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는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전공한 110명의 학자들에게 여야 국회의원들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생각되는 의원 3명과 가장 진보적으로 생각되는 의원 3명이 누구냐”는 설문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됐다.
보수성향 10위권 이내에 든 의원들을 소속당별로 보면 한나라당이 무려 7명으로 다수를 이뤘으며 자민련이 3명을 차지, 두 당의 보수색깔을 확인시켜 주었다. 보수 10위권에 든 민주당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민주당 내에도 보수색 짙은 의원들이 적잖이 포진해 있으나 의정활동 등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보수 1위에 꼽힌 김용갑의원은 11월14일 ‘민주당은 노동당 2중대’ 발언으로 국회파행을 빚는 등 보수색 짙은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스타일로 인해 ‘제일 보수’으로 평가된 것 같다. 김의원은 ‘노동당 2중대 발언’ 파문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29일 다시 국회 예결위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인지 북한지원을 위한 대통령인지 의심스럽다. 국민의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라기보다는 북한 김정일(金正日)을 위한 정부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퍼부었다.
김의원은 일찍부터 보수우익 세력의 선봉으로 각인될 일들을 자임해왔다. 15대 국회에서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국회의원 모임’ 대표를 맡았던 김의원은 안보와 관련된 성명서를 38차례나 냈고 김대중정부 들어서는 국회에서 햇볕정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선명한 비판을 해왔다.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한다’ 등을 포함, 안보 관련 서적도 4권이나 출판했다.
김 의원은 또한 88년 총무처장관 재직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대학과 노동계 쪽의 움직임(좌경화)에 맞선 우익 총궐기론’을 주장, 파문을 일으켰고 ‘중간평가를 통한 시국(좌익세력) 정면돌파론’을 제기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관직을 내던졌다. 밀양농잠고와 육사 17기 출신으로 국보위 시절 안기부 총무국장·기조실장을, 5·6공에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총무처장관 등을 지냈다.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경남 밀양에 입후보해 당선됐으며 지난 4·13총선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으로 재선의원이 됐다.
보수 3걸 김용갑·정형근·김종필
김의원에 이어 보수성향 의원으로 꼽힌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은 과거정권 때부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한 ‘색깔논쟁’의 실질적 주역으로 꼽혀온 데다 정권교체 이후에는 김대중정권에 대한 과감한 공격으로 ‘DJ저격수’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지난해 11월 “현정권의 덮어씌우기는 전형적인 빨치산 수법”이라고 발언, 파문을 빚은 뒤 16대 국회에 와서는 제1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 “폭로보다는 정책에 주력하겠다”며 한동안 대여공격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정기국회에서는 동방금고사건을 비롯한 각종 권력주변 비리의혹 사건과 관련, 다시 대여 공격수로 나섰다. 특히 정보위에서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의 대북접촉을 강력 비판하는 등 현 정부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적극 파고들었다.
‘원조 보수’를 자처해온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는 DJP공동정권 참여 이후 보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짙은 보수’로 분류됐다. DJP공조의 끈을 아직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김 명예총재지만 최근 정부의 저자세 대북접근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의식, 전통적 보수세력의 시각을 대변하고 나설 움직임이다.
김명예총재가 11월9일 국회에서 열린 ‘남북 교류협력 지원 특례법’ 제정 공청회에 참석한 것도 이와 같은 태도 표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대북 지원사업이 국회 동의를 받게 하자는 법안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한 것 자체를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묵시적 ‘항의’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명예총재는 특히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흉상 훼손사건과 관련해서도 정부쪽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명예총재와 자민련의 보수목소리는 이념과 노선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부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당내 일부 소장파 의원들의 다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왔다는 점에서 역시 보수색 짙은 인물로 평가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총재는 12월1일 당사를 찾은 시민단체 관계자들로부터 국가보안법 개폐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총재는 “남북관계의 ‘이중성’이라는 구도가 남아 있는 한 명칭이야 어떻든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면서 “이와 같은 견해를 수구적-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북문제에 관한 대안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시달려온 이총재지만 최근 대북접촉 과정에서 불거진 정부의 저자세 문제 등에 대해 국내여론이 좋지 않은데 힘입어 보수적 주장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학자들이 진보적 국회의원으로 꼽은 의원들 가운데는 재야 또는 운동권출신이 대부분이다. 1위를 차지한 민주당의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을 비롯, 2위에 꼽힌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부총재가 모두 과거 재야세력의 간판이었던 데다가 3위에 랭크된 한나라당 김문수(金文洙)의원은 과거 대표적 노동운동가였다. 4위에는 독립운동가의 장남인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의원이 전대협의장 출신인 민주당 임종석(任鍾晳)의원과 나란히 거명됐다.
