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2001년 1월 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의 자화상

  • 김지석 jk@hani.co.kr

    입력2005-05-11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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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말의 암울한 시대에 ‘철학과’라는 한 배를 타고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은 이제 40대가 되어 대학교수, 의사, 회계사, 변리사, 기자, 사업가, 영화감독 등으로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다. 직업은 달라도 만나기만 하면 ‘돈’과는 관계없는 논쟁을 벌이기 좋아하는 ‘철학적 40대들’의 이야기.
    요즘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이 한창이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니 만큼 기념관을 지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한 독재자’를 위해 국고를 지원해 기념관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중한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공과가 있는만큼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국고 지원보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념하기를 원하는 민간인들이 성금을 내 기념관을 지으면 될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느라 시위와 최루탄으로 얼룩진 학창 시절을 보낸 70년대 학번들이 대부분 그렇듯 서울대 철학과 77학번들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좋지 않은 편이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친구도 있었고 학내외 시위로 구속되거나 강제 징집되거나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친구도 있었다.

    3년 동안 같은 강의실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이 시국 상황과 관련돼 이리저리 흩어져버리자 10여 명의 철학과 77학번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마지막 정’이라도 나눌 요량으로 강촌으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졸업은 아직 1년여 남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한만큼 여러 사람이 아직 학교에 남아 있을 때 졸업여행을 하자는 뜻도 있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쓰러지기 1주일 전인 79년 10월19일이었다. 시국은 몹시 어두웠지만 맑은 가을 하늘과 눈부신 햇살, 북한강의 푸른 물줄기가 뿜어내는 공기는 신선하기만 했다.

    전투경찰의 군화 소리를 듣고 형사의 매서운 눈길을 늘 의식하며 칙칙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암울한 시대를 탄식하게 하던 캠퍼스를 벗어나 ‘자연의 해방구’에서 토론하고 결의를 다지며 밤새 석별의 잔을 기울인 것은 마치 먹구름 속에 언뜻 스쳐 지나가는 한 조각 푸른 하늘과 같았다.



    먼저 강촌의 민박집에서, 한 친구가 미리 준비해온 잘생긴 돼지머리를 허름한 상 위에 올려놓고 ‘기원문’을 올렸다. 졸업여행에 돼지머리가 등장하니 엉뚱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문은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정확하게 1주일 뒤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우리는 ‘기원’이 ‘현실’이 되는 그 빠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그 당시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같은 바람을 기원하던 집단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밤새 시국토론과 철학적 담론을 넘나들던 우리는 아침에 강변을 산책하다가 매운탕 집 옆을 지나면서 기어이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 친구가 매운탕 집의 수족관에서 잘 놀고 있는 쏘가리를 꺼내 장난삼아 툭 쳤는데 그 불쌍한 쏘가리는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그 친구 덕분에 아주 맛있는 쏘가리 매운탕을 먹을 수 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들은 주머니를 털어 주인이 요구하는 ‘엄청난’ 음식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매운탕과 곁들여 먹은 해장술로 취기가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10월 하순의 차가운 강물로 뛰어들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물장난을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이 물세례를 받았던 이 시절의 추억은 모두 잊지 않고 갈무리하고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우리 친구들은 각자 다른 세월의 물줄기를 따라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현재 직업을 보면 교수·학자가 가장 많아 전체의 3분의 1 가량 된다. 언론인이나 사업가·회사원·공무원이 두세 명씩 있는 건 어느 학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과는 정말 거리가 먼 회계사와 변리사도 있고 영화감독과 의사도 한 명씩 있다. 사업을 하다가 농촌에서 공동체생활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 비록 직업은 다양하지만 속을 파헤쳐보면 ‘철학과 냄새’가 아직도 물씬 풍긴다.

