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386정치인들에 믿음 버렸지만, 그래도 희망은 그들”

  •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5-05-11 14: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2월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선 오후 6시부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가 열렸다. 기자가 행사장에 도착한 것은 7시 조금 지나서였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올해로 12회를 맞는 이 공연이 외치는 일관된 구호다. 3층까지 꽉 들어차면 1만2000명임을 감안할 때 어림잡아 7000명 이상이 모인 듯싶었다.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영사막에 임수경씨(32)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MBC 아나운서 손석희씨가 ‘돌아보면 그가 있다―국가보안법 희생자들에게 바침’(이원규 시)이라는 시를 낭송할 때였다. 배경화면으로 광복 이후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는데, 그중에 임씨의 방북사건이 포함돼 있었다. 1989년 7월 북한에 밀입국했던 임씨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장면이었다. 앳된 얼굴에 가녀린 몸.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선 힘이 느껴졌고 굳게 다문 입술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경계선을 넘는 순간 고개를 뒤로 돌려 이별을 아쉬워하는 북쪽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드는 모습. 소리 없는 외침이 새떼가 날듯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어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들어서는, 수척한 그녀. 통곡과 절규의 시대를 삼키며 영사막 화면은 꿈처럼 강물처럼 흘러갔다. 인터뷰는 12월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인사동과 구기동에 있는 찻집에서 모두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인사동 찻집에서 임씨와 마주앉은 것은 양심수 공연이 시작되기 5시간 전인 오후 1시께. 경인미술관 뜰에 사로잡힌 겨울 햇살은 거짓말처럼 따사로웠고, 그녀는 습관처럼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눈은 그럴 때마다 아예 감겨버렸다. 때로 도도함이 느껴지는 활달한 성격은 여전했고 6년 전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 사이 그녀는 석사를 땄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별거를 했고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혼을 했고 양육권소송을 했다. 최근엔 일본에 갔다왔다. 》

    -일본 갔다온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11월22일에 가서 12일 정도 머물다가 돌아왔어요. 공식적인 행사는 두 개였어요. 하나는 일본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학술회의였고, 하나는 일본국제사면위원회 강연회였어요. 두 행사 다 도쿄에서 열렸어요. 학술회의에서는 기조발표를 했는데, 제목은 ‘동아시아 냉전 구조와 테러리즘’이었어요. 국제사면위원회는 (방북사건 당시) 저를 ‘세계 양심수’로 지정해 꾸준히 석방운동을 했던 단체예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강연을 했죠. 아사히신문에 강연회와 관련해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왔더군요. 11월23일 학술회의에 참석한 후 오사카에 갔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와 12월2일 국제사면위원회에서 강연회를 갖고 다음날 귀국했어요.”

    애초 임씨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의 생각을 흔들었을까.

    “일본에서 미국으로 곧장 건너갈 생각이었죠. 가서 남은 학업(임씨는 코넬대 대학원에 등록한 상태다)을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개인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어요. 일본에 가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일본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뿌리 깊은 민족적 차별이 여전한 것을 보고 굉장히 가슴 아프더라고요. 분단 문제만 하더라도 그들이 분단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국적을 선택하는 어려움 못지 않게 총련이나 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대한 설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그래서 더더욱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일동포가 60만 명인데, 오사카에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 동포라고 할 정도로 동포들이 밀집해 있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에서 임수경 석방 탄원에 서명한 사람이 83만 명이었어요. 총련이 78만 명을 끌어냈고, 다른 조직에서 별도로 5만 명을 받았다고 해요. 한국 대사관에 접수하려 했는데 안 받아줘서 UN인권위원회에 보냈대요. 10년 전 일인데도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셨는데, 제가 일본에 처음 가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죠. 통일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절실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로

    재일동포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확인하면서 임씨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통일운동에 대한 신념을 새삼 다진 듯싶다.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우리는 통일의 기운을 크게 느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일본 동포사회에선 정상회담이후 총련과 민단 사이에 벽이 많이 무너지고 있어요. 공동행사도 많이 열리고, 통일 기운이 솟구치는 걸 느꼈어요.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저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동포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문제인데, 밖에 살면서 분단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과 통일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그들이 거기서 뿌리 내리는 힘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통일의 주체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문화재단 만들겠다

    그런데 지금 통일운동엔 구심점이 없어요. 통일 문제를 정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물론 설사 이용이 되더라도 통일이 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통일연구소 같은 통일 관련 단체는 많지만 통일의 기운을 일으키는 실질적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있지요. 과거의 통일운동 양상도 비슷하고.

    일본 강연회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물론 여러 가지 답안이 있겠지만 정말 우려되는 것은 남과 북의 민중들 사이에 놓여 있는 불신의 장벽, 마음의 장벽이에요. 그것을 허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정상들이 왔다갔다 하는 일과 제도적인 정비도 필요하겠지만, 정말 우리가 북한의 민중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북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얼마나 동화될 수 있을지, 통일 이후에 갖는 후유증이란 바로 그런 것이거든요.

