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전두환과 조용필의 독재 서태지와 김영삼의 파격

  • 임진모

    입력2005-05-1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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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가요란 늘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바뀐다. 대중가요가 표현하는 정서는 시공을 초월해 유사한 반면 시대마다 유행하는 색채와 분위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세련된 노래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퇴색하는 법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우연히 옛 노래를 들으면 ‘저 시절이었으니까 저런 노래가 유행했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있다. 대중가요는 한 시대의 소리감각, 어법, 사랑을 비롯한 세인들의 관심사 그리고 시대정신과 사회적 상황까지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사운드와 화성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각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사회사’다.

    먼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을 보자. 사람들은 이 곡을 단순히 평화의 찬가로 해석하지만, 사실 이 노래에는 당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녹아 있다. 이 곡은 나중에 존 레논이 미국의 닉슨 정부로부터 ‘문화게릴라’로 낙인 찍혀 비자 연장신청이 기각되는(다시 말해서 미국 땅에서 나가라!) 빌미가 됐다.

    ‘사유재산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물론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그렇게 되면 탐욕에 대한 필요도 기아도 없지. 형제애만 있을 거야. 모든 사람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서양 사람들은 지금도 존 레논이 닉슨 정부에 대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존 레논보다 대중음악의 사회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노래의 사회적 성격이 자주 발견되지만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오랜 군사독재로 인해 아티스트의 자유로운 의식표출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에도 이따금씩 사회구조에 저항한 아티스트가 있었다.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아침이슬’은 제3공화국과 유신의 억압적 사회상황에 대한 소묘로 볼 수 있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이었다. 당국은 이 노래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부분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아니 왜 하필 묘지 위에서 해가 뜬다는 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적 사고와 거기에 반(反)하는 저항의 사고가 있기 마련이다. 존 레논이나 김민기의 음악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역이었다. 하지만 시대에 순응하는 경우라도 시대상황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일종의 ‘역(逆)반영’이라고 할까.

    특정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제1의 통치자’, 즉 대통령으로 대변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은 각 시대와 통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정치적·사회적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그 시대의 대중음악을 주도했던 가수를 비교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그들의 직접 또는 간접 관계를 통해 당시 대중음악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와 송창식

    박정희 정권을 압축하는 대중가수를 한 명 꼽으라면 누가 될 것인가. 저항성으로 본다면 당연히 포크의 김민기와 록의 신중현이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 정권의 대중문화 억압과 린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시대정신을 견인한 인물로 높은 위상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박정희 대 김민기’, ‘박정희 대 신중현’은 너무도 익숙한 구도다. 이렇게 대립시킬 경우 당시 대중가요의 주류질서가 배제되는 약점이 있다.

    70년대의 음악 풍토와 대중의 인기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인물은 송창식일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 시대의 빛과 그림자, 광채와 잿더미를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1960년대 말 윤형주와 함께 결성한 듀엣 ‘트윈 폴리오’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 최초의 포크 가수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럼에도 데뷔 당시에는 자작곡 없이 주로 외국 팝송만 번안해 불렀다. 하지만 이후 한대수의 영향으로 곡을 직접 쓰면서 ‘작곡의 귀재’로 비상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시대에 그는 1973년 김민기가 노랫말을 쓴 ‘내나라 내겨레’를 부르며 시대에 맞서는 측면을 보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대중가수가 일차적으로 열망하는 ‘대중스타’에 가깝다.

    1975년 서슬 퍼런 대마초 사건에서 ‘한잔의 추억’의 이장희, ‘너‘의 이종용, ‘비와 나’의 윤형주, ‘사랑하는 마음’의 김세환, ‘노을’의 석찬 그리고 ‘벽오동’의 김도향(투 코리안스) 등 당대의 포크 스타들이 모조리 쓰러져 갔을 때도 송창식은 유일하게 그 소나기를 피했다. 요즘 말로 하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자라고 할까?

