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의 전부는 사람이며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정책은 바위를 깨뜨려 모래알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정부나 사용자가 수용해야 하는 당면과제로서 이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정부는 노동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노동자는 책임감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결속의 토양에서 풍요롭고 넉넉한 거목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IMF 이후 100만 명이 넘는 실직자가 생겨났다. 경기회복으로 그 수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75만 명의 실직자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려 50만 명이 건설노동자라는 사실을 통해 건설산업의 몰락과 더불어 건설노동자의 삶도 고난의 질곡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건설산업은 현장 중심의 노동집약적 생산활동을 전제로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의 3자 관계가 다단계, 다기능화되어 있다. 시공 분야도 원도급과 하도급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설비투자, 상시고용과 같은 요소는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제조업에 비해 소규모 자본으로 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위험부담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축적이 불충분했던 우리나라에서 풍부한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손쉽게 발달할 수 있는 분야였다. 특히 건설산업은 타 산업에 비해 생산, 고용, 부가가치 효과가 크기 때문에 국민경제 성장을 주도해왔다.
우리나라의 건설업은 광복 직후엔 주한미군 발주공사 위주의 가설, 수리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공사대금을 순조롭게 지불하면서 발주물량이 폭주했고 황금기를 구가하게 됐다. 그러나 1946년 말부터 부실공사의 범람과 업체의 난립으로 조금씩 쇠퇴해 독립산업으로서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1958년 정부는 난립한 건설업체를 정비하고 도급한도제 도입과 건설업 면허를 제도화하기 위해 건설업법을 제정했다. 1961년엔 건설부가 신설돼 1400개에 이르던 건설업체를 524개로 정비했다.
호황 누리던 건설산업
정비기를 거친 건설업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민경제에 주축으로 등장했다.
건설산업은 70년대 후반 주택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이른바 황금어장이라 불릴 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주택 보급률이 높아진 지금에야 환경이나 지리적 여건, 학군 등을 따져 집을 구입하지만, 그 때만 해도 투기바람이 불어 거의 모든 사람이 주택구입을 재산증식 수단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짓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만 하면 몰려드는 인파로 분양사무실은 초만원을 이루고 웃돈까지 퍼붓는 그야말로 호황기였다.
나는 1982년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그때만 해도 건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마치 지금 젊은이들이 벤처기업에 몰리는 것처럼 그때는 건설이 인기 직종이었다.
건설회사 사장은 현장을 순회할 때마다 직원들에게 회식비를 주었다. 회식비는 기분에 따라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다. 어떤 날은 액수가 너무 커서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많은 돈을 준 적도 있다.
서울 강남이 개발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강남은 명동 못지않은 상권으로 등장했다. 호화 술집들이 생겨나고 고급백화점들이 들어섰다. 내 눈에 강남은 돈을 쓰기 위한 거리로 보였다.
그때만 해도 강남의 술집에 가서 건설회사 명함만 주면 외상 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집에서 인기 있는 고객이었다.
해외로 진출한 건설회사
건설현장이 개설되면 제일 먼저 찾아 오는 사람들이 술집 홍보자들이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국내 건설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해외로 진출한 건설사도 많아졌다. 초기에는 중동지역에 집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한국의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해외현장으로 발령 나면 국내 임금의 두 배를 주었다. 그래도 해외로 가려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서로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번씩 다녀와야 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끝까지 해외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회사로 옮겼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둬도 갈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이야 국내든 해외든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이 행운으로 생각되지만 그때만 해도 돈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것 같다.
어쩌다 해외로 발령이 나면 마치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편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한눈 판 부인들도 있고, 어린 아이들이 제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니 해외로 가려는 사람들이 적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IMF 이후 건설노동자들이 앞다퉈 해외로 나가려 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자 많은 기업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1000여 개에 달하던 건설사는 7300여 개로 늘어났다. 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Paper Company’가 많았다. 즉 회사는 서류로만 존재하고 실제로 공사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업체들이다.
그들은 공사를 수주하지만 직접 시공하지 않고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이윤을 챙겼다. 당시엔 인맥과 로비를 통해 쉽게 공사를 따낼 수 있었으니 건설회사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나 건설 관련 관공서에 있던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이런 방식으로 공사를 수주했다. 어떤 회사는 하청업체 대부분이 친척이나 친구들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들이 건설업에 뛰어든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시일에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자체공사를 소화하며 비자금 조성이 용이하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건설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야 아파트만 지으면 팔렸으니 ‘흙파서 돈버는’ 사업이었던 셈이다.
