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고구려의 옛땅에서 발해(渤海) 왕국(698~926년)이 일어나고, 백제 피난민을 대거 수용한 일본은 찬란한 백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3년)의 번영을 누리기에 여념에 없었다.
이런 국제적인 소강상태를 충분히 활용하여 성덕왕은 나라를 부강과 안정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삼국통일 과정에 삼국간의 쉴 새 없는 전쟁은 물론이려니와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이 땅에서 싸우게 함으로써 200년이 넘는 동안 전쟁 없이 살아본 적이 없던 한반도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동안 백제와 신라는 각기 자기 나라에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미륵불국토를 이룩함으로써 자신들을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미륵불국토 건설에 매진해왔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미륵하생시에 3회 설법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미륵하생경’의 가르침에 따라 익산 용화산 아래에 이 3회 설법을 상징하는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의 구조를 가진 미륵사를 무왕(武王, 600~640년) 초년경에 건립하였다. 백제가 미륵보살이 하생한 미륵불국토임을 표방한 것이다. 자신과 신라에서 유인해 온 신라 왕녀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신라는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를 왕위에까지 올려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
진흥왕(540~576년 재위) 말년경에 확장된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소년 군단을 창설했는데, 묘령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화(原花) 혹은 선화(仙花)라는 이름을 붙여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임을 표방하면서 이들 소년군단을 이끌게 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장차는 왕녀가 원화의 소임을 맡아 막강한 소년군단을 이루어갔던 듯하니, 석가모니불의 부모와 이름이 같은 백정반(白淨飯)과 마야(摩耶)부인이란 이름을 가졌던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재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덕만(德曼) 공주(580년경~647년)가 그 핵심인물이었던 듯하다. (제10회 도판 1)을 선덕여왕의 초상조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덕만공주를 원화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성장한 화랑도 1세대인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30대 후반이 되어 군권의 실세를 장악하니 미륵보살의 직접 통치를 표방한 여왕의 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미륵사를 대규모로 지어놓고 미륵불국토의 성취를 내외에 선전하며 민심을 사로잡아 신라를 맹공해 오는 데 대항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여주(女主)가 이렇게 미륵보살의 하생을 표방하며 군림하여 민심을 사로잡는 일은 이미 중국 북위(北魏)로부터 비롯되고 있었으니 문명태후(文明太后) 풍(馮, 466~490년)과 영태후(靈太后) 호(胡, 516~528년)의 청정(聽政; 정치하는 일을 직접 듣고 처리함)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례 없던 여왕이 된 선덕여왕은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보수적인 반진골(反眞骨)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 위상에 도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필요가 있어 진골 출신 승려로 신라 불교계를 주도하던 자장(慈藏, 590~658년) 율사가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장안 동북쪽의 오대산(五台山)에 머물러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백제 미륵사 겨냥한 황룡사 9층목탑
자장은 오대산 북대(北台)에 모셔진 문수보살의 소조상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꿈속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보통사람이 알 수 없는 사실을 미리 가르쳐 주는 것)를 받고 그 증표로 석가세존이 입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붉은 비단에 금점을 수놓은 가사) 한 벌과 석가세존의 정수리뼈와 치아 및 사리 백과(顆)등을 받아 가지고 온다. 마정수기의 내용은 선덕여왕이 찰제리종(刹帝利種), 즉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특수혈통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여왕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이다.
자장은 이렇게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신라국왕이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고, 종남산 원향(圓香)선사로부터는 황룡사(黃龍寺)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온다.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공표하자 나라에서는 황룡사에 높이 225척(약 56.25m거나 68m)의 9층 목탑을 건립한다. 따라서 선덕여왕 14년(645) 3월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공을 본 (제11회 도판 5)은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며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임을 상징하는 조영물(造營物)이었다.
이로써 신라 사람들은 자신이 미륵불국토에 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미륵사에서 미륵불국토를 확신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신라가 이 탑의 건립을 서둘렀던 것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과 때를 맞추어 짓기 시작함으로써 이 황룡사 구층탑이 완성되고 나면 고구려가 멸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듯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1년 만에 탑을 완공해냈다.