    동료 통기타 가수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는 상황에 그는 포크 가수로는 최초로 1975년 MBC 최고가수상, 즉 ‘가수왕’이라는 영광마저 안았다. ‘박정희 시대의 가수’로 우뚝 솟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성공은 그가 쓴 ‘피리 부는 사나이’ ‘한번쯤’ ‘왜 불러’ 등 놀라운 감성이 드리워진 곡들 덕분이었다. 이 곡들은 뒷날 금지 조치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고래사냥’과 더불어 그 시대 음악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노래는 박정희 시대의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송창식이 로커의 이미지가 강한 신중현이나 저항적 색깔이 물씬 풍기는 김민기보다 사회성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편에서 암울한 시대가 주는 무게에 짓눌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최선의 ‘공격력’은 무엇이었을까.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 관련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김민기를 도와준 송창식

    당시 김민기는 1977년 군에서 제대해 경기도 부평 근처의 완구공장에 창고 관리직으로 취직했지만, 곧 해고당하고 세칭 ‘노가다’로 연명하던 중에 ‘공장의 불빛’을 녹음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에 ‘위험인물’로 찍힌 김민기가 음반작업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 상황에 그에게 실낱 같은 희망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 용산 원효로에 있던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김민기 곁에만 있어도 공범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 그에게 작업실을 내주었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다. 만약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도 피바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무덤을 딛고 ‘살아남은 자’가 갖는 인간적 죄의식을 해소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창식은 김민기가 당시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노래굿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도 있다(만약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지만 당시 최고 가수인 송창식이 기꺼이 스튜디오를 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장의 불빛’을 주조해낸 김민기도 위대하지만 그것을 만들 기회를 마련해준 송창식도 똑같이 위대하지 않을까.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조원익의 세션으로 녹음하고 이대 라디오방송국에서 노래녹음과 믹싱을 마친 ‘공장의 불빛’은 열악한 기자재로 인해 음질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공장의 불빛’은 한국교회선교사협회 후원으로 제작돼 일부 테이프가 배포되면서 관계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렸으나 당국은 제2의 김지하 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해 아예 무시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김민기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원본과 두 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모처에 숨기고, 고문을 받더라도 실토하지 않기 위해 그 장소를 잠재의식 속에서도 잊어버리도록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잊어라 아주 잊어버려라!). 하지만 그 최면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정말 원본을 어디다 감추었는지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이 어인 일? 누구 말대로 지하에서 뿜어 올린 저항성의 불꽃이 다시 지하에 생매장된 셈이었다.

    1990년 김민기가 주관한 ‘겨레의 노래’ 음반에 송창식은 다시 ‘공장의 불빛’의 마지막 부분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불러 역사적 음반의 오리지널 스태프(?)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 피리를 부는 신비한 이 사나이야말로 1970년대를 살아간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한 인물일 것이다.

    전두환 시대의 간판스타는 누구인가. 이 대목은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가객(歌客)’이자 ‘20세기 대중가요의 영웅’으로 손꼽히는 조용필이다. 그는 정확히 신군부 정권이 탄생할 무렵 전성기를 열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5공 정권 내내 난공불락의 톱 가수 자리를 지켰다. 물론 겉으로 통치자와 최고가수를 맺어주는 끈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성과 무관하게 ‘청와대의 주인’과 ‘토토즐의 주인’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시대를 동행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대중전선에 화려하게 등장한 조용필은 유신정권 말기에 출발선을 끊었지만 대마초 파동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불가피하게 트랙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 이후 뼈를 깎는 가왕(歌王) 훈련으로 내공을 다진 후 정확히 1980년 꽃샘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무대로 되돌아왔다.

    때는 바로 현대사의 분기점이라는 ‘서울의 봄’. 잠깐 동안 핀 개나리꽃이 5·17 계엄확대조치와 5·18광주의 비극으로 화향(花香)을 잃던 그 시점, 조용필의 노래는 현실에 아랑곳없이 더욱 진한 향을 뿜으며 꽃을 피웠다.

