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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美차기대통령 라이프 스토리

돌아온 탕아, 세계 정상에 오르다

  • 이흥환 hhlee0317@yahoo.co.kr

돌아온 탕아, 세계 정상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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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미국의 내로라는 언론들마저 그를 ‘조지 부시 주니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이 똑같지 않는 한 아들을 주니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때에야 그는 ‘조지 W. 부시’라는 자기 이름을 찾았다.
조지 W. 부시의 집안은 미 동북부의 명문가다. 텍사스 집안이 아니다. 아버지 조지 부시와 어머니 바바라 부시 모두 부와 명성을 두루 갖춘 뉴 헤이븐의 명문 출신으로 두 살 난 장남 부시와 텍사스로 옮겨가기 전에는 예일대 총장의 이웃집에 살았다. 따라서 부시도 사실은 텍사스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북부의 명문가 출신이다.

부시는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흔치 않은 경우다. 고등학교(매사추세츠 주의 필립스 앤도우버 아카데미)와 대학교(예일), 대학교의 클럽 활동마저 똑같다. 파일럿으로 군 복무를 한 것도, 텍사스에서 석유 회사를 운영한 것도,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던 것도 똑같고, 아버지가 결혼한 나이와 부시가 약혼을 한 나이 20세도 똑같다. 아버지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닮은 것은 부자가 나란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가 부시 가문의 둘도 없는 기둥이요 중심으로 ‘가족들이 그의 주위를 빙 둘러싼 태양 같은’ 존재였는 데 반해,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라는 명함을 내밀기 전까지는 아버지에 훨씬 못 미쳤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그늘과 어머니의 인간성

그는 늘 아버지의 그늘에 묻혀 있었고, 아버지와 비교가 되었다. 특히 군 복무 경력이 부시의 발목을 잡았다. 2차세계대전 때 아버지는 파일럿을 자원했고 영웅이 되어 돌아왔으나, 부시는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텍사스 주 방위군의 147전투비행단에서 근무했다. 최전선 근무를 피하려던 것 아니었느냐는 비난은 앞으로도 그에게 줄곧 따라다닐 멍에가 되고 있다.



석유 사업에서도 아버지는 일찌감치 성공한 사업가로 출세했으나, 부시는 석유 사업에서 한번도 큰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단 한번의 단절도 없이 요직을 옮긴 끝에 백악관 열쇠를 잡은 것에 비해, 부시는 실패와 손가락질과 좌절을 맛보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와는 다른 길, 텍사스의 야구 구단 텍사스 레인저스를 운영하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성공담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부시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마흔 두 살에 텍사스 야구 구단 텍사스 레인저스를 사들인 투자 그룹에서 일을 하던 때와 텍사스 주지사로 일하던 때였다고.

부시는 늦게 핀 꽃이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텍사스 출신다운 강한 이미지의 정치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성취하지 못한 ‘텍사스인’이 되었고, 텍사스 주지사가 되면서 그의 정치적 자질을 유감 없이 발산했다. 아버지는 텍사스의 주인이 되어보지 못했으나, 부시는 두 번이나 주지사 자리에 앉았다. 특히 두 번째 주지사 선거에서는 어느 공화당 주지사도 넘보지 못했던 민주당원과 히스패닉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머 감각, 매력, 상식에 바탕을 둔 대인 관계, 건강한 카리스마, 자신감 - 정치인 부시에 대한 이런 호평은 어머니 바바라 부시의 영향이다. 명문 부잣집의 버르장머리 없는 허풍쟁이, 그럴 듯한 학력에 형편없는 지성 - 부시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은 그의 호감 가는 인간성마저 부식시키지는 못했고, 미 국민의 평가에서도 면죄부를 받았다.

부인 로라는 ‘부시의 성품과 성격은 이 어머니 바바라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아들은 바느질과 대화를 즐겨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성품이 어머니의 영향이라면 인내심과 열정은 아버지 부시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 정치적 야망에 관한 한 아버지 부시는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 않고, 부시는 부시대로 젊은날의 방황을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

부시는 1946년 7월6일 코넷티컷 주 뉴 헤이븐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부시가 예일대에 다닐 때다. 2년 후 아버지가 예일을 졸업하던 해에 부시 집안은 텍사스의 작은 공업 도시 오데사로 기반을 옮긴다. 이듬해인 1949년에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사하고 이 해에 부시의 여동생 로빈이 출생했다.

로빈은 네 살 되던 1953년 백혈병으로 죽었고, 이때 일곱 살이던 부시에게 부모는 동생의 죽음을 한동안 알리지 않았다. 부시 가족으로서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고, 지금도 어머니 바바라 부시는 로빈의 얘기만 나오면 말문을 잇지 못한다. 부시에게도 여동생 로빈의 죽음은 충격으로 남아 있다.

