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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中)

  • 송문홍songmh@donga.com

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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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6년 말 국회에서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 개정안 파문을 결정적인 고비로 YS 정권은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97년 초 한보사태가 온 나라를 뒤흔들자 김영삼 대통령은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구속하도록 지시하는데…. 그 시절 YS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광일 대통령 비서실장, 서진영 정책기획위원장이 털어놓는 문민 비화 2탄.이 연재는 고려대학교 정경학부의 ‘대통령학’ 수업에서 이뤄진 ‘김영삼정부 심포지엄’에서 녹취한 내용을 같은 대학 대통령학 연구실(실장·함성득 교수)의 협조하에 발췌·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
”YS가 돈 안받겠다 했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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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92년 대선에서 문민정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 민주화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는 숙명적으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적 소명을 받은 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오래 모셨고 민주화 투쟁과정에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보좌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 얘기하면 여러분은 ‘저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모시고 높은 자리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시대적 과제와 역사적 소명을 나름대로 고민해가면서 추진하려고 애썼고, 그러면서 어려움도 많이 당했기 때문에, 93년 2월25일 출범한 김영삼 문민정부는 역사의 필연이고, 국민의 소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제 말씀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 투쟁사와 헌정사의 큰 흐름에 편승해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한 분이 아니라 그 흐름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몫을 한 분입니다. 김영삼과 의회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과거 30년간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부문에 군사문화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든지 청산해야만 우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문민정부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앞서 강의한 분들이 이 얘기는 많이 했을 거라고 봅니다.



첫째가 청와대 앞길 개방, 인왕산 개방, 안가 철수였습니다. 새 대통령이 들어섰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때 분위기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안가를 철거했다는 사실인데, 이건 작은 의미로는 대통령이 술먹고 여자들 데리고 노는 곳으로 볼 수 있지만, 원래는 대통령이 돈 받던 곳입니다. 그래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시작했다, 그렇게 봐도 됩니다. 대통령 취임하면서 ‘지금부터 돈을 한 푼도 안 받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설마하면서 농담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오랫동안 YS를 모시던 사람들은 ‘저 양반은 한번 꺼낸 말은 하늘이 무너져도 꼭 지키는 분’이라는 걸 압니다.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원리원칙대로 깨끗한 돈을 써야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돈 받는 관행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돈을 안 주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따르지 않아요. 국정운영이라는 게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센티브를 줘야 하는데, 그것을 다 포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솔직히 말해서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공직자 재산등록과 금융실명제

그 다음으로 시행한 게 공직자 재산등록 공개입니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제가 민자당 부대변인으로 있었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정말로 실명제를 하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할 거냐”고 물어요. 나는 “하실 거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기자가 말하기를, 재무부에서 국장쯤 되면 통장이 70∼80개쯤 있대요. 우리는 통장 없이 살았거든요. 야당 하면서 돈이 없으니까 통장이 없고, 누가 주면 주머니에 넣고 쓰다가 떨어지면 또 얻어쓰고,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통장이 70∼80개라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 같은 돈인데 이 통장 저 통장에 넣어놓는다고 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70~80개 되느냐”고 했더니 “하여간 정부에 들어가보면 이해가 갈 겁니다” 그러더라고. 그 기자 말은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금융실명제를 하고 재산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른이 꼭 하실 거다” 그렇게 말했어요.

과연 하시더라고요. 재산등록 공개를 해보니까 나처럼 돈없는 사람도 굉장히 불편하더라고요. 거기다 보완조치로 부동산 실명제까지 해놓으니까 정말로 큰돈을 뇌물로 먹기는 불가능하고, 뇌물을 먹어도 그 돈을 자기 재산으로 만들기는 더욱 불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재주좋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처럼 돈에 관해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참 어렵더라고요.

제가 공보처차관 하다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가게 됐어요. 청와대에서 가까운 데에서 살아야 하니까 화곡동 집은 그대로 두고 청와대 주변에 전세를 얻었어요. 공보처 차관으로 등록할 때 아파트 값을 2억5000만원으로 신고했더니 총무처 직원이 와서 말하기를, 장·차관들은 모두 국세청 가격으로 냈는데 나만 실제 가격으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국세청 가격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바꿨어요. 그러니까 1억2000만원이더라고요.