    몇 년 전에 필자 집에서 철학과 77학번 동기들이 모인 적이 있는데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열띤 ‘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그 자리에는 독일에서 ‘따끈따끈한’ 철학박사 학위를 막 취득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었는데 눈이 동그래지면서 ‘어떻게 독일 대학에서 박사들이나 할 법한 수준 높은 논쟁을 벌이느냐’고 말해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직업은 달라도 ‘철학과 냄새’ 물씬

    철학과 77학번의 학창시절과 그 이후 20여 년은 격동의 시절을 보낸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과 77학번은 모두 20여 명이지만 사람에 따라 공부한 시기가 다르다. 이 때문에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77학번의 숫자가 달라진다.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한 뒤 ‘상당한 경쟁’을 거쳐 78년 철학과에 진입한 인원은 17명이었다. 이들이 구태여 우긴다면 ‘주류’라고 쳐줄 수 있다. 이 ‘행복한’ 주류들은 77년도 1학년을 무사히 넘긴 부류다.

    여기에다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으나 학내외 시위 등과 관련해 제적된 뒤 ‘민주화의 봄’ 시절이었던 80년에 복학한 사람이 3명 있다. 아울러 77년 인문계열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과 관련해 제적 또는 정학됐거나 군 입대 등으로 나중에 각자 다른 시기에 철학과에 진입한 친구도 몇 명이 더 있다. 또 특이하게 74학번으로 서울대 사대에 입학해 78년 졸업한 뒤 철학과에 학사편입해 ‘형’이기보다는 ‘친구’처럼 지내기를 더 좋아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철학과 77학번의 인원은 보기에 따라 17명에서 27명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이들이 모두 함께 학교에 다닌 학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른바 주류 중에는 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수가 된 친구가 많지만 비주류 중에는 다양한 ‘삶의 체험 현장’을 겪은 친구도 상당수다. 철학과 77학번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감방(감옥생활) 경험’이 있다. 주로 민주화 운동과 관련돼 있지만, 노동운동 및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경우도 있다. 이들의 투옥 햇수를 다 합치면 수십 년은 된다. 강제징집을 당했던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러다 보니 졸업연도도 각각 달라 81년이 반 이상이긴 하지만, 85년을 넘어선 사람도 여럿 있고 입학한 지 14년 만인 91년에야 졸업한 사람도 있다. 학생운동과 관련해 잘렸다가 복학하지 않은 ‘고집스런’ 친구도 몇 명 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대체로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뉘었다. 유럽 계통의 ‘사회철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은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했고 영미 계통의 ‘분석철학’을 공부하던 친구들은 학구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처럼 철학적 취향은 달랐어도 우리 동기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언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술’이었다. 요즘처럼 양주나 맥주로 흥청거리는 술자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시절에 막걸리와 소주는 진지한 대화와 활발한 토론의 안주로 적격이었다.

    술을 안주 삼아 대화와 토론 즐겨

    당시 시국상황은 어두웠지만 철학과에는 나름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봉천동 고개를 넘으면 ‘일미집’과 ‘부산집’ 등의 허름한 술집들이 있었다. 막걸리나 소주에 김치나 빈대떡으로 허기를 때우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술이 깨고 나면 무슨 내용을 토론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었지만 ‘대화’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학내에서도 가끔 술자리를 마련했다. 잔디밭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몰래 사들고 온 소주나 막걸리를 돌리면서 야외 토론을 즐기기도 했다. 이것은 낭만적이기보다는 모험적이었다. 당시 긴급조치법에 따르면 학내에서 3명 이상이 모여 뭔가 숙의만 해도 회합죄로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캠퍼스 잔디밭에서 술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몇 명은 아예 일미집 위층에서 하숙을 했다. 어두워져서 술청으로 내려가 보면 대개 동기 한두 명은 만날 수 있었다. 일미집 아줌마의 귀엽던 딸은 지금 뭐하는지 궁금하다. 따뜻한 봄날이면 강의실에서 나와 소주병을 옆에 차고 관악산에 올라가 대자연 속에서 대화와 토론을 즐겼다.

    때로는 명분도 그럴 듯하게 붙였다. 당시 음대에 다니던 여학생이 실연한 충격으로 캠퍼스 뒤편 연못에 투신 자살을 했는데 그 여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누군가 술을 사들고 오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돼지고기를 볶아오기도 했다. 철학과 77학번이 음대생과 무슨 인연이 있다고 추모까지 했는지….

