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돌아온 탕아, 세계 정상에 오르다

  • 이흥환 hhlee0317@yahoo.co.kr

    입력2005-05-10 15: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미국의 내로라는 언론들마저 그를 ‘조지 부시 주니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이 똑같지 않는 한 아들을 주니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때에야 그는 ‘조지 W. 부시’라는 자기 이름을 찾았다.
    조지 W. 부시의 집안은 미 동북부의 명문가다. 텍사스 집안이 아니다. 아버지 조지 부시와 어머니 바바라 부시 모두 부와 명성을 두루 갖춘 뉴 헤이븐의 명문 출신으로 두 살 난 장남 부시와 텍사스로 옮겨가기 전에는 예일대 총장의 이웃집에 살았다. 따라서 부시도 사실은 텍사스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북부의 명문가 출신이다.

    부시는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흔치 않은 경우다. 고등학교(매사추세츠 주의 필립스 앤도우버 아카데미)와 대학교(예일), 대학교의 클럽 활동마저 똑같다. 파일럿으로 군 복무를 한 것도, 텍사스에서 석유 회사를 운영한 것도,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던 것도 똑같고, 아버지가 결혼한 나이와 부시가 약혼을 한 나이 20세도 똑같다. 아버지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닮은 것은 부자가 나란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가 부시 가문의 둘도 없는 기둥이요 중심으로 ‘가족들이 그의 주위를 빙 둘러싼 태양 같은’ 존재였는 데 반해,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라는 명함을 내밀기 전까지는 아버지에 훨씬 못 미쳤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그늘과 어머니의 인간성

    그는 늘 아버지의 그늘에 묻혀 있었고, 아버지와 비교가 되었다. 특히 군 복무 경력이 부시의 발목을 잡았다. 2차세계대전 때 아버지는 파일럿을 자원했고 영웅이 되어 돌아왔으나, 부시는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텍사스 주 방위군의 147전투비행단에서 근무했다. 최전선 근무를 피하려던 것 아니었느냐는 비난은 앞으로도 그에게 줄곧 따라다닐 멍에가 되고 있다.



    석유 사업에서도 아버지는 일찌감치 성공한 사업가로 출세했으나, 부시는 석유 사업에서 한번도 큰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단 한번의 단절도 없이 요직을 옮긴 끝에 백악관 열쇠를 잡은 것에 비해, 부시는 실패와 손가락질과 좌절을 맛보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와는 다른 길, 텍사스의 야구 구단 텍사스 레인저스를 운영하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성공담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부시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마흔 두 살에 텍사스 야구 구단 텍사스 레인저스를 사들인 투자 그룹에서 일을 하던 때와 텍사스 주지사로 일하던 때였다고.

    부시는 늦게 핀 꽃이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텍사스 출신다운 강한 이미지의 정치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성취하지 못한 ‘텍사스인’이 되었고, 텍사스 주지사가 되면서 그의 정치적 자질을 유감 없이 발산했다. 아버지는 텍사스의 주인이 되어보지 못했으나, 부시는 두 번이나 주지사 자리에 앉았다. 특히 두 번째 주지사 선거에서는 어느 공화당 주지사도 넘보지 못했던 민주당원과 히스패닉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머 감각, 매력, 상식에 바탕을 둔 대인 관계, 건강한 카리스마, 자신감 - 정치인 부시에 대한 이런 호평은 어머니 바바라 부시의 영향이다. 명문 부잣집의 버르장머리 없는 허풍쟁이, 그럴 듯한 학력에 형편없는 지성 - 부시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은 그의 호감 가는 인간성마저 부식시키지는 못했고, 미 국민의 평가에서도 면죄부를 받았다.

    부인 로라는 ‘부시의 성품과 성격은 이 어머니 바바라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아들은 바느질과 대화를 즐겨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성품이 어머니의 영향이라면 인내심과 열정은 아버지 부시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정치적 야망에 관한 한 아버지 부시는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 않고, 부시는 부시대로 젊은날의 방황을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

    부시는 1946년 7월6일 코넷티컷 주 뉴 헤이븐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부시가 예일대에 다닐 때다. 2년 후 아버지가 예일을 졸업하던 해에 부시 집안은 텍사스의 작은 공업 도시 오데사로 기반을 옮긴다. 이듬해인 1949년에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사하고 이 해에 부시의 여동생 로빈이 출생했다.

