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2000년 11월호 ‘신동아’에 한국 공군의 FX(차기 전투기) 사업에 참여하는 프랑스 다쏘항공의 라팔 전투기 기사를 게재하고, 12월호에서는 전략 공군으로 발돋움하려는 한국 공군의 야망을 밝힌 기사를 내보낸 후, 적잖은 관계자와 독자들로부터 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이러한 전화와 이메일 중에는 ‘소련 공군의 벨렝코 중위가 미그-25기를 몰고 일본에 온 것은 80년이 아니라 76년이었다’ ‘일본이 도입한 F-15 전투기는 F-15E가 아니라 F-15C/D다’ 등 기자의 실수를 지적한 것과, ‘왜 라팔만 좋게 써주었느냐?’며 비난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이메일은 ‘FX사업에 관심이 많다. 10여 년 전에 추진된 KFP(한국형 전투기 프로그램) 사업 때도 기종 선정이 공정치 않았다며 시비가 일었던만큼, 라팔뿐만 아니라 FX 사업에 도전하는 다른 전투기들도 자세히 소개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방부는 2001년 4월까지 FX 사업 대상 기종을 결정할 예정이다(그러나 다소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부 관계자들은 “FX 사업 대상 기종이 결정되면, 탈락한 업체들은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공정한 심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투서를 남발해, 정국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심사 단계에서 각 기종의 특성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이런 차에 F-15K(한국형 F-15E) 전투기를 들고 FX 사업에 도전한 미국 보잉사 쪽에서 미국 현지 취재를 제의해왔다. 보잉측의 제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담스러웠다. 첫째, 적잖은 수의 한국 공군 장교들이 “F-15K는 구식이다”며 도입에 반대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기자의 기사로 인해 FX 대상 기종 선정에 참여한 공군과 국방연구원의 전문가들이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민을 거듭하다 현지 취재에 응하기로 했다. 기자 자신이 고정관념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번 부딪쳐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2000년 12월3일 밤 기자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했다. 세인트 루이스는 미국 프로야구(MLB)에서 3년 연속 홈런왕이 된 마크 맥과이어가 속해 있는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 팀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이 도시는 미주리 강과 북미 대륙에서 가장 긴 미시시피 강이 만나는 곳이라, 일찍부터 주운(舟運)이 발달했다.
이러한 주운 때문에 북미 대륙 동쪽에 상륙한 미국인들은 이곳에 몰려들려 서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미국인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이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세인트 루이스 인근에 살며 모험심 강한 미국인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두 명의 조종사가 타는 F-15E
세인트 루이스는 ‘태양왕’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다스리던 곳이라, ‘생 루이(st. Louise)’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나폴레옹 시절 이곳을 영국에 팔자, 생 루이는 영어식으로 ‘세인트 루이스’로 고쳐 읽게 되었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적극적으로 서부 진출을 지원한 지도자였다. 1963년 세인트 루이스 시는 ‘이곳이 서부 개척의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미시시피 강변에 폭과 높이가 똑같은 630피트(약 210m)의 거대한 ‘게이트웨이(Gateway·‘관문’이라는 뜻) 아치’를 세워, 제퍼슨 대통령을 기렸다.
세인트 루이스는 서부뿐만 아니라 하늘을 향한 미국인의 의지가 모여든 출발선이기도 하다. 세인트 루이스 시에는 월남전에서 이름을 떨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F-4 팬텀과 미 해군의 주력기로 발돋움하는 F/A-18 호넷,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계 최강의 제공기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F-15 이글을 생산하는 맥도널더글러스사가 있던 곳이다.
1980년대 중반 맥도널더글러스사는 F/A-18 호넷 전투기를 내세워 한국 공군이 추진한 KFP(한국형 전투기 프로그램) 사업에 도전했다가, F-16C/D 파이팅 팰컨을 들고 나온 미국의 제너럴다이내믹스사에 역전패한 전력이 있다.
그 후 맥도널더글러스는 세계 최대의 민항기 제작사인 미국 보잉에 합병되었고, 승자인 제너럴다이내믹스 또한 세계 최대의 방산 그룹인 미국의 록히드마틴에 통합되었다. 보잉 그룹에 합병된 맥도널더글러스는 ‘보잉 군용기 및 미사일 시스템’사로 재탄생했다. 제럴드 다니엘스 사장(55)이 이끄는 보잉 군용기 및 미사일 시스템(이하 보잉)사가 바로 F-15K를 들고 한국의 FX 사업을 두들긴 주인공이다. F-15K에 맞설 경쟁자로는 프랑스가 개발한 ‘라팔’, 영국과 독일·이탈리아·스페인이 공동 개발한 ‘타이푼’, 그리고 러시아의 ‘수호이 35’가 있다.
보잉이 내민 F-15K는 ‘스트라이크 이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F-15E를 개량한 것. F-15K의 원형에 해당하는 F-15E는 두 명의 조종사가 타는 복좌기(複座機)라는 점에서 다른 3개 기종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다른 3개 기종도 복좌기로 제작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단좌기로 개발되었다).