또한 자신들의 건물이나 공장을 다른 건설회사에 맡기는 것보다 직접 시공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경영측면에서도 필요했다.
한국 경제는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의 부작용으로 ‘부패-사고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고려대학교 장하성 교수는 “경제발전의 기본 틀이 계획경제였으므로 정부의 인허가권, 금융자원 배분권, 규제 등은 자연스럽게 ‘정경유착 부패’의 연결고리를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부정축재의 효시는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일어난 ‘중석불 사건’이다. 60년대 들어서는 삼성그룹 산하의 한국비료 공장 건설과정에 삼성 임원들이 공모해 시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가장해 밀수한 사건이다. 82년 발생한 장영자-이철희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최대의 금융사기 경제사건이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수서지구 택지개발 비리사건이 터졌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적극적 개입(과잉규제) 결과로 정경유착 구조가 발생했다면, 90년대 들어서는 정부가 합리적 규제를 외면해 정경유착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부패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건설은 대표적인 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건설업은 타 산업에 비해 비자금을 쉽게 만들 수 있다. 한때 건설업의 선두주자로 명성이 높았던 한양의 배종렬 회장은 비자금 조성문제로 경영에서 물러났고 최근 워크아웃된 동아건설의 고병우 회장 역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만큼 건설업의 비자금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사계약, 원자재 구입, 노임대장 조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조성된 비자금은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고 관공서에도 뿌려진다. 결국 건설업체와 정치권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건설을 모기업으로 하는 대기업이 많다. 한때 대한민국 최대 기업이었던 현대그룹 역시 건설에서 시작해 굴지의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현금 유동성 문제가 악화돼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위축됐지만 현대건설은 분명 거대 공룡 현대를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우성건설은 우성주택이라는 상호로 주택사업을 시작해서 재벌순위 27위까지 오르는 고속성장을 해왔다. 10여 명으로 시작한 우성건설은 이른바 강남개발과 함께 호황을 누려 1995년 부도가 날 때까지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우성건설 노동조합위원장을 지냈다. 그때만 해도 우성건설은 우량기업으로 인정받았고 주택사업에서도 명성이 높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경영진은 자신들이 땅을 잘 샀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기업의 발전이 어떻게 한 사람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겠는가? 그 안에는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당시의 경영진은 건설회사가 망한 것은 높은 건물들을 지어서 하늘의 기운을 건드렸고 하늘이 노(怒)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또한 궁색한 변명이다. 어찌 한 기업의 운명이 하늘의 기운에만 달렸겠는가?
새벽을 여는 건설노동자
건설현장은 보통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저녁 7시에 끝난다. 7시에 일을 시작하려면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한다. 그래서 건설노동자들을 ‘별 보는 사나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노동조합위원장으로 있던 1992년 경영혁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적이 있다. 건설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기업을 인수하던 때였다. 이런 계열사 늘리기는 모기업인 건설의 재무구조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기업발전에 원동력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마저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면 망한다는 경영진의 논리는 구성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파업을 끝냈고 우성건설은 사주의 뜻대로 많은 기업을 인수하고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러니 재무구조가 좋아질 리 없었다. 1995년 1월 부도가 났고 지난 11월3일 정부의 퇴출발표 명단에 포함되어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1300명에 달했던 동료들은 300명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까지 우성을 살려보겠다고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오던 노동자들의 노력도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우리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임금 인상은커녕 반납해오면서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5~6개월 동안 임금이 체불되면 가정경제가 파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금이 3년 넘게 체불되면서 직원들은 빚더미에 앉았다. 적금을 깨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보험을 해약하는가 하면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번갈아 메워가는 식으로 살아왔다. 이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더 열심히 일했던 것은 동료들을 떠나보낼 때 반드시 회사를 살려 함께 일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생활이지만 가끔씩 들러 고생한다고 위로하던 옛 동료들 앞에서 할 말이 없다며 눈물만 흘리던 동료들은 이제 그들과 함께하는 꿈 대신 차가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건설업, 그리고 그 중심에서 묵묵히 일해온 건설노동자들, 열악한 근로조건에서도 열사의 나라, 산간 오지를 마다지 않고 일하던 그 주역들이 이제는 실직노동자로 길거리에 나앉아 있다.
지방현장으로 발령나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월말부부로 지내왔다. 주당 70시간의 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망가졌지만 국가발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들은 버려진 빈 몸뚱이만 남은 채 쓸쓸히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비자금을 조성해 자신의 안위에만 매몰되어 있던 부도덕한 기업주를 퇴진시키고 건강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한양의 노동자들은 공기업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퇴출되었다.