    조용필의 컴백 앨범은 기념비적인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비롯해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대전블루스’ ‘슬픈 미소’ 등 수록된 전곡이 줄줄이 히트를 기록하는 대박이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히트 행진은 신군부, 나아가 5공 정권과 운명적 인연을 맺는다. 본인은 절대로 원치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신군부 정국의 사운드트랙, 즉 배경음악이 됐다고 할까?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시대에 조용필의 노래가 그토록 대중의 호응을 얻었던 것일까. 탁월한 가창력과 음색 그리고 획기적인 음향이 가져온 음악의 개가임이 명백하지만, 시대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이에 대한 방송작가 구자형씨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조용필의 생명은 외침이라고 봅니다. 팝 가수 로드 스튜어트로부터 그리고 이후 판소리에서 그는 비명이란 영양제를 얻었지요. 그만의 섭생을 통해 생성된 트레이드마크인 절규는 결코 음악적인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억눌린 시대라서 사람들의 가슴에 더욱 파고들지 않았을까요. 조용필 아니면 불가능한 한(恨)의 울림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숨막힘과 두려움을 씻어주는 안정제이기도 했지요. 다시 말해 전두환 시대가 조용필의 비명을 더 리얼하게 만든 겁니다.”

    조용필에 대한 진보진영의 시각

    그렇다면 조용필의 노래도 부분적으로 5공이란 시대적 특수환경에 빚을 진 셈이다. 전두환 정부는 초대형 대중가수의 출현으로서 분위기를 띄울 수 있었고…. 최소한 대중문화 부문에서 삭막함은 사라졌다. 그래서 어쩌면 전두환 정권과 조용필은 희미하게나마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용필은 후대의 서태지를 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소지한 것에 비해 시대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자제했다. 아니 일언반구도 없었다. 대통령이 ‘세금’을 걷어 통치하면서 민생복지로 보답하고, 스타는 ‘사랑’을 얻어 인기를 누리면서 대중의 성원에 보답한다면, 조용필은 분명 ‘애프터 서비스’가 부족했다.

    ‘오빠부대’ 소녀들의 가공할 히스테리, 당시 운동권이던 안치환마저 훗날 “정말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을 만큼 절대적 인기를 누렸고, ‘친구여’라는 노래가 노랫말의 진의와 전혀 무관하게 대학가에서 ‘감옥에 끌려간 친구’를 그리는 진혼곡으로 불렸을 정도의 광대한 흡인력, 80년대 말 이문세와 변진섭이 대학축제에서 학생운동권에 의해 무대를 저지당했던 반면 어느 누구에게도 야유를 받지 않았던 놀라운 카리스마…. 조용필은 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오로지 음악의 예술성에만 혼신을 다했다. ‘마이 웨이’가 따로 없었다.

    그 때문에 386세대로 통하는 당시 진보진영에서 조용필을 보는 눈은 더러 싸늘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어느 중소기업 판촉부장의 일성.

    “조용필은 누가 뭐래도 대중문화의 큰 우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산 밑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왜 그의 노래에는 ‘떠나자’는 내용이 그리 많은가. 그 시절에 우리는 ‘모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시대를 거꾸로 가는 그의 노랫말에 화가 날 때도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떠나요. 사랑의 노래를 멈추지 말아요. 언제나 끝이 없어라. 알 수 없는 질문과 대답. 저 넓은 하늘 끝까지 우리들의 사랑을 노래해요….’ - ‘미지의 세계’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 속을 벗어나 봐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 ‘여행을 떠나요’

    하지만 노랫말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사회성이 담긴 노랫말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그런 상황에 조용필의 음악은 사운드와 녹음수준 등 음악성의 업그레이드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는 세기적 업적을 쌓았다.

