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유럽에서 더 유명한 면도기 名家

  • 곽희자

    입력2005-05-13 15: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요즘 남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면도기가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코와 턱 밑으로 하얀 비누 거품을 잔뜩 발라놓고 날선 칼로 조심조심 수염을 밀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전기 면도기가 흔해져 남자들의 행장 챙기기도 그만큼 빨라졌다. 이 면도기에는 ‘오감’이 담겨야 하는데, 피부에 닿을 때의 촉감은 물론, 소리 냄새 모양 내구성이 모두 좋아야 한다. 수염을 잘 깎는 기능성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손 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면도기에 이런 요소를 압축해 넣는 일은 초정밀 기술을 요구한다. 전기 면도기를 만드는 데 30년 가까운 외길 인생을 바쳐온 조아스전자 오태준 사장(吳泰準·47)이 ‘기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오사장은 국내 면도기 시장을 해외 유명브랜드가 석권하던 70년대 중반, 불모지에 가까운 면도기 시장에 맨주먹으로 뛰어들어 면도기의 완전 국산화를 이뤄낸,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다.

    연구만이 살 길

    조아스는 해외의 유수 브랜드들이 포진한 국내 면도기 시장에서 30%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는데, 국내보다는 해외 시장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조아스가 만든 전기 면도기와 이발기는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세계 30여 개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이 회사의 올해 총매출목표액은 80억 원, 수출목표액은 500만 달러였는데 불황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오사장은 “최근 미국의 콘에어사로부터 면도기 15만 개(230만 달러 상당)를 주문받았는데, 이만한 양을 생산하려면 최소한 3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납기일을 조정해야 할 판”이라며 일손을 걱정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프랑스의 베이비리스사가 여성용 면도기를 대량 주문해 내년 수출물량은 올해보다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했다.

    조아스전자는 30여 종에 달하는 전기 면도기를 비롯해 전기 이발기, 드라이기, 공기청정기, 마사지기, 청소기 등을 만들고 있다. 전기 면도기는 월 7만여 개, 이발기는 2만여 개, 드라이기는 1만여 개를 생산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조아스전자는 한적한 산 속에 자리하고 있어 언뜻 보기엔 공장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특히 공장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세가 빼어났는데 그곳이 바로 광릉수목원 뒷산이라고 했다.

    오사장이 공장지대 대신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곳의 여건이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는 “20년 역사의 우리가 50∼100년 동안 기술을 축적해온 해외 브랜드를 능가하려면 끝없는 연구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잠을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기록을 해둔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는 이처럼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메모와 그림들로 빽빽했다. 항상 면도기 생각을 하다 보니 꿈도 자주 꾸는데, 해결책을 못 찾던 일의 실마리가 꿈에서 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면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날과 망. 날은 0.07mm 굵기의 가는 수염까지 놓치지 않고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 망도 극히 정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1만5000개의 구멍 중 단 한 구멍이 제대로 뚫리지 않아도 수염이 잘리지 않고 뽑혀 나가기 때문에 불량률이 제로여야 한다. 또한 망은 얇고 질겨야 한다. 요즘 나오는 제품의 망 두께는 0.05mm. 더욱이 망은 피부와 직접 닿기 때문에 촉감도 좋아야 한다.

    28년 면도기 외길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국산 면도기를 쓰다가 수염이 뽑히면 ‘역시 국산품은 못 쓰겠어’ 하고 제품을 탓하면서, 외제 면도기 쓰다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내가 잘못 써서 그렇겠지’ 하고 자기 탓으로 돌려요. 이런 인식의 장벽을 넘기가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건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날림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고는 뒷수습도 안 하고 돈만 챙겨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짓을 몇십 년 계속하다 보니 지금 제품 만드는 사람들이 그 욕을 다 얻어먹고 있어요. 국산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때까지는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면도기는 날이 움직이는 형태에 따라 회전식, 왕복식, 로터리식으로 나뉜다. 손이 큰 서양인들은 대개 회전식을 찾는 반면 국내 소비자들은 작고 두께가 얇은 왕복식을 선호한다. 회전식은 소음과 진동이 적지만 절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왕복식은 소음과 진동은 많지만 2중 혹은 3중 날로 되어 있어 한 번에 두세 차례씩 수염을 밀고 지나가기 때문에 수염이 잘 깎인다. 로터리식은 진동과 소음이 적고 수염도 잘 깎이지만 구동하는 데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배터리 소모가 크다. 이 모든 단점을 보완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태준 사장의 과제다.