    저는 해외동포들을 하나의 주체로 세우면서 정말로 커다란 통일문화 캠페인을 벌일 생각이에요. ‘이 시대에 통일의 주역으로 힘있게 일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물을 때, 저의 잠재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사실은 그동안 제 입지나 의지가 약했어요. 석방된 후 학생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틈틈이 단체 활동을 했지만 제가 스스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같아요. 결혼하면서 자신을 한계지었던 점도 있고. 일본에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내가 스스로 주체가 돼서 뭔가 해야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과거에 나를 옭아맸던 외부조건들, 예를 들어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보안관찰 대상이었고, 사면복권도 안됐고, 최근에는 이혼과 아이 문제로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굴레가 거의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힘있게 추진할 때가 됐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비록 지난 10년 간 특정 조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통일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변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제는 저도 제 이름을 걸고 제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테면 ‘통일21 캠페인’ 같은 것인데, 통일문화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선언적인 의미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아니라 비정치적 교류를 계속해 국가보안법이 일상 생활에서 유명무실해지도록 만드는 일 같은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반면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특별법이 있잖아요. 선언적 통일운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과 남에 도움이 되는 통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불씨가 얼마나 크고 밝은 횃불로 빛날 수 있을지, 그들이 그런 희망을 저에게서 보고 있다면 저는 또 그들을 통해 희망을 봤거든요.”

    이런 결심을 하기 전까지 그녀가 최근까지 가장 마음을 뺏긴 일은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과 다섯 살 난 아기를 둘러싼 전남편과의 양육권소송이다. 운동권이던 그녀의 오빠는 연세대 3학년 재학중인 1984년에 입대,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했는데 7개월 만에 죽었다. 군 당국은 사인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습니까.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조사대상으로 결정됐어요. 관련자 몇 명을 조사한 걸로 알고 있어요.”

    ―양육권소송은요?

    “다 끝났어요. 386사건(386 광주술판사건) 때도 느낀 것이지만, 누군가의 공격을 계속 피할 거냐, 아니면 침묵할 거냐를 생각할 때 내가 그것을 피할 이유가 없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내 몫을 잘하고 싶다, 그렇게 뒤늦게라도 마음먹은 것이 잘했다 싶어요.”

    임씨는 미국 유학중이던 지난해 이혼했다. 그리고 올해엔 양육권소송을 벌였다. 2심까지 이어진 재판 결과 그녀가 아이의 양육을 맡기로 했다. 이혼 얘기는 나중에 다시 듣기로 하고 ‘386 광주술판사건’으로 넘어갔다.

    ―광주 사건은 임수경씨 뜻과 상관없이 그 여파가 커진 것 같습니다. 5·18 전야제 사회는 어떻게 맡게 된 거예요?

    “미국에 있을 때 연락이 왔어요. 사실 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오는 형편이었는데 그쪽에서 비행기표를 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왔죠.”

    ―일시 귀국이네요?

    “그렇죠. 미국에서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소송 때문에) 아기가 출국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행사가 끝난 후에도) 못 돌아간 거예요. 한 학기를 미루면 그 안에 판결이 나겠다 싶었는데, 2심까지 가는 바람에 출국날짜가 늦춰졌죠.”

    ―소송이 진행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렇죠. 전야제가 5월17일인데 그 날 첫 재판이 있었어요. 동시에 진행된 거예요, 386사건과 양육권소송이. 묘하게 그렇게 돼버렸어요. 아기 양육권과 여권 문제가 다 해결된 게 10월말이에요. 11월에 나갈 예정이었는데 일본을 다녀와 생각을 고쳐먹은 거죠.”

    ‘386 광주술판사건’은 우리 사회가 그녀의 이름에 어떤 상징성을 부여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그녀에게 불행인지 축복인지 몰라도, 여전히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그 자신에게, 또한 대중에게 새삼 일깨워 준 사건이기도 하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의 진실을 궁금해합니다.

    “저는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건의 결과와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한 거지. 당사자가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고 용서도 있는 건데, 그들은 너무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어요. 공인으로서 대중에 대한 책임이 있고,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라면, 더구나 그들이 겨냥한 대상이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될 저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용서가 안 되는 거죠.”

    ―임수경씨의 글과 관련자들의 주장이 몇 가지 어긋나는 게 있습니다. 박노해씨가 여종업원과 춤을 췄다는 부분만 해도 말이 다르지요?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아가씨와 블루스 추면 안 돼요?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쪽에선 해방춤을 췄다고 해명했지요?

    “매체마다 사람마다 얘기가 달라요. 박노해씨는 자기는 춤춘 일이 없다고, 사건 직후 중앙일보에 그렇게 말했더라고요. 그런데 김성호 의원은 박씨가 해방춤을 췄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김태홍 의원은 ‘박노해가 무슨 춤을 추냐’, 이런 식이에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상반된 진술이 있다 쳐요. 사건 현장에 없던 사람은 누구의 얘기가 맞는지 판단할 수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느냐. 정황에 의해서 판단해야죠.

    이 사람이 A를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은 A가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A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황근거와 반대로 A가 아니라고 할 만한 정황 근거가 각각 있겠죠. 그들은 여자를 끼고 술을 먹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그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반면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술 먹었다, 라고 없는 사실을 꾸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임수경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내가 헛것을 본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나한테 그 이유를 달라는 거예요.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1000%의 허무맹랑한 얘기를 했는지. 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지.”

    ―술자리에 있던 사람이 한 10명 됐나요?

    “10명 넘었을 거예요.”