    돌이켜 생각해볼 때 어찌 제도권 음악계에서 전두환 시대에 대한 성토가 가능했겠는가? 거기에 편승하거나 드러나게 동조하지 않는 것이 대중가수가 취할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용필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을지언정 ‘아 대한민국’도 노래하지 않았다. 불안한 중도노선에서 중용의 미학을 찾아낸 사람이 조용필이었던 셈이다.

    그는 가능한 한 시대에 비켜서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탐구했다. 김민기식의 직접적인 저항은 아니었지만 그의 열창에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항의’가 저류(低流)하고 있지 않았을까. 저항의 메시지는 꼭 가사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 5월의 봄, 비판의식이 거세된 메시지, 사운드에 대한 집착, 억눌림을 날려보내는 절규, 한 단계 도약한 우리 음반산업 등은 조용필이, 전두환 시대가 낳은 대중음악의 찬란한 광채이면서 옅은 그림자임을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전두환과 조용필의 관계를 대결구도로 본다면 싸움의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정통성’을 보유한 조용필이다.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여기서 잠깐 조용필 전성기의 미국을 보자. 한국에 조용필이라면 미국에는 마이클 잭슨이 있었다. 사람들을 춤 열병에 들뜨게 했던 흑인스타 마이클 잭슨은 과연 80년대라는 시대환경의 도움을 받았는가? 팝 시장은 이런 부분에서 우리보다는 명쾌하다.

    ‘스릴러’ 앨범에서 ‘빌리진’과 같은 지구촌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흑인이지만 세상의 문제점들에 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 지배사회에 대한 저항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당시는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 일컬으며 보수적 가치의 복원을 부르짖던 공화당 레이건 행정부의 통치시대. 캐나다판 ‘타임’지라고 할 시사주간지 ‘맥클린’은 1983년과 1984년에 휘몰아친 잭슨 열풍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그리고 비틀스와 같은 팝 스타들은 관능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현상(現狀)에 도전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그들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의 노래는 레이건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다.’

    흑인이면서도 사회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도 고마운데 마이클 잭슨은 아예 대놓고 젊은이들을 선도하는 노래를 불러 레이건의 백악관을 기쁘게 했다. 그 노래가 ‘빌리 진’과 더불어 마이클 잭슨의 최대 히트곡인 ‘비트 잇(Beat it)’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음주와 약물의 유혹을 뿌리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네가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네 삶은 장난치고 있는 거야. 이건 진실이 아냐. 용기도 아냐. 그들은 널 걷어차고 망가뜨릴 거야. 그리곤 그것이 옳다고 소리치겠지. 끊어버려요. 끊어버려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는 법. 이렇게 반항적 청춘을 격리시켜주는 마이클 잭슨의 협조에 레이건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이클 신드롬’이 절정에 달한 1984년 5월 그를 백악관에 초청해 공공생활에 기여하고 박애를 실천했다는 명목으로 ‘휴머니티 상’을 수여했다.

    마이클 잭슨은 보수노선을 견지한 부시 대통령시대까지 천하를 호령하며 전성기를 유지하지만 1991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을 기점으로 절정의 인기가도에서 퇴각하게 된다.

    ▶노태우와 주현미

    노태우 정부는 미국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힌트를 얻었을까? 역대 정부와는 다르게 대중문화의 힘을 인식하고 통치 컬러에 맞는 대중가요를 장려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 ‘날 코미디의 소재로 해도 좋소’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한마디는 그가 내세운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앞으로는 대중문화를 격의 없이 예우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그 시대의 가수는 누구인가. 조용필의 인기는 여전했지만 새 시대의 흐름을 탄 주인공은 ‘약사 출신 가수’ 주현미였다.

    그는 1980년대 후반 ‘트로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여가수였다. 김연자 김수희 심수봉 문희옥 등이 맹활약하는 가운데서 주현미는 성인층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음색으로 6공 시대를 풍미했다.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로 혜성처럼 떠오른 그의 보컬은 목이 메는 듯 간드러지면서도 상쾌했다.

