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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세계화시대의 국가·시장·시민사회

개혁 없으면 21세기도 없다

  • 박세일

개혁 없으면 21세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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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시한 두 번째 모순, 즉 정치와 경제 간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새로운 세계 통치구조를 창출해야 한다. 오늘날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 국제통화질서(new financial architecture)구축도 이러한 세계 통치구조 창출의 문제 중 하나다.

새로운 세계 통치구조를 창출하려면 개별 국가들이 세계이익을 위해 국가이익의 일부를 수정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주요 선진국의 양보와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미국이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세계지도국가(global leadership)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효율적이고 공정한 세계통치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는 사실상 미국이 그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제기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앞에서 지적한대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전성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바람직한 세계통치구조는 사실 케인스가 한때 주장했던 세계중앙은행과 세계화폐의 창출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날 그 대안으로 IMF를 개혁하는 여러 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 우리도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동시에 AMF(Asian Monetary Fund) 설립 등을 통해 외화준비금 공동사용, 통화안정기금 설치 등은 물론이고 나아가 효율적인 지역화폐권(optimum currency area)의 창설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단기자본의 이동에 대해 일정한 부담(penalty)을 지우는 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세계통치구조를 만들기 위한 국제간 혹은 국가 차원의 노력과 동시에 각국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들이 세계시민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적 공동선을 향한 공동 노력을 조직화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구적 공동선에는 국제금융시장의 안정문제 뿐 아니라 지구환경보호, 국제범죄의 방지, 지역분쟁의 예방, 핵, 인종, 인권문제 등 그 내용과 범위가 대단히 넓다. 여하튼 이러한 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차원의 국제연대 노력은 세계 단일 통치구조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모순의 해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과거 역대 정권이 추진해온 개혁을 제1세대 개혁이라고 부른다면, 제1세대 개혁의 중심은 경제사회 운용의 기본틀을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자유화·개방화·민영화·규제완화·공정경쟁·작은 정부 등이 제1세대 개혁의 기본 방향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중심은 경제구조 및 경제질서개혁과 정부조직 및 정부 기능개혁이 중심이었다.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안된다

이 제1세대 개혁은 앞으로도 20∼30년간 지속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신흥공업국이나 체제전환국(transition economies)들이 시장(근본)주의 내지 경제주의에 기초한 제1세대 개혁만으로는 소위 시스템 개혁에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서 개혁이 점차 어려워지고 효과도 떨어지고 있다. 개혁 실패도 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시스템 속에는 시장과 경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정치, 역사와 전통, 의식과 문화 등이 함께 존재하면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는 따로따로 발전·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예컨대 자유화·개방화·규제완화정책도 기존 규제를 무조건 푼다고 해서 바람직한 결과가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잘못된 구질서(구 행동패턴)를 대체할 바람직한 신질서(새로운 행동패턴)가 형성되려면 새로운 행위준칙이 반드시 형성돼야 한다. 이 새로운 행위준칙을 강제하는 새로운 차원의 감시·감독체제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바람직한 신질서가 형성된다.

기존 규제를 혁파하는 것도 물론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한 새로운 차원의 감시·감독체제를 창조하는 것도 정부능력(예컨대 공무원의 전문성과 헌신성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 나라에 IMF 금융위기가 도래한 요인의 하나로 금융개방화에 반드시 따라야 할 고도의 금융감시·감독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규제를 풀었다고 해도 그 규제 완화의 결과는 그 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 시장의 성숙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시민사회와 시장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자유화·개방화·규제완화가 오히려 경제의 천민화 내지 시장의 카지노화만을 부를 수 있다. 예컨대 토지규제 완화가 자연에 대한 무차별 파괴와 국토의 난개발을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와 같이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상호 연결돼 있고 상호 작용하고 있다.