    ―여종업원이 한 사람 앞에 한 명씩 앉은 건 아니죠?

    “그건 아니고, 꽤 있었죠. 앉아 있고 서 있고 서빙하고. 나는 숫자가 몇 명인지 다 알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네가 밝힌 게 4명이거든요. 나는 기자회견에서 4명까지는 인정해줬어요.”

    “내가 헛것을 봤나”

    임씨는 당시 관련자들이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며 분개했다. 특히 L의원의 ‘오리발’에 대해선 혀를 찼다.

    “얼마 전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발족식 행사 때 L의원을 만났어요. 느닷없이 나보고 ‘임수경씨가 (그 방에서) 나갈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래요. 누가 물어봤냐고요. 내가 너무 기가 막혀 ‘의원님 왜 그러세요, 정말. 의원님하고 나하고 그 날 다른 방에서 따로 얘기까지 했잖아요?’ 하고 정색을 했더니 ‘아 그래요? 그럼 내가 술이 취해 임수경씨를 못 봤다고 생각했나봐’ 그러더라고요.

    그 사건으로 기자회견할 때 어떤 기자가 ‘그 자리에서 L의원 보셨습니까. L의원은 임수경씨를 못 봤다는데요?’ 하고 묻기에 제가 ‘봤다’고 대답했거든요. L의원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그게 귀에 들어갔겠죠. 그 날 행사장에서 또 그런 말을 하니까 제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죠. 그래서 ‘술이 취해서 그 사람을 봤는지 못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를 해야지, 왜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느냐’고 따졌어요.”

    임씨는 ‘말’지 7월호 기사에 대해 분개했다. ‘말’지 기사는 당시 관련자들 개별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것인데 그에 따르면 임씨는 헛것을 봤거나 사실을 왜곡 또는 과장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회견을 끝으로 양측 모두 더 이상의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그 후 ‘말’지에 아예 민주당 편들기로 관련자들의 인터뷰를 포함한 기획 기사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날 그런 술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쪽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다만 정도의 차이라는 거지요. 자기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 내용과 달리 여자들하고 흐느적거린 게 아니다, 또 여자들은 술과 안주를 차리느라 왔다갔다 했을 뿐이다, 뭐 그런 해명 아닌가요. 그런데 기본적인 사실도 잡아떼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죠.”

    ―우상호씨(민주당 서대문구지구당위원장)는 다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인정한 사람들만 이상해졌죠. 다른 사람들은 다 잡아떼고. 여자도 없었다, 춤도 안 췄다…. 그런데 영길이 형(송영길 의원)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킬리만자로를 불렀는지 뭘 불렀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자기가 그걸 불렀다고 말하니 알게 됐지―그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어요. 결국 영길이 형만 바보 된 거예요. ‘노래는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자 끼고 술 먹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인데 차라리 그 정도면 나아요. 상호 형도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어쨌습니다’ 하면서 기자회견 때 울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지탄받고, 딱 잡아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돼버리데요.”

    ―김민석 의원도 잡아뗀 편입니까.

    “자기는 원래 여자를 옆에 앉히지 않는대요.”

    ―임수경씨 글에는 양옆에 여자를 앉힌 걸로 돼 있던가요?

    “웃기는 것은 서로 자기 옆에 김의원이 앉아 있었대요.”

    ‘말’지 기사 중 김민석 의원과 관련한 부분을 살펴보자. 김성호 의원은 “확실한 것은 내 옆에 김민석 의원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성민 의원은 “김민석 의원 부분은 1000% 거짓말”이라며 “임수경씨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김민석 의원은 나하고 얘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상호씨의 증언에도 김의원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여종업원이 들어온 것은 맞다. 사람들이 김의원 옆에 여종업원을 앉히려고 했지만 김의원은 ‘화장실 간다’며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는 보조의자에 앉았다.”

    임씨가 문제의 글을 386정치모임인 ‘제3의 힘’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것은 술판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그러나 이 글은 파장을 우려한 ‘제3의 힘’ 총무 이정우 변호사에 의해 몇 시간 만에 삭제됐다. 삭제되기 전까지 조회수는 47. 이 47명의 조회자 중 누군가에 의해 임씨의 글은 일부 표현이 바뀐 채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다.

    ―글을 올린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동기라기보다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죠. 계속 가슴에 담고 있다가 그 사람들이 5·18 기념식에 참석하고 광주를 계승하네 어쩌네 하면서 인터넷에 인터뷰도 하는 걸 보고 한마디로 웃긴다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일 때문에 지금도 많이 아프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런 뜻에서 선배들의 조언을 바랐던 거예요.”

    ―임수경씨가 쓴 글과 인터넷에 돌아다닌 글이 조금 다르지요?

    “문제가 된 글은 누가 쓴 건지 제가 알아요. 그런데 그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그거예요. 제가 쓴 글이 있었고, 누가 그 글을 정말 화려하게 변조해 유포시켰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 글을 쓴 네가 잘못이다. 뭐 그런 스토리인데 그 글은 별도로 작성된 거예요.”

    원문과 이를 도용한 글은 사실 내용 면에선 별차이가 없다. 임씨도 이를 인정했다. 다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다 언론사에 포착된 글에는 원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임씨와 우상호씨 간의 언쟁 부분이 빠져 있다. 그리고 원문에는 없는 ‘흐느적거렸다’ 따위의 자극적인 표현 몇 가지가 첨가돼 있다.