    모처럼 ‘꺾기’ 창법을 회복한 트로트는 그와 함께 이전의 단조에서 장조로 대세가 바뀐다.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이 그런 곡이었다. 밝은 색깔 때문이었을까? 주현미는 KBS ‘젊음의 행진’과 같이 나이 먹은 가수는 꿈도 못 꾸는 청춘 프로그램에도 출현했고 더러 주말 쇼프로그램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연호까지 받았다.

    오랜 세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트로트의 노랫말은 6공화국 정부의 보수 이데올로기와 ‘주식 1000포인트’의 들뜬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마침내 주현미는 1988년 연말 MBC 방송대상에서 트로트 가수로는 오랜만에 가수왕의 영광을 안았다. 이때 10대 가수 중에는 갖은 고생 끝에 밤무대 가수에서 제도가수로 떠오른 현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MBC는 두 사람의 스페셜 스테이지를 마련해 트로트 르네상스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다.

    많은 사람이 이날 프로에서 주현미가 남편을 ‘여보’(텔레비전에서 참으로 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라 부르고, 현철은 성공에 복받쳐 마치 세수하듯 눈물을 쏟아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조용필의 ‘허공’ 이후 비상을 꿈꾸던 트로트가 바야흐로 부활의 깃발을 들어올리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 뒤 트로트는 잊혀질 듯하면 나타나던 뽕짝원류에 대한 논쟁마저 잠재워버렸다. 심지어 트로트 진영은 명칭을 통일하는 작업까지 벌였다. 비가(悲歌)와 애가(哀歌) 등이 경합한 끝에 ‘전통가요’가 낙점되었다. 6공화국 들어서 비로소 트로트가 공식 작위를 하사받은 것이다. 그러한 영광의 한복판에 주현미가 있었다.

    KBS 라디오2국 김경태 차장은 6공과 주현미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주현미는 참 평범한 인상이지요.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미인도 아닙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을 보면 더 순박해 보이죠. 마치 진행자 허참이 된장 맛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때는 ‘밥집 아줌마’ 딱 그 모습이에요. 그게 노태우 대통령 시대의 코드이기도 했던 ‘보통사람’과 맞아 들어갔어요. 만약 주현미가 더 예쁘거나 세련됐더라면 반응이 덜했을 겁니다.”

    남편 임동신과 늘 붙어 다니는 모습,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스타일, 무대에 서기 직전에야 화장을 하는 털털함 모두가 평범한 사람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6공 정부가 막을 내리면서 주현미와 트로트 역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것마저 노태우 대통령과 주현미의 이미지 앙상블이었을까. 문민정부의 출현을 앞둔 시점에서 주현미와 트로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대에게 음악시장의 주도권을 내준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로 랩 음악 바람을 일으키며 홀연히 등장했던 때는 1992년 봄.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때가 그해 12월이었으니 시기적으로는 서태지가 8개월 정도 앞선 셈이다. 하지만 서태지의 X세대 돌풍이 몰고 온 변화의 풍향은 정치판에도 밀어닥쳤다. 대선 전부터 민주세력 출신인 신한국당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누가 대권을 잡든 군사독재를 마감하는 새 시대의 통치자로 떠오르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는 ‘노래가 정치적 물결의 변화를 예고한다’는 서구 음악계의 속설이 현실로 나타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한 음악이 이미 사회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와 새 통치자의 등장에 앞선다는 말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과 영국의 사례를 보자.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의 12년 공화당 시대를 마감한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직전 미국에는 ‘너바나(Nirvana)’라는 그룹의 강풍이 음악계에 급습했다. 얼터너티브 록으로 일컬어진 이 밴드의 음악은 마이클 잭슨이 제도 음악계를 주름잡던 레이건과 부시 시대를 축축한 지하습지에서 보낸 X세대의 좌절, 허무 그리고 불만의 무한 표출을 핵심 컨텐츠로 삼았다.

