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유식한 대통령’이 연출한 ‘무능한 정치’

  • 육성철sixman@donga.com

    입력2005-05-10 2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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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치사에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정권이 임기를 2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에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김대중 정부에 대한 한국사회 지식인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무능' 이다. 대통령과 정부 집권당이 제각각이고, 국가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 사안들이 공식 시스템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신동아’는 ‘한국 지식인 이념지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마지막 문항에 김대중 정부의 국정 난맥 원인과 해결방안을 물었다. 거의 모든 응답자가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을 실패로 규정했는데, 이것은 최근 현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국정난맥의 원인은 측근 중심의 인사정책과 비전(vision)부재였다. 따라서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인사개혁과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을 강조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실패한 인사(人事)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했다.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반부터 호남 편중인사 시비에 휘말렸다. 일부에서는 “수십년간 워낙 호남이 소외돼 있었기 때문에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균형론’보다는 호남의 권력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 커진 게 사실이다.

    한양대 나성린 교수(경제학)는 김대중 정부 인사정책의 문제점을 4가지로 규정했다. 나교수는 “호남편중 정책을 펴면서도 허구의 숫자를 갖다대면서 아니라고 강변하는 점, 대통령과 영부인 인척의 낙하산식 인사, 비개혁적 관료들의 중용, 개혁적 전문가의 발굴 실패” 등을 꼽았다.



    숙명여대 박재창 교수(행정학)는 “기본적으로 DJ가 동원하는 인재풀이 제한돼 있어서 사회 각계의 참여와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도 실패했다. 이 점은 특히 호남 편향적 인사라는 비판과 함께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부정적 영향까지 낳았다. 이것은 현정권이 소수파 정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말했다.

    김태우 국제 평화전략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인사문제를 국정난맥상의 주된 이유로 보았다. 김수석위원은 “기용대상 인물을 특정 스펙트럼(대북 전향적, 호남연고)에 한정시킴으로써 두 가지 문제점(총체적 국정능력 한계, 보수지식인 배제)을 낳았다”면서 “그 결과 비판적 지지자들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지역적 탕평책이 무산되면서 특정 지역의 비토(veto)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시절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까닭에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하는 지식인 그룹도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들을 폭넓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와 관련,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사회학)는 “김대통령의 지나친 ‘신중노선’이 개혁적 인사의 전진배치를 방해했다”고 분석했다.

    대전대 노병일 교수(사회복지학)는 미국인 교수의 말을 인용해 현 정권의 인사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톨릭이었는데,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료 중에 가톨릭 신도를 가급적 임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케네디와는 상반된 접근을 취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는 인사때문에 망하고 있다.단적인 예로 국영기업체에 자기 고향 출신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면서, 기업 구조조정 어쩌고 저쩌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김대중 정부의 호남 인사 편중현상은 집권후기호 가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각계 인사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특히 공기업 낙하산 인사와 주요기관 승진 인사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두고 소수 정권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주장도 있다. 한신대 김명섭 교수(국제학부)도 그런 견해다. ”김대중 정부는 기본적으로 인력풀이 부족하다. DJ 의 비전을 실무적 차원에서 뒷받침해주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층이 빈곤하다. 그것은 영남 30년 집권의 부산물이면서 동시에 DJ의 개인적 퍼스낼리티가 빚어낸 부산물이다.”