    ―인터넷에 글을 유포시킨 사람은 ‘제3의 힘’ 회원인가요?

    “아니에요. 누군가 저한테 확인을 해오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광주에서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였어요. ‘제3의 힘’ 총무인 이정우 변호사가 그 글을 보고 전화를 걸어왔어요. ‘임수경씨 마음 알 것 같다. 나도 글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 내가 얘들을 붙잡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하겠다. 그런데 이게 혹시라도 언론에 보도되면 문제가 커지니까 삭제를 하는 게 좋겠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삭제에 동의했어요. 뭐가 문제죠?”

    ―원문을 보면 그날 임수경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우상호씨에 대한 개인 감정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사적인 감정이 공적 분노로 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요.

    “개인 감정을 폭로하려 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상호 형을 염두에 두고 썼던 것이기 때문에 개인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공적 분노가 그런 것 아닙니까. 개인적인 체험에서 촉발돼 공적인 것이 되지 않나요. 저도 이런 일들을 당했다는 사실을 덮어두고 가고 싶을 만큼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훨씬 더 큰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람이라고요. 내가 길거리에서 불량배한테 그런 식으로 당했다면 밝힐 이유가 없어요. 밝혀서 뭘 해요, 내가 깎이는 일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선배들로 생각했기 때문에 글을 올린 거예요.”

    ―그런 뜻이라면 굳이 공적인 공간에 글을 올릴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적인 통로로 푸는 게 합리적 해결 수순 아니었을까요.

    “문제는 우상호씨를 비롯한 그 사람들이 적절하지 못한 시간에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있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내가 그 일을 알리면서 상호 형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빼놓으면 그건 내 얘기가 아니잖아요?”

    임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태가 악화된 데는 자존심 문제도 있는 듯싶다. 글을 올리게 된 경위야 어떻든 임씨는 5·18 전야에 여종업원이 접대하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생운동을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그런 날 그런 자리에서 술 먹고 노래 부른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봤다. 따라서 그녀는 ‘386선배들’이 마땅히 그 날 일을 반성하고 사과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그 일에 소홀했고 그것이 그녀의 분노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은 그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K의원의 폭탄주 로비

    ―운동이라는 것이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특히 국회의원들에게는 사람이 곧 표잖아요.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는 상호 형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오히려 상호 형이 최대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역 의원이 아니잖아요.”

    ―공적인 차원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임수경씨 개인 차원에서 볼 때는 어쨌든 분노를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나중에 반성했어요. 현역 의원들처럼 나중에 나를 매도하지는 않았죠.”

    ―우상호씨와의 화해 여부와 상관없이 공적인 차원에서 그 일을 문제삼아야겠다고 판단한 겁니까.

    “그럼요. 만약 문제 제기 방식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면, 좋다 이거예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후의 대응방식이에요. 과연 그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갖고 사태를 마무리지었는가. 김민석 의원의 정치적 플랜, 마스터 플랜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걸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나도 미래가 많이 무너졌어요. 나는 정말 억울해요. 내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 제기 방식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정말로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의 잘못이죠. 어쨌거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실성 인간성 도덕성이 어떤지, 체험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큰 교훈을 얻었어요.”

    ―결과를 놓고 보면 그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깨끗하고 정정당당하게 나갔다면 이용당할 이유가 없었겠죠. 어쨌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우리 그 날 여자들 있는 데서 술 마셨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그런 말 할 자격 있나’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반성할 만큼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분을 지적해준 사람에게 고맙다, 앞으로 잘하겠다, 지켜봐달라’, 그랬다면 왜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요. 안 그래요?”

    ―당시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마디로 황당했죠. C일보가 처음 이 일을 알았어요. C일보 담당 기자한테 어떤 크기로 쓸 거냐고 물어보니 사회면 박스 정도라고 했어요. 저도 딱 그 정도의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그 신문엔 기사가 실리지 않았어요. 그날 밤 K의원이 C일보 편집국에 찾아가 기자들에게 폭탄주를 한잔씩 돌렸대요. J의원도 전화로 로비를 했다고 들었어요.”

    임씨는 C일보가 그 날 기사화하지 않은 데는 두 의원의 로비가 영향을 끼쳤다고 믿고 있다. 사건 직후 주간 ‘미디어 오늘’(6월8일자)은 임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기사에도 폭탄주 얘기는 없다.

    ―K의원의 폭탄주 얘기는 누구한테 확인한 겁니까.

