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론에 매우 비판적인 한 프랑스 국제정치학 교수를 만났다. 한국정치학회가 12월2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마련한 간담회에서였다. 파리8대학 국제정치학 교수이면서 프랑스의 대표적 일간지 ‘르 몽드’가 발행하는 월간지 ‘디플로마틱(외교)’의 편집-논설위원인 필립 골럽(Philip Golub)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우선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본다. 1955년 미국에서 미국인 부모 아래 태어난 그는 부모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프랑스에서 다녔고 부모가 다시 미국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다녔다. 대학 학부 과정은 뉴욕의 사라로런스대학 인류학과에서, 석사과정은 프랑스의 메츠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과정은 프랑스의 소르본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서 각각 마쳤다. 따라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통역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어에 익숙하다.
부모는 모두 화가로,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반폭력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공로로 두 사람은 일본 히로시마(廣島)평화상을 수상했다. 정치적 성향이 이런 부모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그래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일찍부터 눈을 떴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 일관되게 미국 주도의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론을 비판해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본다.
“오늘날 전개되는 세계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금융의 세계화다. 폭넓은 개념의 세계화를 두고 축복인지 재앙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금융의 세계화만 놓고 보면 분명히 재앙 쪽에 가깝다. 금융의 세계화란 결국 ‘금융자본의 국경을 넘는 무차별적 이동’을 뜻하는데, 이것이 앞으로 계속된다면 세계 곳곳에서 외환금융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세계금융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를 낳을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금융의 세계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국경을 넘는 무차별적 이동’에 따라 우선 북반부의 잘사는 나라들과 남반부의 못사는 나라들 사이에는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같은 나라 안에서도 빈부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엔발전계획(UNDP)의 조사에 따르면, 잘사는 나라에 사는 세계 20%의 인구와 아주 못사는 나라에 사는 세계 20%의 인구 간 소득 격차는 1960년에는 30 대 1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70 대 1로 벌어졌으며 2015년 경에는 150대 1로 그 차이가 더 커질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때, 인류 사회 전체가 직면할 위험의 수준은 매우 높을 것이다. 그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잠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유럽을 휩쓸었던 시장 신봉과 자본 자유화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사조 아래 국내에서는 계급간 갈등이 날카로웠고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해 제국주의적 침탈을 강화했으며 그러한 복합적 대결구도 속에서 유럽에서는 혁명과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라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시장 신봉과 자본 자유화에 대한 반성이 뒤따랐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론의 이름 아래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약육강식이 확대되고 계급갈등이 심화되면 결국 인류는 또 한 차례 커다란 사회혁명과 국제전쟁이라는 불행한 재앙에 빠져들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한국 경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소련과 대결하던 냉전시대에 미국은 친미 우호 국가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서도 독자적이거나 보호주의적 산업정책과 자본통제정책을 허용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히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경쟁자로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이 미국에 유리한 정책인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이 시점은 한국이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고자 재벌의 해체를 추진하는 시점과 일치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는 이 두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을 개혁에 두 기둥으로 삼아왔다. 한국의 경제 위기는 여기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국이 그 중심에 서 있는 초국적 자본이 한국의 경제주권을 압박하는 가운데 강도 높게 진행되는 재벌 개혁 및 금융 개혁은,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기업 및 은행의 해외 매각에 따른 초국적 자본에 대한 종속, 그리고 실업자의 양산에 따른 중산층의 붕괴와 빈곤층의 증대를 가져오게 된다. 김대중 정부의 장래는 바로 이 경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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