    로빈은 네 살 되던 1953년 백혈병으로 죽었고, 이때 일곱 살이던 부시에게 부모는 동생의 죽음을 한동안 알리지 않았다. 부시 가족으로서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고, 지금도 어머니 바바라 부시는 로빈의 얘기만 나오면 말문을 잇지 못한다. 부시에게도 여동생 로빈의 죽음은 충격으로 남아 있다.

    현 플로리다 주지사인 부시의 첫째 남동생 젭 부시는 로빈이 사망하던 해에 태어났고, 2년 후에는 둘째 남동생 니일이, 3년 후에는 셋째 남동생 마빈이 태어났다. 1959년 부시 집안은 휴스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에 부시의 여동생 도로시가 태어났다.

    앤도우버 예비학교 시절

    부시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5세가 되던 1961년, 뉴잉글랜드의 앤도우버 예비학교(대학 예비학교로 고등학교 격)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 부시의 표현대로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앤도우버에서 15세의 부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3학년 회장, 야구팀 주장 등을 지낸 아버지 부시의 화려한 앤도우버 경력이었다.

    부시의 첫해 영어 성적은 빵점이었다. ‘감정’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부시는 이때를 ‘점수를 매긴 빨간 글자를 봤을 때의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학년 연감(year book) 기록에 따르면, 부시는 단 한번도 A나 B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미국식 점수 등급으로는 평균(average)이었다. 나중에 부시는 동급생에게 앤도우버에서 낙제점을 받아 학교를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부시는 앤도우버의 명물이었다. 앤도우버에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벌써 명물로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운동을 잘해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그의 매력이었고, 부시는 그 매력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어떤 일에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면서 때로는 입을 다물어야 할 자리에서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은 ‘이빨’이었다.

    학교 일에는 늘 그가 중심이었고 화제였다. 본능적으로 중심에 자리를 잡고 들어서는 비법을 체득한 학생 같았다. 3학년 때 그는 미식축구 응원단장으로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로큰롤 밴드부에도 들어갔다. 악기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로큰롤 밴드부에서 맡은 일은 그저 박수로 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앤도우버 동창생들은 누구도 부시가 정치인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같은 반 반장이던 동창생 댄 쿠퍼는 “만약 내기를 했다면 나는 부시가 은행의 투자 전문가로 일하면서 고급 컨트리클럽의 회원이 되는 것에 걸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4년 가을, 부시는 예일 대학에 입학한다. 역사를 공부하러 간 예일은 앤도우버와 달랐다. 예일은 아버지 부시가 앤도우버에서처럼 유명 인사로 대접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시는 예일 신입생이 되었을 때 이미 부시 가문에서 물려받은 전통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부시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이 모두 예일대 출신으로 3대에 걸친 예일맨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예일은 부시를 푸근하게 맞이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 학생 운동이 예일을 휩쓸고 있을 때였고, 부시는 공화당 정치인으로 월남전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하고 있을 때였다. 학우들이 반전을 외치면서 정치 주류에 맞서고 있을 때, 부시는 전통에 충실했다. 남학생 사교 클럽에서 술 잔치를 벌이고, 비밀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고, 주말에는 풋볼을 즐겼다.

    유쾌하지 못했던 예일 시절

    예일 신입생 부시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앤도우버에서 갈고닦은 기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시는 아버지가 가입해 활동했던 대학 클럽에 가입했다. 그중 하나가 교내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주 클럽 ‘델타 카파 엡실런’이다. 부시는 델타의 회장이 되었고 델타가 주최하는 파티에 열심히 참석했다. 동창생들의 회고에 따르면 부시는 ‘남학생 클럽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학생’이었다. 남들과 잘 어울리면서 원만한 대인 관계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부시는 누구든 상대방의 핵심을 재빨리 포착해내는 재간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집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예일 기숙사로 돌아온 부시는 난데없이 약혼을 발표한다. 약혼녀는 휴스턴의 캐서린 울프만이라는 여학생이었고, 이듬해 여름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연기되었고 결국 울프만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울프만은 부시와는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졌다고 말했으나 누가 둘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부시의 예일대 동창으로 지금은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민주당원 래니 데이비스는 부시의 예일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부시는 절대 못돼먹은 부잣집 아이가 아니었다. 이건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민주당원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잘난 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인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귀족 가문의 냄새를 풍기는 학생은 아니었다.”