    “C일보 기자한테 들은 거예요. 시내판 마감이 11시인데, 11시5분 전 나한테 전화했을 때 ‘기사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새벽 1시반쯤 내가 기사가 실렸는지 확인했더니 안 실린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K의원이 찾아와서 폭탄주 한 잔씩 먹고 금방 헤어졌다는 거예요. C일보에 기사가 빠진 그 다음날 동아일보가 1면에 크게 쓰고 사회면 톱으로 키우면서 다른 신문들도 키웠지요. 민주당에서는 이를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탓으로 돌리던데, 그 점은 참 안타깝죠. 어쨌든 언론 보도의 문제점까지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도덕적 비난이야 그렇다 치고, 그들이 우리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애써온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건이 터지면 늘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어요. 예컨대 장원씨 성추행 사건이 터졌을 때 정치권과 보수 언론에서 시민운동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매도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빌미를 준 것이지요. 비판을 하되 구분할 것은 구분해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장원씨 사건과 이 사건은 달라요. 그 사건은 당사자가 잘못을 시인했고, 그에 대한 법적 처벌도 받았어요. 그런데 이 사건은 당사자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잘못된 진술이나 판단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그런 식으로 정리됐어요. 개혁세력? 좋아요. 그런데 개혁세력이라면 뭔가 달라야 한다는 거죠. 기성 정치인이 잘못 했다면 덮어주고 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적어도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개혁세력이라면 ‘그래. 그런 일 있었다. 반성한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다음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돌을 던지지 말아라’ 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자회견도 했던 거고. 그들을 감싸주고 덮어주려고. 건전한 비판, 건전한 해결방식을 통해 건강한 미래가 열리는 것 아닌가요. 아름답게 끝낼 수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들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매도했어요. 지금까지 많은 진실들이 이런 식으로 덮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이 사람들이 딱 잡아떼고 아니라고 한다면, 한 사람의 인생과 인권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임씨는 “인간성 확인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이상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는 말로 386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실망하긴 했지만 그 사건만으로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단할 수는 없다고 봐요. 과거 그들이 보여준 희생 정신이 다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는 거죠. 미래에는 좀더 잘할 수도 있겠죠. 정치인으로서 잘한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감화를 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지요. 나야 개인적 차원에서 그들에게 희망을 버렸지만, 그래도 지나온 삶이 있는만큼 개인적인 영달이나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정치인과는 분명히 다르리라고 봐요.”

    나는 덮어주려 했는데…

    ―학생운동 시민운동 등 과거 각 분야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이 한때 유행처럼 정치권에 진출했고, 지금도 꾸준히 그런 움직임이 있는데, 정치권에 진출해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운동권의 좌절 또는 변절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그런 현상을 어떻게 봅니까?

    “전문성의 문제라고 봐요. 특정 학문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만이 전문성은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고 실천해온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는 사람들도 있어야지요. 물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개인의 선택 문제죠. 제도권 진출은 무조건 나쁘다, 시민운동을 끝까지 한 사람은 무조건 옳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임수경씨가 소외된 측면이 있다는 얘기도 들리는데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주변에서 정치권으로 가겠다는 사람들한테 ‘그래, 가서 열심히 잘해라’ 그랬지만, 저 자신은 전혀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요. 내가 나를 아니까. 나의 능력과 나의 품성과 나의 기질을 아니까.”

    ―혹시 제의 받아본 적은 없어요?

    “그게 중요해요? 얘기해야 돼요?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제의를 받은 적은 있죠. 그렇지만 제 생각이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살면서 한두 번은 ‘운명적’이라 할 만한 사건을 겪게 된다. 임씨의 방북사건이 그랬다. 그 사건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한 운동권 여대생을 ‘통일의 꽃’으로 만들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꽃’이 된 그녀는 ‘꽃답게’ 살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적어도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989년의 임수경씨 방북사건은 통일운동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당시 자신의 행동을 지금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결과가 다 말해주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후회는 전혀 없어요. 당시 정세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일이 남북관계에 끼친 영향이 크잖아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단 말이죠. 그 노래를 북한에 처음 퍼트린 게 저예요. 제가 북한에 머물 당시 북한에서 이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북한 방송에선 매일같이 9시 뉴스 직전 그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그런 것이 비록 작은 부분일지 몰라도 남과 북이 함께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고위급회담이다 뭐다 하면서 양쪽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는데, 북한에 가면 그 사람들이 꼭 묻는 말이 ‘임수경 학생은 언제 석방됩니까’였어요. 우리 정부에서는 그걸 정치적인 행위로 간주했지만, 그런 게 아니죠. 임수경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일종의 공감대 형성이라고 봐요. 앞서 제가 얘기한 대로, 통일을 이루는 데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인데, 이를 위해선 차츰 공감대를 넓혀가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지요. 어떤 생각, 어떤 각오였습니까.

    “어떤 거창한 각오 같은 건 없었어요. 22살 대학 4학년으로서 분단의 현실에 조금은 가슴 아팠던 거죠. 그 시기 젊은이들만이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함이 바탕이었던 것 같아요. 남과 북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북한을 빨간색으로만 보고 자라던 젊은이가 분단의 현실에 눈뜨면서 또 하나의 조국인 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고, 그들과 통일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갔던 겁니다. 나중에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은 받았지만, 저의 행위는 통일로 가는 길에 놓인 중요한 디딤돌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믿어요. 특히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는 점이 중요해요. 뒷날 활발해진 판문점 왕래에 단초가 된 것이죠.”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 축은 5·18에 대한 분노였다고 봅니다. 그 와중에 흔히 주사파로 불리는 극단적인 형태의 운동권도 생겨났죠. 주사파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주사파가 무슨 행동을 했죠?”

