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년 말 국회에서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 개정안 파문을 결정적인 고비로 YS 정권은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97년 초 한보사태가 온 나라를 뒤흔들자 김영삼 대통령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구속하도록 지시하는데…. 그 시절 YS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광일 대통령 비서실장, 서진영 정책기획위원장이 털어놓는 문민 비화 2탄.이 연재는 고려대학교 정경학부의 ‘대통령학’ 수업에서 이뤄진 ‘김영삼정부 심포지엄’에서 녹취한 내용을 같은 대학 대통령학 연구실(실장·함성득 교수)의 협조하에 발췌·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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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92년 대선에서 문민정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 민주화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는 숙명적으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적 소명을 받은 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오래 모셨고 민주화 투쟁과정에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보좌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 얘기하면 여러분은 ‘저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모시고 높은 자리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시대적 과제와 역사적 소명을 나름대로 고민해가면서 추진하려고 애썼고, 그러면서 어려움도 많이 당했기 때문에, 93년 2월25일 출범한 김영삼 문민정부는 역사의 필연이고, 국민의 소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제 말씀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 투쟁사와 헌정사의 큰 흐름에 편승해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한 분이 아니라 그 흐름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몫을 한 분입니다. 김영삼과 의회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과거 30년간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부문에 군사문화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든지 청산해야만 우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문민정부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앞서 강의한 분들이 이 얘기는 많이 했을 거라고 봅니다.
첫째가 청와대 앞길 개방, 인왕산 개방, 안가 철수였습니다. 새 대통령이 들어섰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때 분위기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안가를 철거했다는 사실인데, 이건 작은 의미로는 대통령이 술먹고 여자들 데리고 노는 곳으로 볼 수 있지만, 원래는 대통령이 돈 받던 곳입니다. 그래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시작했다, 그렇게 봐도 됩니다. 대통령 취임하면서 ‘지금부터 돈을 한 푼도 안 받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설마하면서 농담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오랫동안 YS를 모시던 사람들은 ‘저 양반은 한번 꺼낸 말은 하늘이 무너져도 꼭 지키는 분’이라는 걸 압니다.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원리원칙대로 깨끗한 돈을 써야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돈 받는 관행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돈을 안 주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따르지 않아요. 국정운영이라는 게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센티브를 줘야 하는데, 그것을 다 포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솔직히 말해서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공직자 재산등록과 금융실명제
그 다음으로 시행한 게 공직자 재산등록 공개입니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제가 민자당 부대변인으로 있었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정말로 실명제를 하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할 거냐”고 물어요. 나는 “하실 거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기자가 말하기를, 재무부에서 국장쯤 되면 통장이 70∼80개쯤 있대요. 우리는 통장 없이 살았거든요. 야당 하면서 돈이 없으니까 통장이 없고, 누가 주면 주머니에 넣고 쓰다가 떨어지면 또 얻어쓰고,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통장이 70∼80개라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 같은 돈인데 이 통장 저 통장에 넣어놓는다고 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70~80개 되느냐”고 했더니 “하여간 정부에 들어가보면 이해가 갈 겁니다” 그러더라고. 그 기자 말은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금융실명제를 하고 재산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른이 꼭 하실 거다” 그렇게 말했어요.
과연 하시더라고요. 재산등록 공개를 해보니까 나처럼 돈없는 사람도 굉장히 불편하더라고요. 거기다 보완조치로 부동산 실명제까지 해놓으니까 정말로 큰돈을 뇌물로 먹기는 불가능하고, 뇌물을 먹어도 그 돈을 자기 재산으로 만들기는 더욱 불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재주좋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처럼 돈에 관해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참 어렵더라고요.
제가 공보처차관 하다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가게 됐어요. 청와대에서 가까운 데에서 살아야 하니까 화곡동 집은 그대로 두고 청와대 주변에 전세를 얻었어요. 공보처 차관으로 등록할 때 아파트 값을 2억5000만원으로 신고했더니 총무처 직원이 와서 말하기를, 장·차관들은 모두 국세청 가격으로 냈는데 나만 실제 가격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국세청 가격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바꿨어요. 그러니까 1억2000만원이더라고요.
그 뒤 청와대 주변으로 이사한 뒤에 그 집을 2억500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재산 변경등록을 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1억3000만원이 늘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집을 국세청 가격으로 신고한 것과 매매가격으로 신고한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나더라고요. 공직자 재산등록이 그만큼 불편한 겁니다. 아무튼 공직자 재산등록과 금융실명제는 소위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 게 사실입니다.
금융실명제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겠는데, 금융실명제라는 게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해서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고, 부정부패를 막고, 과세를 공정하게 한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시장에서 한 평, 반 평짜리 가게 하는 분들의 저항이 엄청났습니다. 그분들은 과세특례자로서 부가가치세도 잘 안내고 세금도 잘 안 내다가 이제부턴 세금을 내게 생겼단 말이에요. 이렇게 있는 사람, 재벌이 아니라 서민으로부터 저항이 오더라고요.
우리가 처음 개혁을 시작할 때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서 당신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응답자의 90%가 세금을 더 내겠다고 했습니다. ‘개혁을 하면 당신이 가진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내놔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90%가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의 효과가 자기들에게 오니까 개혁은 고통을 주는 것, 자기네 기득권과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이 된 겁니다.
군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
다음은 군의 사조직 척결입니다. 저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어요. 정치를 하면 적이 더 많습니다. 투표를 해봐도 절반 이상이 반대하거나 무관심합니다. 인구 20만명인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3만6000표 정도 받으면 됩니다. 인구 20만명에서 유권자는 한 15만∼16만명 되고, 그중 투표하는 사람은 60% 정도, 약 9만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유효 투표의 40% 정도를 받으면 압도적으로 당선됩니다. 그래서 3만6000표 정도면 압도적인 당선이에요. 선거구민 입장에서 보면 20만명 중 15%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나머지는 국회의원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치 하는 사람들은 욕먹게 돼 있어요.
반면에 군은 모든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군이 너무 강력하면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 박정희 쿠데타가 용납되고, 전두환 쿠데타가 용납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군부에서도 하나회에 속한 사람들은 동기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나눠먹고 그랬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어떤 정치학과 교수는 “김영삼 대통령도 결국 군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국방장관이라는 사람이 25일 취임식 전에 “한국군은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 인터뷰 속에는 “김영삼 정부도 결국 군과 협력해서 나라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위협이라고요. 그들은 그걸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군의 힘이 컸으니까.
김대통령께서 이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척결하겠다고 결심하신 모양이에요. 노태우 대통령 당시 참모총장이 경남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모두 갈았습니다. 앞서 강의에 나온 분 중에 “별이 모자라서 일단 남의 것을 빼서 줬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건 군이 군답게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군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다시는 군이 쿠데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책을 마련한 대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취임 당시에 두 세력 때문에 김대통령도 결국 이전 대통령들과 똑같아질 거다라고들 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재벌입니다. 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옛날 선거 치를 때 신세지고…. 당시 언론들은 “3개월 안에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이 무너질 것이고, 그 다음 6개월 안에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재벌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게 당시 좀 잘났다는 사람들이 하던 얘기였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도 처음부터 노태우 대통령을 형사 처벌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신 것 같아요. 집권 초기에 “역사에 의해서 심판받아야지 법에 의해서 심판받을 사안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복권시켜놓고, 광주문제와 관련해서 청문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숨겨놓은 엄청난 비자금이 발견됐을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고 봅니다. 저도 정무수석으로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는데, 여러분 선배인 박계동 의원이 폭로해서 신문에 나오고 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UN에 가 계셨는데,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저는 그것이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정권이 정경유착을 통해서 만든 검은 돈을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바로 세우기는 김영삼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라기보다는 역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시킨 소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이 개혁을 하면 표를 잃게 됩니다. 미국의 어떤 대통령 학자가 “개혁은 탈유권자 정책”이라고 했습니다. 인기와는 담을 쌓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개혁을 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개혁은 한 정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5년 단임제하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개혁의 대상과 과제 때문에 청와대 수석들 간에도 상당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들은 김대통령 같은 개혁지상주의자가 집권했을 때 어떻게든 모든 분야의 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저희처럼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개혁의 효과가 20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고 30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김대통령 임기 중에는 금융실명제라든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제도화라든지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로 끝내야 된다. 나머지는 다음 정권이 이어받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현실주의자 내지는 개혁 반대자가 되고, 그분들만 개혁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반드시 그랬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랬습니다. 그만큼 개혁은 힘들다는 겁니다.