    거국내각 검토해야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는 2003년 2월까지다. 앞으로 2년 이상 국정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벌써부터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김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노르웨이로 출국하자마자 터진 박금성 서울지방경찰청장 인사 파문은 현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극도로 증폭시키면서 레임덕을 성큼 앞당겨버렸다. 정권의 체모(體貌)와 신뢰를 유지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자기검증과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조직도, 이른바 측근실세 그룹도 이 점에서 무기력과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구효성가톨릭대 박승길 교수(사회학)는 이와 관련, 전문관료의 탈정치화와 가신화한 과두적 지배집단의 혁파를 주장했다. 서원대 김성건 교수(사회교육학)도 “오로지 애국의 일념으로 청와대 비서진과 행정부 각료들을 전면 개편하여 명실공히 ‘거국중립내각’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대전대 유재일 교수(정치외교학)는 지역화합 정책을 강조했다. 유교수는 “지역편중 인사를 시정하고 국회 주관하에 ‘지역발전기금’을 신설하여 지역문제 연구 및 화합행사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인사개혁 차원을 넘어 정계개편을 주장한 의견도 많았다. 동국대 권오윤 교수(정치외교학), 서강대 박상태 교수(사회학), 서울대 송호근 교수(사회학) 등은 거국내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 정권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지역감정이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김대통령 스스로 정책의 목적과 현황,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지역감정을 뛰어넘었다는 이미지가 생길 정도로 거국적인 인물을 선정해야 할 것이다.”(권오윤 교수)

    “소수 실세(가신, 측근, 연고자)에게 주었던 특혜를 박탈하고 그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범법자 처벌, 당 조직 개편, 거국내각의 구성이 필요하다.”(박상태 교수)

    동아일보 김재홍 논설위원, 부산외대 강천 교수(경제학), 동의대 김동운 교수(경제학) 등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파를 떠나 유능한 인사들을 기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각 분야에서 국민적 신망을 받는 사람들을 골라 기용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존경하는 가치들이 무엇인가를 따져 보고 그런 가치들을 갖춘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해야 한다.”(김재홍 논설위원)

    “정파를 초월한 테크노크라트를 기용해 정책 수행 능력을 높이고 국정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강천 교수)

    “DJ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각료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고 유능하고 깔끔한 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국내정치에서도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펴야 한다.”(김동운 교수)

    정치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은 여야 구분이 없었다.

    경상대 최태룡 교수(사회학)는 “정치세력의 무능이 국정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여야 정당을 모두 비판했다. 최교수는 “민주당은 중심을 갖고 있지 못하며, 자민련 같은 기회주의적이고 수구적인 세력의 눈치만 보고 있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다수당으로서의 위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 개혁 방안과 관련해 김경웅 통일교육원 교수는 가신정치와 DJP 연합을 비판한 뒤 “젊은 총리를 발굴해서 내정 중심의 실질적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대 유재일 교수(정치외교학)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방안으로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 영남 출신 총리 기용, 한나라당과 선의의 정책경쟁 등을 제시했다.

    한신대 윤상철 교수(사회학)와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조현연 연구원도 여야를 초월한 정치체제 개편론을 역설했다.

    윤교수는 “내각제를 통해 계파의 분화에 기반한 정치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가능한 방향은 여야를 초월한 인물영입을 통해 실질적인 정당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조현연 연구원은 “정권 재창출에 매몰된 정치공학적 계산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 단초는 DJP 공동정권의 틀을 깨고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북대 노진철 교수(사회학)는 “정부와 민주당이 집권 초기에 보여주었던 개혁의 추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민주당 최고위원 등 실세를 정부각료나 청와대 비서관으로 등용하여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충남대 이기훈 교수(경제학)와 이환성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를 포함, 강도높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민주당의 대부로서 공천권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대통령도 지냈고, 노벨상도 받았으면 더 이상 권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총재직을 사퇴하고 당적을 떠나야만 여야에 구애받지 않는 큰 개혁정치를 할 수 있다.”(이기훈 교수)

    “문제는 사회 전체에 만연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있다. 그렇다면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선,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포기해 정치적인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대통령은 정부, 기업, 정당, 언론 등 책임있는 여론 선도기관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이환성 책임연구원)