    부시는 예일이 풍기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즐기기보다는 역겨워 하는 축이었다. 예일 졸업반이 된 부시는 최상의 은신처 하나를 발견하고 그 은신처로 숨어든다. ‘해골과 뼈(Skull and Bones)’라는 예일 최고 엘리트의 비밀클럽이었다. 이 클럽은 공부, 운동, 음악 등 각 분야에서 예일 최고의 엘리트 15명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예일의 전통 있는 클럽이었고, 부시의 아버지도 이 클럽 회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부시의 예일 시대에 이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최대의 영광으로 간주되던 것과는 달리, 아들 부시 시대의 ‘해골과 뼈’는 예일대 학생의 경멸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해골과 뼈’ 회원들은 누구나 자신의 두 가지 경력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PH라는 불리는 개인 경력(personal history)과 SH라 불리는 성 경력(sexual history)이었다.

    15명의 졸업반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밤 이 클럽의 클럽 하우스에 모였다. 저녁을 먹고 젊음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사랑과 인생, 꿈과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고 듣고 토론했다. 특히 클럽 회원 모두가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베트남전에 대한 얘기도 빠질 수 없는 토론의 주제였고, 졸업 후 징병 대상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는 관심사 중에 관심사였다.

    부시가 대통령 후보를 선언하고 나섰을 때 미 언론이 부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예일 시절 부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생각이었다. 반전 운동에 참여하는 대신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던 ‘침묵’의 경력을 따지고 든 것이다. 부시의 친구나 가족들은 부시의 전쟁관은 당시 아버지와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고 옹호한다. 당시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 의원이었고,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부시는 아버지의 생각이 옳다는 쪽이었다. 반전 운동을 하기보다는 참전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지난 7월 ‘워싱턴 포스트’와 한 기자 회견에서 반전 운동 불참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반전 운동이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동부 지역에서 가장 컸던 반전 운동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있었던 것 같다. 1968년이다. 나는 그냥 참여하지 않았다. 굳이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친구들도 반전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일에 대한 부시의 기억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1968년 예일 졸업 후 3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예일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학교와 가까워지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일대 출신 동창 명부 개정을 위해 써달라는 개인 에세이 청탁마저 거절했다. 이 점마저도 아버지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부시도 예일과는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8년 동안 미국의 부통령으로 있었고 대통령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91년에야 예일은 아버지 부시를 비로소 예일 출신으로 대접한다. 당시 현직 대통령 부시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던 것이다.

    부시는 예일 재학 시절에도 ‘지적 속물’ 같은 예일에 더 이상 남아 있기가 지긋지긋하다는 심정을 친구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도 예일대와의 관계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버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예일이 짜증스럽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모교에 대한 부시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어쩌면 예일에 대한 그의 첫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1964년 부시가 예일의 신입생으로 갓 입학했을 때, 그는 예일대의 윌리엄 슬로앤 카핀 목사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동창이고, 아버지가 예일에 가면 만나보라고 일러주었던 사람이다. 당시 아버지는 텍사스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반전을 외친 민주당의 랄프 야보로우 상원 의원에게 패배한 직후였다. 부시가 찾아간 코핀 목사 역시 나중에 반전의 기수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자기 소개를 하는 부시에게 카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아버지를 아네.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사람한테 선거에서 지셨더군.” 카핀 목사는 이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만일 그랬다면 농담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일화는 부시에게 예일이 앤도우버와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었음에 틀림없다.

    부시가 예일에 다닐 때만 해도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다. 비밀클럽 ‘해골과 뼈’에서도 부시는 그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 비밀클럽의 회원이던 동창생들은 부시가 아버지를 ‘거의 신처럼 받들었다’고 회고한다. 일부러 찾아간 예일의 카핀 목사가 그런 아버지를 일언지하에 폄했으니, 예일에 대한 부시의 첫인상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부시가 처음 정치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31세였던 1977년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텍사스 미들랜드에서 연방 하원 의원 자리를 노렸던 것이다. 이렇다 할 이력도 없고, 선거에서의 승리 가능성도 희박했다. 1975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하고 텍사스로 돌아와 석유 사업에 처음 손을 대 석유 채굴권을 얻기 위해 법정을 들락거리고 있던 사업 초년생이었다. 결국 이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선거는 부시 자신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유감 없이 보여준 선거전이기도 했다.