이제 문민정부의 정치개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문민정부가 깨끗한 정치를 제도화했다고 자부합니다. 1994년 4월3일 통합선거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통합선거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전에는 선거법이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 선거 등 따로따로 있었어요. 선거에 따라서 적용되는 법이 다 달랐습니다. 그리고 선거 날짜가 법률로 정해지지 않아서 선거 날짜를 점쟁이한테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거 날짜를 법제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선거운동 방식입니다. 당시 야당 총재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말은 풀고 돈은 묶자, 정부도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선거운동은 많이 할 수 있게 하고 돈은 못 쓰게 하자, 그래서 포괄적 금지규정을 없앴습니다. 포괄적 금지규정이란 무엇무엇은 해도 된다, 대신 여기 열거되지 않은 것은 못 한다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금지되는 사항을 열거하고서 나머지는 다 된다, 이렇게 했던 거예요.
그 전에는 전국구를 의석비율로 했는데 이걸 득표 비율로 바꿨습니다. 선거비용을 실사했습니다. 후원회 제도를 확대하고 국고 보조금도 만들어서 선거비용을 실사했는데, 과거에는 형식적으로 신고한 대로 그냥 다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선거비용 공개를 의무화하고, 또 선관위에서 실사를 했습니다. 물론 인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 한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사람들에 대해서 검찰에서 판단해서 기소하지 않을 경우에 선관위나 당사자가 제정신청을 하면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서 재판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후보자 한 사람만 위반했을 때에 선거가 무효가 되거나 당선이 무효가 됐는데, 이제는 후보뿐만 아니라 사무장, 배우자, 친척까지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으면 당선이 무효로 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으로 까다롭고 엄격한 법이었습니다. 당시 김대통령도 “선거법을 영국식으로 엄격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선거법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만들어도 국회의원들이 결국 자기들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만들어놓기 때문에 원래 의도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운 선거법이 됐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엄격한 선거법이 됐습니다.
둘째, 정치자금법의 제정입니다. 후원회 재정을 대폭 확대하고, 국고보조금을 늘렸습니다. 유권자 1인당 600원이던 것을 800원으로 늘렸고, 야당이 집요하게 요구하던 쿠폰제 헌금을 수용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야당에 정치자금을 잘못 줬다가 혼날까 봐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줬는지 모르게 쿠폰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여당이 수용했습니다. 제도를 그렇게 만든다고 정치자금이 골고루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야당 사정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한나라당이 평상시에 국고보조금을 백몇십억원씩, 심지어 민국당도 20억원씩 받아가서 그것만으로 당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선거운동원은 과거보다 10분의 1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예전으로 환원돼 선거운동원이 과거보다 오히려 많아진 것 같습니다.
공정한 선거관리 자부한다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입니다. 지방자치제 기본법은 노태우 대통령 때 만들어졌는데 실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걸 김영삼 정부가 전면 실시했습니다. 사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 정부 여당의 기득권을 상당 부분 내놓는 겁니다. 시장 군수 모두 임명하면 될 걸 선거로 뽑으니까 정부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어요. 전라도는 어느 당, 경상도는 어느 당, 충청도는 어느 당, 이렇게 나눠먹게 돼 있다고요.
그런데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국가공동체를 운영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전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했습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결과 지방재정이 무너지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지만, 그런 부작용은 고치면 되는 겁니다. 그때 기본 제도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못 했을지 모릅니다. 실질적으로 중앙 업무가 93, 94년 사이에 464건이 지방으로 이양됐고, 95년에는 137개 사무가 이양됐고, 지자체에 근무하는 공무원 1만1000여 명이 지방공무원으로 전환됐습니다.
그 다음에, 집권당이 솔선수범해서 선거 풍토를 바꾸려고 노력한 것도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선거라면 죄다 부정선거이고, 여당이 관권선거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선거문화를 바로잡겠다는 대통령 의지가 대단했어요. 부정선거는 관권이 개입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돈을 뿌리는 금권 선거, 대체로 이 두 형태입니다.
그런데 94년 8월에 3개 지역에서 보선이 있었습니다. 대구 수성 갑구에서 박철언씨가 형사사건으로 의원직을 잃고 부인이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경주에서 이상구씨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강원도 영월에서 김기수씨가 출마했는데, 3개 보선에 두 지역에서 여당이 지고 한 지역에서 겨우 당선됐습니다. 당시 제가 정무수석이라고 해서 당으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습니다.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에 본부를 옮겨놓았는데, 우리는 중앙당 지원을 제대로 못하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의지가 원체 강했으니까. 저도 물론 선거에서 이기고 싶었지요. 지원하면 이길 것 같은데 당에다가는 지원하지 못하게 하니까, 당시 당에서는 ‘이원종 저 놈 빼야 된다.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아무튼 우리가 참패했지만, 당시 언론이나 민주당 대변인마저 공명선거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고 했어요. 통합선거법이나 후원회, 쿠폰제 도입했을 때에도 야당 대변인이 여당에 감사한다고 했어요. 당시 선거를 생각하면 김대통령이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 속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지경입니다.
95년 6월 4대 지방선거 관리가 얼마나 공정했느냐 하는 것은 선거 결과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이 결과를 놓고 사람들은 “당신네가 국정을 잘못했으니까 결과가 그렇게 됐지 선거 관리를 잘해서 그렇게 됐냐”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선거에서는 지역성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잖아요. 이건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시 15개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민자당이 3분의 1인 5석을 차지했어요. 경기, 인천, 부산, 경남, 경북입니다. 민주당은 서울, 광주, 전북, 전남 4석입니다. 자민련은 대전, 강원, 충남, 충북 4석이었습니다. 대구, 제주는 무소속이었습니다. 이건 우리 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은 국민의 수준과 함께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치렀습니다.
96년 4월11일 총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우리가 선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서울에서 여당이 과반수를 넘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소선거구제하에서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선거에서 두 사람을 뽑는 중선거구제는 몰라도 단 한 사람을 뽑는 선거에서는 심지어 27개 선거구에서 여당이 딱 한 사람 당선된 적도 있습니다. 잘 돼봐야 2∼3명. 그 뒤 선거구가 늘어서 잘해봐야 여당이 10∼11석이었습니다. 그런데 96년 4월 선거에는 우리가 서울에서 27석을 얻었습니다. 그때 조세형씨, 정대철씨, 한광옥씨 등 지금 한창 잘 나가는 의원들이 많이 떨어졌지요. 나는 우리가 깨끗한 선거 풍토에 대한 의지를 갖고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자부합니다.
97년 대선의 공정한 관리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대단한 의지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정권이든지 정권 재창출은 지상명제입니다. 정권 재창출을 생각하지 않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해체해야 해요. 그래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선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선거 관리, 검찰, 사법부, 이런 곳에 여당에 우호적인 사람을 앉히는 겁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그걸 거부했습니다. 선거관리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총리를 호남 출신인 고건씨로 임명했고, 검찰총장도 호남 출신으로 선거를 치렀습니다. 또 한나라당이 제기했던 김대중씨 비자금 사건 수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걸 수사하겠다고 했으면 선거가 안 돼요. 그렇게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후임 대통령을 뽑겠다는 일념으로 선거를 치렀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이회창씨에게 욕먹고 있잖습니까? 김대중 대통령도 이 점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97년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했다는 것과 하나회 척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노동법 개정, 나는 반대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저는 원래 노동법 개정에 반대했습니다. 헌법 개정보다도 힘든 노동법 개정을 왜 합니까? 우리가 무슨 영국의 대처내각입니까? 아무튼 나는 그걸 반대했어요. 그런데 각하께서 노동계의 누구와 의논했는지 모르지만 노개위를 만들었잖아요. 노개위를 만든 건 좋은데, 어느 날 느닷없이 9월 며칠까지 노개위가 합의되든 합의되지 않든 그 상태대로 보고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대통령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노동법을 바꿔서 국가경쟁력을 키우자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상품은 골라서 살 수 있는데, 노동이라는 상품은 골라서 살 수 없단 말이에요. 아무튼 나는 ‘이 어른이 정말로 노조와 한번 붙겠다는 얘긴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의해서 정부안을 만들었어요.