현대그룹의 일등공신이었던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은 지난 98년 1차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은 현대건설에 입사해서 오늘의 재벌 현대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열사의 땅에서 한국인의 우수한 기술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아왔다. 또한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찻길도 없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산간오지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왔다. 재무구조가 우수하고 흑자 사업을 해왔는데도 중장비사업이 하양세라는 이유로 퇴출되었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현대건설에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투쟁을 450일 동안 벌였지만 현대는 결국 그들의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고용승계를 요구하던 노동자들은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숨져간 노동자도 있다. 살아남은 노동자들도 거의 병원신세를 져야 할 만큼 쇠약해졌다. 몸사리지 않고 일만 해온 그들에게 퇴출은 사형선고나 같았다. 청춘을 바친 일터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된 노동자들의 아픔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작업화를 신고 공사현장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들과 함께하던 정주영 회장이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던 중장비 노동자들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경찰 포위망을 피해 서울 조계사 한켠에서 불을 피우며 추위를 달래던 그들,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던 그들을 담은 드라마는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인권영화제에서 인권상을 받았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한 편의 영화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오늘날 건설산업이 퇴조의 길로 들어선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황금어장으로 불릴 만큼 호황을 누리던 건설산업이 천덕꾸러기가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방만한 경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고 경쟁력을 키우기보다는 기업을 확장하는 데만 신경을 써왔던 것이다. 경기 좋을 때 기술투자를 하라는 교훈을 잊은 채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늘리고 마구잡이로 신규 사업에 투자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정부의 정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주택정책의 기본 틀이 되는 주택공급규칙이 78년 이후 20여 차례나 바뀐 것만 봐도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갈팡질팡해왔는지 알 수 있다.
노태우 정권의 200만호 주택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을 강행할 경우 우리나라의 한정된 자원으로 미루어 결국 자재난, 인력난, 자금난, 인건비 및 자재값이 오를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결국 신도시 개발 사업과 함께 건설회사들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자재난, 인력난을 겪으면서 임금과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다. 업체의 증가는 과당경쟁을 일으켰고, 저가 낙찰이 성행하면서 기업의 부실과 부패가 심각해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특히 경제부문만큼 조화가 요구되는 것도 없을진대 공약의 과욕에서 이 모든 문제가 비롯됐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신도시 개발은 농사를 짓던 사람들까지 공사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문제점을 낳았다. 힘들게 농사 짓는 것보다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 오기 때문에 농사를 그만두겠다는 농민이 많아졌다.
자재구입도 점점 어려워졌다. 레미콘의 경우 한 차 들어올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이른바 ‘떡값’이라는 것을 주었다. 양이 적거나 부실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불량자재 문제로 일부 골조가 철거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얼마 전에 만난 모 자재생산업체 직원은 “신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 영업직원 결혼식장에 건설회사 자재과장이 식당에 와서 음식을 나르는 일도 있었는데…” 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신도시 개발이 끝나자 주택시장은 예전 같지 않았고 정부의 주택가격 연동제와 소형주택 의무 시공은 주택에 의존하던 많은 기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부도가 난 대부분의 건설회사 중에는 주택사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기업들이 많다. 주택경기의 침체는 이들을 순식간에 위기에 빠뜨렸다. 현재 7300여 개의 건설업체 중 부도가 났거나 파산한 기업은 무려 1000여 개에 이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살아남은 업체의 사정도 여의치 않다는 사실. 이대로 가면 또 한 차례 대규모 부도사태가 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둘째는 기술투자에 소홀했다는 점이다. 국민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주택에 대한 질적 선호도가 점차 높아졌다. 집만 지으면 팔리던 시절에서 시공회사, 공사자재, 내부구조에 이르기까지 주택에 대한 질적 선호도가 바뀌면서 기술개발을 하지 않은 기업들은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이들은 공사수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건설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도산 위기에 내몰리는 것은 방만한 기업확장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건설업의 경영방식은 제조업과 다르다. 건설업은 수주사업과 자체사업으로 구분되는데 수주사업의 경우 과당경쟁과 담합으로 인해 수주가 힘들어지고 자체사업 또한 풍부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 서울의 경우 이젠 아파트를 지을 땅이 없어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가장 큰 주택시장인데 이 역시 업체의 경쟁으로 재력이 없는 기업은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다.
최근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기업가들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열심히 일만 해온 노동자들은 끼니를 거르고 자식들을 친척집이나 고아원에 맡겨 생이별을 하는가 하면 노숙자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우성주택으로 시작한 우성그룹은 계열사에 총 8000여억 원을 투입했다. 이 자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모두가 건설에서 벌어들인 돈이다. 호황을 누리던 시절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무분별한 기업확장에만 매달린 기업가 때문에 노동자들만 희생되어 이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것이다.