    ―한마디로 북한의 주체사상에 흠뻑 빠진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의 주류 정서에 비춰보면 맹목적인 친북 성향을 띤 것이죠. 5·18에서 촉발된 정권에 대한 분노, 한쪽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나머지 한쪽의 조국, 곧 북쪽에 대한 기대와 경도로 나타난 것 아닐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렇지만 다양한 철학과 다양한 사고가 나올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죠. 그것이 처벌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학생들을 잡아 가두려고만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인 행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 문제를 꺼낸 것은, 주사파의 대부라 할 김영환씨의 행태를 어떻게 보는지 묻고 싶어서입니다. 김씨는 전향한 후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통해 공공연히 김정일 정권 타도와 흡수통일을 주장합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라면 극에서 극으로 돌아선 거지요.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해요. 물론 개인적인 과오를, 시대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과오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학생운동할 때 김영환 선배 영향을 참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노동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느낀 배신감이란 것은―그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굉장한 참담함이었어요. 저는 다양한 사고방식을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렇지만 대중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죠. 김영환씨는 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노동당 입당은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였다고 생각해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행위죠.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의 입당이나 월북, 귀순이야 개인의 선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김영환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두고두고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운동권 일부에 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을 얘기하다가 황석영씨의 신작 ‘오래된 정원’이 화제에 올랐다. ‘오래된 정원’은 5·18이라는 역사의 급류에 몸을 던진 80년대 초 운동권 젊은이들의 투쟁과 사랑을 그린 것으로, 지난 5월 작가 황씨가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을 수 없다”며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해 화제가 된 작품이다. 임씨는 “재미없지만 끝까지 읽었다”며 까르르 웃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 학생운동과 관련해 이런 표현이 나오죠. 윤희라는 여주인공의 얘기인데, ‘대개 사회적 보상욕구가 큰 가난한 젊은이들이 동아리를 만들고 거기서 권력을 실험하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재빠르게 자기 변신을 한다’고.

    “윤희의 한계죠. 윤희는 운동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윤희도 현우(남자 주인공)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는 굉장히 높게 평가하지 않아요?”

    ―학생운동권의 권력화 또는 운동권의 변절을 작가가 윤희의 입을 빌려 비판한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사회적 보상욕구가 큰 가난한 젊은이들이라는 표현은 좀….”

    ―임수경씨는 가난하지는 않았죠?

    “(윤희의 시각은) 학생운동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보편적 시각이에요. 그런데 보상욕구가 큰 사람들이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을까요?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하나의 편견인 거지.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 잘못된 일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삶 외에 어떤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학생운동을 한다고 생각해요.”

    방북사건이 터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서울지하철공사의 고위간부였다. 그후 승진에서 계속 밀리는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정년을 앞두고 관리이사로 승진했다가 조순 서울시장이 물러날 때(1997.9) 해고당했다. 지금은 아리랑TV 감사를 맡고 있다.

    화제를 통일 문제로 돌렸다.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그녀의 통일철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그녀는 나름의 영역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현 정부의 햇볕정책은 대립 일변도의 기존 남북관계를 개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반대하거나 시비를 거는 세력의 목소리가 높은 것이 현실 아닙니까. 황장엽 파동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데, 황씨의 대북정책 비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황장엽씨가 남북한 민중에게 사죄해야 할 날이 올 겁니다. 386사건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데, 비판과 싸움이라는 건 강자에 대항할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북쪽에 있을 때는 상대가 너무 강해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 강자를 적으로 두고 있는 곳으로 넘어와 그들을 짓밟는 건 싸움이 아니죠. 북에서 문제가 있어 남쪽으로 오면 귀순자 환영대회 해주고, 생활비 지원하면서 마음대로 북한을 비판하게 하는데, 그런 비판은 가치가 없는 거죠. 남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전혀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가 없다고 봅니까.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는 있겠죠. 그래도 그쪽 분야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영향력을 스스로 떨어뜨렸거든요.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제3국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 안기부(국정원)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적절한 비판을 할 수 있을까요.”

    ―현 정부 들어선 오히려 국정원과 대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모르는 거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현 정부가 북한의 인권 문제나 군축 문제에 대해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건 차후의 문제예요. 지금 논의할 과제가 아니라는 거죠. 이제 겨우 두 정상이 만났어요. 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법과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선결과제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건 그야말로 극우의 논리죠.”

    정부 독점이 문제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 대차대조표를 따집니다. 결론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너무 많고, 그쪽 비위 맞추기에 바쁘고 그쪽 의도에 끌려가고 있다는 거죠. 따라서 이런 방식은 통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 사람들 주장 중엔 남쪽이 우월하니까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 않은가요. 그 논리에 따르면 우월한 쪽이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 사람들 논리에 모순이 있는 거죠. 왜 끌려 다니느냐고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시혜를 베풀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통일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의 차이라고 봐요.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분단되고 50년이 지났어요. 현정부의 통일정책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시작단계를 두고 비판의 강도가 너무 센 것 같아요.”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열렬히 지지하는 편입니까.

    “열렬하지는 않아요. 지지도 아니고. 다만 인정할 뿐이에요.”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좀더 과감하게 가도 될 것 같아요.”

    ―지금도 시끄러운 마당에 난리가 날 텐데요.

    “법과 제도 정비가 뒤따라가야 한다는 뜻이에요. 정책은 열렸는데 그것이 정부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 통일을 원하는 쪽, 원하지 않는 쪽 양쪽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는 거죠.”