F-15E는 왜 복좌기일까? 이러한 의문을 추적해 들어가보면, 보잉이 F-15K를 한국의 FX 사업에 최적 기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잉측의 논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기자는 세인트 루이스의 보잉 본사를 방문하자 “F-15K는 구식이 아니냐”며 공격을 퍼부었다.
F-15K가 구식이라는 공격에 대해 보잉측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F-15K가 구식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F-15E 스트라이크 이글을 보유하고 있는 알래스카 엘멘돌프 기지를 방문했을 때도 반복되었다. 이에 대해 보잉측에서는 조 허러 부사장과 마이클 마크 부사장 그리고 스키프 베네트 이사 등이 돌아가면서 매우 전문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F-15K는 구식인가, 아닌가’란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F-15 이글 개발사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었다. 또 F-15 이글 개발사는 FX 사업에 참여한 나머지 3개국의 전투기 개발 역사와 바로 연결되므로 생각 밖으로 흥미진진하다. 다음은 이들의 설명과 기자가 다른 루트로 입수한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해본 F-15 이글의 개발사다.
월남전에서 시작된 F-15 개발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군은 베트남 동쪽의 남중국해에 항공모함 수척을 띄워놓고 월맹(북베트남)을 맹공격했다. 미국인들은 남중국해에 붙박이로 띄워 놓다시피한 이 항공모함들을 가리켜 ‘양키 스테이션’이라고 불렀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절대적으로 빈약한 월맹은 이 양키 스테이션을 전혀 공격하지 못했다. 이 시기 양키 스테이션을 기지로 삼아 월맹 공격에 나선 대표적인 전투기가 바로 맥도널더글러스가 개발한 F-4 팬텀이었다.
북베트남 공격에서 F-4 팬텀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지만 몇 가지 약점도 노출했다. F-4 팬텀은 지상 폭격을 위주로 하는 전폭기로 제작됐다. 그러다 보니 적기와 공중전을 벌이기에는 기동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밝혀졌고 뛰어난 기동성으로 적기를 쉽게 요격할 수 있는 순수 제공기(air superiority fighter)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비슷한 시기 소련이 순수 제공기로 미그-25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제공기란 주로 공대공 전투를 하는 전투기를 말한다. 전폭기는 공대지 전투를 위주로 하는 전투기다. 따라서 제공은 공대공 작전, 전폭은 공대지 작전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여러 전투기 제작사가 제공기 개발에 들어갔는데, 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맥도널더글러스였다. 1969년 이 회사는 미 국방성과 순수 제공기 개발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1972년 시제기를 제작해 전투 시험에 들어갔다. 이 시험을 통해 부족한 점을 보강한 맥도널더글러스는 1974년부터 F-15A를 양산해 미 공군에 인도했다. 순수 제공기인만큼 F-15A기에는 하늘의 왕자인 ‘이글(독수리)’이란 닉네임이 붙었다. 쌍발 엔진을 장착한 F-15A는 추력 대 중량 비가 1대 1이 넘는 최초의 전투기다. 추력이란 전투기 엔진이 발휘하는 힘인데, F-15A기의 추력이 F-15A의 무게를 능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F-15A는 강력한 기동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추력이 강하다고 무조건 제공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투기가 급기동을 하면 조종사와 전투기는 상당한 부하를 받게 된다. 이러한 부하의 크기는 g(gravity·‘중력’이라는 뜻)로 표시되는데, 일반인이 일상 생활에서 받는 중력을 1g라고 한다. 1g에서 2g로 옮겨가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공기의 부피가 2분의 1로 줄어들 정도로 압력이 강해지는 것을 뜻한다. 3g로 옮겨가면 4분의 1로 줄고, 4g에서는 8분의 1로 줄어든다. 4g에 이르면 사람들은 가슴이 눌려, 호흡하는 데 큰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는 억지로 가슴 근육을 움직여줘야,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뱉을 수가 있다. 1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라면 일반인들도 최고 4g에서 억지 호흡을 할 수 있다. 반면 전투기 조종사들은 평소에 억지 호흡을 연습하기 때문에 최고 7g에서도 잠시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전투기를 포함한 모든 비행기는 무게를 줄이는 쪽으로 제작되는데, 그러다 보니 지상 장비에 비해 훨씬 약하게 만들어진다. 전차와 장갑차는 총알도 뚫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철재로 제작되므로, 50~100g 상황에도 끄떡없다. 하지만 비행기는 가볍게 제작됐기 때문에 이런 압력을 받으면 금방 부서지거나 우그러들게 된다. 추력이 강한 전투기가 급기동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7~8g의 압력이 기체에 가해진다. 따라서 추력을 증가시킬 때는 기체도 더불어 강화시켜야 급기동시 전투기가 파괴되지 않는다. F-15A는 9g까지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된 최초의 전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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