제1세대 개혁의 성공 여부는 시민사회가 성숙돼 그 사회에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정신, 공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자제하는 가치와 의식이 보편화돼 있느냐, 아니면 사회가 성숙되지 않아 사회가 이익집단들의 각축장이 돼 있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사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시민사회에서는 자유화도 규제완화도 비교적 쉽게 성공할 수 있다. 자율과 자유의 영역이 커져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한 마디로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적 해이나 기회주의적 행태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만 강조되는 사회에서 갑작스런 자유화·규제완화는 사회를 이익집단들의 무한경쟁·무한투쟁의 장으로 바꾸고, 그 결과 규제완화가 사회혼란을, 그리고 사회혼란이 규제의 재도입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물론 신뢰받는 정부, 실력 있는 정부 하에서는 제1세대 개혁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이런 정부는 시민사회로부터 협력과 신뢰를 쉽게 얻을 수 있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자유화와 규제완화 정책을 쉽게 성공시킬 수 있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상호신뢰가 있다면 민관합작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작은 정부 혹은 큰 정부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정부인가 또는 언행일치의 유능한 정부인가가 중요하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국내시장이 경쟁적이냐 아니냐,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냐, 부패구조가 얼마나 심각하냐 아니냐에 따라 제1세대 개혁의 성공 여부가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대외개방 이전에 대내개방(자유·공정·투명경쟁의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요컨대 능력있고 신뢰받는 정부, 성숙한 시민사회의 지지와 협조, 그리고 공정·투명·경쟁적인 시장경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유화·개방화·민영화·규제완화·작은 정부 등을 추구하는 제1세대 개혁의 성공은 대단히 어렵다는 결론이다.

개혁은 결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개혁은 사회의 주요 영역인 국가·시장·시민사회 각자의 근본적인 자기혁신과 이들 3자간 관계를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제2세대 개혁’의 중심과제다.

‘제2세대 개혁’ 위한 5가지 국가능력

이를 풀어 이야기하면 제2세대 개혁의 중심과제는 첫째 국가능력·시장능력·시민사회능력을 높이는 것이고, 둘째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관계를 상호 보완과 협력, 상호 균형과 견제의 새로운 선순환 관계로 재설정·재구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위기를 맞은 이유는 국가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관치경제 관행 때문에 시장능력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시민사회능력도 이제 막 시작인데, 국가능력(협의로는 국정운영능력)이 소위 민주화 이후 크게 약화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 위기의 본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혁이 부진했던 주된 이유도 약화되고 있는 국가능력, 공정하고 투명하지 못한 시장구조, 미성숙한 시민사회, 그리고 이들 3자간의 상호배타적·비협조적 관계, 그리고 견제와 균형이 깨진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국가능력이란 다음 5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제도 능력이다. 제도능력은 국가제도의 정당성·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 정도가 결정한다. 예컨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있어야 검찰 제도가 능력을 가지게 되고 법의 지배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만일 공직에 부패가 만연하면 국가정책과 제도가 국민적 신뢰를 받을 수 없어 그만큼 제도능력이 떨어진다.

둘째, 정책능력이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정책을 기획하고 수립할 수 있는 능력과, 한번 수립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집행하는 능력이 정책능력이다. 예컨대 국가정책이 단기적 성과주의 내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좌지우지되거나 혹은 정치적 편의에 의해 자주 바뀐다면 정책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사실 우리 나라 역대 정부가 시도했던 많은 개혁들은 개혁안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일관성있게 지속적으로 집행되지 않아서 실패한 예가 대부분이다.

셋째, 행정능력이다. 이는 기초행정능력과 전문행정능력으로 나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방·치안·방범·소방·교통·분쟁해결·공적부조 등 기초행정분야에서는 공평성과 효율성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국가의 기본 질서를 바로잡는 분야다. 동시에 시대가 점차 세계화·정보화하면서 국가경영에 고도의 전문행정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행정부도 그렇지만 입법부나 사법부의 국제화 정도는 우려할 수준이다.

넷째, 위기관리능력이다. 세계화에 따라 국내와 국외의 구별이 엷어지면서 국가 경영을 둘러싼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가 급속해지고,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급격한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 종합기획능력, 현장장악력 등이 필요한 시대다.

다섯째, 학습능력이다. 이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자기개선을 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자기개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하나의 학습조직이 돼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과거 국정운영의 경험, 개혁의 성공과 실패 경험, 그리고 교훈들이 제도적으로 전수돼야 한다는 점이다. 국정운영과 관련된 암묵지(暗默知·tacit knowledge)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전수하는 것을 반드시 제도화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국가경영에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정책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국가능력이 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5가지 국가능력을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인가가 제2세대 개혁의 주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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