나는 정부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사실 몰랐어요. 그런데 정부안에서 핵심이 “정리해고는 3년 유예하고 복수노조는 즉시 시행한다”는 건데, 이게 당에 가서 부딪힌 거예요. 이상득씨처럼 경영을 아는 사람들이 “정리해고는 즉시 시행하고 복수노조는 유예한다”는 쪽으로 주장했지요.
이 개정안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는 건 합의가 돼 있었던 거예요. 김광일 실장이 날짜와 시각을 정확하게는 몰랐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정기국회 다 끝나고 임시국회를 열었던 것 아닙니까?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는 몰랐을 수 있지만, 그 원칙은 알고 있었어요. 그때에도 다음해 1월에 하자는 주장이 있었어요. 야당에서도 그렇게 하면 협조하겠다고 했고. 그러나 야당에 또 한 번 속는 것일 뿐이라고 해서 그냥 밀고 간 겁니다. 과거의 예로 볼 때 야당이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들어줘본 일도 한번도 없고….
방청석 질문:“또 속는 것일 뿐”이라는 느낌은 당시 이원종 수석이 잡았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내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습니까? 의견은 내놓을 수 있어도 결정은 공식기구에서 합니다. 당에서 판단할 때는 야당 요구대로 1월에 가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고, 아마 실제로 안 됐을 겁니다. (이하 생략)
사방에 적을 만든 대통령 부자의 비극 ‥‥‥‥‥‥‥‥‥‥‥‥‥‥‥‥‥‥‥‥‥‥‥‥‥‥‥‥‥‥‥‥‥‥‥‥‥‥‥‥‥‥‥‥‥‥‥‥
제가 비서실장이 되던 시기가 대통령의 권위가 약화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거기에다 우리 나라의 주력 수출종목인 반도체 가격이 국제시장에서 내려가고 세계적으로 경제 사이클이 호경기에서 불경기로 들어서던 때입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경제적으로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경제성장도 94∼95년에 8%가 넘었고, 물가도 연 5% 이상 오르지 않았고, 대체로 경제가 안정된 상태였지만, 앞으로 경제가 나빠질 가능성에 대비해서 전반적으로 국면 전환을 위해서 인사를 단행해야 하겠다, 해서 95년 12월 말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총리를 바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비서실장이 된 겁니다.
비서실장이 되기 열흘 전쯤에 대통령이 저를 불렀어요. 당시 제가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잘하고 있는데, 그 석 달 전에 송파갑구에 국회의원을 하라고 보냈거든요. 당시 지방자치 선거에서 우리가 야당에 져서 15대 선거는 이겨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수도권에서 바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김광일, 너는 부산에서라면 어디든 당선되겠지만 수도권에서 바람을 일으켜라’ 이렇게 된 겁니다.
사실 제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갔던 것은 3당 통합 때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은 심리적인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3당 합당 당시에 군정종식을 하겠다, 야당을 하겠다고 해서 표를 얻은 사람이 군인 정치하는 사람들과 한덩어리가 된다면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됐거든요. 김영삼 대통령은 그때 “내가 거기 가서 조무라기 노릇하려는 게 아니고, 호랑이를 잡아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고 하면서 저를 설득했지만,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계속 저를 챙겼습니다. 제게 다른 목적이 있어서 당신을 따라가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 후, 그분이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고, 대통령이 되어서 개혁정책을 하는데, 저는 ‘야, 잘한다’ 싶었어요. 그렇다면 3당 통합에서 잃었던 정통성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음으로써 다시 회복했고, 이렇게 차질없이 개혁정책을 진행하는 것으로서 대통령의 실효성도 확보된 것이다, 그러면 이런 역사적인 개혁과업에 나도 필요하면 참여하겠다, 이랬던 건데, 대통령이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제게 맡겼고, 다시 비서실장이 된 겁니다.
“YS가 창문 밖 내다볼 때 조심하라”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정전반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모든 사안을 균형 감각이 있게 처리해야 합니다. 지역, 시간, 공간, 계급 이런 것을 두루두루 파악해야 되는데 저는 어쨌든 입법, 사법, 행정을 다 거쳐본 사람입니다. 행정기관의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봤고, 국회의원도 해보고, 사법부에서도 판사·변호사를 20∼30년 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순발력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순발력있게 대처하느냐, 이런 저런 면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저를 선택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때 제가 한 가지 조건을 달았어요. 저한테 맡기신 이상 전폭적인 신뢰를 주셔야 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에 대해 나쁜 소문이 들려서 잘라야 되겠다 싶거든 저에게 먼저 확인을 해주십시오, 이랬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들이 잘려서 나갈 때는 차 타고 가다가 들었다는 일이 많았거든요. 기용할 때도 전격적으로 기용하고, 그만두게 할 때도 전격적으로 그만두게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그런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제게는 한 열흘 전에 말씀해주셨으니까 그나마 준비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비서실장을 맡고 나서 박관용씨가 김영삼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해서 조언을 해줬습니다. 제가 대통령의 옛날 스타일은 알지만 대통령이 된 뒤의 스타일은 모르거든요. 박관용씨 말이, 당신을 임명한 것은 장악력과 추진력 때문일 거요, 이러더라고요. 그분이 저에게 한 가지 코치한 것이, 김영삼 대통령은 일도 많이 하지만 일도 잘 저지른다, 실수를 한다는 말이지요. 특히 일이 잘 되어간다 싶을 때 혼자서 결정하는 수가 있으니까 비서실장은 그걸 잘 살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창문 밖을 심각하게 내다보고 무슨 생각에 빠져 있거든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 이럽디다.
제가 아직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의 직무에 대해서는 다 말하지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회고록에나 쓸 만한 일이 많아요. 제가 모셨던 분이고, 지금도 계속 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분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할 수 없잖아요? 여러분은 그런 점이 있다는 걸 아시고 제 말에서 그 뜻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 당신이 뜻밖의 정책을 결정할 때 사전에 참모들과 장관들이 대책회의를 열어서 그 정책의 옳고 그름을 연구해서 올리면 그걸 100% 받아들이는 분입니다. 그게 그분의 장점입니다. 그러니까 참모들은 어떤 정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미리 다 짚어봐야 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그걸 놓고서 함께 앉아서 검토하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대통령이 클린턴과 직통전화도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 많은 국정을 혼자서 다 챙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비서실장이 처리해야 하는데, 비서실장 머리가 터져 나가는 거예요. 저는 임기 동안 그렇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도 저희가 건의하면 받아들이고 해서 제가 있던 96년 한 해 동안은 별다른 정책적인 실패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현철은 희생양”
제가 비서실장이 되면서 한 가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대통령이 실질적인 일에 전력할 수 있도록 형식적인 일은 좀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통령은 새해에 각 부처에 연두순시를 나갑니다. 각 시도도 방문하는데, 그게 두 달 정도 걸립니다. 그러면 각 부처에서는 대통령 보고자료 만드느라고 한 달 내내 매달립니다. 지방에서도 그렇습니다. 국정감사 때문에 행정부가 업무를 제대로 못 하다가, 국회가 끝나면 대통령 연두순시 준비하느라고 또 공백과 손실이 막심해요. 제가 이걸 건의하니까 대통령께서도 느끼고 계셨던지 바로 응락하셨어요.