    일순간에 오버그라운드 스타로부터 무명의 언더그라운드 그룹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이런 ‘소외된 청춘’의 음악이 거함 마이클 잭슨을 쓰러뜨리고 주류를 장악했던 때는 1991년 가을이었고, 얼마 후 사회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입증하듯 클린턴은 부시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백악관에 입성한 클린턴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여성, 동성애자 등 소외된 사회적 소수를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단순화하자면 하층민 출신 록 밴드 ‘너바나’의 홀연한 등장이 ‘이번에는 절대 공화당 대통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점친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가 1990년에 데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머라이어 캐리는 먼저 등장한 휘트니 휴스턴, 나중에 나온 셀린 디온, 토니 브랙스턴 등과 함께 1990년대 중반을 초토화한 여가수 붐, 즉 ‘디바’ 현상을 견인한 주인공이었다. 클린턴 정부의 출범에 앞서 음악적으로 홀대받는 ‘여성들의 반란’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정말 클린턴 시대에는 록밴드도 그렇지만, 여가수가 어느 대통령 때보다 많이 나왔다.

    음악이 통치자를 점친다

    영국도 다르지 않았다. 대처와 메이저의 보수당 시대를 종식하기 이전 영국의 음악은 젊은 밴드 중심의 이른바 ‘브릿팝(Brit-pop)’이 기승을 부려 뭔가 정치분위기가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다. ‘브릿팝’의 약진은 미국 정복에도 성공한 화제의 그룹 ‘오아시스’가 진두지휘했다. ‘오아시스’는 철저히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밀려 위기에 처한 영국음악을 구출하면서 전통의 음악강국인 대영제국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의 급부상은 곧바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출현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 기존 노동당의 정강에 보수 색채를 덧입혀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해 정권 탈환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 시대의 뉴 컬러와 부합했던 것이다. 그만큼 ‘오아시스’의 음악은 덜 심각하고 덜 지적인 노동자의 스타일을 실감나게 반영했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노골적으로 ‘브릿팝의 대사’인 ‘오아시스’에 구애작전을 폈으며 새 정부 출범 뒤에도 공식적으로 당시 영국의 록을 듣는 젊은 인구, 그들 말대로 하면 팝 키즈(pop kids)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이 가능했다고 발표했다. 1998년 영국의 그래미상이라고 할 브릿 어워즈에 존 프레스콧 부총리가 참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보은 행사였다. 이에 앞서 토니 블레어 총리도 영국 음악산업의 성공을 치하하기 위해 런던 10 다우닝가에서 연 개인 파티에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를 초청했다.

    영국의 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이 경험한 바와 같이 우리의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 후보에게 서태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연히 두 후보진영이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들을 유인하려는 방편으로 방송사의 취재경쟁을 방불하게 하는 ‘서태지 모시기’ 전략을 짰다.

    이 상황은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 이회창 후보의 격돌 때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물론 미국에 은둔한 서태지는 두 후보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뜻대로 되질 않자 김대중 후보 진영은 대타로 ‘서태지가 좋아한다’는 마이클 잭슨을 골랐다(솔직히 이미지 면에서 맞는 궁합은 아니었다). 이런 일 때문인지 서태지는 YS와 DJ 시대를 관통하는 느낌을 준다.

    김영삼 문민정부 초기의 정치현장은 마치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꾼 서태지의 음악세계와 궤를 맞춘 듯 꽤나 흡사했다. 고위공직자가 잇따라 정치판에서 쫓겨난 재산공개의 사정과 개혁 한파와 마찬가지로 서태지 현상은 음악계에 무서운 개혁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트로트를 비롯한 성인음악 시장의 퇴각을 종용했고 대형 레코드사들을 겁주었다. 이전까지 펄펄 날던 발라드도 ‘팽’을 당했다. 이제 음악판은 10대의 독점적 소유였고 소형 음반사도 힘을 얻게 되었고 흑인 댄스음악이 천지를 주무르게 되었다.