    철학과 봄 야유회에서 빠지지 않는 의식이 있었다. 교수님 한 분이 그 의식을 집행했는데 일종의 ‘바쿠스제’였다. 바쿠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이다. 니체는 인류의 문명을 아폴론적인 것과 바쿠스적인 것으로 나눈 적이 있는데 전자가 질서, 이성, 합리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혼돈, 감성, 비합리적인 것을 뜻한다.

    음식과 술을 들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면 교수님은 ‘바쿠스제’를 선언했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순서에 따라 무릎을 꿇고 은박지 접시를 막걸리통에 갖다대고 입을 그곳에 대면 4학년 선배가 막걸리를 줄줄줄 따랐다. 쉬지 않고 누가 가장 오래 마시는지에 따라 급수가 정해졌다. 1분도 안 돼 탈락하면 주졸(酒卒), 그 위로 주사(酒士), 주장(酒將), 주왕(酒王), 주선(酒仙)이 있고 가장 오래 견딘 사람을 그해의 주신(酒神) ‘바쿠스’로 뽑았다.

    철학과 77학번들은 전체적으로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학창시절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이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자나 제적자, 강제징집자가 다른 과에 비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노력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됐고 대체로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문화운동, 사회운동 등 각종 ‘운동’으로, 다른 쪽으로는 현실의 모순을 구명하고 극복하기 위한 학술·언론·문화 등 분야에서의 활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쓴 것이다. 이는 ‘현실을 이상화’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0대 중반을 앞둔 지금은 ‘현실의 이상화’보다는 ‘이상의 현실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자기 영역을 찾아 자신만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쪽이 비슷한 듯하나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불만스러운 현실을 바꾸는 데 초점을 뒀다면 후자는 오랫동안 꿈꿔오던 것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나가는 데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만큼 정신적·물질적 역량을 축적했다고도 할 수 있고 꿈을 펼칠 수 있는 현실적인 분위기와 기반이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사회주의권의 붕괴 및 국내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70~80년대식 ‘큰 그림 그리기’가 퇴조하고 이상을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철학과 77학번 친구들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 크게 성공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다. 권력이나 재력을 갖출 능력도 없겠지만 사고방식이 그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상을 현실화하려고 애쓰는 친구가 많은 편이다. 그런 친구 몇 명을 소개하고 싶다.

    우선 여균동이라는 영화감독이 있는데 대중에게 꽤 알려져 있다. 이 친구는 ‘세상 밖으로’ ‘미인’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감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도 쓰고 ‘주노명 베이커리’ ‘이재수의 난’ ‘박봉곤 가출사건’ ‘맨’ ‘너에게 나를 보낸다’ ‘성공시대’ 등에 영화배우로 출연도 했다. 이 친구는 대학 다닐 때 시를 쓰기도 하고 한동안 마당극 연극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이처럼 다재다능한 친구가 어떤 영화제에서도 수상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이 ‘귀재’를 몰라주는 것인지 운명적으로 상복이 없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여균동은 6년간에 걸쳐 서울대에 다녔지만 실제 적을 둔 기간은 모두 합쳐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대학 1학년 때 어느 술자리에서 ‘해동청 보라매가 봉천동 고개를 넘어가느니 마느니’ 하는 노래를 걸게 부르더니 1학년 말 교내시위 때 ‘못된’ 선배의 꾐에 빠져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버렸다. 이때 제적된 그는 80년에 복학해 철학과로 진입했으나 바로 그 봄을 버티지 못하고 2개월 만에 다시 제적됐다. 당시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팔씨름에 가장 센 보안사 요원과 시합을 했는데 ‘맞지 않으려고’ 일부러 져줬다는 일화가 있다.