그리고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행사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밥을 줘야 하는데, 예컨대 어느 기관을 상대로 한 행사라면 유관 방계기관이나 민간인까지 수백 명을 부르곤 했어요. 이게 다 권위주의 시절에 대통령이 폼잡는 거였거든. 그런 게 그때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어요. 이것도 대통령께 건의했더니 꼭 필요한 사람만 참석하게 축소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얘기할 것이 인사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장관급 인선은 비밀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의 독자적으로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해줘야 할 부분이 있는 게, 집권당에서 대통령이 되기는 됐지만 3당 통합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권력의 중추부에 정보가 없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탈당 이후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부의 중요한 정보가 안 왔어요. 청와대에는 쓸 만한 인재들 명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권위주의 시절에 맞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을 하려는데 정부자료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주변, 민주계에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면 뻔합니다. 충성심이나 투쟁력은 있어도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공백을 아들이 채운 겁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김현철 군에 대한 평가도 언젠가는 바로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에게는 공과가 있습니다. 아들은 고대 사학과를 나왔지만 정치 성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아버지가 야당에서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선거에 나가서 독자적으로 정치를 했든지 국회의원을 했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87년 대선을 치르면서 보니까 이건 주먹구구식이거든요.
김현철씨는 야당에 여론조사 제도를 도입한 사람입니다. 중앙여론조사소를 만들어서 소장을 했어요. 후보자를 선정하는 데에 그 자료를 가지고 해보니까 신기하게 들어맞잖아요. 그래서 아들을 신뢰하게 되고, 아들이 건의하는 여러 가지 현대적인 정치기법을 수용하게 된 겁니다.
물론 김현철씨는 아버지가 대통령이 됐을 때 기용할 수 있는 젊고 참신한 두뇌를 나름대로 많이 골랐습니다. 아버지가 정부 자료도 못 믿고, 측근 인물 중에 쓸 만한 사람을 별로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이 이러저러한 과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얘기하면 많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일이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극이 된 것은, 그렇게 해서 10명 중에 한 명이 발탁되잖아요. 그리고 아들을 통하면 직효라는 것이 주변에 알려지자 모두들 아들에게 줄을 서다가 한 명은 되고 아홉 명이 안 되면 그 아홉 명이 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 한 명도 중간에 말없이 잘리면 또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김현철씨는 아버지를 위해서 희생양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현철에게 집중된 원성들
그러다 보니까 97년에 들어가 한보사태가 터지고부터는 모든 원성이 김현철씨에게 다 돌아갔습니다. 사실 김현철이라는 이름 자체는 워낙 음지에 숨어서 일을 했기 때문에 96년까지는 신문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복해 있다가 소문이 소문을 낳으면서, 현철이가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더라, 돈도 억수로 많을 것 아니냐, 소통령이라고 하더라, 이러던 판에 한보사태가 터지니까 대통령께서 일본에 갔다가 오시면서 그 얘기를 듣고는 ‘엄정하게 조사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어요.
저는 그런 일에서도 철저합니다. 우물우물하지 않아요. 비서실장이 민정수석에게 조사해보라고 넘기면, 민정수석은 검찰이나 사직동팀에 조사를 지시합니다. 사직동팀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대통령 측근이나 가족이 무슨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 조사해보면 금방 나옵니다.
제가 재직할 때 이양호 국방장관 뇌물문제를 조사했습니다. 조사하는 중에 이양호씨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전달해달라고 저에게 갖고 왔어요. ‘나는 하늘을 우러러 죄가 없습니다. 기독교 장로로서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이렇게 써갖고 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인가 다 자백했어요. 즉각 구속이었지요.
장학로가 제2 부속실장일 때, 제2 부속실장은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영부인 치다꺼리하는 자리인데, 야당 시절에는 같이 돌아다니면서 투쟁도 했는데, 청와대에 들어와서 1급 비서관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권력은 잡은 것 같은데 찾아오는 손님은 하나도 없거든. 옛날 상도동 시절에는 사람들이 장학로를 통해야만 대통령을 만나기 쉽고 그랬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장학로를 불러서 ‘대통령에게 얘기 좀 해주라’ ‘만나게 해주라’ 이러면서 용돈 주고, 이렇게 돈 좀 먹은 게 드러났잖아요.
대통령이 보기에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돌봐주고 싶겠지요. 그런데 어른이 돈을 안 받겠다고 했으면 아랫사람도 받지 말아야지. 아랫사람이 받아먹으면 그 욕이 어른에게 다 가잖아요. 그래서 구속해라, 그리고 오해 살 소지가 있으니까 청와대에서는 면회도 함부로 가지 마라, 그래서 그 사람이 외롭게 옥살이를 하다가 나왔습니다.
아무튼 97년 한보사태가 터지고 김현철 문제가 터져서 모든 화살이 김현철에게 쏠리자 김현철씨는 자기는 한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왜 검찰에 조사받으러 가야 하느냐, 그 화살이 전부 저에게 오는 겁니다. 그래도 저는 조사를 받게 했어요. 실제로 저는 97년 2월에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밖에 나와 있다가 3개월 만에 다시 불러서 정치특보로 갔습니다.
저는 김현철씨와는 무관하게 비서실장이 된 사람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친구가 저를 추천한 게 아니냐고 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나중에 6개월 이상 지나서 제가 비서실을 확고하게 꾸려가니까 김현철씨가 그 뒤부터 저에게 허심탄회하게 의논을 했어요. 저도 그 사람에게, 차라리 나한테 얘기해라, 그러면 우리가 한 차례 걸러가면서 일을 하면 공조직이 일한 게 된다,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김현철씨가 한보 집안 아들과 만나서 한두 차례 술자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직접적으로는 관계된 게 없다고 나왔어요. 그랬더니 언론이 깃털론을 제기하면서 ‘몸통은 왜 그대로 두느냐’고 하는 거예요.
아무튼 한보사건 때 다른 사람은 모두 잡혀 갔잖아요. 내무부장관, 권노갑, 홍인길씨, 다 들어갔잖아요. 그러니까 ‘저 위에서 누군가가 한보와 뒷거래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 이렇게 계속 따졌거든요. 그래서 청문회까지 했지만 더 이상 나온 게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해서 성형외과 얘기 등등 국민들의 혐오감이 계속 커져가면서 김현철씨가 죽일놈처럼 됐습니다. 한국 경제를 흔들 정도의 한보사태다, 권력형 부정비리다, 사건들이 터지면서, 대통령이 아니라면 아들이 했을 테니까 아들을 잡아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커져갔어요.
대통령께서도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하면서 저에게도 어쩌면 좋겠냐고 의논했습니다. 나중에는 ‘나라를 구해야 하겠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지금 그냥 뒀다가는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대통령 뜻이 이런 것 같으니까 철저하게 조사하라. 그래서 무엇이든 나오면 구속하라’고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총장 말이, 한보와 관련해서는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때 김현철씨와 가까운 친구들도 다 불러다가 조사했습니다.
이성호라는 사람이 있는데, 김현철씨가 보면 이 사람은 그야말로 배신자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니까 김현철씨 동창 중 가까운 사람 셋이 ‘너는 이제 대통령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돈이 많이 필요할 테고 여기저기서 돈을 갖다 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걸 받으면 독약이다. 그러니까 우리 동문들이 한 달에 6000만원을 모아서 용돈을 줄 테니까 절대로 다른 데에 손 벌리지 말아라’ 이래서 매달 6000만원씩 줬다는 게 드러났어요.
그런데 그렇게 돈을 주면서 다른 사람은 별문제가 없었는데, 이성호는 사업을 하면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좀 알아봐주라’ 이랬다는 겁니다. 김현철씨는 그 사람이 고마우니까 알아봐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알아봐주는 편의를 예상하고 뇌물을 줬다, 이렇게 된 겁니다. 법적으로 보면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돈을 줘야 대가성이 있는 뇌물이 되는 것이지 친구를 위해서 정기적으로 돈을 주는 과정에 ‘뭐 좀 알아봐달라’고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건 무죄가 됐습니다.
그 다음, 옛날에 대선자금 남은 것과 누가 준 돈이 좀 있었어요. 그걸 김현철씨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예금통장이니 뭐니 다 파헤쳐봤더니 그게 나오더라고요. 이게 증여받은 것 아니냐, 증여를 받았으면 증여세를 왜 안 내냐, 크게 그 두 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현철이는 구속됐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죄가 많겠지, 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했어요. 그때는 제가 비서실장을 안 하고 있을 땝니다. 나중에 재판과정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저한테 왔어요. 그래도 제가 비서실장을 하든 안 하든 꾸준히 대통령을 돌봐드렸으니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불만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위해서 재판을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하고서 빨리 풀려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김현철씨가 ‘이건 도무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기소장을 가져와보라고 해서 다 봤습니다. 그걸 보니까, 이건 너무 했구나, 싶더라고요. 이건 법적으로 잘못 됐다, 다퉈야 한다고 해서 다투겠다고 나오니까 언론에서는 김현철씨가 반성하지 않고 발뺌한다고 난리였습니다.