    김대중 시대의 가수는 누구?

    서태지도 개혁이었고 김영삼 정부도 개혁이었다. 단지 공식 슬로건이 있고 없는 차이일 뿐이었다. 서태지의 개혁 행군은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 이데아’가 수록된 세 번째 앨범에서 절정에 달했다. ‘발해를 꿈꾸며’의 경우는 서태지 본인도 밝혔듯이 당시 추진중이던 남북정상회담이란 시의성을 노렸다. 또한 ‘교실이데아’는 공교육을 비판하는 곡이었으나 그것은 어쩐지 현 김영삼 정부가 아닌 이전 시대를 질타하며 당시의 ‘바꿔’ 무드를 고양시키는 ‘개혁 사운드트랙의 주제곡’으로 들렸다.

    이 무렵 서태지는 ‘가수 아닌 사회적 인사’로 솟아오르면서 국내 가수, 아니 전체 연예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소리를 듣기에 이른다. 신문지상에는 ‘10대 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이란 말이 줄기차게 등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걷어내는 ‘역사 바로 세우기’ 과업을 수행하고 있을 때 서태지의 콘서트 현장에는 ‘서태지가 대중음악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피켓이 걸렸다.

    청와대에 김영삼 대통령이 있었다면 거리와 교실은 서태지라는 비제도권 대통령이 통치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어떤 여론조사기관에 의한 ‘대한민국을 떠받드는 인물’ 리서치에서 김영삼이 1위였을 때 서태지도 위풍당당 7위에 올랐다(2위부터 6위까지는 정·재계 인물이었다).

    IMF가 대중문화시장을 압박해 음악 소비심리를 위축시킨 탓일까. 김대중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대표 음악가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문화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것을 감안할 때 ‘국민의 가수’가 없는 것은 약간 의아한 일이다.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히스테리의 관점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올해 컴백과 함께 다시 한 번 떠들썩한 소동을 일으킨 김영삼 시대의 가수 서태지가 다시 타이틀 벨트를 찰 수도 있다. ‘김영삼-서태지’가 아니라 ‘김대중-서태지’가 더 그럴 듯한 듀엣(?)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음반판매량으로 서태지를 누른 조성모가 ‘국민가수’에 가장 가까이 간 가수라고 주장하며, 일각에서는 그래도 H.O.T.가 적합하다고 고집을 부린다.

    특기할 사항은 미국의 클린턴 시대에 여가수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것처럼 김대중 시대에 와서 S.E.S. 핑클 엄정화 박지윤 김현정 이정현 등 이전까지 소외된 ‘여가수들의 반격’이 거세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중 현재 노태우 시대의 주현미처럼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가수는 없다. 최악의 경우 여자든 남자든 김대중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 아직까지는 의견일치를 볼 수 없을지라도 후대의 역사가 합당한 인물을 골라낼지도 모른다. 아직은 더 기다려볼 필요도 있고….

    대통령과 대표가수는 때로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때로 호혜와 협력 관계로(또는 국내 유신과 5공 시대처럼 두 패턴이 결합된 형식으로) 한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한다. 1960년대의 경우 미국의 닉슨 정부와 록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기타주자 지미 헨드릭스의 관계는 적대적 갈등이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과 포크의 영웅 밥 딜런의 관계나 영국의 해럴드 윌슨 총리와 비틀스의 관계는 상호선린의 커넥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각각 신좌익의 68세대, 민권과 반전운동, 비트의 공습이라는 새 역사의 물꼬를 튼 사회적 흐름의 심장부에 섰다.

    대통령은 민심을, 인기가수는 대중을 무기로 한다면 결국 둘의 지지기반은 겹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서로 밀월 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대통령과 대중가수가 벌이는 ‘애증의 곡예’는 한편으로 대중가수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제 전세계에 걸쳐 국가를 대표하는 톱 가수는 ‘문화대통령’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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