    한신대 김현희 교수(사회학)와 연세대 이두원 교수(경제학)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이 국정 난맥상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대통령이 모든 내용을 결정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권력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이교수는 “모든 의사결정을 DJ 혼자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DJ의 관심이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국정 방향이 좌우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여현덕 에드퓨쳐 대표도 “김대통령이 집권당에 힘을 실어주지 않아 대국민 민심수습 시스템이 사라졌다. 또한 민주당은 가신 의존도가 높아 집권당의 ‘진공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현덕 대표는 “우선 국정을 새로운 시스템으로 구축하고(당직 초월, 인사 탕평책, 구조적 처방 제시), 그것이 안되면 제2의 리더를 조기에 부각시켜 그를 중심으로 국정쇄신을 단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90년대 중반,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이 벽에 부딪혔을 때 일부 학자들은 “문민정부가 보수세력과 관료세력에 포위당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일부 응답자들은 여전히 관료가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가로막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재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관료가 DJ의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DJ의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경상대 최태룡 교수는 “김대중 정권이 그동안 권력의 수족 노릇을 해오던 관료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국가관료와 정치세력 간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관료들의 실패가 여과없이 정치 실패로 여겨지고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력들의 잘못까지 다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고 주장했다.

    최교수는 이어 “행정관료를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더 이상 장관을 교체하지 말고, 장관이 혼신을 다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료를 장악하지도 못하면서 관료에게 의존하는 행태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은 원칙대로

    김대중 정부의 지지도는 지난 가을부터 급락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내림세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와 관련, 민주당 관계자들은 경제불안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부실기업 퇴출, 공기업 구조조정, 현대건설 부도 위기, 벤처기업 도산 등의 사태가 겹치면서 민심이반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KDI(한국개발원) 박정동 연구위원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외화내빈’이라고 평가했다. 박연구위원은 “경제가 그렇고, 남북관계가 그렇고, IMF를 1년반 만에 졸업하겠다던 호언장담과 그것을 위해 내놓은 모든 정책이 그렇다. 일종의 유동성 위기에 지나지 않았던, 하지만 체질개선을 할 수 있었던 너무나 좋은 기회를 내실없이 외형만 포장하는 바람에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한신대 사회학과 김현희 교수는 “IMF(국제통화금융) 주도의 개혁은 경제 전반에 대한 총체적 구조조정이 아닌 기업에 국한된 미봉(彌縫)적 구조조정으로 악순환만 가져왔다”며 국부의 유출, 외국자본에 의한 종속의 심화, 실업의 증대, 기업 구조조정 답보 등을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후유증으로 거론했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경제부문과 관련해 어떤 처방을 내놓고 있을까? 학자들은 무엇보다 일관된 원칙을 강조했다.

    이각범 정보통신대 교수는 “장기적 비전에 입각해 구조개혁을 철저히 해야 한다. 이 정부가 집권한 이래 장기적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IMF 위기를 단시일에 극복하여 세계가 감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장기 비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적 변화에 맞추어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명헌 단국대 교수(경제학)와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경제학)는 구조조정 원칙의 일관성을 주장했다.

    강명헌교수는 현대의 계열분리를 원칙으로 주장하다가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에서는 형제들이나 계열사의 도움을 요청한 점과, 대우사태가 났을 때 노동조합에 구조조정 동의서 제출을 요구하다가 부도가 난 뒤 김대통령이 “대우자동차를 살리겠다”고 말한 부분을 예로 들면서 “정부가 일관성없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명헌교수는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논리가 아닌 순수 경제논리에 입각해서 공공, 기업, 금융부문 구조조정을 원칙대로 실시하고, 구조조정의 부작용은 실업대책과 같은 별도의 정책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정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도 “경제 위기를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하며, 구조조정을 적합하게 실시하되 조속히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표방했다. 하지만 개혁작업은 도처에서 암초를 만났다. 개혁 실패의 원인에 대해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는 개혁주체의 미결집과 개혁전술의 오류를 지적했다. 또한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불완전한 인적 청산작업이 국정의 난맥을 가져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연구위원의 말.

    “개혁은 기존 시스템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세력을 청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개혁의 칼날이 기득권 세력을 향하지 못하고, 개혁대상이 오히려 개혁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정권은 많은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개혁대상을 청산하지 않는 개혁은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그 결과 DJ정권은 이해집단의 논리를 차단하지 못했다.”

