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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美차기대통령 라이프 스토리

돌아온 탕아, 세계 정상에 오르다

  • 이흥환 hhlee0317@yahoo.co.kr

돌아온 탕아, 세계 정상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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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의 졸업반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밤 이 클럽의 클럽 하우스에 모였다. 저녁을 먹고 젊음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사랑과 인생, 꿈과 희망과 미래를 얘기하고 듣고 토론했다. 특히 클럽 회원 모두가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베트남전에 대한 얘기도 빠질 수 없는 토론의 주제였고, 졸업 후 징병 대상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는 관심사 중에 관심사였다.

부시가 대통령 후보를 선언하고 나섰을 때 미 언론이 부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예일 시절 부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생각이었다. 반전 운동에 참여하는 대신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던 ‘침묵’의 경력을 따지고 든 것이다. 부시의 친구나 가족들은 부시의 전쟁관은 당시 아버지와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고 옹호한다. 당시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 의원이었고,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부시는 아버지의 생각이 옳다는 쪽이었다. 반전 운동을 하기보다는 참전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지난 7월 ‘워싱턴 포스트’와 한 기자 회견에서 반전 운동 불참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반전 운동이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동부 지역에서 가장 컸던 반전 운동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있었던 것 같다. 1968년이다. 나는 그냥 참여하지 않았다. 굳이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친구들도 반전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일에 대한 부시의 기억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1968년 예일 졸업 후 3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예일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학교와 가까워지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일대 출신 동창 명부 개정을 위해 써달라는 개인 에세이 청탁마저 거절했다. 이 점마저도 아버지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부시도 예일과는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8년 동안 미국의 부통령으로 있었고 대통령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91년에야 예일은 아버지 부시를 비로소 예일 출신으로 대접한다. 당시 현직 대통령 부시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던 것이다.

부시는 예일 재학 시절에도 ‘지적 속물’ 같은 예일에 더 이상 남아 있기가 지긋지긋하다는 심정을 친구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도 예일대와의 관계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버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예일이 짜증스럽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모교에 대한 부시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어쩌면 예일에 대한 그의 첫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1964년 부시가 예일의 신입생으로 갓 입학했을 때, 그는 예일대의 윌리엄 슬로앤 카핀 목사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동창이고, 아버지가 예일에 가면 만나보라고 일러주었던 사람이다. 당시 아버지는 텍사스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반전을 외친 민주당의 랄프 야보로우 상원 의원에게 패배한 직후였다. 부시가 찾아간 코핀 목사 역시 나중에 반전의 기수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자기 소개를 하는 부시에게 카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아버지를 아네.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사람한테 선거에서 지셨더군.” 카핀 목사는 이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만일 그랬다면 농담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일화는 부시에게 예일이 앤도우버와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었음에 틀림없다.

부시가 예일에 다닐 때만 해도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다. 비밀클럽 ‘해골과 뼈’에서도 부시는 그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 비밀클럽의 회원이던 동창생들은 부시가 아버지를 ‘거의 신처럼 받들었다’고 회고한다. 일부러 찾아간 예일의 카핀 목사가 그런 아버지를 일언지하에 폄했으니, 예일에 대한 부시의 첫인상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부시가 처음 정치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31세였던 1977년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텍사스 미들랜드에서 연방 하원 의원 자리를 노렸던 것이다. 이렇다 할 이력도 없고, 선거에서의 승리 가능성도 희박했다. 1975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하고 텍사스로 돌아와 석유 사업에 처음 손을 대 석유 채굴권을 얻기 위해 법정을 들락거리고 있던 사업 초년생이었다. 결국 이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선거는 부시 자신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유감 없이 보여준 선거전이기도 했다.

31세 때 첫 선거 패배

43년 의정 경력이라는, 당시 최장수 하원 의원이던 민주당 조지 마헌 의원의 예상치 못했던 정계 은퇴 선언이 있은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부시는 그의 빈 자리를 노리고 출마를 선언한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기습 선언이었다. 빈 자리를 노리는 짐 리스 등 공화당의 정치 지망생들이 줄을 서 있던 판국이었다. 특히 오데사 시장이던 짐 리스는 이미 마헌 의원과 한차례 격돌하면서 45%를 득표한 적이 있는 우선순위 1위 후보였다. 리스 측으로 봐서는 ‘애송이’ 부시의 난데없는 등장이야말로 어리둥절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부시 가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부시는 맨손으로 선거에 뛰어들 만큼 무모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1977년에 그는 이미 아버지를 도우면서 세 차례나 선거바닥을 뛰어본 유경험자였던 것이다. 내심 그는 주 방위군 현역 근무를 마친 후부터 텍사스 주 의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코넷티컷 출신 상원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정치 야망의 본궤도에 이미 들어서 있던 집안 출신이었던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시 아버지의 선거 운동에도 같이 참여했던 부시의 한 친구는 ‘허풍쟁이 부시’의 느닷없는 선거 출마를 이렇게 평했다. “부시는 이미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치 무대에 서자마자 그의 연설 솜씨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앉아 그의 연설을 들었다면 아마 그의 아버지가 연설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아 선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고 불과 몇주 만에 자원 봉사를 하는 핵심 동료들로 구성된 훌륭한 선거본부를 차렸다. 이때 부시의 선거 캠프에 합류한 사람 중에는 이번 대선에서 재정위원장을 맡은 막역지우 돈 에반스와 선거전략가 칼 로우브, 모금 담당 오닐 등이 끼어 있었다.