    83년에 다시 복학했으나 2학기 때 또 제적된 후에는 아예 사회운동과 문화예술 활동에 전념하느라 아직까지 졸업장을 ‘구경’하지 못한 상태다. 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 운동 관련 집회장에서 여러 차례의 멀티슬라이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본인은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으나 현실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마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영화배우 겸 감독 ‘여균동’은 어디에서도 찾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재미보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그런 ‘철학적 영화’가 대중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을지 늘 염려스러워한다.

    목소리가 우렁차서 시위나 집회 때마다 눈에 잘 띄던 정광필은 지금 경기도 분당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경기도 광주에 부지를 마련하고 2003년에 대안학교를 개교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그도 1학년 때인 77년 가을 학내시위와 관련해 제적됐다. 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1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대통령이 숨진 날인 79년 10월26일 입대했다. 82년 2학기에 복학해 86년에 졸업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83년부터는 노동현장에서 생활하면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함께 했다.

    교육으로 눈을 돌린 것은 90년대 초반부터다. 당시 관여하던 민중당이 사회노동당과 진보정당추진위로 갈라지면서 ‘현실 정치’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현실적으로는 정치가가 돼야 하는데, 자신과는 도저히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운동가로 남을 수 있는 기반도 크지 않은 것 같아, 먼 장래를 내다보고 교육을 택했다.

    20대의 유연한 몸매를 간직한 의사

    신체는 근육질로 다져졌지만 다정다감하던 변우식은 대학 때 기독교학생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의사가 돼 있다. 그는 81년 2월 철학과를 졸업한 뒤 바로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가을 휴학하고 입대해 84년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그 뒤 여러 해 동안 인천·부천·경주 등의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간사로 일했다. 그러다 90년대 초반에 의대 1학년에 다시 입학해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충남 보령시 보건소 관리의사로 근무중이다. 10여 년 동안 동기들과는 소원하게 지냈는데 최근 그를 만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멋있는 ‘철학적 의사’가 됐다고 한다.

    보건소에서 진료를 전담하고 있는 그는 인간의 생·노·병·사 문제 해결은 인류의 숙원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어 철학 신학에 이어 다시 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질병과 노화에 대해 그는 독특한 생각을 갖고 있다. 질병과 노화도 자신이 학습한 신념의 결과물이며, 이 신념(또는 의지)의 변화에 따라 삶의 형식이 바뀌고 질병과 노화가 치유되기도 하고 지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질병과 노화를 포함해 외부세계는 내부세계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우주에서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몸과 마음의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생명체로서의 인간 완성”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통일이다. 아울러 그는 이런 노력을 이웃과 함께 하는 일종의 공동체 운동을 통해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업의가 아니라 보건소를 직장으로 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광필도 그렇지만 변우식도 무인 스타일이다. 키는 크지 않지만 못 하는 운동이 없고 강하고 튼튼하다. 한마디로 강철 같다. 얼굴에는 건강함에서 오는 자신감이 보이고, 손목을 잡으면 내공의 힘에 압도된다. 최근 변우식을 본 사람은 군살이 하나도 없는 마른 몸매에 놀란다.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고 한다. 언제 한번 볼품없는 ‘똥배’만 나온 동기들끼리 모여 변우식을 연사로 모시고 건강과 몸매 관리에 대한 강의를 들어보자고 제안한 친구도 있다.

    철학이 사람과 세계의 근본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탐구 방법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분석과 직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분석은 이성, 논리, 합리, 정합성 등과 관계된다. 철학과 출신들이 차고 냉정하게 보이는 것은 분석이 앞서기 때문이다.

    세계 훗설학회에서 알아주는 철학교수

    학창시절 수업시간(사실 어수선한 학내사정으로 제대로 수업이 이뤄진 적이 별로 없지만)이나 동기들 사이의 세미나, 술자리 등에서는 새로운 개념과 논리가 난무했다.

    그때마다 큰 덩치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한 친구가 종횡무진의 논리로 다른 사람을 기죽이곤 했다. 박정희식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하면 비판이론을 들고 나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얘기하고, 비판이론을 좀 공부한 뒤 얘기하면 다시 비판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뒤 변증법을 풀어놓는 식이다. ‘무늬’만 동기였지 완전히 선배격이었다.