이밖에 6위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민주당 김민석(金民錫)의원, 7위에는 전국연합상임의장을 지낸 민주당 이창복(李昌馥)의원, 8위에는 민주화운동에 깊이 간여했던 성공회대총장 출신의 민주당 이재정(李在禎)의원이 거명됐다. 이 밖에 9위에는 역시 재야출신으로 교육부장관과 정책위의장 등 김대중정부 들어 요직을 맡아온 민주당 이해찬(李海瓚)의원이 거명됐고 10위에는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김홍신(金洪信)의원과 민주당 정범구(鄭範九)의원이 꼽혔다. 정당별로는 민주당이 7명으로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고, 한나라당이 3명을 차지했으며, 자민련은 한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3걸, 김근태·이부영·김문수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가장 진보적 국회의원에 꼽힌 것은 김최고위원이 같은 재야운동가 출신 중에서도 ‘김근태고문사건’으로 상징되는 가장 엄혹한 시련을 겪어가면서 독재와 냉전주의에 일관되게 맞서왔다는 점 때문으로 분석된다. 15대 국회 때 원내에 첫 진출한 김최고위원은 길지 않은 기간 제도권에 속했지만 당내 재야출신의 리더격으로 자리잡은 데 이어 차기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설 뜻을 천명(신동아 2000년 12월호 인터뷰)해 놓은 상태다.
김의원은 자신에 대해 ‘민주주의자’ 이외에 ‘진보적’이라는 이념적 수식어가 붙는 것을 사실 은근히 경계해왔다. ‘진보’의 라벨은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한국의 사회구조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김최고위원의 이미지를 특정 이념에 묶어둠으로써 국민적 지지기반을 확대시키는 데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때문에 김최고위원은 앞으로 ‘진보적’ 측면보다는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심어나가는 데 정치활동의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보수성이 강한 한나라당에서 이부영부총재가 가장 ‘진보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부총재가 재야민주화운동 시절은 물론 제도정치권에 들어와서도 경직된 보수적 대북관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 의견을 밝히는 등 ‘소신’을 보여온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부총재는 김용갑 의원의 ‘민주당은 노동당 2중대’ 발언 파문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김의원의 시각을 ‘보수’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에 기초한 ‘수구’라고 비판하고, 이념문제에 대한 당의 분명한 입장정립을 촉구했다. 당내 진보세력의 좌장격인 이부총재는 “김의원 같은 발언이 DJ정권에 반감이 깊은 영남정서를 단합시킬지는 모르지만 이런 수구적·냉전적 사고로는 전국정당화가 어렵고 2002년 대선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부총재의 ‘탈냉전 노선’은 특히 이회창총재가 남북관계의 급변 속에서도 고수하고 있는 보수적 대북노선에 대한 정면비판으로 발전할 소지를 갖고 있다. 게다가 이총재의 당운영방식을 두고 ‘1인지배 정당’ ‘사당(私黨)화’라는 당내 일각의 비판에 공감하고 있는 이부총재는 경우에 따라 이총재와 심각한 노선갈등을 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진보 4순위에 랭크된 같은 당의 김원웅의원 역시 이부총재와 같은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11월14일 김용갑의원의 ‘노동당 2중대’ 발언 직후 이부영(李富榮) 부총재를 비롯, 김원웅(金元雄) 김홍신(金洪信) 의원 등 진보성향의 의원들은 이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강한 톤으로 비난했다. 이들은 또 15일 오전엔 손학규(孫鶴圭) 임태희(任太熙) 서상섭(徐相燮) 정병국(鄭柄國) 의원 등을 규합, 모두 9명이 국회에서 별도 소모임을 가진 바 있다.
이 모임을 주도한 김원웅 의원은 “냉전논리와 지역주의의 결합은 경계해야 한다”면서 “통일은 DJ를 뛰어넘어 민족적 과제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의원 등은 앞으로 당지도부에 이 문제를 건의하고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져갈 태세다. 이들의 움직임은 김영춘(金榮春) 의원 등 당내 386세대 의원들의 ‘전향적’ 시각과도 맥이 닿아 있어서 앞으로 남북관계와 관련된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당내에 간단찮은 이념적 내홍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다.
11월 27일에는 김원웅(金元雄) 김홍신(金洪信) 안영근(安泳根) 서상섭(徐相燮)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 4명이 ‘국가보안법폐지 반대’ 당론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의원들과 공동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 소속당 의원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