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 중 조수미란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그 작은 몸 어디서 그런 끼가 나오는지 일단 무대에만 오르면 순식간에 객석을 평정해버리는 카리스마의 성악가, 소프라노로서 가장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밤의 여왕’ 아리아(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정상급 콜로라투라…. 대충 이런 이미지가 대중의 머리 속에 그려진 조수미 아닐까?
그는 사실상 한국의 ‘문화 대사’ 노릇을 지난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80년대 이래로 ‘메이드 인 코리아’ 상표를 부착한 자동차가 세계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동방의 조그만 나라를 알려온 것처럼, 한국인 조수미는 전세계를 무대로 한국 예술의 성가를 높여온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 그가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했을 때, 현지 신문은 공연비평 기사에 ‘베르디 메이드 인 코리아(Verdi Made in Korea)’라는 제목을 뽑은 적도 있다.
2000년 한 해 동안 그가 보여준 활약상도 가위 눈부신 것이었다. 3월 LG아트센터 개관기념 무대 이래로 몇 차례 한국 무대에 섰고, 9월 시드니 올림픽 기념행사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테너 가수인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노래했으며, 11월에 두 차례 서울에서 가진 리사이틀에서는 인기가수 조성모와 함께 멋진 무대를 연출했다. 그때 입장권은 보름 전에 이미 매진돼버렸다던가? 그는 또 지난 12월10일 노르웨이의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시상식 축하공연에서도 축가를 불렀다. ‘동분서주’라는 말이 따로 없다.
2000년 활동 중 무엇보다 특기할 것은, 에라토 레이블로 발매한 음반 ‘온리 러브(Only Love)’가 12월 초까지 60만장 판매를 돌파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클래식 음반은 물론 팝송 부문까지 포함해 전무후무한 기록. 크로스오버(crossover) 계열의 감미로운 노래들로 채워진 이 음반의 판매기록에 대해서 관계자들은 “앞으로 한동안은 깨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무리 일반인들 귀에 듣기 편한 크로스오버 음반이라지만, 전세계적으로 클래식 음반시장이 줄곧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 나온 이런 기록은 분명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그의 목소리는 2000년 상반기 화제의 TV 드라마 ‘허준’의 주제가에도 실려 전국의 안방에 파고들었다. 이런 그를 놓고 한 신문은 “조수미는 이제 세계적 성악가를 넘어 국민적 엔터테이너로 부상했다”는 촌평을 붙이기도 했다.
세계적 성악가에서 ‘국민적 엔터네이너’로
몇 년 전 ‘신동아’ 편집장을 맡았던 이가 조수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기자이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기자가 알기에) 클래식 음악에는 썩 친숙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이가 호텔 커피숍에서 한두 시간 조수미를 만나고 와서는 담박에 조수미의 ‘열성팬’이 돼버렸다. 그 뒤 몇 달간 그의 출퇴근길 승용차에는 허구한 날 조수미의 오페라 아리아만 흘러나왔다. 오죽했으면 간혹 그 차를 얻어타던 다른 기자들이 “이제 제발 그만 좀 들으시라”고 했을까.
조수미를 직접 만나 얘기해본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가 많다. 이를테면 조수미는, 단 한 번을 만나도 아주 강렬한 인상을 오랫동안 남기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드러내놓고 폼을 잡고 잘난 척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꼴불견이다. 그런데 조수미가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심지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이 오페라 프리마돈나에 대해서 갖는 첫번째 선입견이 도도함과 오만함이라면, 조수미는 그 말에 딱 들어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조수미는 도도하지만, 그 도도함이 상대방에게 거부감으로까지 확대재생산되지는 않으니까.
조수미가 쓴 책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1997년 출간)를 보면 이런 얘기도 나와 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을 처음 만나서 오디션을 받던 때의 일화란다.
라벨의 곡은 고난도의 멜로디에다 프랑스어로 발음을 정확히 해주어야 하는 난곡 중에 하나다. 다들 발음문제 때문에 애를 먹는 곡인데 나는 자신있게 노래했다. 그 동안 이 곡을 무진장 연습해온 덕이었다.
첫 연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젤은 노래가 끝나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는 거의 절대음감을 갖고 있구먼.”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재빨리 대답했다.
“마에스트로, 저는 거의가 아니라 완벽한 절대음감을 갖고 있습니다.”
당돌한 내 말에 잠시 당황했던지 놀란 토끼눈을 하던 마젤은 곧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브라보!”
건방지다고 보지 않고 내 자신감을 당당함으로 인정한 것이다. 나도 그에게 브라보를 외쳐주고 싶었다. 내 말에 웃어줄 수 있는 그는 나보다 거인임이 분명할 테니까.
