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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中)

  • 송문홍songmh@donga.com

YS정권 핵심 실세가 회고하는 문민정부 5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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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문민정부의 정치개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문민정부가 깨끗한 정치를 제도화했다고 자부합니다. 1994년 4월3일 통합선거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통합선거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전에는 선거법이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 선거 등 따로따로 있었어요. 선거에 따라서 적용되는 법이 다 달랐습니다. 그리고 선거 날짜가 법률로 정해지지 않아서 선거 날짜를 점쟁이한테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거 날짜를 법제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선거운동 방식입니다. 당시 야당 총재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말은 풀고 돈은 묶자, 정부도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선거운동은 많이 할 수 있게 하고 돈은 못 쓰게 하자, 그래서 포괄적 금지규정을 없앴습니다. 포괄적 금지규정이란 무엇무엇은 해도 된다, 대신 여기 열거되지 않은 것은 못 한다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금지되는 사항을 열거하고서 나머지는 다 된다, 이렇게 했던 거예요.

그 전에는 전국구를 의석비율로 했는데 이걸 득표 비율로 바꿨습니다. 선거비용을 실사했습니다. 후원회 제도를 확대하고 국고 보조금도 만들어서 선거비용을 실사했는데, 과거에는 형식적으로 신고한 대로 그냥 다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선거비용 공개를 의무화하고, 또 선관위에서 실사를 했습니다. 물론 인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 한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사람들에 대해서 검찰에서 판단해서 기소하지 않을 경우에 선관위나 당사자가 제정신청을 하면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서 재판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후보자 한 사람만 위반했을 때에 선거가 무효가 되거나 당선이 무효가 됐는데, 이제는 후보뿐만 아니라 사무장, 배우자, 친척까지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으면 당선이 무효로 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으로 까다롭고 엄격한 법이었습니다. 당시 김대통령도 “선거법을 영국식으로 엄격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선거법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만들어도 국회의원들이 결국 자기들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만들어놓기 때문에 원래 의도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운 선거법이 됐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엄격한 선거법이 됐습니다.

둘째, 정치자금법의 제정입니다. 후원회 재정을 대폭 확대하고, 국고보조금을 늘렸습니다. 유권자 1인당 600원이던 것을 800원으로 늘렸고, 야당이 집요하게 요구하던 쿠폰제 헌금을 수용했습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야당에 정치자금을 잘못 줬다가 혼날까 봐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줬는지 모르게 쿠폰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여당이 수용했습니다. 제도를 그렇게 만든다고 정치자금이 골고루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야당 사정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한나라당이 평상시에 국고보조금을 백몇십억원씩, 심지어 민국당도 20억원씩 받아가서 그것만으로 당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선거운동원은 과거보다 10분의 1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시 예전으로 환원돼 선거운동원이 과거보다 오히려 많아진 것 같습니다.



공정한 선거관리 자부한다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입니다. 지방자치제 기본법은 노태우 대통령 때 만들어졌는데 실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걸 김영삼 정부가 전면 실시했습니다. 사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 정부 여당의 기득권을 상당 부분 내놓는 겁니다. 시장 군수 모두 임명하면 될 걸 선거로 뽑으니까 정부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어요. 전라도는 어느 당, 경상도는 어느 당, 충청도는 어느 당, 이렇게 나눠먹게 돼 있다고요.

그런데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국가공동체를 운영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전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했습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결과 지방재정이 무너지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지만, 그런 부작용은 고치면 되는 겁니다. 그때 기본 제도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못 했을지 모릅니다. 실질적으로 중앙 업무가 93, 94년 사이에 464건이 지방으로 이양됐고, 95년에는 137개 사무가 이양됐고, 지자체에 근무하는 공무원 1만1000여 명이 지방공무원으로 전환됐습니다.

그 다음에, 집권당이 솔선수범해서 선거 풍토를 바꾸려고 노력한 것도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선거라면 죄다 부정선거이고, 여당이 관권선거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선거문화를 바로잡겠다는 대통령 의지가 대단했어요. 부정선거는 관권이 개입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돈을 뿌리는 금권 선거, 대체로 이 두 형태입니다.

그런데 94년 8월에 3개 지역에서 보선이 있었습니다. 대구 수성 갑구에서 박철언씨가 형사사건으로 의원직을 잃고 부인이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경주에서 이상구씨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강원도 영월에서 김기수씨가 출마했는데, 3개 보선에 두 지역에서 여당이 지고 한 지역에서 겨우 당선됐습니다. 당시 제가 정무수석이라고 해서 당으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습니다.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에 본부를 옮겨놓았는데, 우리는 중앙당 지원을 제대로 못하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의지가 원체 강했으니까. 저도 물론 선거에서 이기고 싶었지요. 지원하면 이길 것 같은데 당에다가는 지원하지 못하게 하니까, 당시 당에서는 ‘이원종 저 놈 빼야 된다.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아무튼 우리가 참패했지만, 당시 언론이나 민주당 대변인마저 공명선거라는 데에 이의가 없다고 했어요. 통합선거법이나 후원회, 쿠폰제 도입했을 때에도 야당 대변인이 여당에 감사한다고 했어요. 당시 선거를 생각하면 김대통령이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 속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지경입니다.