    그의 논리가 정통이었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가 이후 학자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현재 교수로 있는 이남인(서울대), 민찬홍(한남대), 김재기(경성대) 등도 뛰어난 논객이었다. 특히 이남인과 민찬홍은 사회문제에 대한 시각이 다소 다른데다 일찍부터 학자의 길을 선택했으면서도 동기들의 각종 모임에 꾸준히 참여한 것을 지금 생각해보니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남인은 훗설이라는 세계적인 철학자가 제창한 ‘현상학’을 전공했는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열린 훗설학회에서 주목할 만한 논문발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동기들 중에 기자가 둘이나 있으면서도 이를 널리 알리지 못했으니 ‘뛰어난 학자도 친구의 눈에는 친구일 뿐’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다.

    시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는 이성백은 학창시절에 과대표를 지냈다. 순탄하게 성장했음이 외모에서도 드러나는 그는 당시 운동권적인 과 분위기 때문에 마음 고생을 꽤 한 것 같다. 그러나 야외에서 술판이 벌어지면 현란한 제스처와 함께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멋지게 불러 박수 갈채를 받곤 했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다가 독일 베를린 대학에 유학했다. 그가 소련철학을 전공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철학과 77학번 중 몇몇은 다소 놀랐다. 활발한 성격이긴 하나 학창시절에 사회문제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하게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서의 소련철학의 개혁 시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교수가 됐지만 소련 동구 붕괴의 여파로 국내에서도 이 분야의 철학은 시들해진 상황이었다.

    그는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명예가 실추된 마르크스주의를 21세기의 시기적 상황에 맞는 진보적 사상으로 재정립하는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적 재구성이란 연구 목표 아래 20세기 서구 마르크스주의 흐름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이론 등 기존 철학 및 일반 사회이론의 비교 연구, 사회 현실 변화의 새로운 주제들인 신자유주의, 정보화, 생태위기, 페미니즘 등에 대한 좌파적 관점의 이론적 해명 등이 구체적인 연구 대상이다. 그는 나이 들면 자신이 사는 조그마한 지역을 ‘사람’이 사는 소규모 지역공동체로 발전시키는 데에 일조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사실 철학과 77학번으로 학계로 나간 사람들은 자리잡기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다른 학번에 비해 비교적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공부하는 시기도 길어지고 유학파도 적은 편이다. 그중에는 강사생활을 14년간 한 사람도 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철학과 77학번 출신 교수 가운데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학문적 혈연의식이 강하다는 서울대에도 철학과 77학번 교수는 1명밖에 없다.

    철학과 77학번 가운데 상당수가 ‘따지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철학의 성격과 철학과의 풍토에 비춰볼 때 우연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준비작업을 한 셈이다.

    그중 한 사람이 변리사로 있는 오세중이다. 그도 1학년 때인 77년 가을에 학내시위로 제적됐다가 80년에 철학과로 복학했다. 이후 ‘학교에 다니고 싶었으나’ 80년 봄 계엄철폐 문제와 관련해 학내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여했다가 수배된 뒤 광주민중항쟁 관련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구속됐다. 이후 80년 중·후반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88년 다시 복학해서 77학번으로는 가장 늦은 91년에야 졸업했다. 바짝 마른 그가 한때 더 바짝 말랐던 재야 운동가 계훈제씨를 ‘모시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변리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운동권 사람들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그도 정치와 전문직을 사이에 놓고 갈등했다. 정치는 성격에 잘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변리사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합격했다. 지금은 ‘잘 나간다’는 소리도 듣는다.

