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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

축구인 최은택

축구인 최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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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을 하면서 학업도 병행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장려해야지, 그게 논란이 된다면, 이거 나라가 망할 일입니다. 개인 생활을 못하게 하고 운동 이외의 소질을 개발할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면 그건 감옥이지요. 무엇보다도 교육적이 아니에요.” 》
대학 교수들에게 안식년(安息年)이라는 것이 있다. 본시 유대 사람들이 7년째 되는 해에는 휴식을 취하던 데서 비롯된 것인데, 일정 기간 근속해온 교수들의 노고를 위무하고 학문 연찬의 시간을 주자는 의미에서 시행하는 제도일 터이다.

나는 교수들이 이 안식년을 어떻게 보내는지 잘 알지 못한다. 재가연수(在家練修)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외국 대학에 나가 연찬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안식년을 中國 연변 오동팀 감독으로

그러나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친 안식년을 중국 연변에서 보낸 한양대학교 체육대학의 최은택 교수(62)만큼, 의미 있는 안식년을 보낸 교수도 드물 것이다. 그는 강단에 선 이래 처음 맞은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중국의 한 프로축구팀 감독으로 지냈다. 그가 맡았던 팀은 길림성의 조선족 자치지역인 연변의 ‘오동(敖東)팀’이었다.





1997년 7월 7일자 연변지역 조선족 ‘종합신문’은, 최은택 감독이 오동팀을 맡은 이래 막강 전력을 자랑하던 ‘전위’팀을 맞아 2:1로 이긴 뉴스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문기사라기보다는 격문에 가깝다. 1부리그 격인 ‘갑(甲)A’에서 꼴찌를 맴돌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전위팀을 상대로 홈스포츠장(홈구장)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조선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실감케 하는 기사다. 조선족뿐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팀만 만나면 공한증(恐韓症)으로 맥을 못 추고 있던 중국의 축구계는 ‘최은택’을 통해 한국식 축구의 면모를 읽기에 바빴다. 인민일보, 신화통신, CCTV를 비롯한 중국의 주요 언론이 다투어 그를 소개했다.

恐韓症을 극복시켜줄 ‘교수님’

98년 1월, KBS는 ‘최은택 현상’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연변의 한 조선족 사내아이는,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최은택 교수님”이라 했다. 연길시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나 날아갈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서안(西安)의 한 시민은 “최은택 감독을 아느냐?”는 질문에 “함부로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분은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교수님이다”라며 오히려 한국 취재팀을 야단쳤다.

그는 이제 다시 교수로 돌아와 강단에서 학생지도에 전념하는 한편으로, ‘2002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직분에 충실하고 있다. 운동장의 함성이나 질타도 뒷전으로 물러나고 매스컴의 각광도 그를 저만치 비켜난 지금이, 축구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얘기를 담담하게 듣기에는 오히려 맞춤한 때가 아닐까? 지난 6월3일, 서울 역삼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월드컵 관계로 일본에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어떤 일을 보고 오셨는지요?

“2002 일본조직위원회를 방문해서 성공적인 경기개최를 위한 방안도 논의하고, 경기장 건설 상황과 각 경기장의 특색들을 둘러봤습니다.”

―일본의 경기장 건설 상황은 어땠습니까?

“요코하마와 오사카 경기장을 둘러 봤는데요, 요코하마는 예전 전용축구장을 증축하는 경우고, 오사카는 우리 잠실경기장같이 종합경기장인데 이미 완공이 된 상태였고 다른 경기장은 40%에서 60%의 공정을 보였습니다.”

―공동 개최국으로서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본받아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우선 장애인이 관람하는 데에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0개의 경기장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립니다. 서울의 경우야 다르겠지만, 지방의 경우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조성한 대형 축구장이 월드컵 경기가 끝난 후 어떻게 관리되고 활용될 것인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요.

“일본도 월드컵 이후의 경기장 관리문제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축구장에 유스호스텔을 지어서 청소년의 사회활동에 기여한다거나, 풀을 조성하겠다는 등의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만 해도 J리그가 아주 잘 되고 있고 관중도 많습니다.”

―관중 호응도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열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관심가는 국제경기가 열려야 스탠드가 들어차는데….

“그게 걱정입니다. 월드컵이 끝나고나서 그 운동장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우리도 고민이 많습니다. 청소년 캠프로 활용하거나 음악회 등의 행사를 유치한다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거든요. 가장 좋은 것은 한국의 프로축구가 활성화해서 경기장이 글자 그대로 ‘경기의 장’으로 거뜬히 관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미군 하우스 보이로 전쟁중 호강

최은택은 193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1945년 소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는 강원도 통천에서 살았다. 소학교 시절 이미 학교 대표 축구선수였다. 47년 부모를 따라 월남, 경기도 연천중 1학년 때 6·25를 맞았다. 피란길에 길이 엇갈려 가족들과 헤어졌으나 대구까지 흘러간 그는 운 좋게도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들어가 전쟁시기를 ‘호강’하며 보냈다.

미군 부대의 북진 행렬에 끼여 인천까지 올라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다시 만나 인천에서 송도중학을 다니게 된다.

―전쟁 직후의 학교 체육 상황은 어땠습니까? 축구팀 만들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축구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프로축구보다 관중이 더 많았어요. 송도중학을 졸업하고 축구 명문이던 한양공고에 진학했는데, 당시에는 한양공고와 더불어 배재·중동·동북·영등포공고 등이 서울에서는 강호였고, 지방에서는 부산의 동래고와 경남상고 그리고 전주의 전주고, 광주의 광주사범 등이 강팀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어떤 포지션을 맡았습니까?

“이너(Inner)였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미드필더지요.”

한양공고를 졸업한 뒤 신흥대학에 진학한 그는 한양대에 축구부가 생기자 그리 옮겨간다. 그러니까 최은택은 한양대 축구부가 처음 생기던 시절에 선수로 들어가서 감독을 거쳐 체육대학 교수가 되었으니 한양대 축구의 살아 있는 역사인 셈이다.

1950년대에는 국제경기가 고작 1년에 한 번 정도였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양대 축구부와 육군헌병감실 축구단, 그리고 대한중석팀을 거치는 동안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 2진으로 활약했으나 빼어난 활약을 못한 축이었다.

―당시에도 요즘처럼 다양한 축구 기술이나 전술이 있었습니까? 가령 선수배치를 4·4·2 시스템으로 한다거나….

“기술이래야 단순했지요. 전술 역시 ‘WM 포메이션’(공격진은 W 대형으로, 수비진은 M자 대형으로 포진)이 고작이었어요.”

1967년,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이듬해에 모교인 한양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10년 넘게 감독생활을 한다. 1971년에 한국 고교축구 상비군이 생길 때 초대 감독을 맡았고, 72년에는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해외원정을 다녔다. 조광래, 조영증, 허정무 등 근래 프로팀 감독으로 활약하는 사람들이 그 무렵 청소년 대표팀의 주축이었다.

73년도부터는 국가대표 코치를 맡아 지도했다. 이회택, 박이천, 김재한, 이세연, 변호영 등이 활약하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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