퇴출된 기업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은 회사 바깥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채용을 기피하는가 하면 죄인처럼 취급하는 기업도 있다. 기업이 도산하는 것이 어디 노동자의 문제인가? 노동자들이 일을 안 하고 놀기만 해서 망했단 말인가?
이미 길거리로 내몰린 50만 명의 노동자, 계속되는 퇴출로 더 늘어날 노동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진념 재경부 장관은 실업자가 늘어나더라도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고 말했다.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한 우리나라에서 실직자에 대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구조조정만 강행하는 것은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부는 왜 그것을 모르는가? 현재의 구조조정 정책은 ‘소탐대실’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건설업이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건설산업 활성화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광복 이후 우리의 건설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수출 증대와 산업구조 고도화를 뒷받침하는 기간산업이었다.
80년대 이후에는 국민소득 증가에 따른 민간 부문의 건축수요 급증과 수요의 고급화, 다양화로 업체의 전략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한편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1930년대 초 세계경제는 사상 유례없는 대공황을 경험하면서 그 이전까지 세계경제학계를 풍미하던 “공급이 스스로 수용을 창조한다”는 세이의 법칙은 한계를 드러냈다. 대공황의 암울한 현상을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라 분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적자재정을 통한 적극적인 유효수요 부양책을 역설한 케인스의 경제이론이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거시경제학이 세계 경제이론에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총수요조정을 위한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조세율 조정, 통화량 조절, 정부지출 정책 등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경기침체 국면에서는 정부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책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정부지출 확대의 가장 구체적인 투자대상은 건설부문이다. 1930년대 대불황을 건설산업을 통해 극복한 미국의 예에서 그 효과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정부는 사랑을 베풀어야
대부분의 산업이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지만 건설산업은 IMF 이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99년 SOC(사회간접자본) 투자는 GDP대비 2.9%에 불과하고 IBRD 권고치인 5%에도 훨씬 못미쳐 국가경쟁력의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SOC의 중요성을 감안, 투자를 20% 이상 늘여왔음에도 불구하고 98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물류비는 미국 10.7%, 일본 9.5%에 비해 우리나라는 16.5%에 달한다. 결국 SOC 예산을 줄이는 것은 국가경쟁력 감소와 모든 산업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건설에 대한 투자로 고용증대 효과와 경제적 기능을 감안하여 SOC 투자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
건설산업은 한때 GDP 23%에 달할 만큼 중심산업으로 자리잡아 왔다. IMF 이후 경기가 침체된 지금에도 건설산업은 GDP 13%에 이를 만큼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고용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산업이므로 건설산업에 대한 활성화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물론 어느 정책이든 완벽한 것은 있을 수 없어 정(正)의 측면이 있으면 부(負)의 측면도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되도록 이면 부(負)의 측면을 최소화하면서 정(正)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운영이다.
노동자들이 일터를 떠나고 있다. 아니 사회가 그들을 버리고 있다.
화가들이 가장 그리기 힘든 그림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한다. 잘난 부분을 그리려면 쑥스럽고, 못난 부분을 그리려면 곧이곧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심정이 꼭 그렇다.
개봉관을 떠나 삼류극장을 전전하다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한물간 낡은 필름처럼 차가운 길거리로 내팽개쳐진 그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새로운 각오와 분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얼어붙은 이 사회에서….
돌이켜보자. 그들이 흘린 땀의 흔적은 없었는가 돌이켜보자. 그들의 정열이 남긴 발자취는 없는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과 고통의 무게를 감내하고 다시 일어나 힘차게 뛰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비쳐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언제 삶을 자기 의지로 열어가면서 자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월급쟁이, 먹고 살려니 일한다는 낮춤말로만 자기를 표현하고 회사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이라는 그 헛된 말놀음에 밀려 이름마저 숨긴 채 지나온 안쓰러운 삶 아니던가? 또 그것이 부끄러워 감추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그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와 버르적거리면서 굳세게 선 모습이 바로 역사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기업의 전부는 사람이며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정책은 바위를 깨뜨려 모래알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정부나 사용자가 수용해야 하는 당면과제로서 이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는 노동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노동자는 책임감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결속의 토양에서 풍요롭고 넉넉한 거목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은 마치 물에 올려 놓은 물방개처럼 이 구석 저 구석 빙빙 돌며 거리를 배회하며 추운 겨울을 고단하게 이겨내고 있다.
오늘도 그들은 향기로운 노동의 땀내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