    변리사를 선택한 것은 논리와 분석력을 요구하는 것이 철학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남이 안 하는 분야이고 앞으로 성장할 분야라는 점도 고려됐다. 그는 지금의 직업이 지적 재산, 즉 끊임없는 창조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철학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매일 하는 일은 철학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말이다. 자기 것을 따지기보다는 남 좋은 일만 할 것 같은 허남정도 뒤늦게 변리사가 되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는 인문계열 1학년이던 77년 가을에 학내시위와 관련해 제적됐다. 다음해에 복학해 철학과에 다니다 1년 뒤인 79년 가을에 강제징집돼 입대했다. 80년에 복학해 82년 졸업한 그는 직장 근무를 거쳐 인천과 성남 등에서 여러 해 동안 노동운동을 하다가 90년대 초에 손떼고 다시 다른 대학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키가 크고 깔끔했던 이영인은 일찍부터 회계사로 일하면서 ‘숫자’와 씨름하고 있다. 그 직업이 철학과 출신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몇 년에 한 번씩 동기 모임에 나와 ‘철학적 분위기’를 관조하면서 즐긴다. 그래도 그는 대학원까지 가서 철학 공부를 한 바 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한 것이 업무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데 회계에 무지한 필자로서는 그 경지를 알 길이 없다.

    제일 먼저 소개했어야 할 ‘장형’ 이치범은 서울대 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철학과 77학번에 합류한 경우다. 자그마하고 말랐지만 속에서 뿜어내는 정열은 동생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고교 때 응원단장을 한 적이 있는 이 형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뒤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한국자원재생공사 이사로 일하고 있다. 먹거리에서부터 종교, 환경문제에 이르기 해박한 지식에 동기들은 늘 감탄한다.

    대학생 딸에서 돌 지난 아들까지

    지금 철학과 77학번을 보면 다들 웬만큼 먹고 살기는 하는 것 같은데,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업가인 친구들도 ‘돈’보다는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데 마음이 가 있다.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남충희가 있다. 그는 80년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뒤 얼마 있다가 오퍼상 업무에 뛰어들었는데 최근까지 그 일을 계속했다. 90년대 이후에는 사업가 냄새가 풀풀 났고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동기들과 만날 때면 교수와 기자들은 뒤로 빠지고 술값을 내는 것은 그의 몫이었지만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자신이 워낙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다가 어리석은 돈자랑은 하지 않으니 그 소문을 확인할 길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그는 최근 사업을 정리하고 강원도 시골 마을로 내려갔다. 웬 ‘조기은퇴’냐고 하자, 사업을 하면서도 그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날씨가 풀리는 대로 일종의 사회사업을 해볼 생각을 갖고 있다. 동기들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교육방송 외국어 교재를 주로 출판하는 홍익미디어 대표로 있는 유대기는 생활고 해결과 사회운동의 방편으로 출발했던 출판사업을 발전시켜, 이제 종합 미디어사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큰돈을 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사업을 펼치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 듯하다. 그는 장사꾼을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사업이 돈을 버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살기 좋아지고, 그 구성원들이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70~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가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젊었을 때의 꿈을 유지·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문화센터 등에서 여러 강좌를 듣는다. 머리가 녹슬면 꿈도 사라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키도 헌칠하고 얼굴도 잘생긴 유대기는 동기들 중 가장 노숙하다. 그 배경에는 가장 먼저 결혼을 해서 붙은 사회생활의 관록도 있지만 일찍부터 출판사업에 뛰어든 경륜 탓도 있다. 동기들 중에는 연애조차 해보지 못한 ‘철부지’가 있던 학창시절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학번 위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을 한 유대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허름한 신혼 단칸방에 놀러가서도 아직 ‘어린’ 동기들의 눈에는 그들이 겪는 생활고가 보일 리 없었다. 남편은 학생운동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우기도 하고 경찰의 감시를 받는 바람에 부인이 엄청난 고생을 했다.

    유대기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지금 큰 딸이 벌써 대학교 2학년이어서, 동기들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반면 이성백은 이제 아이가 막 돌이 됐다. 공부만 하느라 애를 만들어 키울 시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유대기 딸과는 거의 한 세대가 차이 나는 셈이다. 철학과 77학번들이 여느 사람처럼 20대 후반에 결혼했다면 첫아이가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광필은 아이가 7살이다. 본인 말로는 노동운동·진보정당운동·통일운동 등을 하면서 자신이 두 차례, 부인이 한 차례 엇갈려 감옥 생활을 하는 바람에 ‘하늘을 보고 달을 딸’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오세중도 첫아이가 8살인데, 세상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느라 결혼이 늦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려는 친구들

    요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우려가 많다. 철학이 꼭 인문학이어서가 아니라, 철학과 77학번들은 대체로 인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는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국토분단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라고도 한다. 사실 당시 철학과는 인문계열에서 진입할 때 성적 순으로 끊으면 항상 상위에 있었다. 인문계열 77학번 중 가장 성적이 좋았던 친구도 철학과를 선택했다.