그런데 당 태종은 이 해(645) 2월에 수십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여 5월에 요하를 건넌 다음 6월에 가서야 요동성(遼東城) 하나를 떨어뜨리고 곧바로 안시성(安市城)을 들이친다. 그러나 60일 동안 집중 공격해도 안시성이 끄떡 없자 9월에 들어 참패를 인정하고 회군해 돌아간다. 다음해 3월에야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이 불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윤 3월에는 요동성 점령 포기를 선포한다.
이에 신라에서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의 의미가 무색하게 되어 미륵불국토 건설을 표방하던 선덕여왕 측근 혁신 진골 세력들은 반진골 보수세력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그래서 황룡사 구층탑이 완공될 즈음인 선덕여왕 15년(646) 11월에는 저들을 회유하기 위해 반동세력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러나 비담은 오히려 그 다음 해인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그 무리를 이끌고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전례에 없는 여왕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으니 미륵불국토 건설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깨뜨리는 행위였다.
이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화랑 출신 진골 수호세력들은 감연히 일어나 이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들의 9족을 멸하여 그 씨를 말린다. 그러나 이미 68세쯤의 고령이던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충격으로 1월8일에 돌아간다.
이를 숨긴 채 반란을 진압한 진골 수호세력들은 신라가 계속 미륵보살이 다스리는 불국토임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해 다시 미륵보살의 화신인 원화(原花)를 여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3년 재위)이다.
미륵보살은 가고 미륵불 시대가 오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숙부인 국반(國飯, 석가모니불의 숙부 이름도 국반이다)의 따님으로 일찍이 선덕여왕과 함께 원화가 되었던 분이라고 생각된다. 풍만한 용모를 가진 미인으로 서면 손이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긴 팔을 가진 특이한 신체를 타고났다고 한다. 이 역시 불보살이 지니는 32대인상(大人相) 중의 한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니, 미륵보살이 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져 여왕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진지왕(眞智王, 576~579년 재위)의 장손자(長孫子)이자 진평왕(579~632년)의 외손자이며 선덕여왕의 이질(姨姪)이던 김춘추(金春秋, 603~661년)가 진덕여왕 2년(648) 윤12월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을 면대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미륵보살의 화신을 표방하는 정도로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으로 등장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생각은 벌써 자장율사가 당나라를 다녀와서 바로 가졌던 듯, 자장이 귀국한 다음해인 선덕여왕 13년(644)에 서남산 북쪽 봉우리인 삼화령(三花嶺) 위에 (제11회 도판 10)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은 주불을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좌상)으로 표현하여 하생 성불한 미륵불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미륵보살의 시대는 가고 미륵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표시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7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이 끝나자 용수(龍樹; 龍華樹의 생략어)의 아들인 김춘추가 하생성불한 미륵불의 자격으로 왕위에 등극한다. 처남인 김유신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를 뒷받침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흥왕 이래 전륜성왕을 표방하며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꿔오던 신라는 진흥왕의 증손자인 김춘추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꿈을 이루어 미륵여래가 다스리는 미륵불국토를 현실에 구현해 내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백제와 고구려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당태종과 당 고종의 정복 욕구를 부추겨 결국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재위기간(654~661년)에 백제를 멸망시킨다(660).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은 당군의 힘을 빌려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다(668).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 바로 삼국이 통일될 줄 알았던 신라는 당 고종의 영토확장 야욕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신라마저 당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한다.
