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4년여 전인 96년 10월 말의 일이다. 미국의 세계적 경영전문주간지 ‘포천’은 오라클사 회장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과 마이크로소프트사(MS)의 빌 게이츠(Bill Gates) 회장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기사 제목은 ‘래리 엘리슨은 아합 선장이고 빌 게이츠는 모비 딕이다(Larry Ellison is Captain Ahab and Bill Gates is Moby Dick).’
소설 ‘백경’에 나오는 두 주인공인 외발이 아합 선장과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의 사례를 들어 엘리슨과 게이츠 두 사람간의 숙명적 경쟁관계를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동시에 현재는 빌 게이츠가 그 누구도 넘기 힘들어 보이는 거대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으나, 조만간 집요하고 공격적인 엘리슨이 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이츠 대 엘리슨, 15년 전쟁
그로부터 4년 뒤인 2000년 11월, 미국의 또 다른 경영전문지 ‘포브스’는 해마다 관례에 따라 자체 집계하는 ‘올해의 미국 400대 부호 명단’을 발표했다. 그 결과 역시 1위는 MS의 빌 게이츠 회장(630 억달러), 그리고 2위가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580억 달러)이었다. 1위와 2위의 격차는 불과 50억 달러. 외형상 엄청난 금액이기는 하나, 양측 주가가 몇 달러씩만 반대로 움직여도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근소한 차이였다.
더 중요한 대목은 최근 오라클사는 욱일승천하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반면, MS는 하향세로 반전됐다는 점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 9월 25일 발표한 ‘세계 100대 기업‘ 랭킹에 따르면, 지난 99년 랭킹 1위를 차지했던 MS는 시가 총액이 3727억 달러를 기록해 5629억 달러를 기록한 제너럴 일렉트릭(GE)에 1위 자리를 내어주고 4위로 밀려났다. 반독점 관련 그룹해체 소송과 나스닥 주가 폭락에 따른 결과였다.
반면에 오라클사는 2292억 달러로 12위를 차지했다. 오라클사의 전년도 랭킹은 81위. 한해 동안에자그만치 69위나 올라서는 경이로운 실적을 올린 것이다.
4년 전 엘리슨과 게이츠 간의 대역전 가능성을 예고했던 ‘포천‘지는 이와 같은 결과에 기초해 지난 11월, 종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오라클사 래리 엘리슨 회장 관련 특집기사를 실었다. 커버스토리로 꾸며진 이번 기사의 제목은 ‘차기 세계 최대의 갑부(The Next Richest Man In the World)’.
“지난 10여 년간 쉼 없이 계속돼온 두 사람의 게임은 이제 승부가 났다”는 의미였다. 집요한 아합 선장이 마침내 작살 한 자루로 거대한 백경 모비 딕을 잡게 됐다는 뜻이다. 이르면 내년쯤 역전이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것이 ‘포천’의 전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상대적 쇠락이자 오라클이라는 새로운 최강자의 출현이다.
엘리슨과 게이츠의 싸움은 정확히 지난 86년부터 시작됐다. 이 해 3월12일 오라클은 주당 15달러에 주식을 상장했다. 상장 첫날 종가는 20.75달러. 정확히 24시간 뒤인 3월13일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주당 21달러에 주식을 상장했다. 그러나 종가는 7달러. 첫 승부는 엘리슨의 승리였다. 그 후 15년간 마이크로소프트는 계속 오라클을 앞섰으나, 이제 마침내 대역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스파이짓 불사하는 승부욕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하룻 밤 자고 나면 최대 갑부자리가 바뀌는 게 요즘 세계 재계 판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십 수 년간, 최소한 정보통신업계(IT)에선 마이크로소프트가 난공불락의 성이고, 따라서 최고갑부 자리는 빌 게이츠 몫이 될 것이라 여겨왔다. IT시대를 개막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신화가 워낙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이제 래리 엘리슨이 주도하는 새로운 신화가 쓰이고 있다.
오라클 직원들은 평소 엘리슨 회장을 ‘사무라이’라 부른다. 외형적 이유는 그가 철저한 일본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16세기 일본 교토의 고성을 그대로 본뜬 4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저택에 살고 있다. 소담한 일본 정원양식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그는 평상시 일본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다도와 검도를 즐긴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일본 중세갑옷 및 투구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언론과 인터뷰 때에도 자택에서 편한 사무라이 복장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엘리슨이 사무라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는 집요함 때문이다. 한번 목표한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쟁취하는 광기어린 집요함. 특히 그는 10여 년 전부터 ‘타도! 마이크로소프트’를 목표로, 한때에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리면서 집요한 공세를 펼쳐왔다. 이것이야말로 엘리슨을 사무라이라 불리게 하고 오늘날의 오라클을 이룩한 저력이다.
엘리슨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얼마 전 세계 정보통신업계에서 화제가 된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워싱턴DC에 있는 로비회사 어소시에이션 포 컴페터티브 테크놀로지(ACT). 이 회사는 독점금지법 재판에서 미국 법무부와 싸우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지난 5월, ACT 사무실 부근에 유령회사 이름을 사용하는 한 사립탐정이 사무실을 임대해 들어왔다. 그는 며칠 뒤 직원을 시켜 ACT 건물 청소부들에게, 쓰레기를 가져다 주면 1200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며칠 뒤 청소부들이 이 사실을 ACT에 보고하면서 사건화됐다.
6월 말, 문제의 사립탐정은 사설탐정기관인 인베스티게이티브 그룹 인터내셔널(IGI) 소속이며, 일을 시킨 배후 인물은 오라클사의 최고경영자 래리 엘리슨이란 사실이 언론의 추적 끝에 드러났다.
이런 보도가 나가자 곧바로 마이크로소프트측은 오라클의 산업스파이 활동에 대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MS는 성명을 통해 “오라클이 독립적 이익단체나 정치후원 단체를 공격하는 것은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짓”이라며 “오라클은 MS에 비판적인 이익단체들을 후원해왔다”고 공격했다. MS는 또 “그 동안 오라클의 비열한 짓들에 비하면 이번에 알려진 사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오라클은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나 자유로운 의견 개진보다도 그들의 사업 목적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MS의 공세가 펼쳐지자 엘리슨은 곧 오라클사 본부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쇼어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IGI 직원을 고용한 사실을 깨끗이 시인했다.
엘리슨은 “IGI에게 전국납세자동맹 등이 MS의 지원을 받는 단체인지를 파악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 불법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며 자신이 직접 쓰레기 뒤지기를 지시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이들 단체가 MS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마치 독립적인 지지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다”며 “사설 조사기관을 고용한 것은 MS의 반독점 위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이들 단체가 MS를 지원하는 연구자료를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반격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한 일은 숨겨진 사실을 찾아내 일반에 공개한 것으로,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버려진 물건은 버린 사람의 소유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라클의 행위는 산업스파이 행위의 일종임에 분명했고, 세간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미국산업안전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1000대 기업이 산업스파이로 인해 잃은 금액은 450억 달러. 일부에서는 1000억 달러로 추산할 만큼 미국에선 산업스파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지난 93년 소프트웨어 위조 사건을 조사하면서 한 경쟁사의 쓰레기를 뒤지도록 의뢰한 적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쪽에서 보면 ‘장군 멍군’ 식으로 오라클로부터 부메랑을 맞은 셈이다.
이처럼 랭킹 1위를 차지하기 위한 실리콘밸리의 전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치열하기로 악명 높다. 특히 현재 소프트웨어 업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게이츠와 엘리슨은 애당초 사업 출범 당시부터 산업스파이 행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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