절대음감이란 음(音)의 제자리를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인데, 음악을 업으로 삼는 연주자라고 해서 모두가 절대음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절대음감을 가졌다는 건 결국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과 어느 정도 동의어라는 것이다. 자신은 ‘거의’가 아니라 ‘완벽한’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정정하는 조수미의 당돌함,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로린 마젤의 포용력, 만약 이들이 음악의 정점에 선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했을까?
“진짜 연주는 앙코르부터”
기자가 조수미에 ‘주목’한 것은 지난 3월 LG아트센터 개관기념 연주회 무렵이다. 그때 열렸던 조수미 리사이틀에 직접 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 공연에 갔던 사람이 공연장 분위기를 전해줬다. 그날 조수미는 노래 사이사이에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자연스럽게 섞어넣는가 하면, 성악가수로서는 파격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크로스오버 곡들을 불렀다고 했다. 자신은 운전할 때 어떤 음악을 들으며, 혼자 있을 때는 어떤 일을 한다는 등 조수미가 들려주는 얘기가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기자의 머리 속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그렇고 그런, 뻔한 얘기로 채워진 인터뷰는 별로 재미없겠지만 대중에 드러나지 않은 조수미의 면모를 탐구하는 인터뷰라면 흥미롭지 않을까? 예컨대, 노래라면 전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조수미가 즐겨 듣는 팝송은 어떤 것일까, 조수미는 자기말고 노래 잘하는 가수로서 누구를 꼽을까, 세계에서 내로라는 음악인들과는 평소 어떻게 지낼까 등등이다. 무대 전면의 스포트라이트가 밝으면 밝을수록 무대 장막 뒤의 어둠은 더 짙은 것처럼, 대중에 노출된 조수미가 아닌 감춰진 조수미의 진짜 모습을 끌어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사실 이런 얘기는 통상적인 인터뷰로는 끌어내기가 어렵다. 상대를 무장해제시킬 뭔가 특별한 ‘무대 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편안한 시간에,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술 한 잔 놓고 신변잡사를 나누는, 그런 식 말이다.
그러나 그건 기자의 ‘꿈’일 뿐이었다. 조수미의 한국내 매니지먼트사에 그런 요청을 수차례 넣어봤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프리마돈나의 스케줄에서 그런 여유 공간을 만드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지난 5월에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강남 사무실에서 조수미를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음반사, 매니지먼트사, 코디네이터, 방송관계자 등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북적거리는 통에 기가 질려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무튼 기자가 조수미를 만난 건 두 차례, 지난 5월에 30분 정도와 11월에 한 시간 정도였다. 그나마 매니지먼트사가 조수미의 바쁜 일정을 쪼개고 쪼개서 어렵사리 마련해준 자리였다. 두 차례 모두 벌건 대낮에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 꼭대기층 라운지에서 시간에 쫓겨가며 ‘멋없이’ 만났다.
─올해는 특히 한국 연주회에서 정통 클래식이 아닌 크로스오버를 많이 불렀지요? 음반도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고….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라면 모를까, 무대에서 크로스오버를 부르는 경우는 사실 굉장히 드물어요. 외국에서는 주로 정통 클래식 곡들로 하지요. 그런데 고국무대에서는 자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크로스오버를 부르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또, 클래식음악을 잘 모르는 분들도 제가 부르는 크로스오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LG아트센터 콘서트 때에도 크로스오버를 불렀는데, 청중들이 보기에는 좀 어색했을 거예요. 마이크도 처음 잡아보는 거라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고, 나중에 사람들 말이 ‘조수미씨는 그냥 노래하는 게 마이크를 쓸 때보다 훨씬 성량이 크더라’고 하더군요.”
─요즘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전세계적으로도 젊은 층이 클래식음악을 점점 멀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잖아요? 조수미씨가 크로스오버를 자주 부르게 된 건 그런 것에 대응해서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뭐 그런 차원도 있는 겁니까?
“글쎄,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클래식음악을 잘 모르는 분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유도하겠다는 뜻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앙코르에 대해서는 참 넉넉한 것 같더군요. 어떤 연주자는 앙코르를 받으면 마지못해서 나오기도 하는데, 조수미씨는 앙코르를 정말로 반기면서 받아들이는 느낌을 준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선 아홉 곡까지 앙코르를 불렀는데요, 뭘. 사실 연주회에서 진짜 연주는 앙코르 곡을 부를 때부터예요. 관객의 반응이란 게 장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다 달라요. 그러니까 앙코르 곡도 그때 그때 관중들 반응을 봐가면서 선정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노래가 아니라 팬들이 듣고 싶어하는 곡을 불러야 한다는 거지요.”