    31세 때 첫 선거 패배

    43년 의정 경력이라는, 당시 최장수 하원 의원이던 민주당 조지 마헌 의원의 예상치 못했던 정계 은퇴 선언이 있은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부시는 그의 빈 자리를 노리고 출마를 선언한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기습 선언이었다. 빈 자리를 노리는 짐 리스 등 공화당의 정치 지망생들이 줄을 서 있던 판국이었다. 특히 오데사 시장이던 짐 리스는 이미 마헌 의원과 한차례 격돌하면서 45%를 득표한 적이 있는 우선순위 1위 후보였다. 리스 측으로 봐서는 ‘애송이’ 부시의 난데없는 등장이야말로 어리둥절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부시 가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부시는 맨손으로 선거에 뛰어들 만큼 무모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1977년에 그는 이미 아버지를 도우면서 세 차례나 선거바닥을 뛰어본 유경험자였던 것이다. 내심 그는 주 방위군 현역 근무를 마친 후부터 텍사스 주 의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코넷티컷 출신 상원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정치 야망의 본궤도에 이미 들어서 있던 집안 출신이었던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시 아버지의 선거 운동에도 같이 참여했던 부시의 한 친구는 ‘허풍쟁이 부시’의 느닷없는 선거 출마를 이렇게 평했다. “부시는 이미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치 무대에 서자마자 그의 연설 솜씨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앉아 그의 연설을 들었다면 아마 그의 아버지가 연설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아 선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고 불과 몇주 만에 자원 봉사를 하는 핵심 동료들로 구성된 훌륭한 선거본부를 차렸다. 이때 부시의 선거 캠프에 합류한 사람 중에는 이번 대선에서 재정위원장을 맡은 막역지우 돈 에반스와 선거전략가 칼 로우브, 모금 담당 오닐 등이 끼어 있었다.

    어쨌든 부시는 출발 때부터 보수주의자였다. 학창 시절에 미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배리 골드워터의 저서 ‘보수의 양심’을 읽고 있는 부시에게 친구가 왜 그 책을 읽느냐고 물었을 때 부시는 ‘아버지가 준 책’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민주당 카터 대통령의 천연가스 가격 규제 조치를 부시는 ‘연방 정부의 관료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보수 공화당원의 색채를 부각시키긴 했으나, 정작 그의 관심은 정책이나 이슈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모아 화제의 중심에 서고 상대 후보와 경쟁하고 싶어하는 내면의 욕구가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부시의 출마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이미 텍사스 출신의 의원 경력에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의장과 CIA 국장을 지낸 베테랑이었고 백악관을 노리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청년국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조지(부시)가 텍사스에서 출마를 한 모양이야. 예비선거에서는 중립을 지켜주기 바라네.” 청년국장은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부시는 매일 60여 가구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비선거에서 그는 같은 공화당 후보인 리스의 맹공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스는 말끝마다 부시를 ‘주니어’라고 부르면서 빈정거렸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나온 애송이라는 말이었다. 예비선거일 나흘 전에 리스는 부시의 출생 증명을 걸고넘어졌다. 텍사스 출신이 아니라 뉴 헤이븐 태생의 동부인으로 출생지를 속였다는 것이었다. 부시로서는 치명타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경쟁에 돌입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레이건이 공공연하게 리스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이를 막고 나섰다. “레이건과 말다툼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러나 내 주(州)인 텍사스에서 하는 일을 보니 놀라울 뿐이다. 조지(부시)를 떨어뜨리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부시는 선거 자금으로 40만 달러를 모았다. 당시 정치 초년생이 모은 돈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포드 전 대통령 등의 지원으로 부시는 부인 로라와 함께 선거구를 돌면서 있는 힘을 다했으나 ‘아버지 옷자락에 매달려간다’고 맹공을 퍼부어대는 상대 후보에게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첫 선거가 패배로 끝난 후, 부시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소한 일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지구전을 펼쳐야 하는 의원 선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원보다는 오히려 회사 회장이나 주지사로 나서는 것이 어울린다는 평이었다.

    선거 패배 2년 후 아버지가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을 때, 부시는 아버지가 공직에서 물러나기 전에는 다시는 선거직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8년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절제 모르는 술주정뱅이

    미 지성의 산실인 예일을 거쳤고, 미 대통령 후보가 된 부시가 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한 다음의 두 마디는 부시 특유의 투박한 솔직함과 능청스러움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기자는 첫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뒤로 자빠지며 박장대소를 할 겁니다. 주변에 지성들이 많기는 했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그 지성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고약한 질문이었다. 앤도우버와 예일 시절에 그토록 사람을 잘 끌었다는 부시가 한 대답은 이러했다.

    “잘 아시겠지만, 리더십이란 여러 형태로 발휘되는 겁니다. 이제 공화당과 공화당 지지자가 아닌 다른 유권자들이 내 리더십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곧 판단하게 될 겁니다.”