미륵불국토의 이상을 구현하려던 신라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결국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벅찬 감격을 누려볼 겨를도 없이 당군(唐軍)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는 힘겨운 전쟁에 다시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문무왕 16년(676)에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겨가고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겨가게 되니 비로소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했던 대로 패수(貝水, 대동강) 이남의 땅이 신라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은 끝내 옛 고구려와 백제 땅의 신라 영유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신라로부터 탈취하려는 야욕을 부린다. 이런 형편이니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신라가 불국토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지내다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장자인 신문왕(神文王, 681~692년)이 등극하였으나 불과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하며 통일 전쟁의 영웅들을 제압하느라 정력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으니 역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꾸며 삼국 통일을 힘겹게 달성해 내던 초기 80여 년 세월은 신라가 미륵불국토라는 확신이나 자부심을 드러내 보일 겨를도 없이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차례로 극복해 나가는 중에 한반도 주변이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어 국제적인 평화가 자리를 잡아가자 신라는 통일된 국세를 바탕으로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났던 성덕왕(702~737년 재위)이 36년 동안 통일 신라 왕국을 다스리며 나라를 안정과 부강(富强)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성덕왕은 그 6대조 진흥왕이 꿈꾸던 불국토의 건설을 실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조부 문무왕이 일찍이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으로 수용했던 의상(義湘, 625~702년) 대사의 신라화엄종(新羅華嚴宗, 海東華嚴宗이라고도 한다) 이념에 따라 불국토 건설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우선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라 국토 안에 여러 보살의 진신(眞身; 육신을 벗어난 참모습, 각종 육신을 빌려 나타나 보이기도 함)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를 설정하였다. 동해안 양양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하고 평창 오대산(五台山, 淸凉山)은 문수보살의 진신상주처이며 회양 금강산(金剛山)은 법기(法起)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한 것이다.
이는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년)가 측천무후(則天武后) 증성(證聖) 1년(695)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성력(聖曆) 2년(699)에 번역을 끝낸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에서 말한 내용을 신라 국토에 적용한 것이다.
‘신역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북방에 머무는 곳이 있으니 청량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문수사리(文殊師利)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만 인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바다 가운데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법기(法起)보살이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200인(‘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에서는 1만 2000인이라 하였다)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또 ‘신역화엄경’ 권68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남방에 산이 있으니 보달락가(補洛迦)라 하고 저곳에 보살이 있으니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한다.”
이렇게 ‘신역화엄경’에서 말한 여러 보살의 진신 상주처를 이미 자장율사(慈藏, 590~658년)나 의상대사(義湘; 625~702년)가 확정한 것처럼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 및 낙산이대성관음정취(洛山二大聖觀音正趣) 조에서 말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진신상주처가 청량산이라는 것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의희(義熙) 14년(418)에 번역한 60권본 ‘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에도 나오는 말이니 모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제보살 진신의 신라국 상주설이 일반에 널리 보급된 것은 성덕왕(702~737년) 치세 시대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가 신라화엄종 이념을 바탕으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신라 불국토의 자존심을 확보해 가는 것이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의상대사는 신라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면서 금당(金堂)의 주불(主佛)을 (제14회 도판 8)으로 모셨다고 한다. 통일 전쟁 과정에 무수하게 죽어간 망령(亡靈)들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당시의 신앙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화엄종에 정토(淨土)사상을 녹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의상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스승 지엄이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는 열반에 들지 않아서 시방정토(十方淨土)로 몸을 삼으니 나고 죽는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이르기를, 간혹 아미타와 관세음보살이 관정수기(灌頂授記)한 자들이 법계(法界)에 가득 찬 것을 본다고 하였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은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온다)의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녹아들어 거칠 것이 없음)한 종지(宗旨)로 일체 불교를 융회(融會; 녹여서 한데 모음)하려는 신라화엄종의 통합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래서 종래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왕을 출현시켰던 사실이나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망령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야 했던 사실들을 모두 만법귀일의 신라화엄종지로 수용해 신라불국토 건설의 풍부한 제반 요소로 재현하게 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구득한 김지성
성덕왕 5년(706)에 성덕왕이 돌아간 모후(母后)인 신목태후(神穆太后, 655~700년)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해 (제15회 도판 6) 제2층 옥개석 위에 사리 4과(顆)와 높이 6치(寸)짜리 순금제 아미타불상 1구(軀), 즉 (제15회 도판 10)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추가 봉안한 것이 바로 그런 일의 첫걸음이었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19세(643)에 출가한 절이라 하니 의상대사의 출가 본사로 화엄종 사찰이 분명한데 신문왕이 돌아가자 그 미망인인 신목태후가 장자인 효조왕(孝照王, 692~702년 재위)과 함께 신문왕의 추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신문왕의 초상조각이자 미륵불이라고 생각되는 순금 불상인 (제15회 도판 7)을 만들어 탑 안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화엄종사찰에 미륵여래를 모신 3층 석탑이 세워지고 다시 거기에 황금아미타불좌상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이 추가 봉안된 것이다.