    오사장이 면도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심미전자에 입사하면서부터. 당시 심미전자는 일본과 홍콩에서 완구와 전자제품들을 들여와 상품이 될 만한 것을 골라 새로운 형태로 만든 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오씨는 제품 개발과 제조, 조립공정을 두루 배웠다. 면도기도 이때 처음 접했다. 면도기는 다른 제품에 비해 상당히 높은 기술력을 요구해 아무나 손댈 수가 없는데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면도기를 뜯어 연구한 뒤 새로운 제품으로 조립해 만들면서 면도기 제조 기술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그러다 75년에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회사가 문을 닫았다. 회사를 나오게 된 오씨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고교졸업 학력만으로는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다. 면도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될 것 같았지만 갓 스무살을 넘긴 그를 믿고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었다. 심미전자에서 함께 근무했던 부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는 오씨의 기술 정도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남대문시장에서 돈을 투자할 판매상을 수소문했다. 어렵사리 판매상이 나타나자 오사장은 제품 개발을, 부장은 경영을, 판매상은 상품판매를 맡기로 하고 76년 우진공업사를 만들어 처음으로 면도기를 생산했다.

    “초기에는 대개 부속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수준이어서 제품이라고 할 만한 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물건은 잘 팔려 나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낮에는 물건을 만들고 밤에는 기술을 연구했어요. 그때가 스물두 살 때였는데, 그 후 서른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사흘에 한 번꼴로 밤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진공업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업멤버들 사이에 의견차가 컸기 때문이다. “갈라지면 다 끝난다”고 버티던 오사장도 결국 사장과 뜻이 맞지 않아 79년에 회사를 나왔다. 그는 면도기 사업에선 손을 떼겠다고 마음먹고 ‘제2의 고향’인 남양주로 내려갔다.

    부산시 반여동에서 태어난 오사장은 군속이었던 아버지가 5·16 군사혁명으로 직장을 그만두면서 서울을 거쳐 초등학교 3학년 때 남양주시 도농동으로 이사했다. 직업이 없던 아버지는 소작을 하며 대장간을 운영했는데, 어린 오태준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나이답지 않게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새벽 다섯 시 반만 되면 아버지가 절 깨우셨어요. 눈을 비비고 나가 불이 꺼지지 않게 풀무질을 했는데, 아침마다 풀무를 돌리면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이깟 풀무나 돌리려고 태어났나. 이러다 평생 풀무나 돌리다 죽는 것 아닌가. 남들은 다들 달게 자고 있는데 내 신세는 이게 뭔가…’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

    일찌감치 철이 든데다 어릴 때부터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밴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는 혼자서 1000평 규모의 오이 농사를 지었다. 씨를 뿌리면 얼마 지나서 싹이 나고 그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학교에 있는 시간말고는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눈앞에 뒀을 때 고민거리가 생겼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3년 터울인 여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다 못해 진학을 포기했는데, 얼마 후 친구가 버린 원서 한 장을 우연히 손에 쥐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마음을 바꿔 서울 청량공업고교 기계과에 원서를 냈다. 시험 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자 가서 시험을 쳐 합격했다. 합격한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집에 알리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됐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려 했는데, 그 사정을 들은 동네 아주머니가 돈을 들고 와 등록을 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등록금을 냈다. 오사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눈가가 붉어졌다.

    “나 때문에 동생이 결국 중학교를 못 갔어요. 얼마나 미안했던지….”

    가까스로 고교에 진학했지만 부모에게선 차비 정도밖에 타 쓸 수 없는 형편이어서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는 기술을 익혀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양옥집 굴뚝 주변에 비가 새지 않도록 함석으로 방수처리하는 기술을 배워 등록금과 용돈을 벌어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엔 모나미에 취직해 1년간 근무하다 심미전자로 옮겼다.

    판매망·자금력 없어 고전

    80년 4월 고향 남양주로 내려온 그는 산업용 기계를 만들어보겠다며 길가에 구멍가게 하나를 얻어 혼자 뚝딱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면도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핵심부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면도기 관련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산업용 기계 제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면도기 부품 만드는 일이 주업이 됐다.