    ―통일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있지요.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이 왜 힘든 줄 아세요? 독점하니까, 정부가 다 쥐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그걸 나눠야 해요. 통일정책에 호의를 갖고 있고 정말 의욕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분위기를 만들면 안 돼요. 정부 독점에서 벗어나야 해요. 제가 앞으로 벌이려는 ‘통일21 캠페인’도 그런 차원이에요.”

    ―통일문화재단을 만들려면 돈도 필요할 텐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있죠. 남북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좀더 다양하게 이뤄져야 해요. 학생들이 금강산이나 개성에 캠핑을 가고 북한 대학생들을 남쪽에 초청할 수도 있어요. 이런 일들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지요. 정부 차원에서는 남쪽이나 북쪽 모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저만이 갖고 있는 달란트가 있을 거예요. 북한에서 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다고 보거든요.”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씨가 동독을 거쳐 북한에 들어간 것은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석한 것이다. 방북기간은 45박46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씨는 바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6월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5년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임씨의 상고를 기각, 5년형이 확정됐다. 그녀는 1992년 12월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옥살이를 통해 뭔가 깨닫거나 배운 것이 있다면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다스려질 수밖에 없지요, 뭐. 이야기하고 싶어도 못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읽고 싶은 책도 못 읽고… ‘할 수 없다’라고 규정되는 생활의 연속이니. 감옥에 있을 때 제 나이가 22살에서 25살이었어요. 그 나이 때면 누구나 뭔가 하고 싶다고 갈망하잖아요. 그런데 ‘할 수 없다’로 규정된 곳에 있다보니 그 갈망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이걸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나를 다스리며 다른 방법을 찾느냐. 그런 갈등이 있었지요. 처음에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주변에 양심수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어요. 그러다 청주여자교도소로 이감돼 혼자 있게 됐지요. 집단적으로 있을 땐 막 싸우고 그랬는데 혼자 있다 보니 ‘저 교도관을 인간적으로 감화시켜 또는 잘 구슬려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보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분노―공권력 앞에 한없이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울화랄까 고통이랄까. 기도를 통해 그런 것들이 조금씩 다스려졌지요.”

    ―뉘우치는 일은 없었겠지요, 물론?

    “왜 뉘우쳐요. 나를 가둔 공권력을 향한 분노 때문에 고통스러웠어요. 고 문익환 목사님은 항상 감옥에 있는 게 즐겁다고, ‘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축복을 주시냐’고 늘 감사기도를 드렸다는데, 나는 나이가 어려 그런지 ‘왜 나에게 고통을 주냐’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감옥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이라든가, 책도 많이 읽었고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알게 됐고.”

    ―많이 울지는 않았습니까.

    “그러진 않았어요. 면회 때 가끔 우는 정도였어요. 극한상황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안기부에서 조사 받고 검찰로 넘어가기 전날 엄마를 면회시켜 줬는데, 엄마는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혼났는데. 독한 년이라고. 그런데 저 사람들한테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싶지 않더라고요. 눈물 흘릴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거죠. 바싹 긴장한 탓도 있고.”

    ―모욕감 같은 건 없었습니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잠자는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아 잘 때는 이불을 뒤집어썼어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교도관과 늘 일대일로 대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했지요. 청주여자교도소에선 사동 한 층에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운동도 혼자 하고. 특급 요시찰 인물로 격리대상이었거든요.”

    ―평상심 회복이 쉽지 않았던 것 같군요.

    “서울구치소에서 1년 지낼 땐 재판 받으러 다니느라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청주에서는 좀 힘들었어요. 3년을 넘기고 나니 많이 힘들더라고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싶을 때 나온 것 같아요.”

    ―옥살이 후유증 같은 건 없었습니까.

    “한동안 혼자 다니는 게 무섭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어지러웠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주인공이 탈옥한 후 길을 걸을 때 누군가 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자꾸 뒤돌아보잖아요. 내가 그랬던 것 같아요. 혼자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통일운동권에서 갖게 된 자신의 위치가 부담스럽진 않았습니까.

    “처음엔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통일의 꽃’도 그렇고. 한동안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것으로 받아들이자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방북계획을 알았다면 말렸겠지요.

    “당근(‘당연하다’는 뜻의 신세대 용어)이지요.”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가 아니라 어느 부모라도 말릴 일이지. 당근을 자꾸 얘기하시네.”

    임씨는 “우리 가족들한테 정말 고맙다”며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하느님이 우리가 고통을 견뎌낼 줄 알고 고통을 주신 거라고. 아버지는 지금도 언론보도에 민감해요. 저와 관련된 기사는 일일이 체크하시지요.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에요. 엄마는 늘 ‘임수경,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하세요.”

    ―가장 믿음직한 동지네요.

    “그냥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아픈 일 있으면 더 아파하시고. 언니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든든한 친구였어요. 직장에서도 잘렸죠. 임수경 사건 3일 만에. 우리 딸이, 내 동생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나중엔 자랑스러워하시고. 지금도 격려해주시고.”

    가장 믿음직한 동지, 가족들

    임씨는 “요즘 힘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최근 버스에서 겪은 일을 들려줬다.