95년 6월 4대 지방선거 관리가 얼마나 공정했느냐 하는 것은 선거 결과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이 결과를 놓고 사람들은 “당신네가 국정을 잘못했으니까 결과가 그렇게 됐지 선거 관리를 잘해서 그렇게 됐냐”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선거에서는 지역성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잖아요. 이건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시 15개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민자당이 3분의 1인 5석을 차지했어요. 경기, 인천, 부산, 경남, 경북입니다. 민주당은 서울, 광주, 전북, 전남 4석입니다. 자민련은 대전, 강원, 충남, 충북 4석이었습니다. 대구, 제주는 무소속이었습니다. 이건 우리 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은 국민의 수준과 함께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김영삼 대통령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치렀습니다.

96년 4월11일 총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우리가 선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서울에서 여당이 과반수를 넘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소선거구제하에서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선거에서 두 사람을 뽑는 중선거구제는 몰라도 단 한 사람을 뽑는 선거에서는 심지어 27개 선거구에서 여당이 딱 한 사람 당선된 적도 있습니다. 잘 돼봐야 2∼3명. 그 뒤 선거구가 늘어서 잘해봐야 여당이 10∼11석이었습니다. 그런데 96년 4월 선거에는 우리가 서울에서 27석을 얻었습니다. 그때 조세형씨, 정대철씨, 한광옥씨 등 지금 한창 잘 나가는 의원들이 많이 떨어졌지요. 나는 우리가 깨끗한 선거 풍토에 대한 의지를 갖고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자부합니다.

97년 대선의 공정한 관리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대단한 의지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정권이든지 정권 재창출은 지상명제입니다. 정권 재창출을 생각하지 않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해체해야 해요. 그래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선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선거 관리, 검찰, 사법부, 이런 곳에 여당에 우호적인 사람을 앉히는 겁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그걸 거부했습니다. 선거관리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총리를 호남 출신인 고건씨로 임명했고, 검찰총장도 호남 출신으로 선거를 치렀습니다. 또 한나라당이 제기했던 김대중씨 비자금 사건 수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걸 수사하겠다고 했으면 선거가 안 돼요. 그렇게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후임 대통령을 뽑겠다는 일념으로 선거를 치렀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이회창씨에게 욕먹고 있잖습니까? 김대중 대통령도 이 점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97년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했다는 것과 하나회 척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노동법 개정, 나는 반대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저는 원래 노동법 개정에 반대했습니다. 헌법 개정보다도 힘든 노동법 개정을 왜 합니까? 우리가 무슨 영국의 대처내각입니까? 아무튼 나는 그걸 반대했어요. 그런데 각하께서 노동계의 누구와 의논했는지 모르지만 노개위를 만들었잖아요. 노개위를 만든 건 좋은데, 어느 날 느닷없이 9월 며칠까지 노개위가 합의되든 합의되지 않든 그 상태대로 보고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대통령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노동법을 바꿔서 국가경쟁력을 키우자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상품은 골라서 살 수 있는데, 노동이라는 상품은 골라서 살 수 없단 말이에요. 아무튼 나는 ‘이 어른이 정말로 노조와 한번 붙겠다는 얘긴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의해서 정부안을 만들었어요.

나는 정부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사실 몰랐어요. 그런데 정부안에서 핵심이 “정리해고는 3년 유예하고 복수노조는 즉시 시행한다”는 건데, 이게 당에 가서 부딪힌 거예요. 이상득씨처럼 경영을 아는 사람들이 “정리해고는 즉시 시행하고 복수노조는 유예한다”는 쪽으로 주장했지요.

이 개정안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는 건 합의가 돼 있었던 거예요. 김광일 실장이 날짜와 시각을 정확하게는 몰랐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정기국회 다 끝나고 임시국회를 열었던 것 아닙니까?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는 몰랐을 수 있지만, 그 원칙은 알고 있었어요. 그때에도 다음해 1월에 하자는 주장이 있었어요. 야당에서도 그렇게 하면 협조하겠다고 했고. 그러나 야당에 또 한 번 속는 것일 뿐이라고 해서 그냥 밀고 간 겁니다. 과거의 예로 볼 때 야당이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들어줘본 일도 한번도 없고….

방청석 질문:“또 속는 것일 뿐”이라는 느낌은 당시 이원종 수석이 잡았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내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습니까? 의견은 내놓을 수 있어도 결정은 공식기구에서 합니다. 당에서 판단할 때는 야당 요구대로 1월에 가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고, 아마 실제로 안 됐을 겁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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