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19명을 공개 총살하고 4000여명을 불법 연행”

  •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5-05-11 15: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99년 2월부터 6개월간 압록강 상류에 있는 혜산시에서는 자본주의 요소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인민군대가 동원돼 대규모 숙청이 진행되었다. 이 숙청에서 인민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공개 총살형을 집행하고 600여명을 투옥했으며 800여명을 추방했다. 국정원은 남북화해 무드에 방해가 된다며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1999년 3월8일부터 8월10일 사이 6개월간,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서는 한국군 기무사령부에 비교할 수 있는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북한 후방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인민군 제10군단의 지원을 받아 혜산 시민 19명을 공개 총살하고, 800여명을 추방했으며 600여 명을 징역형에 처했다는 충격적이 증언이 나왔다. 인민(프롤레타리아)을 위해 생겨난 나라라며 국호를 인민공화국으로 하고, 군대도 인민군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인민군이 인민을 대규모로 숙청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증언은 당시 혜산시 ○○동 ○○반에 살면서 ‘혜산 사태’를 목격한 다음, 99년 8월21일 밤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빠져나온 정진수(가명)씨가 밝힌 것이다. 정씨는 1년 넘게 중국을 떠돌다 10월 한국으로 귀순해 현재 국정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양강도 갑산군 출신인 정씨는 ○○대학 출신으로, 3대 혁명소조원을 거쳐 양강도 인민위원회(우리의 도청에 해당)에서 지방공업총국의 제4호 지도원을 하다가, 13국으로도 불리는 양강도 인민위원회 군수보장국에서 책임지도원으로 일했던 사람이다(편집자 주: 정진수씨의 실명과 나이, 그리고 그가 살던 곳의 주소 등은 정씨를 보호하는 측면에서 밝히지 않기로 한다).

    정씨는 한국으로 귀순하기 전 자기 자신과 ‘혜산 사태’에 대한 기록을 연변대학(延邊大學) 로고가 붙은 용지에 빼곡히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씨의 두 번째 경력인 양강도 인민위원회 지방공업총국 4호지도원은, 양강도에 있는 152개 공장기업소와 인민을 상대로 전시 동원 계획을 세우고, 해마다 전쟁 예비물자를 마련해 각 시군에 있는 4호 창고에 비밀리에 보관하는 자리라고 한다.

    북한에서 그의 마지막 경력이 된 군수보장국 책임지도원은 양강도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위한 군수물자 비축을 주임무로 한다. 직제상으로만 양강도 인민위원회에 속해 있을 뿐, 실제로는 인민무력성(우리의 국방부에 해당) 제9과 직속 기관이라고 한다.

    정씨에 따르면 ‘인민군에 의한 혜산 시민 대숙청’으로 정리될 수 있는 ‘혜산 사태’는 양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우리식으로 말하면 ‘양강도지사’에 해당)인 이수길(59)이 99년 2월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혜산시가 완전 자본주의가 되었으니 수습하여 주기 바람’이라는 내용을 담은 비밀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국정원의 북한 인물 자료에 따르면 이수길은 81년 함경북도 회령군당 조직비서가 된 후, 94년 8월 조선로동당 간부부 부부장, 96년 9월 자강도당 비서를 지내고 98년 7월에 우리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이 되고 같은 해 8월에 양강도 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취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수길의 보고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99년 2월24일이라고 한다. 북한에는 우리의 경찰청에 대응하는 기구로 ‘사회안전성’이 있고, 국정원에 비교할 수 있는 비밀경찰 및 방첩기구로 ‘국가안전보위부’가 있다. 혜산시에 대한 숙청은 이런 기관에서 맡는 것이 적법할 듯한데, 뜻 밖에도 군내의 비밀경찰인 ‘보위사령부’가 숙청을 도맡았다.

    정씨는 그 이유를 김일성 사망 후 중앙당 간부들을 대숙청할 때 앞장선 것이 보위사령부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더 구체적으로 정씨는 김정일 위원장은 공공연히 “국가안전보위부도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 보위사령부가 나의 오른팔이다”고 말할 정도로 보위사령부를 신뢰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혜산 대숙청을 맡겼다고 밝혔다.

    정씨는 과거에도 보위사령부가 민간인을 숙청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 예로 87년 평안북도 신의주 숙청, 88년의 평양과 황해도 송림시 황해제철소 그리고 남포시 숙청, 89년의 양강도 혜산시 숙청, 그리고 무산과 나진-선봉시 숙청을 나열했다.

    ‘혜산 대숙청’을 주도한 것은 중장(한국군 소장에 해당) 계급을 단 보위사령부 부사령관이다. 99년 3월8일부터 보위사령부 부사령관은 소좌(소령)급 이상 기본 성원 600명과 10군단을 동원해, 조·중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거나 아편에 중독된 사람,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혜산시 성후동에 있는 혜명여관 3·4층과 10군단 보위부(10군단에 있는 보위사 예하 부대) 구류장, 조·중 국경을 지키는 국경보위소대 구류장, 철도를 지키는 철도보위소대 구류장 등에 집어넣었다.