이로써 황복사가 점점 복합적인 성격을 띠어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측천무후 말년인 장안(長安) 4년(704)에 밀교승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한 것으로 번역되자마자 그 다음해인 성덕왕 4년(705)에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사신으로 가서 구득해 온 것이었다. 성덕왕은 갓 번역된 이 밀교 경전을 보고 그 경설(經說)에 심취하여 바로 그 내용대로 황복사 3층 석탑 안에 77소탑 그림과 이 경전을 봉안하면서 아울러 순금제 아미타좌상 1구도 함께 조성 봉안했던 것이다. 신라 화엄종 이념을 근간으로 하며 미륵신앙과 밀교 신앙을 모두 융회했다고 볼 수 있다.
성덕왕 18년(719)에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사(甘山寺)에 (제16회 도판 1)과 (제16회 도판 2)을 거대한 규모로 조성해 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김지성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최초로 구득해 온 바로 그 김지성일 것이다.
의 광배 뒤에 새겨진 명문에서는 조상 공덕주인 김지성이 법상종(法相宗) 근본 경전의 하나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연구했다 했으니 현장(玄, 602~664년)이 문호를 세운 법상종 이념까지 혼효(混淆; 마구 뒤섞임)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유가사지론’ 100권은 미륵보살이 설(說)한 것을 무착(無着)이 편집하고 현장이 정관(貞觀) 22년(648)에 처음 번역해 낸 신역 경전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배경
통일신라 왕국을 그 문화 절정기인 불국시대로 이끌어간 성덕왕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다. 3세경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경에 모후인 신목태후가 돌아가서 어린 시절을 고아로 보내야 했으며 형인 효조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때는 13세쯤의 소년이었다.
다만 태종무열왕의 적장손(嫡長孫)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태종무열왕의 내외 혈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그들의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되었을 뿐이니, 초기에는 저들의 세력다툼 틈바구니에 끼어 말못할 고통을 겪었다. 15세에 결혼하여 태자까지 생산한 첫 왕비 성정왕후(成貞王后)와는 27세 때(716)에 강제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뒤이어 외사촌 누이동생인 소덕왕후(炤德王后, 700년경~724년)를 계비로 맞이하여 두 왕자를 낳았으나 그 역시 25세쯤의 젊은 나이에 어린 왕자 형제를 남겨 놓고 타계하고 만다.
35세의 한창 나이에 상배(喪配)한 성덕왕은 어린 왕자 형제를 위해 재혼을 하지 않고 13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돌아간다. 이때 남겨진 어린 왕자들이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 형제였으니 효성왕은 4세, 경덕왕은 2세쯤의 젖먹이였다. 자신이 고아로 자라난 성덕왕이 다시 30대 중반에 상처하여 어미 잃은 젖먹이 아들 형제를 보게 되었으니 그 참담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재혼을 거부하고 어린 왕자들의 양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 결과 외척들에게 세력다툼을 벌일 명분을 주지 않게 되니 이후 성덕왕의 치세 시에는 정국이 안정되어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실감할 수 있는 극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런 상황을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은 덕(德)이 산하(山河)와 같아서 그와 같이 높고 이름은 해와 달과 가지런할 만큼 높이 걸려 있다.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시속(時俗)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습을 바로잡으니,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풍속은 금과 옥을 싫어했고 대대로 문재(文才, 글 잘하는 재주)를 숭상했다.
내 자신이 신령스럽다 생각지 않았고 마음에는 노인의 경계함이 있었다. 40여 년 나라에 임하여 정치에 힘썼으나 한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고 어지럽게 한 적이 없으니 그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만리 밖에서 손님으로 찾아와 오직 교화를 흠모하여 바라다보았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리려고 엿보지는 않았다.
연(燕)나라(昭王)와 진(秦)나라(穆公)가 사람을 쓴 것이나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패권을 번갈아 차지한 것과 어찌 바퀴를 나란히 하고 고삐를 쌍으로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안정은 성덕왕이 돌아가면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여 17세에 등극한 효성왕의 여자 관계가 도화선이 되어 척족들간 세력다툼이 반란 형태로 드러난다. 이를 제압하지 못한 효성왕은 결국 재위 5년 만에 척족들의 손에 비명 횡사한 듯하다.