언론재판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현철씨가 처음에는 좋은 조건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그가 한 일이 제도 속에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여론이 악화됐고, 그가 마지막까지 좋은 인물을 천거해서 잘 해보려고 애쓴 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보사태가 일어나고,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대해서 불만 불평이 터지면서 희생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사개혁에 전념한 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왜 1997년부터 그렇게 빠르게 내리막길로 갔느냐, 제가 비서실장을 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지냈습니다. 1996년에 대통령께서 가장 주력한 게 노사개혁입니다. 우리 나라의 노동법은 5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미국식 노동법을 베껴서 진짜 민주적으로 돼 있습니다. 법 자체는 노동자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개발독재하에서 정반대로 운용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정부가 하는 건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실상은 이 법을 제대로 적용하면 노동자는 오히려 덕을 보게 돼 있어요. 복수 노조를 금지한 조항 외에는 대체로 노동조합에 유리했어요. 사용자 측에서 보면, 정리해고도 해야 하고 변형 근로도 해야 하는데, 그건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서 절대 양보 못 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결과 투쟁의 노사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합리적인 관계로 만들지 않고서는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노사개혁을 해야만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96년 4월에는 남북회담, 4자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처음에 대통령은 북한과 가까이 지내려고 쌀까지 주다가, 북한의 정체가 그런 게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남북 평화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해서 남북 당사자 회담에다가 미국과 중국을 포함시켜 4자 회담을 제안하기로 클린턴과의 제주회담에서 합의했어요.
그때 북한은 공식·비공식으로 우리측에 식량지원을 해달라, 경제협력하자, 금강산 개발해서 관광지구화하자, 월드컵 남북 동시 개최에 동의해줄 테니까 경기장에 잔디를 깔아주고 전광판 만들어주고 수입은 절반씩 가르자, 이런 등등의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김대통령이 확고했던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조금씩 줘봤자 너희에게 득이 안 된다. 차라리 남북간에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4자 회담에 응해라, 결론이 안 나도 좋다, 4자 회담을 하는 동안에 그 모든 문제를 의논하자, 이런 입장이었어요. 그건 제가 확실한 증인입니다. 그렇게 4자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계속 노력했어요.
외교에서도 자주외교를 하려고 애썼는데, 특히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라는 걸 친필로 써서 거기에다 꽂아 놓고, 접안시설까지 만들고,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너무 강경하게 대하려고 해서 우리는 ‘독도 문제는 그냥 놔두면 됩니다. 현재 우리가 독도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면 저쪽도 시끄러워져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느니 어쩌니 하게 되니까 그런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권고할 정도였어요. 심지어 클린턴과 직통전화에서 심한 말을 할 정도로 우리 국익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4자 회담을 제의해놓고서 대통령 말씀이 ‘남북문제는 이렇게 해놨으니까 다음은 노사문제해결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노사위원회를 뽑는데, 대통령이 ‘전국에서 최고 인물들을 뽑으라’고 지시했어요. 그때 민노총은 정부 행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는데, 민노총 대표까지 와서 과거 오랫동안 계속돼온 문제점을 논의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노사간에 타협이 잘 안됐지만, 우리는 계속 타협을 유도했습니다.
그때 박세일 수석이 참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청와대 참모 중 박세일 수석만큼 능력이나 애국적인 충정이나 열성적인 사람은 보기 드뭅니다. 그분이 그 일을 하면서 저에게 와서는 ‘정부 쪽 누구에게 얘기해서 하도록 해주십시오’ ‘경영자협회 회장에게 얘기해서 잘 안되는 부분 좀 합의하게 해주십시오’ 그랬어요.
“정무수석 전화 받고 날치기 통과”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거의 합의가 이뤄지고, 나머지는 정부안으로 해서 국회에 제출하게 됐습니다. 그때 야당은 이 문제에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심의하지 말자, 내년 1월에 임시국회를 열어서 그때 하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이유를 말하지 않아요. 그때까지도 야당은 거기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없었거든. 야당이 근로자에 유리한 방향으로 주장하면 경영자측에서 반발해서 정치자금을 안 줄 것이고, 사측 입장에 서면 근로자들이 김대중 정당을 반대할 거고, 그래서 발을 뺀 겁니다.
이걸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강행할 수도 없고…. 당시 대책회의를 여러 차례 했는데, 언론은 빨리 처리하라고 계속 압박을 가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금년 안에 국회 본회의까지 상정해놓자, 그러면 언론이나 국민 여론이 높아질 것이고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1월에 야당이 하자는 때에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당정협의를 하는 과정에 참모들 건의와는 달리 국회에서 12월26일 새벽에 갑작스레 변칙 처리를 해버렸어요. 저도 그날 그렇게 할 줄은 몰랐어요. 박세일 수석이 쫓아와서는 ‘복수노조 금지조항 등 몇 가지를 추가한다는 설이 있는데 빨리 좀 알아봐주십시오’ 이래요. 그래서 제가 ‘오늘이 크리스마스인데 설마 오늘 처리하겠느냐, 모레 가서 알아보자’고 했는데, 26일 새벽 5시에 해버린 겁니다.
나중에 당 쪽에 알아보니까 ‘정무수석에게서 전화가 와서 통과시켰습니다’ 하는 겁니다. 제가 야당에도 통지를 했느냐고 물었어요. 반드시 야당에 통지를 해야 하거든요. 야당에 통지했는데 야당 의원이 나오지 않았다면 결석이 되지만, 통지하지 않고 여당 의원들끼리 모여서 하면 날치기 아닙니까? 적법성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통지와 동시에 법안을 처리했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하도 많이 날치기를 해와서 날치기를 해도 그냥 넘어가니까, 이건 해야 된다 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1년 반을 끌면서 그렇게 고생한 일이 이렇게 돼버린 겁니다.
대통령은 어떤 법안에 대해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면 지지여론이 형성되도록 하고, 입법 관계자들을 초청해서 대화하고 부탁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누가 쏙닥거렸는지 그냥 통과시켜버렸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언론도 빨리 처리하라고 주장했지만, 그런 식으로 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스타일이 워낙 참모를 개별적으로 불러다가 얘기를 잘 하기 때문에 제가 ‘모든 것은 일단 비서실장을 통한다’는 지침을 내려놓고 있었어요. 물론 거기서 비서실장이 인의 장막을 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겁니다. 비서실장인 제가 대통령에게 보고드리고, 제가 들은 바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혹시 참모가 대통령에게 직보해야 할 경우가 있으면, 가서 얘기하고 나와서 대통령이 뭐라고 하셨는지 저에게 알려달라, 이렇게 하기로 돼 있었어요.
단, 정치분야는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다스리고 비서실장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대국회 대책이라든지 정당문제, 4월 총선거에서 후보 공천하는 일 등은 정무수석, 당 사무총장을 불러서 처리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비서실장도 좋은 의견을 내고 관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해서 응락은 받았지만, 사실 그렇게 할 여가가 없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제 불찰이라고 할지 뭐라고 할지…, 결국은 그 일이 김영삼 정부가 마지막 1년 동안 무너지기 시작하는 단초가 된 겁니다. 그거 한번 연구해보세요.
(방청석에서 질문) 아무튼 누군가가 그 법안을 통과시키라는 결정을 내렸을 것 아닙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비서실장이 모르는 분야도 있어요. 제가 알았다면 일이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결말 난 뒤에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법안의 당위성 때문에 언론에서도 비판 논조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노동계의 반발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습니다. 안기부법 개정안과 함께 통과됐기 때문에…. 어쨌든 의회 쪽 책임자와 청와대 정무수석팀이 대통령 재가를 얻어서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다음에 정무수석을 불러서 물어보세요. 분명 말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썽이 많은 건 일단 금년 안에 국회에 상정해놓자’ 이런 식으로 추진했습니다. 저는 철저한 의회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날치기 통과는 절대 반대합니다.
