 자기가 맡은 바 직분을 깜짝 놀랄 만큼 잘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

    현재 서울에는 두 남매가 자취를 하며 건전하게 잘 살고 있다. 물론 서울 지리도 잘 알고 한국에서 사는 지혜도 많이 터득한 것 같다.

    한국에서 학창 생활을 보내고 또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은 아이들의 경험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이다. 나는 사업이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우리 애들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것 같아 염려한 적도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한국 생활을 통해 세상이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고, 검소한 생활도 자연스럽게 익히고, 아울러 ‘헝그리 정신’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큰딸은 내 사업이 부진한 것을 알고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기 학비는 물론 서울 생활비와 동생들 용돈까지 마련하기도 했다.

    언젠가 아이들은 “우리집이 좀 어려워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무슨 뜻인지 의아해 쳐다보니까 “미국에서 잘살 때처럼 한국에서 살았으면 틀림없이 우리도 강남 로데오 거리에서 이상한 옷차림으로 그런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안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교육목표는 아이들이 언어나 문화상의 제약 없이 한국이나 미국 어디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부모 마음이야 아이들이 장차 한국에서 살아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 선택은 이제 아이들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한국어로 부모와 자유롭게 대화하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장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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