어쨌든 부시는 출발 때부터 보수주의자였다. 학창 시절에 미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배리 골드워터의 저서 ‘보수의 양심’을 읽고 있는 부시에게 친구가 왜 그 책을 읽느냐고 물었을 때 부시는 ‘아버지가 준 책’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민주당 카터 대통령의 천연가스 가격 규제 조치를 부시는 ‘연방 정부의 관료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보수 공화당원의 색채를 부각시키긴 했으나, 정작 그의 관심은 정책이나 이슈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모아 화제의 중심에 서고 상대 후보와 경쟁하고 싶어하는 내면의 욕구가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부시의 출마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이미 텍사스 출신의 의원 경력에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의장과 CIA 국장을 지낸 베테랑이었고 백악관을 노리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청년국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조지(부시)가 텍사스에서 출마를 한 모양이야. 예비선거에서는 중립을 지켜주기 바라네.” 청년국장은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부시는 매일 60여 가구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비선거에서 그는 같은 공화당 후보인 리스의 맹공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스는 말끝마다 부시를 ‘주니어’라고 부르면서 빈정거렸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나온 애송이라는 말이었다. 예비선거일 나흘 전에 리스는 부시의 출생 증명을 걸고넘어졌다. 텍사스 출신이 아니라 뉴 헤이븐 태생의 동부인으로 출생지를 속였다는 것이었다. 부시로서는 치명타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경쟁에 돌입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레이건이 공공연하게 리스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이를 막고 나섰다. “레이건과 말다툼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러나 내 주(州)인 텍사스에서 하는 일을 보니 놀라울 뿐이다. 조지(부시)를 떨어뜨리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부시는 선거 자금으로 40만 달러를 모았다. 당시 정치 초년생이 모은 돈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포드 전 대통령 등의 지원으로 부시는 부인 로라와 함께 선거구를 돌면서 있는 힘을 다했으나 ‘아버지 옷자락에 매달려간다’고 맹공을 퍼부어대는 상대 후보에게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첫 선거가 패배로 끝난 후, 부시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소한 일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지구전을 펼쳐야 하는 의원 선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원보다는 오히려 회사 회장이나 주지사로 나서는 것이 어울린다는 평이었다.

선거 패배 2년 후 아버지가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을 때, 부시는 아버지가 공직에서 물러나기 전에는 다시는 선거직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8년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절제 모르는 술주정뱅이

미 지성의 산실인 예일을 거쳤고, 미 대통령 후보가 된 부시가 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한 다음의 두 마디는 부시 특유의 투박한 솔직함과 능청스러움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기자는 첫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뒤로 자빠지며 박장대소를 할 겁니다. 주변에 지성들이 많기는 했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그 지성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고약한 질문이었다. 앤도우버와 예일 시절에 그토록 사람을 잘 끌었다는 부시가 한 대답은 이러했다.

“잘 아시겠지만, 리더십이란 여러 형태로 발휘되는 겁니다. 이제 공화당과 공화당 지지자가 아닌 다른 유권자들이 내 리더십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곧 판단하게 될 겁니다.”

미 언론의 냉혹하고 혹독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 대통령 후보 검증 과정에 부시의 예일 시절은 부시의 과거 음주벽과 코카인 사용 여부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시의 대통령 후보 자질에 하자가 많다는 부적절론의 근거로 들이댄 것 중 하나도 바로 이 음주벽이었다.

예일과 하버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1975년 여름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온 부시는 미들랜드의 평원 먼지더미 속에서 11년 동안 석유 채굴 사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투자할 사람을 찾아내 협상을 하고, 큰 건수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긴 했으나, 큰돈을 만져보겠다는, 돈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은 없었다. 허름한 옷에 낡은 차를 끌고 다니는 30대의 부시에게서 지위와 명성과 부를 갖춘 집안의 자식이라는 낌새는 좀체 찾기 힘들었다. 다만 석유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욕심이었다.

문제는 그의 주벽이었다. 30대 후반의 부시를 묘사하는 단어는 온통 술 냄새 진동하는 것뿐이다. 본인도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들조차 부시의 한때 음주벽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 문턱을 넘지만 않았을 뿐이지, 병원 문고리를 잡을 뻔했다는 것이다. 부시의 가장 친한 친구 돈 에반스도 술독에 빠졌던 부시를 이렇게 묘사할 정도다.

“절제할 줄을 몰랐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자제력이라고는 없었다.”

부시도 인정한다. 선거 운동중에 그는 “내 가족과 인생을 망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자신의 과거 주벽을 고백했을 정도다. 맥주(beer), 버번(bourbon), 비앤비(B&B)가 그가 학창 시절부터 즐기던 술이었고, 부시 자신은 이를 ‘4B’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시는 자신이 결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으며, 병원 치료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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