여론 등돌린 97년 연두 기자회견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 기자회견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러다가 제가 비서실장이 되기 전에 지방자치 선거에서 패배하고, 대북관계가 어려워지고, 대형 재난사고가 자꾸 일어나고, 이런 상황에 대통령 기자회견이 중단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95년 12월에 ‘대통령이 국민을 만나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을 기자회견에서 다 밝히십시오’ 하고 강력하게 건의했습니다.
당시 가장 문제 됐던 게 대선자금 문제였거든. 이 문제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선거 때 부정한 자금을 쓴 것 아니냐는 문제가 계속 정치권 일각과 시민단체에서 논의됐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밝히고 넘어가자고 주장했고, 대통령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꺼진 불을 왜 새로 지피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대통령 선거 때 후보는 돈을 얼마나 썼는지 모릅니다. 몰라요. 저도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지만 돈이 얼마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대통령 선거는 총액이 얼마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사실 이러저러해서 내가 잘 모르고, 알고 있는 부분은 이렇다’ 하고 진솔하게 국민들에게 얘기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적어도 대다수는 ‘그러냐’고 넘어가지 않겠어요? 아무튼 그 문제 때문이었는지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안 하고 담화문 발표로 넘어갔어요.
97년에 들어서 제가 ‘각하, 이번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기자회견 할 거야” 이러셨어요.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노사개혁법 변칙처리 문제, 그해에 있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문제 등이었어요. 기조연설문은 참모들이 의논해서 초안을 잡아서 참 잘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과정에 기자들과 일문일답할 때 문제가 터졌습니다.
대충 세 가지가 문제가 됐어요. 첫째, 노동자들이 노사개혁법에 반대하는데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 대통령은 “기업부터 살려야지” 이랬단 말이에요. ‘이건 노사가 같이 잘 되자고 하는 법이다. 시행하다가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되지 않느냐’ 이 정도로 말씀했으면 반발이 없었을 텐데 기업부터 살려야 한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볼 때 ‘이 법은 노동자 희생 하에서 개악된 것이구나’ 이런 인상을 줬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질문, 답변하는 사이에 뛰어들 수도 없잖아요.
그 다음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야 영수회담을 안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안 한다”고 대답했어요. 세 번째로 “차기 대통령 선거에 어떻게 관심을 표명하시겠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당연히 관심있지” 그랬단 말이에요. 그건 당신이 핸들링하겠다는 말이거든요.
아무튼 이 세 마디 때문에 국민 여론이 완연히 나빠졌어요. 언론에서 비판이 비오듯 나오고, 대학교수들까지 날치기 반대서명이 일어나고, 한동안 잠잠했던 학생운동도 다시 반정부 쪽으로 돌아서고, 이렇게 됐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그때 국민이 정말 무섭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4년 만에. 저희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런 말을 합니다.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의 권위가 살아 움직여야 나라가 바로 된다, 대통령 권한이 막강하고 책임이 막중한데 이것이 제대로 수행되게 하는 권위는 국민의 지지에서 온다, 그러면 국민의 지지는 어디서 오느냐, 좋은 정책을 국민들 앞에 제시하고 집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국민들 뜻에 따라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 여기서 온다,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 대통령들은 긴급조치 등 독재 수법을 가지고 해왔잖아요. 그러나 민주화가 된 때일수록 국민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모두 그런 데서 와요. 왜 반면교사로 배우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이하 생략)
“DJ는 YS 집권 후반기에서 교훈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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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YS 대통령 임기 5년 중에 4년 동안 정책기획위원장을 했습니다. YS 시대에 임기를 가장 오래 맡았던 사람이 나와 오인환 장관, 두 사람일 겁니다.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셈이고, 내가 정책기획위원장을 그만둔 게 YS가 퇴임하던 98년 2월25일입니다. 그분이 내 사임서에 마지막으로 서명하고 퇴임했기 때문에 내가 별로 한 건 없지만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 주변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책기획위원회는 원래 89년에 대통령 자문기구로 21세기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21세기위원회는 아시다시피 탈냉전이라든가 세계적인 대변혁기에 대비해서 새로운 세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느냐는 일종의 와이즈맨 커미티(wiseman committee) 같은 기구가 미국과 일본에서 생겼고, 그것을 본떠서 우리도 노대통령 시절에 장기적인 정책과제를 연구하는 전문가집단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정책평가에 내부 저항 심했다
YS정권이 출범하면서 나도 21세기 위원회 멤버로 출발했는데, 93년에 나는 ‘장기적인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는 이만 하면 대체로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정책의 문제 아닌가…. 내가 이제부터 얘기하고, 그 4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인식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정치에 정책에 대한 마인드가 상당히 적고, 더욱이 정책을 조정·관리하는 시스템이 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21세기위원회 위원장이 된 게 94년입니다.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곧바로 대통령령 개정작업에 들어가 21세기위원회의 명칭과 기능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95년에 정책기획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기능도 장기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나 자문기능 이외에 현안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와 자문, 그리고 정책평가라는 두 가지 기능을 덧붙였습니다.
당시 정책기획위원회로 탈바꿈하던 시점이 이홍구 총리 시대였습니다. 그때 정부에는 21세기위원회가 정책기획위원회로 전환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세력이 있었지만, 이홍구 총리와 내가 몇 차례 얘기해서 이런 기능전환을 가져온 겁니다.
이와 동시에 청와대 조직도 개편해서 정책수석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내가 강조한 것인데, 내 생각만큼 되지는 않았지만, 청와대 내에 정책수석실을 만들고 정책기획위원회를 만든 것은 정책 조정이 우리 정부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이 문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간 그렇게 해서 정책기획위원회가 50여 명 내외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활동했습니다.
활동은 크게 보면 4가지 영역인데, 우선 장기정책 과제에 대한 연구는 21세기위원회 시절부터 했던 것이고, 중단기 현안 정책과제에 대한 부분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이슈들이 다뤄졌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것을 일일이 얘기할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중요한 정책 이슈에 대해서 정책기획위원회가 중심이 돼서 여러 의견을 취합하고, 대통령에게 직접·간접으로 보고하는 기능이 둘째입니다.
셋째가 정책평가 기능입니다. 우리 나라 정부기구 중에서 정책 평가기능을 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간에서 언론도 정책평가 기능을 하는 것이고, 국회에서도 국정감사나 위원회를 통해서 정책평가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부 내에서는 회계감사는 감사원이 평가를 하고 있지만, 정책에 대한 평가는 별로 이루어지는 데가 없다, 국무총리실 내에서 이런 기능을 하는 곳이 있는데 총리실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정책평가는 관료조직 내에서 자기들끼리 하는 것이기 때문에 효율성도 별로 없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걸 정책기획위원회가 주도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저항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이 기능을 몇 차례 했지만, 그 다음에는 다시 흐지부지돼서 총리실 산하로 들어가서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정책평가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 대통령이 신년에 국정연설을 하면서 ‘금년에는 이런 과제를 중점적으로 수행하겠다’고 제시합니다.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은 정부 각 부처에서 그해의 중점 과제로 올린 것을 취합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상 각 부처가 대통령의 통치이념 또는 국정목표에 맞춰서 그해에 중점적으로 추진할 과제를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정책 평가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각 부처가 국정연설에서 제시했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그걸 보고받고, 그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일이 제대로 돼가고 있는지, 제대로 되지 못 한다면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는 작업을 하고, 그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DJ 정권도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각 부처와 장관의 성적표를 매겨서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이런 것은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그런 평가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가장 어려운 일이 평가작업이었는데, 관료조직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자기가 평가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에게 조금만 불리한 얘기를 해도 난리법석을 치기 때문에 평가작업을 할 때가 되면 청와대 수석에서부터 장관, 고급관리들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일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걸 내 임기 동안 3년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이 작업이 계속되는 것 같지 않아서 유감입니다.
