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정치인들이 사과상자에 든 돈 1억~2억 원을 받아 챙기는 식이었다면 요즘은 (자금)시장 구조 자체를 활용,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액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고 있다.”
2000년이 다 가는 시점. 한때 ‘황금의 땅’으로 불리던 테헤란밸리에서 만난 한 벤처캐피탈 대표가 허탈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다. 그 자신 ‘작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에 합류를 종용받은 것이 수 차례. 그래서일까, 말을 아끼는 가운데에도 표정엔 냉소가 가득했다.
지난 한해 천당과 지옥을 오간 여의도 증권가 역시 세밑 루머치고는 심상치 않은 가담항설(街談巷說)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현준, 진승현 게이트는 시작에 불과하다” “점점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등의 절망적 진단마저 나돈다. 정계·금융계 소식에 정통한 사람들 입에서조차 ‘정권만 바뀌면 불거질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가 서슴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의심’과 ‘루머’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을 듯한 부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또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몇몇 사례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만능키처럼 사용돼 온 ‘시장의 논리’란 실상 ‘정권의 논리’를 뜻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비난마저 횡행하는 요즘이다.
새 천년 첫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민심은 정치권과 벤처 주변의 ‘부적절한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코스닥 폭락, 만연한 주가 조작, 잇따른 벤처 관련 금융사고, 벤처기업의 연이은 도산이 2000년이 남긴 상흔이라면, 이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정치권이 왜 민심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일까. 민심은 그 해답을 정치권과 벤처 금융, 경제관료를 잇는 검은 커넥션의 존재와, 그 커넥션이 신(新) 정경유착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징후에서 찾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IMF 경제 위기가 본격화된 1998년 초, 50년 만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위기 수습에 나서야 했다. 이를 위해 김대통령은 정권과 재벌의 유착을 완전히 청산하고, 재벌로 인해 피폐한 한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실리콘밸리식 벤처기업을 대량 육성, 경제 기반을 튼튼히 하겠다는 획기적인 구상을 내놓았다.
한국 벤처, 어떻게 길러졌나
대통령은 100만 명에 육박한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벤처기업을 통한 고용 창출에 주력하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정부 부처가 김대통령의 시책을 받들어 너도나도 벤처육성책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듯 벤처 창업 붐이 거세게 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김대중 정부가 벤처에 거는 기대는 절박한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순수함이 깃들여 있었다.
IMF 경제 위기로 빈 사무실이 널려 있던 테헤란밸리에 벤처기업이 몰려들었다. 마치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금맥을 찾아 전세계에서 몰려든 ‘포티나이너스’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를 만들어냈듯 불과 몇 km에 불과한 테헤란밸리에 사람과 기술, 자금이 집중됐다. 정부는 이런 분위기에 고무돼 2000년까지 1만개, 2002년까지 2만개, 2005년까지 4만개의 벤처기업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생존율이 5%도 안되는 것이 벤처기업인데 정부가 그런 무모한 정책을 펴도 되느냐는 비판도 거셌지만 한번 달아오른 벤처 열기는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번 하면 화끈하게 한다’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까지 가세하면서 벤처 산업 특유의 위험성 따위는 잊혀졌다.
그러나 테헤란밸리의 벤처 열풍은 그 조성 과정부터가 실리콘밸리와는 전혀 달랐다. 자생적이라기보다는 정부의 강력한 벤처 드라이브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측면이 강한 것이다.
70년대 재벌과 정·관계 유착을 심화시킨 도화선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었다. 몇몇 기업에 대형사업 인·허가권을 쥐어주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과정에 각종 부작용이 발생했다.
벤처 육성책 또한 비슷한 유의 ‘관치(官治)’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벤처 자금 지원의 증가와 더불어 각종 규제·관리 장치들이 마련됐다. 일정한 ‘심사’를 거쳐 벤처기업을 ‘지정’하고, 코스닥 등록을 ‘좌지우지’하며 주가를 ‘관리’했다.
여기에는 벤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 부처간 경쟁도 한몫을 했다.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중소기업청 과학기술부처럼 기본 업무가 벤처와 관련이 있는 부처는 물론이고 문화관광부 환경부 농림부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벤처 정책을 쏟아냈다. 부처 안에서 벤처와 관련된 실무를 하는 조직만도 20개를 넘어섰다. 정부는 벤처기업 확인 제도를 통해 자연스레 벤처기업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지만 이런 제도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부는 지난 3년 동안 5500여개의 기업에 대해 ‘너, 벤처 맞아’ 하는 식의 ‘확인서’ 발급을 통해 벤처 위에 확실하게 군림할 수 있었다. 정부 인증을 받은 벤처기업들은 회사 출입구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확인서를 걸어두고 손님에게 자랑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한편으론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관료들의 벤처 행이 이어졌다.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금융감독위원회 등 1999년 이후 벤처기업을 택한 공무원들의 수는 사무관 이상 급만 대충 헤아려 보아도 30명을 넘어선다. 업계 일각에선 이들이 영입 기업의 로비스트나 ‘얼굴마담’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코스닥 활황과 더불어 벤처업계엔 엄청난 돈이 몰려들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제도권 벤처로 흘러든 자금만도 15조~20조원, 이 가운데 감시가 거의 불가능한 사설펀드에만도 2조원 안팎의 자금이 몰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민들도 벤처 신드롬에 흠뻑 도취했다. 올해 초 한 여론조사에서는 배우자 후보 1위가 벤처기업가로 나타났으며, 돈 2000만원을 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가장 많은 대답은 벤처 창업이었다. 돈, 사람, 정보의 이상 집중 현상. 어느새 한국은 ‘벤처공화국’이 돼 있었다. 영남 출신의 40대 여성 벤처기업가 한 명은 “지역 감정, 지역 감정 해도 벤처기업을 지원해주는 김대중 대통령이 최고다”고 말할 정도였다.
