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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인 성공학|조아스전자 오태준 사장

유럽에서 더 유명한 면도기 名家

  • 곽희자

유럽에서 더 유명한 면도기 名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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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반여동에서 태어난 오사장은 군속이었던 아버지가 5·16 군사혁명으로 직장을 그만두면서 서울을 거쳐 초등학교 3학년 때 남양주시 도농동으로 이사했다. 직업이 없던 아버지는 소작을 하며 대장간을 운영했는데, 어린 오태준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나이답지 않게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새벽 다섯 시 반만 되면 아버지가 절 깨우셨어요. 눈을 비비고 나가 불이 꺼지지 않게 풀무질을 했는데, 아침마다 풀무를 돌리면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이깟 풀무나 돌리려고 태어났나. 이러다 평생 풀무나 돌리다 죽는 것 아닌가. 남들은 다들 달게 자고 있는데 내 신세는 이게 뭔가…’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

일찌감치 철이 든데다 어릴 때부터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밴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는 혼자서 1000평 규모의 오이 농사를 지었다. 씨를 뿌리면 얼마 지나서 싹이 나고 그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에 있는 시간말고는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눈앞에 뒀을 때 고민거리가 생겼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3년 터울인 여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다 못해 진학을 포기했는데, 얼마 후 친구가 버린 원서 한 장을 우연히 손에 쥐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마음을 바꿔 서울 청량공업고교 기계과에 원서를 냈다. 시험 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 가서 시험을 쳐 합격했다. 합격한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집에 알리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됐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려 했는데, 그 사정을 들은 동네 아주머니가 돈을 들고 와 등록을 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등록금을 냈다. 오사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눈가가 붉어졌다.



“나 때문에 동생이 결국 중학교를 못 갔어요. 얼마나 미안했던지….”

가까스로 고교에 진학했지만 부모에게선 차비 정도밖에 타 쓸 수 없는 형편이어서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는 기술을 익혀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양옥집 굴뚝 주변에 비가 새지 않도록 함석으로 방수처리하는 기술을 배워 등록금과 용돈을 벌어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엔 모나미에 취직해 1년간 근무하다 심미전자로 옮겼다.

판매망·자금력 없어 고전

80년 4월 고향 남양주로 내려온 그는 산업용 기계를 만들어보겠다며 길가에 구멍가게 하나를 얻어 혼자 뚝딱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면도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핵심부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면도기 관련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산업용 기계 제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면도기 부품 만드는 일이 주업이 됐다.

하지만 부품만 만들어주는 것은 돈도 되지 않았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물건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갈고 닦은 실력을 자신의 제품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는 부품 만들던 일을 청산하고 82년 1월1∼2일 이틀간 산꼭대기에 올라앉아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내려왔다. 그리고 3일부터 제품화할 면도기의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면을 그린 후 외제 샘플을 구하러 남대문시장에 갔더니 아는 상인들이 금방 눈치를 채고 “면도기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면도기를 만들고는 싶지만 돈이 안 된다”고 하니까 좋은 사람이 있다며 물주를 소개해줬다. 도면을 들고 돈을 대겠다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 그는 대뜸 “담보가 있느냐”고 물었다. 오씨는 “담보는 없지만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도면과 기술력, 그리고 젊음이 있으니 믿고 돈을 빌려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는 문방구에서 약속어음 용지 두 장을 가져와 발행날짜만 적고는 500만 원씩 두 장을 써 건네줬다. 그렇게 빌린 1000만 원으로 그해 10월에 성진전자(99년 ‘조아스전자’로 사명 변경)를 만들어 8명의 직원과 함께 본격적으로 면도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생산한 면도기 ‘피닉스’는 자금을 댄 판매상에 의해 전국의 도·소매상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밤낮 물건을 만들어도 워낙 마진이 적어 수익은 형편없었다. 돈은 판매상이 다 벌고 있었다. 재료비와 인건비만 겨우 건지는 정도가 되다 보니 신기술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판매상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크면 내가 골치 아파진다’는 눈치였다. 오사장은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5년 만에 스스로 문을 닫았다.

놀란 판매상이 좀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며 오사장을 달랬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직접 물건을 들고 도·소매상을 찾았다. 그러자 판매상은 오사장이 이들에게 물건을 팔지 못하게 창고에 두 달치 물건을 쟁여놓고 원가로 물건을 대며 방해공작을 폈다. 판매망과 자금력 없이 단순히 제품만 만들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남대문시장 주변에는 오사장 같은 제조업자가 수없이 많았지만 대부분 판매망과 자금력이 없어 도태됐다. 당시 오사장과 거래했던 판매상에게는 20여 명의 제조업자들이 물건을 납품했지만 후에 기업화한 사람은 오사장이 유일했다.

결국 판로가 막힌 오사장은 판매상에게 싼값에 제품을 넘기고 관계를 정리했다. 한번 호되게 당한 그는 이후 새 판매상과 관계를 맺을 때는 처음부터 판매상의 주권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독립자금’을 따로 모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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