현 플로리다 주지사인 부시의 첫째 남동생 젭 부시는 로빈이 사망하던 해에 태어났고, 2년 후에는 둘째 남동생 니일이, 3년 후에는 셋째 남동생 마빈이 태어났다. 1959년 부시 집안은 휴스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에 부시의 여동생 도로시가 태어났다.

앤도우버 예비학교 시절

부시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5세가 되던 1961년, 뉴잉글랜드의 앤도우버 예비학교(대학 예비학교로 고등학교 격)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 부시의 표현대로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앤도우버에서 15세의 부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3학년 회장, 야구팀 주장 등을 지낸 아버지 부시의 화려한 앤도우버 경력이었다.

부시의 첫해 영어 성적은 빵점이었다. ‘감정’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부시는 이때를 ‘점수를 매긴 빨간 글자를 봤을 때의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학년 연감(year book) 기록에 따르면, 부시는 단 한번도 A나 B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미국식 점수 등급으로는 평균(average)이었다. 나중에 부시는 동급생에게 앤도우버에서 낙제점을 받아 학교를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부시는 앤도우버의 명물이었다. 앤도우버에 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벌써 명물로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운동을 잘해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그의 매력이었고, 부시는 그 매력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어떤 일에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면서 때로는 입을 다물어야 할 자리에서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은 ‘이빨’이었다.

학교 일에는 늘 그가 중심이었고 화제였다. 본능적으로 중심에 자리를 잡고 들어서는 비법을 체득한 학생 같았다. 3학년 때 그는 미식축구 응원단장으로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로큰롤 밴드부에도 들어갔다. 악기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로큰롤 밴드부에서 맡은 일은 그저 박수로 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앤도우버 동창생들은 누구도 부시가 정치인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같은 반 반장이던 동창생 댄 쿠퍼는 “만약 내기를 했다면 나는 부시가 은행의 투자 전문가로 일하면서 고급 컨트리클럽의 회원이 되는 것에 걸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64년 가을, 부시는 예일 대학에 입학한다. 역사를 공부하러 간 예일은 앤도우버와 달랐다. 예일은 아버지 부시가 앤도우버에서처럼 유명 인사로 대접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시는 예일 신입생이 되었을 때 이미 부시 가문에서 물려받은 전통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부시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이 모두 예일대 출신으로 3대에 걸친 예일맨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예일은 부시를 푸근하게 맞이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 학생 운동이 예일을 휩쓸고 있을 때였고, 부시는 공화당 정치인으로 월남전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하고 있을 때였다. 학우들이 반전을 외치면서 정치 주류에 맞서고 있을 때, 부시는 전통에 충실했다. 남학생 사교 클럽에서 술 잔치를 벌이고, 비밀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고, 주말에는 풋볼을 즐겼다.

유쾌하지 못했던 예일 시절

예일 신입생 부시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앤도우버에서 갈고닦은 기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시는 아버지가 가입해 활동했던 대학 클럽에 가입했다. 그중 하나가 교내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주 클럽 ‘델타 카파 엡실런’이다. 부시는 델타의 회장이 되었고 델타가 주최하는 파티에 열심히 참석했다. 동창생들의 회고에 따르면 부시는 ‘남학생 클럽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학생’이었다. 남들과 잘 어울리면서 원만한 대인 관계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부시는 누구든 상대방의 핵심을 재빨리 포착해내는 재간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집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예일 기숙사로 돌아온 부시는 난데없이 약혼을 발표한다. 약혼녀는 휴스턴의 캐서린 울프만이라는 여학생이었고, 이듬해 여름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연기되었고 결국 울프만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울프만은 부시와는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졌다고 말했으나 누가 둘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부시의 예일대 동창으로 지금은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민주당원 래니 데이비스는 부시의 예일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부시는 절대 못돼먹은 부잣집 아이가 아니었다. 이건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민주당원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잘난 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인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귀족 가문의 냄새를 풍기는 학생은 아니었다.”

부시는 예일이 풍기는 전통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즐기기보다는 역겨워 하는 축이었다. 예일 졸업반이 된 부시는 최상의 은신처 하나를 발견하고 그 은신처로 숨어든다. ‘해골과 뼈(Skull and Bones)’라는 예일 최고 엘리트의 비밀클럽이었다. 이 클럽은 공부, 운동, 음악 등 각 분야에서 예일 최고의 엘리트 15명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예일의 전통 있는 클럽이었고, 부시의 아버지도 이 클럽 회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부시의 예일 시대에 이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최대의 영광으로 간주되던 것과는 달리, 아들 부시 시대의 ‘해골과 뼈’는 예일대 학생의 경멸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해골과 뼈’ 회원들은 누구나 자신의 두 가지 경력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PH라는 불리는 개인 경력(personal history)과 SH라 불리는 성 경력(sexual history)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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