이를 뒤이은 경덕왕(景德王, 723~765년)은 자못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던 듯 이런 외척 전횡의 고리를 차단하려고 20세에 등극하자마자 자식 못 낳는 것을 트집잡아 김순정의 딸인 왕비 삼모부인(三毛夫人)을 출궁시킨다. 폐립(廢立)을 자행할 만큼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처가이자 외가인 김순정(金順貞) 집안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조카딸 뻘인 서불한 김의충(金義忠, 670년경~739년)의 따님 만월부인(滿月夫人)을 맞아들인다. 경덕왕 2년(743) 4월에 결행한 일이다. 자신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비를 내쳐서 외척 전횡의 싹을 자른 다음 다시 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은 이 막강한 외척세력이 결사적으로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 현명한 처사였다. 경덕왕이 등극 초에 자신을 옹립한 외척 집권가문의 기세를 이렇게 가차없이 눌러놓자 효성왕 때 일시 흔들리던 신라의 정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군림하여 절대왕권을 행사하며 불국시대(佛國時代) 문화의 황금기(黃金期)를 이루어낸다.
우선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전륜성왕의 자격이 충분했던 부왕 성덕왕을 전륜성왕답게 대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왕릉을 스투파 형식으로 꾸미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護石) 주변에 돌려가며 세우고 난간석과 요도(繞道)를 상징하는 지면석(地面石)을 추가 설치하여 전륜성왕이나 불타의 탑묘와 같은 형식으로 (제18회 도판 1)을 치장함으로써 새로운 스투파형 능묘제도를 창안해낸 것이다.
그리고는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추복(追福)을 위해 두 가지 큰 불사를 일으켜 불국시대의 최고 문화역량을 과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할 (제17회 도판 10) 주조(鑄造)이고, 둘째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조영(造營)이었다. 3세 때 돌아가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 소덕왕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자식들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홀아비로 살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낸 불쌍한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경덕왕은 이 분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불사(佛事)를 일으켜 그 복을 빌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선왕을 위해 추복사찰을 짓고 그 초상조각을 주불로 봉안하는 것은 북위 운강석굴로부터 용문석굴의 빈양중동(賓陽中洞)으로 이어지고 최근에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에 의해 (도판 1)이 굴착되어 고종과 측천무후 및 왕황후가 형태로 조성되고 있음에랴!
경덕왕은 이제 자신이 전륜성왕이며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천하에 과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부모를 위한 추복사찰을 짓되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를 신라 땅에 구현(具顯)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투파 형식이 장엄한 부모의 능인 이 있는 경주 동남쪽 양장곡(楊長谷) 주변의 길지(吉地)를 찾아 토함산(吐含山)에 불국사를 조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 경덕왕의 심회는 ‘성덕대왕신종명’에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사라쌍수에 누운 시기(석가모니불은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헤아릴 수 없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운지라 (성덕대왕이) 돌아가신 이래 이미 34년이 되었다. 그 전에 아드님인 경덕대왕이 살아 있던 날 대업(大業)을 이어 지키며 모든 일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런데 (경덕대왕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해가 지날수록 그리움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대궐의 전각에 임하면 슬픔이 더했다. 추모하는 정(情)이 더욱 처절해지고 혼령을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이 다시 간절해져서 삼가 동 12만근을 시주하여 한 길쯤 되는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세워 성취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라는 것은 용문 봉선사동에서 부분적으로 시도되어 ‘구역화엄경’ 권2에서 말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부분적으로 구현해 낸 적이 있다. 주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오존상(五尊像) 형태로 표현되어 문수와 보현 양대 보살이 보살을 대표하고 가섭과 아난 양대 제자가 10대 제자를 대표하여 좌우에 시립해 있다.
그리고 여러 털 구멍에서 나오는 화신운(化身雲)을 상징하듯 화불(化佛) 입상이 각 벽면의 감실마다 가득 새겨져 있다. 입구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 중 남북 양대 천왕이 한 쌍씩 문을 지키고 있으니 사천왕도 대표로 넷 중 둘만 표현한 것이다.