    동국대 이철기 교수(국제관계학)도 과거 청산의 실패가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김대중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집권 초기에 과감하게 과거를 청산하고 개혁정책을 밀어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DJ가 YS보다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사이에 영남의 반DJ정서를 업은 수구 기득권 세력들과 수구 언론의 반격, 기회주의적 관료들의 무능과 보신주의가 합쳐지면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세종연구소 이종석 연구위원은 “김대중 정부가 국정운영 능력과 시민사회의 사회적 협약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과제를 설정한 것이 개혁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과는 다른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조현연 연구원은 개혁실패의 원인으로 ‘철학의 빈곤’과 ‘의지의 부재’ 등을 꼽았으며,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전재호 객원연구위원도 김대통령의 의지부족을 지적했다. 전교수는 한 예로 김대중 정부가 인권법을 만들기로 해놓고 입법과정에 힘을 실어주지 않은 점을 거론했다.

    김대중 정부가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민의 신뢰 회복이 절실하다. 최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폭발 직전이라는 점에서 개혁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개혁대상을 보호하는 개혁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개혁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개혁 대상자와 개혁 때문에 발생하는 억울한 피해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전연구위원의 주장.

    “기존 시스템을 변경하는 데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든다. 개혁은 자칫하면 기존 시스템에서 기득권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진행중인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 문제가 있다. 개혁대상자에게는 보호의 룰을, 개혁피해자에게는 시장의 룰을 적용하고 있다. 개혁대상과 억울한 피해자를 구분할 때만 개혁의 총체적 정당성과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숙명여대 박재창 교수(행정학)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엄정한 개혁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단순히 정치적 필요에 의해 사정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부정부패 추방을 위해 일생을 걸었다는 느낌을 국민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묻고 이를 끝까지 추적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정책브레인으로 불리는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은 “권력주변부터 척결해야 한다. 대통령 친인척, 동교동계의 대대적 사정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의 냉소만 살 것이다”고 말했다. 이강천 동우캐피탈 대표이사도 친인척의 부정부패 척결과 가신그룹 배제 등을 주장했다.

    한편 김대중정부에서 2년여 동안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성훈 중앙대 교수(농경제학)는 무엇보다 언론개혁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언론개혁을 단행하고 정치개혁과 정계개편을 해야 4대 부문 개혁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다. 언론개혁 없는 경제개혁 및 사회정의 구현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언론·노동(노조)·정치 귀족의 발호와 지방토착 세력의 준동,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낭비를 방지해야 한다.”

    비전없는 인기영합주의의 대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을 비전 부재에서 찾는 지식인도 상당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이각범 정보통신대 교수는 “DJ정부는 비전이 결여된 채 출발했다. IMF의 원인은 외환관리의 일시적 잘못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구조적 결함인데, 구조개혁을 할 생각은 않고 외환만 쌓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착각했다. 한마디로 나라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신대 이일영 교수(경제학)도 국가경영을 위한 장기전략의 부재를 지적했다. 이교수는 “일차적으로는 정치권 전체의 책임이지만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심층적으로 책임있는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는 오피니언리더 그룹, 지식인 그룹이 허약하다. 이것은 어떤 집권세력이 등장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권의 비전 부재에 관한 해결방안으로 김형구 부산경제연구소장은 “부문별 전문가를 최대한 활용하고 폭넓은 여론을 수렴하여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경북대 김진웅 교수(역사과)는 정부의 임기응변식 국정운영을 비판한 뒤 “지금부터라도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하면서 이해를 구하고 소신있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비전 부재와 비슷한 맥락에서 리더십과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부산대 경제학과 임정덕 교수는 “김대통령이 누구에게나 잘하겠다는 대중영합적 자세만 견지하고 있어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위기에 필요한 것은 확고한 리더십이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국정홍보에 비중을 두었다. 취임 초기엔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 각종 정책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이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지나치게 인기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정치외교학)는 김대통령을 ‘대중추수주의자(populist)’로 규정하고, 그것이 국정의 혼란을 가져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교수의 말.