한국 대통령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그 다음에 정말로 중요한 일은 여론수렴 활동입니다. 대통령의 귀와 눈, 입이 되어 주는 일인데, 다시 말하면 지식인 사회의 광범위한 여론을 어떻게 대통령에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민주정치라는 게 여론정치이고, 선거를 통해서 여론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나옵니다만, 의외로 대통령이나 고위 관리들이 여론에 둔감하거나 왜곡된 여론을 접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실 진정한 여론이 무엇이냐는 건 영원한 논란거리일 수 있고, 여론조사를 해서 이런 의견이 몇%가 나왔다, 무엇이 진정한 여론이냐는 것을 정의 내리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고위 관리직에 올라가면 일반 여론과 접할 기회도 없을 뿐 아니라 왜곡된 정보에 접하기 때문에 건전한 상식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 점에서는 YS나 DJ, 과거의 대통령 모두 마찬가지인데, 대통령이 빠지는 가장 큰 함정이 뭐냐 하면, 대통령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고 다 아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왜냐. 각종 정보기관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다 받아보기 때문입니다. 정보의 질과 양에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대통령만큼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늘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또 사실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문젭니다. 수없이 많은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 것인가 하는 부분인데, 바로 거기서 대통령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의 판단과는 다른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대통령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각자 자기네 이익에 따라서 교묘하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안기부장은 안기부장 입장에서, 여당 대표는 당대표 입장에서, 총리는 총리 입장에서, 장관은 장관 입장에서,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 정보를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좋은지 대통령에게 교묘하게 주입한다는 겁니다.
그런 정보를 받다가 보면 대통령이 종종 엉뚱한 결정을 내릴 때가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내가 YS와 그 이전, 이후의 대통령들을 보면, 한국의 대통령이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이분들이 외유를 나갔다가 돌아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종종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겁니다. 뭔가를 모르는 거예요. 그건 YS도 DJ도 마찬가집니다. 왜냐. 과거 대통령들과는 달리 민주화가 된 이래로 YS 때는 더했고, DJ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만, 외국에 나가면 외국 원수들이 한국을 극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80년대 후반 이래로 한국에 대한 외국의 평가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경제는 잘됐는지 몰라도 인권과 민주주의에는 문제가 있는 나라다, 이런 측면이 있어서 밖에 나가서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정치문제가 나오면 슬슬 빼거나 그랬는데, 90년대 이래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됐고 경제적으로도 기회의 땅이며 돈 버는 나라가 됐으니까,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면 저명한 지식인에서부터 그 나라의 여야 정치 지도자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한국을 극찬합니다.
대통령 일정의 80%는 사전 각본에 의한 것
한국 내에서는 만날 뭐가 잘못됐고 뭐가 잘못됐다는 얘기를 듣다가 외국에 나가면 노벨상 수상자, 전현직 대통령들이 ‘당신 최고다’ ‘한국 최고다’ ‘잘하고 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내가 뭐가 잘못됐느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요.
대통령은 국내에서도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주변에서들 ‘야당이 뭐라고 하지만 이러저러해서 별 문제는 없다, 잘 돼가고 있다, 그건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고 유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건전한 상식을 갖는 평가나 여론에 접한다는 게 쉽지 않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사실 여러 사람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대통령직이라는 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는데, 그 스케줄 80%는 공식적인 거예요. 공식적인 것이라는 건 예컨대 장관이 대통령에게 뭘 보고한다면 사전에 유관 부처와 청와대 유관 수석하고 치밀하게 사전조율을 한 다음에, 하다못해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하면 대통령이 뭐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다 짜놓고서 거기에 따라서 한다는 겁니다. 회의할 때 장관은 보고서를 읽고 대통령이 한 마디 하면 옆에서 받아쓰는 것처럼 하는데,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당신들, 쇼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료는 프린트해서 다 나와 있고, 대통령도 무슨 얘기를 할지 미리 다 짜놓고서 하는 건데, 심지어 기자회견도 그렇게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너는 무슨 질문할래,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렇게 하고…. 물론 대통령의 기자회견이나 회의주재, 면담이라는 게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청와대 비서실로서는 그냥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킬 수는 없어요. 사전에 누가 어디에 앉아서 무슨 얘기를 할지 정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게 청와대 비서진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라는 게 굉장히 공식적입니다. 거기서 누가 시나리오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미친 놈이거나, 배짱이 두둑하거나, 뭔가 물정을 모르거나, 그런 겁니다. 내 얘기는 그런 게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그런 회의에 한두 번 참석하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대통령은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그런 회의만 하는 거예요. 정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고, 불쌍한 게 대통령입니다. 자유가 없어요. YS나 DJ나 마찬가지인 것이, 야당 할 때는 야생마처럼 살던 이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대통령이라는 굴레에 묶여서 완전히 시들어 죽어가는 거예요.
대통령도 어떤 때는 술도 먹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할 것 아닙니까? 대통령에게도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겁니다. 대통령도 친구가 있을 테고, 괴로움도 있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니겠어요? 밖에 나가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 술도 먹고 얘기도 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 가운데 진짜 민심의 일부가 드러나지요. 그런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서는 진짜 민심이 드러나지 않아요.
보고서의 틀 안에서 하다보면 토론이 어디 있습니까? 보고하고, 대통령이 지시하면 따라서 받아 적고, 이런 저런 시나리오대로 얘기하고,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YS 당시에 내가 주변에서 욕을 많이 먹은 것 중 하나가 그거였습니다. 나도 관례에 따라서 공식 보고를 할 때는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가끔씩 내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이 있으면 “대통령 좀 만나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 비서실에서 난리가 납니다. 내가 비서실과 싸움도 많이 했어요. 원래 대통령과 면담을 하면 특별히 대통령이 지시하지 않는 한 비서실의 관련 비서관이 배석을 합니다. 대통령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적거나 녹음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비서실 배석을 거부했어요. 내가 대통령과 따로 할 얘기가 있고,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왜 비서실이 참석하느냐, 그러면 비서실장이 기분이 나쁘지요.
내가 대통령에게 처음부터 얘기한 것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YS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YS와의 관계가 그 후 계속 이어지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내가 YS에게 얘기한 것은, 나는 정치할 생각 전혀 없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앞으로 정치는 안 한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려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고려대학교 교수가 최고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고려대 교수를 그만두지 않는 대신에 당신에게 정파적인 뜻이 없이 내 생각을 얘기하겠다, 당신이 싫으면 그만이고 좋으면 계속 만나서 내 얘기를 듣고, 판단은 당신이 하는 것이다. 내가 정책기획위원장을 하면서 YS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정부에 많은 조직이 있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조직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내가 하는 정책기획위원회다, 그것 때문에 10억, 20억이 든다면 그건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로 만나자고 하면 만나주고, 얘기를 들어보고 받아들일 만한 얘기는 받아들이고, 역시 학자들이라는 게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면 무시하는 건 당신 생각이고, 이렇게 약속했어요.
그런 약속을 했기 때문에 YS 임기 내내 내가 YS를 만나겠다고 하면 비서실에서 약속을 해줬어요. 그러면 종이 한 장 안 갖고 들어가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보고서는 없느냐고 하면, 없다, 얘기하고 싶은 건 머리 속에 다 있다,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기회가 가끔 있었어요. 대통령이 가끔 전화를 하거나 급히 나를 찾으실 때가 있어요. 대통령 말을 들어보면, 각 부처에서 보고가 올라오는데 판단이 잘 안 선단 말이에요. 대통령이 다 꿰뚫어보고 있어요. 이 사람이 이런 보고를 낼 때는 이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거라고 알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불러서 물으십니다. ‘이 친구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뭔가 얘기할 거다’ 그런 믿음이 있는 거지요. 물론 내 말대로 따라줄 때도 있고, 다르게 결정할 때도 있어요.
내가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려고 했던 서비스가 바로 이런 상담역이었고, 나의 상식적인 소리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정책·여론수렴 기능을 나름대로 해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일을 하려면 두 가지 상반되는 요구가 충족돼야 해요. 첫째는 나에게 얘기하는 상대방에게 ‘저 친구에게 얘기하면 대통령에게 그 얘기가 가감없이 들어갈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 친구한테 얘기해봤자 아무것도 아니다. 얘기해봤자 저 친구는 대통령을 만나서 자기 편한 대로 각색해서 다른 소리를 할 거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이 나에게 솔직한 얘기를 안 해요.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입장에서 ‘이 친구는 장난칠 사람이 아니다. 정파나 당파적인 입장에서 얘기할 친구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이렇게 YS정권 4년 동안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서 나온 불평, 건의를 받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했어요. 1000여 명을 면담해서 의견을 듣고 100여 차례에 걸쳐서 대통령에게 직간접으로 전달했어요. 나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임자의 시신을 넘어가는 역사
마무리로 성공과 실패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당시의 슬로건은 아시다시피 한국병 치유, 신한국 건설이었고, 그 수단이 변화와 개혁이었습니다. 이것을 관통하는 이념으로서 문민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얘기했던 것이 개혁자유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건 신자유주의 얘기가 나오기 전의 얘기입니다.