경덕왕은 불국사 조영을 계획하면서 이 용문 봉선사동의 조형기반이 된 화엄 정신을 가장 면밀하게 관찰해 오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화엄경’ 내용만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체 경전에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 일체의 불국세계를 종합적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 진정한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이는 바로 신라화엄종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종지에 따라 일체 불교를 융회하려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엄 불국토의 건설이라는 근본 원칙만 ‘화엄경’으로부터 취하고 구체적인 불국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각 경전에서 따다가 조화롭게 배치하는 설계를 하게 되었다. 정녕 ‘화엄경’에서 얘기하는 제망중중(帝網重重, 제석천의 보배구슬망은 서로 아름다움을 반사하여 아름다움을 몇 제곱으로 배가시킨다는 말)의 효과를 이루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틀어 하나의 화엄불국세계로 설정하고 일관된 기획 아래 그 조영을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갔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유사 권5 대성(大成)이 2세 부모에게 효를 하다’라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량리(牟梁里, 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넓어 성과 같으므로 그로 인해서 대성(大城)이라 이름지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지주인 복안(福安)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니 그 집에서는 소작논 몇 마지기로 의식을 해결하게 하였다.
어느 때 점개(漸開)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으로 시주를 권하러 왔다.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단월은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하여 지키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것이며 편안하고 즐거우며 수명이 길 것입니다’ 한다.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와 그 어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문에서 승려가 외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수 있다 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정녕 전생에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어서 이렇게 곤궁한 모양입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터이니 내가 소작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뒷날의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미도 좋다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나라의 대상(大相; 큰 재상)인 김문량(金文亮) 집에는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네 집에 태어난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모량리를 찾아가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고 그날 외침이 있던 것과 같은 때였다. 임신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손을 꼭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여는데 금간자(金簡子; 금으로 만든 조각판)가 있고 대성(大城)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대성이라 이름짓고 그 어머니를 맞이해다 집안에서 아이를 함께 기르게 하였다.
장성하고 나자 사냥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이렇게 따진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나도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를 청하니 귀신이 이렇게 말한다. ‘능히 나를 위해서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나니 땀으로 이불과 요가 모두 젖었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그 잡았던 곳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이 일로 인해서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 자비와 서원(誓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했다. 성대하게 상설(像說; 불보살상과 불사에 필요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또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으로 2세(世)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새기려고 큰 돌 하나를 쪼아서 감실 뚜껑을 만들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고 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조성(造成)을 마쳐놓고 돌아간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을 향령(香嶺)이라 한다. 그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에서 돌과 나무에 조각해 새긴 공이 동부 여러 사찰로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옛날 시골에서 전해오는 얘기책에 실린 것은 이와 같으나 절에 있는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덕왕대 대상(大相; 큰 재상)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751, 경덕왕 10년) 신묘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으나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大曆) 9년(774, 혜공왕 10년)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써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
처음에 유가(瑜伽) 대덕(大德)을 청해다가 마군(魔軍)을 항복받고 이 절에 머물게 했다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계속하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와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삼국유사’를 완성하던 때인 충렬왕 6년(1280) 전후한 시기에도 이미 불국사의 사적기(事蹟記)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향전(鄕傳)에 실린 고담(古談)을 채록하고 그 말미에 사중기(寺中記) 한 토막을 실은 다음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고 있다.
사중기(寺中記; 절에 있는 기록)가 얼마만큼 자세한 내용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향전에 실린 고담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일연이 오히려 향전의 고담 내용을 전면 채록하고 나서 그와 다른 내용만 한 토막 실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애당초 불국사의 사적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그 창건시말을 이런 고담 형태의 전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과 같은 경우 일연이 직접 종명을 읽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것은 현존한 종명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는 무언가 애매모호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중기’ 내용에서 대강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천보 10년(751)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으나 혜공왕(765~780년) 시대를 지나 대력 9년(774)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대력 9년이 혜공왕 시대 이후라고 착각하고 쓴 내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는 혜공왕 시대에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원성왕(元聖王, 785~798년)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원성왕릉인 (도판 2)이 바로 불국사 아래 토함산 산자락 끝에 있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분명히 밝혀 놓기를 꺼렸던 것은 바로 원성왕 자신이 성덕왕과 경덕왕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새 왕조나 다름없는 하대(下代) 왕조를 열어간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면 어째서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밝히려 하지 않았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계 기록 중 일부를 옮겨 보겠다.