    “그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욕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는 선택이며,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비용을 치르기 무서워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도자가 아니다. DJ는 비판이 두려워 선택을 과감하게 못한다. 그러다 보니 구조조정도 못하고 실업자 구제도 못한다. 선택은 정치의 몫이고, 비용을 줄이는 것은 정책의 몫이다. DJ는 정치와 정책을 혼동하고 있는데, 가장 큰 요인이 그가 ‘populist’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세명대 고숙희 교수(행정학)도 “모든 정책은 반드시 얻는 자와 잃는 자를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이 필요한 집단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그들을 설득하기보다 무조건 끌어안으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을 불만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도 ‘대중추수주의(populism)’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유소장은 “대중주의는 늘 대중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운명이다. 현 정권은 당장의 인기만 추구하다가 낭패를 보았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성격과 정국운영 스타일이 국정 난맥을 부채질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고숙희 세명대 교수는 김대통령의 집착과 경력 부재를 지적했다.

    “김대통령은 한 가지 명분이 뚜렷한 이상에 매달려 있을 경우, 다른 어떤 가치도 그것을 대신하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그의 노벨상을 향한 집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정도다. 김대통령은 큰 조직을 경영해본 경험 없이 오직 투쟁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때문에 실제적인 국가운영에서는 여러 한계가 노출된 것이다.”

    반면 대구효성가톨릭대 박승길 교수(사회학)는 “김대통령 개인의 도덕성 완비가 오히려 자기성찰에 소홀함을 자져왔다. 혼자 말하고 혼자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면서 사실상 당정의 관료가 대통령 한사람만 바라보고 일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국민의 현실적 삶과는 점차 거리가 있는 ‘청와대 속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때문에 등돌린 대표적 집단이 바로 지식인 집단이다. 어느 사회든 지식인 집단이 있다. 이들이 정부에 지지를 보낼 경우 정책이 성공할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반면 지식인 집단이 등을 돌리면 정책은 벽에 부딪히기 쉽다. 그래서 역대 정권은 지식인을 끌어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김대중 정부가 좋은 정책을 구상하고도 언론과 여론의 비판에 시달리는 이유로 지식인들의 비우호적 태도를 꼽았다. 그렇다면 왜 지식인들은 김대중 정부에 비판적일까? 김논설위원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어설픈 ‘신지식인’ 정책에서부터, 순수 기초학문을 버리고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응용학문만 키우려는 발상 때문에 지식인 사회가 이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됐다.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같은 자리를 통해 직접 민주정치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 정부가 하는 일들을 평가하고 일반 국민들에게 관점을 제공하는 일은 지식인들이 맡는다. 언론이 적대적인 이유도 김대중 정부의 지식인 정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청한 모 대학 교수는 “각종 사회과학 관련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정부정책의 홍보기관 노릇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국정 방향을 찾아가는 ‘싱크탱크’가 돼야 한다. 더 나아가서 ‘지식공동체’와 ‘정책공동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적 합의 없는 대북정책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수세력을 가장 긴장시킨 사건은 역시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경의선 철도 건설이 시작됐고 이산가족 상봉이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김대통령이 국민적 합의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국정 난맥상의 한 가지 원인으로 꼽았다. 김교수는 “소련 붕괴 이후 동구권 국가들에서 시장수요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경제특수를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와 더불어 북한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안보와 대북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내부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김대중 정부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김대통령의 결단에 달렸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김대통령이 당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초강수를 둘 것이라는 관측은 극소수였다. 현 시점에서의 개혁은 필연적으로 김대통령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김재일 단국대 교수(사회과학부)는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DJ 자신의 용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도 “대통령 및 국민 대중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염홍철 대전산업대총장과 정낙근 안민정책포럼 사무총장은 김대중 정부의 국정쇄신 방향에 다소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염총장은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전제한 뒤 “지금이라도 대통령은 국정난맥상을 솔직히 시인, 사과하고 향후 국정운영 프로그램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사무총장도 “시기적으로 늦은 감이 있다. 이미 레임덕이 시작됐다. 행정부에 권한을 대폭 위임하여 정책담당자들이 소신을 갖고 일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김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국정을 펼쳐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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