─콘서트 외에도 레코딩, 영화음악, 더욱이 TV 드라마 주제가까지…. 클래식 팬들 중에는 ‘외도’가 너무 잦은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저는 제가 할 수 있으니까 해요. 자신 없으면 안 해요. 저는 저를 잘 알아요.”
“무대에서 내려오면 마음을 탁 놓아라”
─아무튼 올해는 참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혹시 “사람들이 나에게 식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그러는 건 아닌가요?
“저는 연예인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저는 계산적이지 못해요. 좋으면 좋고, 아니면 아니고, 가식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아요.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조수미씨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대다수 연주자들은 관객들에게 압도당한다는 인상을 주는 데 반해 조수미씨는 언제나 관객을 압도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개인적인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제가 화제의 중심이 돼야 했어요. 주목받는 것을 즐겼고, 그렇지 못한 것을 참지 못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누가 나를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게 싫어요.”
─자신의 그런 변화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봤습니까?
“매니저 말이, 아무래도 사람들 앞에 서는 직업이다보니까 무대 밖에서는 혼자 있고 싶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거라고 하던데….”
─그러나 자기 시간이라는 걸 얼마나 가질 수 있겠어요?
“그건 때에 따라서 달라요. 공연 때에는 굉장히 바쁘고, 연주가 끝나고 집에서 며칠 보낼 때에는 스위치를 딱 꺼버려요. 음악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에요. 예전에 카라얀이 저에게 얘기할 때, 무대에서 내려오면 자기 마음을 탁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자기도 그걸 65세가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저는 아직 그게 잘 안돼요.”
─마치 한 분야에서 도통한 사람 얘기 같군요.
“저는 아직 멀었지요, 뭘. 사실 제 생활이 종교적일 수밖에 없어요. 종교인에게는 종교가 전부인 것처럼, 제게 있어서 종교는 음악이라는 거지요.”
─간혹 성악가 이외의 다른 인생도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왜 안 하겠어요. 많이 하지요. 몇 달씩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닐 때면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많아요. 어디에 가서 겨우 시차적응이 되면 곧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고…. 그런데도 계속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해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웃음).”
─정통 클래식 곡을 할 때와 크로스오버 곡을 할 때 많이 다르지요? 쉽다 어렵다, 편하다 불편하다 등의 차이랄까….
“녹음으로 치면 클래식이 훨씬 힘들어요. 제 분야니까 기대수준이 있잖아요. 녹음과정에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프로듀서가 이제 그만 됐다고 해도 계속해요. 그런데 크로스오버 음반은 처음 해보는 일이고, 그 분야는 제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이번 녹음은 그냥 주변에 맡겨버렸어요. ‘나는 이 노래는 이렇게 해석해서 부르겠다’고 해서 몇 가지 불러 보여주고 ‘그중에서 당신들이 좋은 것으로 골라봐라’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성악가로서는 그렇게 못 해요. 저에게 노래는 본능이거든요. 저는 노래를 본능적으로 해요. 마치 숨쉬고 잠자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음악을 갖다줘도 ‘이건 어떻게 불러야 한다’는 게 그냥 몸에서 나와요. 그런 게 타고난 음악성 같은 건데, 그건 선생님도 소용없고 트레이닝과도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곡이든 느끼는 대로 해석해요.”
─그러면 예컨대 오페라를 할 때 지휘자의 곡해석과 자신의 해석이 다를 때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로린 마젤이나 오자와 세이지 같은 대가들과 함께 할 때에도 서로 곡 해석이 다를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는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그런데 결국은 제가 느끼는 대로 해요. 상대방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도 맞는 것 같은데, 제 몸에선 그렇게 안 나오거든요. 처음에 제가 느끼고 해봤던 식으로 하는 게 확실히 맞아요. 결국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가지요.”
─명반이란 건 지휘자와 연주자가 작품 해석과 필링에서 서로 완벽하게 일치할 때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맞추려고 노력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일방적으로 지휘자에게 맞춰주지는 못해요.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그렇게 못해요.”
─똑같은 지휘자와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매번 결과는 다르지요?
“그럼요. 같은 지휘자와 2년 후에 다시 만나서 같은 오페라 작품을 해도 느끼는 건 전혀 달라요. 일반적으로는 파리에서 하는 ‘리골레토’와 런던에서 하는 ‘리골레토’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다르니까 다른 색깔과 다른 퍼스낼리티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게 바로 오페라의 매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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