    “엊그제 이쪽(구기동)에서 광화문 가는 버스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아 잠깐’ 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돌아보니 ‘임수경씨죠? 차비 내지 마!’ 그래요. 목소리도 크고 덩치도 큰 분이었는데, ‘운동권 사람들이 다 변절했지만 임수경씨는 변함없는 것 같다. 힘내라. 우리 희망이다’ 뭐 그런 말씀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렸는데, 운전대를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수까지 건네고. 그 아저씨가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이혼도 했죠?’ 하고 묻는 바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아, 이렇게 나를 지켜보며 지지하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때는 지났거든요. 오히려 고마워요. 그분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내가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돌이켜보면 그동안 사회의 주변부를 맴돌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스스로 많이 위축됐고. 지금은 별로 무서운 게 없어요. 작년에 미국에서 아기와 떨어져 혼자 살며 참 힘들었거든요. 이제 이혼 문제도 정리됐고 아기 문제도 정리돼 홀가분해요. 자신감이 생겼어요.”

    ―버스 기사 말대로 운동권의 변절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임수경씨도 주변에서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까.

    “많이 겪었죠. 그런데 저는 변절이라기보다 변화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사회가 변화하고 삶이 그만큼 다양해졌으니까. 누구든지 변화하는 거고, 누구나 전선에 설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요. 섭섭한 것은 있지만요.”

    ―어떤 점이 섭섭합니까.

    “영향력 측면에서죠. 꼭 그 길은 아니더라도 그 마음만은 변치 말아야 하는데…. 뭐 그런 거죠. 그런데 사회가 워낙 냉혹하니까 그렇겠지, 하고 생각해요.”

    ―그걸 사회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운동권 사람들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과거에 그런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 평가하면 좋겠어요. 그들 개개인의 인생을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지금 뭘 좀 잘못했다고 해서 과거 고생한 것까지 매도하면 안 된다고 봐요.”

    ―대다수 소시민은 자기 삶을 살기에 바쁘지요. 그러면서도 사회개혁을 위해 애쓰거나 뭔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기대감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도덕성 잣대도 들이대고.

    “저만 해도 이제 아기 데리고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생존 문제에 이르면 개인은 또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모른 척하면서 도덕성만 요구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물론 저는 생활비는 벌고 있어요.”

    임씨는 가방에서 의료보험증을 꺼내 보이며 웃었다. “나 직장 있어요. 매달 갑근세도 내고 있고.” 그러나 직장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임씨가 결혼한 것은 1995년 1월. 대학원(서강대 언론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1998년 11월부터 별거에 들어간 임씨 부부는 이듬해 8월 이혼신고를 냈고, 그해 10월 법적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아픈 것 없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 생각해요.”

    ―그래도 결혼할 때는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글쎄요. 그래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결혼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냥 옆에 있는 사람과 결혼한 거죠.”

    ―무엇이 가장 큰 갈등 요소였습니까.

    “법적으로 혼인파탄사유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에 해당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임씨는 “거기까지만” 하면서 구체적 이혼사유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용기가 없었어요. 임수경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혼한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잇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특히 여자들은. 이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오늘 아닌 것은 내일도 아닌 거고. 1년 후나 10년 후나 똑같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이혼한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문제예요. 이혼한 여자가 있으면 이혼한 남자도 있는 건데, 남자에 대해선 별로 뭐라고 안 하잖아요. 왜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미루었나. 후회가 돼요. 좀더 일찍 정리했더라면 빨리 내 자리를 찾았을 텐데.”

    이혼을 당당히 받아들여야

    조금 난처하다 싶을 질문을 던졌다.

    ―주변에서 임수경씨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들이 종종 들려요. 오만하다느니 건방지다느니 실망했다느니… 특히 운동권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이 들리던데, 왜 그런 얘기가 나올까요.

    “오만해요, 제가? 오만하고 건방져요, 제가?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운동권 사람들이라고 내가 다 알지는 못해요. 제가 아는 사람보다 저를 아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피상적 측면만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예, 아니오’가 분명하거든요. 그동안 여성문제에는 별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많이 느끼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을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 점도 작용하는 것 같고.”

    ―꾸미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직선적인 성격이 오해를 낳은 건 아닐까요.

    “좋고 싫은 것을 분명히 구분해 말하니까 그런 평판이 나올 수도 있겠죠. 제가 특정 조직에 매이고 싶지 않은 것도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예요.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조직 입장에 따라 ‘예’라고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임씨는 “저는 굉장히 겸손하고 인간적이고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데…” 하면서 웃었다.

    ―자신은 별생각 없이 얘기하거나 행동한 것이 다른 사람한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것이 내 위치를 세우는 버팀목이에요. 그것마저 없었다면 거의 이리저리 끌려 다녔을 거예요. 제 삶의 위치를 스스로 규정지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규정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 여러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끝내며 새삼 느낀 것은 그녀가 참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간의 일부 평이야 어쨌든 건강한 의식을 갖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점은 기자가 1989년의 방북사건에 대해 ‘운명적’이라는 표현을 쓰자 그녀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 데서도 엿볼 수 있었다.

    ―운명적인 방북사건이 이후의 삶을 규정지은 것 같은데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운명이라기보다 의지일 것 같아요. 능력은 약하지만 내가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힘을 모아 세력화해갈 시기도 됐고 또 그만한 나이도 된 것 같아요.”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