    미 언론의 냉혹하고 혹독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 대통령 후보 검증 과정에 부시의 예일 시절은 부시의 과거 음주벽과 코카인 사용 여부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시의 대통령 후보 자질에 하자가 많다는 부적절론의 근거로 들이댄 것 중 하나도 바로 이 음주벽이었다.

    예일과 하버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1975년 여름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온 부시는 미들랜드의 평원 먼지더미 속에서 11년 동안 석유 채굴 사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투자할 사람을 찾아내 협상을 하고, 큰 건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으나, 큰돈을 만져보겠다는, 돈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은 없었다. 허름한 옷에 낡은 차를 끌고 다니는 30대의 부시에게서 지위와 명성과 부를 갖춘 집안의 자식이라는 낌새는 좀체 찾기 힘들었다. 다만 석유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욕심이었다.

    문제는 그의 주벽이었다. 30대 후반의 부시를 묘사하는 단어는 온통 술 냄새 진동하는 것뿐이다. 본인도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들조차 부시의 한때 음주벽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 문턱을 넘지만 않았을 뿐이지, 병원 문고리를 잡을 뻔했다는 것이다. 부시의 가장 친한 친구 돈 에반스도 술독에 빠졌던 부시를 이렇게 묘사할 정도다.

    “절제할 줄을 몰랐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자제력이라고는 없었다.”

    부시도 인정한다. 선거 운동중에 그는 “내 가족과 인생을 망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자신의 과거 주벽을 고백했을 정도다. 맥주(beer), 버번(bourbon), 비앤비(B&B)가 그가 학창 시절부터 즐기던 술이었고, 부시 자신은 이를 ‘4B’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시는 자신이 결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으며, 병원 치료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정치인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은 부시의 40대 이전 인생만 가지고는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 힘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허세나 부리는 남학생 비밀클럽의 회장이었고 주변에 사람 꼬이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지도자상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 현대사의 걸출했던 역대 대통령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부시가 백악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일 시절 ‘해골과 뼈’ 클럽 멤버였던 한 친구는 “우리 반에서 대통령감 다섯 명을 꼽아보라고 했을 때 부시 이름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지도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의 무절제했던 젊은 날이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은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나갔을 때다.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술집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었다, 길거리에서 코카인을 먹었다 등등.

    대선 운동 기간에 코카인 복용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부시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보기에는 20~30년 전 일을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다.”

    그런 부시가 다시 태어난 것은 그의 나이 40되던 해인 1986년이다. 부시가 지지부진한 석유 사업으로 겉돌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독에 빠져 있었을 때 워싱턴에서는 앨 고어 상원의원이 처음 대통령 선거에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고, 전쟁 영웅인 존 매케인 하원의원은 상원의 배리 골드워터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며, 빌 브래들리 상원의원은 세금 제도 개혁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국의 부통령이었다.

    1985년 여름, 부시는 집안의 오랜 친구이자 정신적인 조언자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만난다. 부시는 이때의 일을 “그레이엄 목사가 내 가슴에 씨를 하나 심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바뀌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소년 시절 부시는 장로교였고, 결혼 후 부인을 따라 감리교로 개종했다.

    그레이엄 목사를 만난 후 부시는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 한잔’이 문제였다. 더구나 부시는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내향적인 인물이 아니다. 부인 로라야말로 방황하던 부시를 옆에서 끝까지 지켜준 사람이다. 부시 자신을 포함해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로라가 부시의 구세주였다고 말한다. 부시는 1986년 이후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1986년, 이때 부시는 이미 두 딸의 아버지였고 수줍음 잘 타는 도서관 사서였던 부인 로라 웰치와 결혼한 지 9년째였다. 쌍둥이 딸의 이름은 로라의 어머니와 부시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제나와 바바라로 붙였다. 두 사람은 1977년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했고, 결혼할 때까지도 부시는 로라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로라는 부시와 뿌리가 같았고, 돈 에반스, 오닐 등이 이 두 사람의 친구들이었다.

    40세에 부시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미 부통령의 장남이던 때다. 앤도우버, 예일, 파일럿 군 복무, 텍사스 석유 사업-부통령이던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자신도 똑같이 걸어왔지만 아버지의 성공마저 복사할 수는 없었다.