    79년 이전에 학내외 시위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가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한 20명 가량의 인문계열 77학번들에게 과를 골라잡게 했더니 대부분 1지망으로 철학과를 꼽았다는 얘기는 지금도 ‘전설’로 내려온다.

    이들이 철학과를 선택한 것은 철학이 사람을, 그것도 근본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문학)·사(역사학)·철(철학)로 이뤄진 인문학은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사람을 키우는 학문이다. 이런 인문학이 괄시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사람 이외의 것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능이나 기술일 수도 있고 돈벌이 방법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경쟁에 쫓기다 보니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지고 사람들이 가벼워지다 보니 그게 바로 사람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77학번 누구나 ‘박윤배 도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성백이 독일에서 귀국한 다음날 북한산에 올랐다. 중턱에서 쉬는데 한 사람이 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흰 운동모자를 쓰고 있는, 도사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당혹해하는 이성백에게 모자를 벗어보이고 인사한 그가 바로 박윤배였다. 그 날 두 사람은 남은 일정을 동행했다. 산을 내려와서 가볍게 술 한잔을 하고 헤어졌다. 이성백이 보기에 그는 도사가 돼 있었다. 동행하는 내내 그는 미소를 띤 채 해학적 말풀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풀어보였다.

    박윤배는 몇 개월 또는 몇 년씩 잠적했다가 나타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기독교·불교를 포함해 여러 종교를 연구했고 도를 닦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하다. 철학과 77학번은 가끔씩 그를 만나 몇 마디 듣는 것으로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그는 인간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웃음과 해학을 통해 우리를 일깨우곤 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먹을 것이 없는 동기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곤 했다. 그 배경에는 동기들을 늘 따뜻하게 맞아주던 그의 어머니가 계셨다. 그의 집은 당시 경찰의 수배를 받던 사회운동가나 학생운동가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철학교수가 될 법했던 그는 의식화 관련 서적을 내는 출판 사업도 하고 이 바람에 구속되기도 했고 한때는 노동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얼마 전 그를 만나본 친구들의 말로는 인터넷상에서 청소년들의 문제를 상담해주기도 했다는데 최근에는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할 뿐이다.

    사람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사람으로서 커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으면서도 술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인생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함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커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학창시절의 기억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술 먹고 이야기하고 싸운 것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인문학적 사고를 키워나갔다. 우리는 이것을 ‘필로조피렌(Philo-sophieren)’이라고 부른다. 단지 철학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정부가 인문학에 매년 1조원 이상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정신·교육·생각 등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규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며, 말과 생각을 하고 들어줄 수 있는 체계, 즉 대화 체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경험하면서 말하고 고뇌하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술 마시고 고민하고 논쟁하는 것을 꼭 필요한 과정으로 인정해야 한다.

    철학과 77학번은 대부분 강의보다는 친구에게서 배운 게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77학번의 한 사람은, 다른 친구가 ‘변증법의 논리를 나에게 설득해봐라’고 하자 책에서 읽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설득할 수는 없었다며, 그때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자기 것이 아닌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민족주의에 대해 세미나를 하는데, 고교 때 배운 것이었지만 다른 친구가 요모조모 따지고 들자 모든 단어가 생소했고, 그래서 지나간 모든 세월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철학과에서 한 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인간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배움은 술자리, 토론회, 각종 도전과 실패 등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분위기 등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이뤄진다. 이게 인문학이다. 사회가 성장·발전할수록 인문학도 발전해야 삶이 풍요로워지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철학과 77학번들은 지금도 인문학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키워나가면서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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