60~80년대 정권처럼 재벌기업을 통해 자금을 동원할 수도 없고, 김영삼 정권처럼 한보 같은 신흥재벌에 기댈 수도 없던 정치권 인사들 또한 벤처 주변에 모여들었다. 벤처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정·관계 인사, 벤처기업인, 유력 투자자를 아우르는 수많은 공식·비공식 모임들이 잇따라 형성됐다. 이들의 만남은 벤처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인적 네트워크’의 이름으로 점점 그 세(勢)와 긴밀함을 더해갔다.
그중에서도 386정치인들과 역시 같은 세대인 유력 벤처 CEO들의 만남이 두드러졌다. 첫 번째 끈은 학맥. 같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 출신끼리 다양한 모임을 형성했다. 업계가 커지면서 모임 규모도 함께 성장했다.
형식은 엔젤투자, 내용은 주식상납
한 벤처기업인은 “학교 선배인 모 청와대 인사와 술자리를 했다. 만취하자 ‘나도 벤처로 돈 좀 벌었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한 둘이 아니다’는 얘길 하더라. 자기 돈 갖고 투자하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공직사회에 그런 현상이 만연해 있다면 문제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올 초 코스닥 활황이 절정에 달했던 때에는 ‘벤처 돈 못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정가에 파다했다고 한다.
최근 중앙일보는 벤처업계 유력 최고경영자 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들 역시 벤처 기업이 포함된 금융사고가 터지는 이유로 투자자들의 한탕주의(32%), 허점 많은 각종 제도(19%), 정치권의 부도덕성(17%)을 꼽았다.
B창투 책임심사역 L씨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벤처기업들은 힘있는 인사를 바람막이로 둬야 안심이 됐고, 정·관계 인사들은 적당히 뒤를 봐주며 최대한 낮은 배수로 펀딩에 참여해 이권을 챙겼다. 간혹 무상으로 주식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형식은 엔젤투자였지만 내용은 주식상납 구조였다”고 설명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랄까. L씨 자신도 “유망한 벤처기업 리스트를 달라, 돈을 줄테니 마음껏 굴려 보라는 등의 요청을 여러 번 받았다”고 증언했다.
정치인이나 공무원들로서는 투자한 업체가 잘 돼야만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위치와 인맥을 활용, 해당 기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코스닥이 붕괴되면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으로 원금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투자원금 보존’이라는 기상천외의 비즈니스 모델. 한국디지탈라인에 투자했던 장래찬 전 금감원 비은행검사 1국장이 유조웅 인천 대신금고 사장으로부터 돌려 받은 7억 원이 이에 해당한다.
정·관·벤처업계를 잇는 각종 루머들이 절정에 달한 것은 4·13 총선 직후인 2000년 4월17일 주가가 대폭락한 무렵부터였다. 권력 주변 인사들이 총선과 대선용 정치자금줄로 벤처를 선택했다는 설이었다. 현 정부 권력 실세들이 1998년 하반기 이후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을 통한 바람 넣기 ▲벤처육성을 명분으로 한 코스닥 붐 조성 ▲올 봄 제3시장 개장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주가 띄우기’를 했다는 음모론이 시중에 공공연하게 유포됐다.
이런 시나리오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은 4·13 총선 직전부터 코스닥이 붕괴 조짐을 보였다는 점이다. 결국 권력층은 이른바 ‘먹튀(먹고 튀기)’를 하고, 소액 투자자들만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법인고객을 담당하는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 증시가 최고 활황일 때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다. 정치권에서 4월 총선에 필요한 선거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려면 총선 치르기 4,5개월 전에 ‘작전’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 막차를 탄 개미투자가들만 헛물을 켠 셈이다. 그렇게 권력과 큰손들의 하수인인 금융브로커들이 단물을 빼먹은 벤처기업들은 껍데기만 남게 됐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벤처는 결국 ‘가진 자들’의 ‘잿밥’이 되고 말았고, 정경유착을 배척하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신경제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것이 2000년말, 다시 실업자 100만 시대를 맞는 한국경제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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