    부시가 새로운 삶을 결심하기 직전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배럴당 37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1986년 상반기에 들어 상황이 더욱 악화되더니 부시의 마흔 살 생일이던 1986년 7월6일에 유가는 배럴당 무려 9달러로 떨어졌다. 직원들 봉급은 모두 깎인 상태였고, 석유 탐사 및 개발 회사인 부시의 스펙트럼 7은 적자는 물론 300만 달러의 은행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언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동부 출신 귀공자가 처음 삶의 바닥을 느끼는 순간이었고, 부시는 이 절망의 순간에 인생의 행로를 바꾼 것이다.

    부시에게 탈출구가 생긴 것은 1988년이었다. 회사를 처분할 기회가 생겼고 아버지가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다. 석유 사업의 진흙구덩이에서 발을 빼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워싱턴으로 간다는 것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고, ‘마지막 카드’였다. 더구나 부시에게는 돈이 따르기 시작했다.

    회사 처분은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해 있던 부시를 구해 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몇 년 후의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팀에 투자를 해 결국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의 서면 질문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해명했다.

    “내가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 아버지의 이름 덕을 본 것이 사실이다. 내 이름으로 W(아들 부시)가 덕을 볼 수만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정치 지지자가 생기고 투자가가 이롭게 된다면 누구든 그렇게 할 것이다. W에게도 마찬가지다.”

    부시의 정치 이력에 1988년은 부시 대통령 선거 진영의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대선 캠프에 합류하면서부터다. 아버지의 선거 캠프에서 부시는 ‘충성 집행자’를 자처했다. 아버지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부시는 자기만의 일을 원했다. 대통령 선거 기간에 발행된 ‘텍사스 옵저버’에는 부시에 대한 이런 글이 실려 있다.

    ‘1988년 아버지가 백악관에 들어간 후 부시는 한 선거 참모한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물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를 물은 것이다. 선거 참모였던 덕 위드는 대통령이 된 사람들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조사했고, 몇 주 후에 ‘대통령의 자녀들’이라는 44쪽 짜리 보고서를 내놓았다.

    위드는 조사 결과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절반 이상의 자녀들이 알코올 중독이나 이혼, 자살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더구나 조지 W. 부시가 관심을 가질 만한, 우연의 일치 사례도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공통점이었다. 두 명 모두 4남1녀를 두었고, 한 자녀는 어릴 때 죽은 것이다.

    또한 플로리다 주의 선거직에 진출한 아들을 한 명 두었고(당시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의 상무 장관이었다), 서부에 처박혀 사는 아들 역시 한 명을 두고 있었다(니일 부시는 당시 콜로라도에 살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아들 이름을 자기와 똑같이 지었고, 그 아들은 고향 의 주지사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선거전에 패했다. 덕 위드는 부시가 그 보고서를 읽고는 근심스러운 표정이더라고 말했다.

    10년이 지난 후, 텍사스 주지사 연임에 성공한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루스벨트의 저주를 꺾어버렸다”고.

    되찾은 이름 ‘조지 W.부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후 부시는 워싱턴에 남아 있기를 싫어했다. 고립된 섬 같은 워싱턴은 위선덩어리로 비쳤던 것이다. ‘매일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파티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무슨 대화를 하든 항상 그것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허위와 거짓의 워싱턴’ 분위기를 부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텍사스로 돌아간 부시는 ‘조지 W’라는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팀의 소유주가 되어 큰돈을 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994년 텍사스 주지사가 되기 전까지 5년 간 부시는 성공한 프로야구 사업가로서 면모를 발휘했고, 백만장자 소리를 듣게 된다. 공식 직함은 텍사스 레인저의 경영 파트너였다.

    1994년 그는 두 살 때 처음 발을 디딘 고향 텍사스에서 주지사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주지사였던 앤 리차드를 상대로 접전을 치른 끝에 48%의 득표율로 텍사스 주지사 공관의 열쇠꾸러미를 손에 쥐었고, 1998년에는 65%의 득표율로 주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을 때, 대뜸 튀어나온 여론의 반응은 조지 W. 부시가 대체 누구냐는 것이었다. 텍사스가 아니라 미합중국 앞에 섰을 때 그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을 뿐, ‘조지 W’나 ‘W’라는 자기 이름은 없었다.

    조지 워커 부시(George Walker Bush).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미국의 내로라 는 언론들마저 그를 조지 부시 주니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이 똑같지 않은 한 아들을 주니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쯤에야 그는 조지 W. 부시라는 자기 이름을 찾았다.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는 75회 생일에 스카이다이빙을 몸소 해보이고 때맞춰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또 한번 자신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출마하는 아들을 도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