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7일 목요일 밤 11시. 문화방송 ‘목요 100분 토론’ 사회자 유시민씨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안) 발의에 서명한 의원들이 토론에 참석도록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대부분 국회의원들이 ‘내용을 잘 모르고 서명했다’ ‘자의반 타의반 서명했다’며 토론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심지어 토론 참여를 응락했던 국회의원조차 당지도부의 강한 압력을 이유로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법안을 발의해놓고도 공개토론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줏대없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유감을 표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설 기회만 있으면 나서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전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텔레비전 토론을 기피한 이유는 무엇일까. 행정부도 아닌 국회에서 지방자치제의 발전과 역행하는 입법을 한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번 법안을 발의한 대표 의원인 임인배 한나라당 의원은 의원들이 토론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발의에 서명한 여야 의원들이 모두 안 나가기로 결의했어요. 조용히 처리하면 될 일인데 공개적인 토론 자리에 나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임의원은 현행 지방자치제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은 이 개정안에 찬성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 사우나에서 의원들을 만나면 모두 잘했다고 격려해줍니다. 여당 의원들도 당론 때문에 서명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 여야 총재가 묵인만 한다면 이 법안은 통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난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 러브호텔의 난립, 방만한 재정 운용 등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시민이나 시민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 분권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으로 실시된 지방자치제 자체를 폐지하자고 공공연하게 주장한 경우는 없었다.
지방자치제 존폐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11월13일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 때 임인배 한나라당 의원이 기초자치단체장을 선출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임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현행 지방자치 단계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줄이는 행정개혁이 필요한데 이 문제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고 발언했다. 임의원은 현행 지방자치제도의 문제점으로 차기선거만 의식한 선심성 전시성 사업의 남발, 방만한 운영으로 인한 지자체 재정난의 가중화, 지방 재정의 확대를 위해 각종 건축허가를 남발함으로써 발생한 난개발, 차기 선거 준비로 인한 행정공백과 인사권의 전횡, 지역이기주의와 기초자치단체장의 제왕적 자세로 인한 종합행정의 어려움 등을 열거했다. 이런 문제점들은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꿔야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임의원은 대정부 질문 후 자신이 속한 상임위인 건설교통위원회의 여야 의원들과 한나라당 소속 대구 경북지역 의원들 42명의 서명을 받아 임명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법률안을 11월29일 발의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 공동회장단 회의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국회의장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임명제 법안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임명제를 골자로 한 지방자치법 개정안 철회와 여야 3당이 공식적인 당론을 표명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 YMCA 등 시민단체에서도 기초단체장 임명제 전환 시도에 대한 반박 성명을 냈다.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는 12월2일에는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전국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여론 조사 대상자의 절대 다수(88.3%)가 시장 군수 구청장 직접 선출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여론에 힘입은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협의회는 재차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여야 3당 총재 및 대표를 방문했다.
그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박병석 대변인을 통해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정안 발의에 서명한 42명 중 30여명이 소속되어 있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당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서명 의원 중에는 하순봉 의원 등 이총재의 측근으로 알려진 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총재도 임명제직 전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방문했던 이재용 대구 남구청장의 말이다.
“서명 의원 중에는 한나라당 의원이 가장 많았고 이총재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의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총재가 임명제직 전환에 동의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이총재는 의원들 각자가 입법기관이기 때문에 서명하거나 발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지만 당론이 서 있다면 당총재로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총재를 방문한 다음날 임인배 의원을 만난 이총재는 “어제 구청장들이 찾아와 항의하는 바람에 애먹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지자체의 폐해사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5년 만에 민주주의의 전당인 의회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의 임명제를 주장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은 아이러니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42명의 의원이 개정안 발의에 서명한 배경에는 최근 부각된 고양시 일산의 러브호텔 난립과 엄청난 국고를 축낸 하남시 환경박람회, 용인시의 무차별적인 난개발 등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사원이 2000년 4월부터 6월까지 행자부와 16개 시도, 40개 기초자치단체를 상대로 실시한 지방재정운영실태 특감 결과, 지자체들의 지방채 규모가 94년 말 10조3154억원에서 99년 말 현재 18조190억원으로 75%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자체들이 출자해 설립한 전국 252개 지방공기업도 방만한 경영으로 99년 말 현재 부채 규모가 20조481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지자체 실시 전에 설립된 공기업의 부채도 포함돼 있다.