그 뒤 청와대 주변으로 이사한 뒤에 그 집을 2억500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재산 변경등록을 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1억3000만원이 늘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집을 국세청 가격으로 신고한 것과 매매가격으로 신고한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나더라고요. 공직자 재산등록이 그만큼 불편한 겁니다. 아무튼 공직자 재산등록과 금융실명제는 소위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 게 사실입니다.

금융실명제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겠는데, 금융실명제라는 게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해서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고, 부정부패를 막고, 과세를 공정하게 한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시장에서 한 평, 반 평짜리 가게 하는 분들의 저항이 엄청났습니다. 그분들은 과세특례자로서 부가가치세도 잘 안내고 세금도 잘 안 내다가 이제부턴 세금을 내게 생겼단 말이에요. 이렇게 있는 사람, 재벌이 아니라 서민으로부터 저항이 오더라고요.

우리가 처음 개혁을 시작할 때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서 당신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응답자의 90%가 세금을 더 내겠다고 했습니다. ‘개혁을 하면 당신이 가진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내놔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90%가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의 효과가 자기들에게 오니까 개혁은 고통을 주는 것, 자기네 기득권과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이 된 겁니다.

군개혁과 역사 바로 세우기

다음은 군의 사조직 척결입니다. 저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어요. 정치를 하면 적이 더 많습니다. 투표를 해봐도 절반 이상이 반대하거나 무관심합니다. 인구 20만명인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3만6000표 정도 받으면 됩니다. 인구 20만명에서 유권자는 한 15만∼16만명 되고, 그중 투표하는 사람은 60% 정도, 약 9만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유효 투표의 40% 정도를 받으면 압도적으로 당선됩니다. 그래서 3만6000표 정도면 압도적인 당선이에요. 선거구민 입장에서 보면 20만명 중 15%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나머지는 국회의원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치 하는 사람들은 욕먹게 돼 있어요.

반면에 군은 모든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군이 너무 강력하면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 박정희 쿠데타가 용납되고, 전두환 쿠데타가 용납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군부에서도 하나회에 속한 사람들은 동기생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나눠먹고 그랬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어떤 정치학과 교수는 “김영삼 대통령도 결국 군과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국방장관이라는 사람이 25일 취임식 전에 “한국군은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 인터뷰 속에는 “김영삼 정부도 결국 군과 협력해서 나라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위협이라고요. 그들은 그걸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군의 힘이 컸으니까.

김대통령께서 이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척결하겠다고 결심하신 모양이에요. 노태우 대통령 당시 참모총장이 경남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모두 갈았습니다. 앞서 강의에 나온 분 중에 “별이 모자라서 일단 남의 것을 빼서 줬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건 군이 군답게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군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다시는 군이 쿠데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책을 마련한 대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취임 당시에 두 세력 때문에 김대통령도 결국 이전 대통령들과 똑같아질 거다라고들 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재벌입니다. 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옛날 선거 치를 때 신세지고…. 당시 언론들은 “3개월 안에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이 무너질 것이고, 그 다음 6개월 안에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재벌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게 당시 좀 잘났다는 사람들이 하던 얘기였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도 처음부터 노태우 대통령을 형사 처벌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신 것 같아요. 집권 초기에 “역사에 의해서 심판받아야지 법에 의해서 심판받을 사안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복권시켜놓고, 광주문제와 관련해서 청문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숨겨놓은 엄청난 비자금이 발견됐을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고 봅니다. 저도 정무수석으로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는데, 여러분 선배인 박계동 의원이 폭로해서 신문에 나오고 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UN에 가 계셨는데,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저는 그것이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정권이 정경유착을 통해서 만든 검은 돈을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바로 세우기는 김영삼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라기보다는 역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시킨 소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인이 개혁을 하면 표를 잃게 됩니다. 미국의 어떤 대통령 학자가 “개혁은 탈유권자 정책”이라고 했습니다. 인기와는 담을 쌓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개혁을 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개혁은 한 정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5년 단임제하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개혁의 대상과 과제 때문에 청와대 수석들 간에도 상당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들은 김대통령 같은 개혁지상주의자가 집권했을 때 어떻게든 모든 분야의 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저희처럼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개혁의 효과가 20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고 30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김대통령 임기 중에는 금융실명제라든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제도화라든지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걸로 끝내야 된다. 나머지는 다음 정권이 이어받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현실주의자 내지는 개혁 반대자가 되고, 그분들만 개혁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반드시 그랬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랬습니다. 그만큼 개혁은 힘들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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