나는 개혁자유주의라는 이념적 토대에서 변화와 개혁을 하고, 그 과정에 가장 역점을 둬야 할 부분이 정상화를 위한 개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상화를 위한 개혁이란 단순한 겁니다.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정상적인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얘기했지만, 그것들이 왜곡됐기 때문에 이제는 제대로 해보자는 겁니다.
정상화를 위한 개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군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는 겁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를 통해서 시장경제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21세기 준비를 위해서 사법개혁, 교육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YS정권 내내 변화와 개혁이 끊임없이 제기됐습니다. 일각에서는 YS정권 내내 제기했던 이슈들 중에서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라는 얘기가 나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YS정권의 임무는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다 건드려본다, 나머지는 21세기로 넘어가 다음 정권, 그 다음 정권이 두고두고 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정권 말기에 IMF 때문에 문제가 됐지만, 나는 문민정권의 가장 큰 성과로 민주주의의 정착과 국가사회가 정상화의 기틀을 잡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부가해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지요. 지난번 중국에 가서 중국과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한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지난 50년 사이에 이처럼 발전한 나라가 없어요. 이승만 박사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건국이라는 부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박정희 시대에는 독재와 부정적인 점들이 있었지만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했어요. YS 때에 와서 비로소 민주화가 제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하려면 건국과 경제발전, 민주주의, 거기에다 DJ의 역사적인 과제를 더해서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서 통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한다면 완벽한 역사의 진보로 가는 과정인 겁니다.
우리 나라에는 새 대통령이 서면 씻김굿하듯이 전임자를 완전히 부인하고 시작합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혁을 하고 앞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어서 가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이박사의 시체를 넘어서 박정희시대가 왔고, 박정희의 시신을 뛰어넘어서 YS 시대가 왔고, YS 시신을 뛰어넘어서 DJ 시대가 온 겁니다.
그런 점에서 YS 정권은 여러 가지 문제는 있지만 개혁을 하고 정상화로 가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YS가 아니었으면 군개혁을 그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단기간에 해치울 수 없었을 겁니다. DJ처럼 조심스러운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YS가 그렇게 함으로써 군이 다시 정치개입을 하려면 앞으로 20∼30년 동안 사조직을 다시 만들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YS의 공로는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국정 손놓은 대통령
그러면 과연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크게 봐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단임 대통령제의 한계입니다. 단임 대통령제라는 제도적 한계 속에서 개혁 후반기에 들어가면 레임덕 현상이 발생합니다. 저는 DJ정권도 이미 레임덕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개혁, 개혁의 지속적인 추진이 어렵습니다. 그건 여당 내부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곧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와 더불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이 추진력을 상실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DJ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만, 개혁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개혁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국민적인 지지를 상실합니다. 그건 어떤 대통령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중임제로 개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YS에게도 여러 번 얘기했어요.
YS의 경우 97년 초까지만 해도 힘이 굉장히 컸는데, 97년 1∼2월 이후에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그리고 97년 2∼3월 이후로 정치적인 혼란과 혼돈이 계속됐습니다. 그 당시 한보 사건은 정권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어요. 한보를 터뜨리느냐 마느냐, 지금 청와대에서도 현대 문제를 놓고 똑같은 상황일 겁니다.
경제합리론자들은 시장 논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보 문제는 시장논리에 따라야 한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지금 이 정부가 현대에 대해서 보여주는 태도가 수시로 바뀌잖아요? 시장 논리를 주장하다가 그 다음엔 또 그게 아니라면서 고민하는 걸 보면서 나는 ‘역사라는 게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살리든 죽이든 양쪽이 다 문제가 있어요. 죽이면 정권이 금방 죽을 것 같고, 살리면 정권이 끝난 다음에 죽어요. 결과는 똑같아요. 지금 재경부장관, 경제수석, 청와대 1급 참모들은 현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정말 고민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한보를 어떻게 할 것이냐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고민에는 경제논리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YS정권의 순진성이라는 게 한보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간단했어요. 우리는 한보에서 엄청난 정치자금을 받은 것도 없고, 정치적인 부담을 가질 것도 없다, 시장논리에 맞지 않으면 가는 거다, 대마불사를 깨야 한다, 이석채씨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그걸 관철시켰어요.
당시에 나는 반대했습니다. 당신들 정권이 끝나도 이건 반드시 부메랑으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좋은 점이 바로 시장논리를 관철시키는 것 아니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한보사태가 그렇게 처리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정치적인 공세가 온 거예요. 정치공세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김현철 문제였습니다. 사실 한보와 김현철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김현철 문제를 다루면서 치고 들어온 겁니다. YS의 가장 약한 부분이 김현철이고, 김현철을 잡아넣는 게 YS를 잡는 길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지금 하는 얘기는 사실 해서는 안 되는 얘기인데, 그게 바로 DJ와 이회창씨의 압박이었어요.
그게 태풍처럼 와서 청문회를 열어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마침내 YS는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구속시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얘기할지 몰라도 나는 그때 YS에게 ‘당신은 사도세자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물론 제가 김현철을 동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김현철을 잡아넣어야 할 뚜렷한 물증이 없었어요. 김현철이 관련됐다는 증거라는 것이 사실상 김현철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과거 대선자금이 문제가 됐는데, 그렇게 잡아 넣으려면 YS도 잡고 DJ도 잡고 다 잡아야지요.
그러면서 YS는 97년 후반기에는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놔버렸어요. 자기 손으로 자식을 잡아 넣고, 여당 내부에서조차 칼부리를 들이대니까 이 사람이 모든 의욕을 잃게 됩니다. 그 과정에 국정이 표류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IMF가 온 겁니다. IMF가 오는 마지막 순간에 일본과 미국이 정치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일본과 미국이 YS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일본과 미국이 거절하게 된 이면을 나는 경제논리로 보지 않아요. 거기에는 YS정권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었다고 봐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YS는 일본에 대해서 과거사 문제같은 것에 대해서 심한 소리를 했어요.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도 했고, 핵문제에 대해서는 클린턴과 YS 사이에 언쟁이 많았어요. 미국과 일본에 대한 YS 정부의 입장이 의외로 자주적이었어요. 그분 스타일이 그런 것도 있고,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도 있으니까 ‘내가 일본이나 미국에 왜 굽실거려야 하느냐’면서 당신 생각대로 막 밀고 나갔어요. 그 전까지 한국의 대통령이란 게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서 늘 아쉬운 소리를 했지 그렇게 떳떳하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나온 적이 없었어요. YS와 과거 이승만 박사 정도가 예외일 거예요. 그 중간에는 다들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에 저자세였거나 겸손하고 정중했어요.
그런 부분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일본과 미국에 SOS를 쳤을 때 거절당한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요즘처럼 공적 자금을 쓸 생각을 했더라면 그 정도까지는 안 됐을 텐데, 당시 위기란 게 일종의 유동성 위기인데, 일본과 미국이 단기자금 회수를 6개월만 유예시켜준다고 합의만 해줬어도 IMF까지 갈 필요가 없었어요. 사실 어느 누구도 그 6개월 전에는 한국 경제가 그렇게까지 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어요.
YS가 “나에게 IMF가 온다고 얘기해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IMF 자체도 한국경제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 민간기관에서 한국경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늘 해왔지만, 일이 꼭 그런 식으로 됐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 영향력의 쇠퇴와 몰락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DJ정권 후반기를 걱정합니다. 현대 문제에 처해 있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나오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일면 당시 상황과 비슷하다고 봐요.
그러나 나는 한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거쳐 진보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기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장래를 낙관적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