지방자치체들이 벌이는 각종 축제도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전국 232개 지자체의 축제는 모두 600여 건으로 지자체 당 평균 3개꼴이다. 이중 하남시의 ‘국제환경박람회’는 낭비가 심해 시민단체로부터 정부보조금 지급결정을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을 받기도 했다. 하남시는 환경박람회의 총지출액 211억여원 중 88%인 186억여원을 국고에서 지원받았다.
시민단체인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최악의 선심성 예산 배정과 어처구니 없는 예산낭비 사례를 선정해 매달 ‘밑빠진 독상’을 선정하는데 하남시가 제1회 수상자로 결정된 바 있다.
이외에도 서울시는 90억원을 들여 ‘미디어시티 서울 2000’을 개최했지만 수입금은 19억원에 불과했고, 인천시도 18억원의 예산을 들여 개최한 ‘인천 세계 춤 축제’ 도 6억원밖에 회수하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하듯이 신청사를 짓는 것도 국고를 낭비하고 재정난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지적된다. 경실련은 99년 최악의 예산낭비 10가지 사례 중 대전시 신청사를 3위로 발표한 바 있다. 이 청사는 95년 3월 착공해서 99년 11월에 완공된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1414억원이 들었다. 지하 2층 지상 21층 연면적 2만6380평으로 전국 지자체 청사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부산지역 16개 기초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강서구는 연간 지방세 수입 430억원의 65%가 넘는 예산을 들여 대형청사를 지어 지역 시민단체들의 빈축을 샀다. 공사비 중 81억원은 지방채를 발행해 마련했다. 재정자립도가 20.4%인 전북 김제시는 142억여원을 들여 통합시청사를 짓고 있다. 재원 확보 계획도 없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가 공사가 중단된 경우도 있다. 대전 서구청의 경우 97년, 98년 2년간 청사 신축과 실내빙상장-다목적체육관-용문종합사회복지관 건립 등 총규모 800억원에 달하는 ‘4대 대형사업’을 잇달아 발주했다가 재원고갈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전국의 지자체가 안고 있는 빚은 모두 18조원이 넘고 연간 이자 부담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빚을 얻어 빚을 갚아야 할 실정이다. 따라서 재정이 부실한 지자체들은 재정수입 증대를 위해 난개발이나 유흥업소 러브호텔 등의 허가를 남발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행정소송 당하기 쉬워
지방자치단체의 이런 부작용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제론자는 부작용의 폐해 때문에 기초자치단체장을 임명제로 바꾸는 것은 반대한다. 5년 남짓한 지방자치 역사 속에 아직까지 실질적인 기능과 권한을 갖추지 못하고 제한된 자치권과 재정, 잘못된 법체계와 선거제도 등으로 인한 시행착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선체제 출범전과 비교하여 각종 행정서비스가 향상되는 등 지방 행정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이재용 대구 남구청장의 말이다.
“기초자치단체장들이 돈 벌기에 혈안이 돼 난개발이나 러브호텔 난립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런 단체장이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초자치단체장이 의지를 가지고 이런 것들을 막으면 다른 쪽에서는 권력을 전횡한다고 비난하면서 행정소송을 한다. 현행 법상 행정소송을 하면 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웬만한 소신 없이는 사업자들에게 인허가를 해주지 않을 수 없다.”
이 구청장은 한때 지역 유흥업소를 정리하려다가 유흥업계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고 현재는 주택가에 고압선을 깔려는 한전에 허가를 해주지 않아 행정소송을 당한 상태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는 현행 법상 기초자치단체장이 난개발이나 유흥업소 난립 등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미비하지만 기초자치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재량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고양시 일산 지역의 러브호텔 난립문제가 여론을 일으키자 고양시장이 신규 호텔 건설을 불허한 것을 예로 든다.
그러나 기초자치단체장 임명제론자들은 시행착오의 개선 등으로는 지방자치단체의 폐해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차기 선거를 위해 선심성 전시성 사업을 하다 보면 자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허가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지역구가 김천인 임인배 의원의 말이다.
“경북의 상주 구미 김천시가 버스로 20분대에 인접해 있는데 제각기 문화예술회관과 공설운동장을 짓겠다고 합니다. 한 군데에 700억원이 드는데 3곳 모두 지으면 2100억원이 듭니다. 인구 규모로 볼 때 한 개만 지으면 3곳이 이용하기에 충분한데 각 시가 시민들에게 업적을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국고에서 빌리거나 수익사업을 해서 충당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지역 주민들의 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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