    비행장터에서 공개처형

    이때 검거된 사람은 4000명이 넘었으며 이들은 짐승 취급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취조를 통해 보위사령부는 혐의가 중하다고 판단되는 6명에게 아편을 밀매한 죄를 걸어, 99년 4월2일 혜산 시민들을 혜산시 연봉동에 불러 모은 후 공개 총살했다.

    두 번째 공개 총살은 5월9일 오전 10시쯤 전(前) 혜산비행장 터에서 집행되었다. 이 날 형장에 끌려나온 사람은 모두 12명인데, 이들에게는 조·중 국경을 넘나들며 밀수를 했다, 중국에 연고자가 있다, 장사를 했다, 부화(간통)를 했다, 살인과 돈을 횡령한 혐의가 있다는 것 등이 죄목으로 내걸렸다. 세 번째는 5월9일 운흥군에서 1명을 공개 총살했다. 이 사람에게 걸린 죄목은 ‘현대판 지주’였다.

    정씨는 공개총살 외에도 20여 명이 비공개로 총살되거나 타살됐다고 밝혔다. 비공개로 처형된 사람 중에는 양강도 보위부 책임비서와 무역국 부국장, 검사장 등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보위사령부는 자본주의에 물들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추려내 800여 명은 혜산에서 추방하고, 600여 명은 징역형에 처했다. 이 과정에 백두산 들쭉술공장의 지배인도 재산을 압수당했다. 징역이나 추방은 면했으나 다니던 직장에서 해임되거나 철직(한직으로 쫓겨나는 것)을 당한 사람만도 3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정씨는 혜산에서 피해자가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은 가정은 10%도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씨는 또 이 숙청 과정에 100여 명 정도의 무소식자(실종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보위사령부가 주도하는 숙청이 장기화되자 혜산 시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가 발생한 혜산의 일반 시민들은 특히 당 간부나 보위부·검찰·안전부(경찰)에 근무하는 일꾼을 둔 혜산 주민들과 마찰을 빚어, 서로 마주보지도 않는 지경이 됐다고 한다. 피해자 가족들은 이들을 향해 “개새끼들 다 죽여라”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 “배급을 주지 않아 장사를 좀 한다고 붙들어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국경경비대 소속 중위(31세)를 살해해, 그 시체를 보위사령부 정문 앞에 던져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보위사령부 요원들이 더욱 폭압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보위부 사람들은 “저번에 남포시를 빗자루질하였다면, 이번에는 혜산시를 물걸레질하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를 받았다. 솔직히 죄를 고하고 돈을 모조리 바쳐라” “너, 햇빛이 좋아, 신선한 방이 좋아?”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북한의 人權 탄압 외면하면 안돼”

    보위부 요원들의 횡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 보위부원은 사복 차림으로 모 부국장 집에 도끼를 들고 침입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부국장 부인으로부터 일본 돈 2만 엔을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장기간 구류를 당한 채 조사를 받았으나 죄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석방된 사람도 적잖은 후유증을 겪었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5개월 동안 갇힌 채 조사를 받았던 ○○사업소 부기원은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중병에 걸렸다. ○○소장은 돈 3만원을 지불하고 간신히 석방됐다고 한다.

    이러한 숙청 중에는 과거부터 나쁜 짓을 해온 자들을 척결한 경우도 있다. 보위사령부 7처 부처장은 혼자 사는 과부의 집(신흥동 ○○반)에 매일 밤 찾아가, 능욕하고 이 여자로부터 음주를 접대받았는데, 보위사령부는 혜산 대숙청 때 이 자를 붙잡아 총살했다고 한다.

    이 대숙청을 종결하기 위한 대규모 총화(자기 반성과 앞으로의 다짐 등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공산주의의 사상훈련 행사)가 열린 것은 99년 8월8일이었다.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양강도당 회의실에서 열린 이 총화에서 집행자(보위사령부)들은 “만약 장사와 자본주의 요소를 끌어들이고 반항하는 자들은, 우리 혁명의 총칼로 무자비하게 찔러버릴 것이다”는 위협을 가해왔다.

    이에 대해 영장도 없이 한밤중에 사복을 한 보위부 사람들에게 끌려가 수개월간 짐승처럼 수감돼 조사받고 무죄로 나온 사람들은 단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장군님 배려로 나오게 되었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혜산은 압록강 상류에 위치해 중국으로 쉽게 건너갈 수가 있다. 중국을 오가면서 밀무역을 할 경우 그 수입이 적지 않은데, 북한은 이러한 밀무역이 자본주의 요소를 불러들이고 있다며 인민군대를 동원해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것이다.

    북한에도 검찰소와 재판소가 있다. 따라서 범죄용의자를 체포하면 적법한 재판 절차를 통해 피의자를 처벌해야 한다. 혜산사태는 이러한 절차 없이 보위사령부 독단으로 사람을 공개·비공개로 총살하고, 추방하고, 징역에 처했다. 정씨는 북한을 탈출한 뒤 이 목격기를 써 한 한국인에게 넘긴 후 중국을 떠돌다 2000년 10월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국정원은 북한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정씨가 전하는 북한의 실상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남북 화해를 위해서는 북한 내부 문제를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법 체포와 감금 처형 같은 인권 문제는 인류 공동의 문제다. 북한과 화해가 아무리 중요해도 북한이 저지르고 있는 인권 탄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