‘삼국사기’ 권10 원성왕 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성왕이 서다. 휘(諱; 임금의 이름은 감추고 부르지 않는 것이므로 임금의 이름자는 휘라고 부른다)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朴)씨 계오(繼烏) 부인이고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神術) 각간의 따님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 반역하는 신하)이 발호(跋扈; 제멋대로 날뜀)하자 선덕왕(宣德王, 金良相)이 그때 상대등이 되어 임금 곁의 악인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었다. 경신도 이에 참여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으니 선덕왕이 즉위하자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자 군신들이 뒤이을 일을 의논하고 왕의 조카인 주원(周元)을 세우자고 했다.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밖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자리라는 것은 큰 자리라서 진실로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혹시 주원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 이에 뭇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여 세워서 자리를 잇게 하니 끝나고 나자 비가 그쳤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고조인 대아찬 법선(法宣)을 추봉(追封)하여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하고, 증조인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하며 조부인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興平)대왕으로 하고 부친인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明德)대왕으로 했다. 어머니 박씨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하고 아들인 인겸(仁謙)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 개성(開聖)대왕 2묘(廟)를 헐고 시조대왕(始祖大王, 내물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과 부친인 명덕대왕으로 5묘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는 이런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 최고위 재상)가 되고 (원성)왕이 각간이 되니 두 번째 재상 자리에 있었다. 꿈을 꾸니 복두(頭,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깨어나서 점을 치게 하니 이렇게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할 조짐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큰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왕이 듣고 몹시 걱정이 되어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고 나다니지 않음)하고 있는데 그때에 아찬 여삼(餘三; 어떤 본에는 餘山이라고도 함)이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한다. 왕이 병을 핑계 대고 나가지 않자 다시 청하기를 한 번 보기만 하자고 한다.
왕이 허락하자 아찬이 이렇게 말한다. ‘공이 꺼리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왕이 꿈을 점친 일을 모두 얘기하니 아찬이 일어나 절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길하고 상서로운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 임금자리)에 올라서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풀어드리겠습니다.’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풀기를 청하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사람이 윗자리에 없음이고 흰 갓을 쓴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며 열두 줄 가야금은 12손이 대를 물릴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중으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아찬이 이르기를 ‘북천(北川; 閼川의 다른 이름) 신(神)에 가 몰래 제사지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좇았더니 얼마 안 되어 선덕왕이 돌아가고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궁으로 맞이해 들이려 했다.
(주원의) 집이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자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上宰, 김주원)의 무리가 모두 와서 이에 붙좇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절하며 축하했다.
이가 원성대왕이다. 휘는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니 대개 꿈의 보응을 두텁게 받은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洲, 지금 강릉)로 물러나 살았고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자손을 불러다 벼슬을 주었다.(중략)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한 토함산의 석굴암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 崇福寺의 옛이름)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碑)가 있다.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다. 조부인 훈입(訓入) 잡간(干; 신라 관등 제3위)을 추봉하여 흥평(興平)대왕으로 삼고 증조인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神英)대왕으로 삼았으며 고조인 법선(法宣) 대아간(大阿干; 제5위)을 현성(玄聖)대왕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이로 보면 원성왕은, 경덕왕의 아들이며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립한 후에는 경덕왕은 물론 성덕왕의 사당까지 허물고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을 대신 세워 새 왕조의 개창을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 왕통과의 단절을 표방했으니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원성왕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사실을 공표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니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대성이 양대 부모를 위해 그 추복사찰로 지은 것처럼 선전하여 민간에 그 얘기가 퍼지도록 하고 창건시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인멸시켜간 듯하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지은 사실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왕릉 자리를 그 불국사가 바라다보이는 토함산 끝자락에 써서 불국사가 마치 자신의 원찰인 듯 착각하게 했다. 그 결과 신라불국토 사상을 표방하기 위해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낸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확한 창건 시말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 오늘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백인 백설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