    하지만 부품만 만들어주는 것은 돈도 되지 않았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물건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갈고 닦은 실력을 자신의 제품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는 부품 만들던 일을 청산하고 82년 1월1∼2일 이틀간 산꼭대기에 올라앉아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내려왔다. 그리고 3일부터 제품화할 면도기의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면을 그린 후 외제 샘플을 구하러 남대문시장에 갔더니 아는 상인들이 금방 눈치를 채고 “면도기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면도기를 만들고는 싶지만 돈이 안 된다”고 하니까 좋은 사람이 있다며 물주를 소개해줬다. 도면을 들고 돈을 대겠다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 그는 대뜸 “담보가 있느냐”고 물었다. 오씨는 “담보는 없지만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도면과 기술력, 그리고 젊음이 있으니 믿고 돈을 빌려주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리고는 문방구에서 약속어음 용지 두 장을 가져와 발행날짜만 적고는 500만 원씩 두 장을 써 건네줬다. 그렇게 빌린 1000만 원으로 그해 10월에 성진전자(99년 ‘조아스전자’로 사명 변경)를 만들어 8명의 직원과 함께 본격적으로 면도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생산한 면도기 ‘피닉스’는 자금을 댄 판매상에 의해 전국의 도·소매상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밤낮 물건을 만들어도 워낙 마진이 적어 수익은 형편없었다. 돈은 판매상이 다 벌고 있었다. 재료비와 인건비만 겨우 건지는 정도가 되다 보니 신기술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판매상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크면 내가 골치 아파진다’는 눈치였다. 오사장은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5년 만에 스스로 문을 닫았다.

    놀란 판매상이 좀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며 오사장을 달랬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직접 물건을 들고 도·소매상을 찾았다. 그러자 판매상은 오사장이 이들에게 물건을 팔지 못하게 창고에 두 달치 물건을 쟁여놓고 원가로 물건을 대며 방해공작을 폈다. 판매망과 자금력 없이 단순히 제품만 만들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남대문시장 주변에는 오사장 같은 제조업자가 수없이 많았지만 대부분 판매망과 자금력이 없어 도태됐다. 당시 오사장과 거래했던 판매상에게는 20여 명의 제조업자들이 물건을 납품했지만 후에 기업화한 사람은 오사장이 유일했다.

    결국 판로가 막힌 오사장은 판매상에게 싼값에 제품을 넘기고 관계를 정리했다. 한번 호되게 당한 그는 이후 새 판매상과 관계를 맺을 때는 처음부터 판매상의 주권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독립자금’을 따로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사업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추석시장을 겨냥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다 만든 새 제품들이 화재로 잿더미가 된 것. 설상가상으로 그 전까지 꼬박꼬박 불입해온 보험이 화재 수일 전에 만기가 지나 보상을 한 푼도 받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그는 떠나겠다는 직원들을 붙잡고 잿더미 위에서 간곡하게 설득했다. “우리가 언제 돈 들고 물건 만든 적이 있었나. 그 동안의 경험을 살리면 다시 일어서서 더 잘할 수 있다. 지금껏 신용을 쌓아왔기 때문에 거래처에서도 외상으로 물건을 대줄 것이다. 우리 모두 젊으니 다시 한 번 해보자”고.

    오사장의 말대로 그간 거래했던 부품업체 가운데 절반은 그를 믿고 외상으로 부품을 대주며 밀어줬다. 그는 이때부터 외국산 부품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 기술로 부품을 만들어 쓰기 위해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부품을 만드는 외국 기업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워 왔다.

    “연구를 하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무작정 외국업체로 날아갔어요. 그냥은 배워올 수 없으니까 기계를 사려는 손님처럼 가장하고 들어가 상담을 하면서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물어봤지요. 그걸 메모해 와서 우리 용도에 맞게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써보고 결함이 나타나면 보완하고, 그래도 안 되면 또 나가서 비슷한 방법으로 배워오고… 10년을 그렇게 했어요. 그래도 끝나지 않습디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사장은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했지만 자체 판매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선 기업의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94년, 스스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거래해오던 판매상에게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로선 30∼40년씩 실타래처럼 얽혀온 판매망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거래하던 한 판매상이 자신의 거래처 장부를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오사장은 자기 힘으로 판매망을 구축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고 거래처 장부와 함께 직원들까지 인수했다. 면도기 사업에 뛰어든 지 12년 만에 판매망을 갖게 된 것이다.

    제품 생산과 판매를 독자적으로 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에 국내 최초로 전기 이발기를 개발해 시판했다. 이발기는 전기면도기와 기능이 비슷해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진 않았지만 날을 개발하는 게 어려웠다. 이발기의 날은 가는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깎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하면서도 강해야 하는데, 이 날을 자체 개발하면서 98년엔 수출 길도 열렸다. 현재 이 제품은 유럽에서 베이비리스 상표로 팔리고 있는데, 네덜란드의 필립스나 독일의 브라운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품목이 늘어나고 회사도 커지자 오사장은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회사를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95년 그는 소사장제를 도입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4개의 생산라인을 만든 뒤 그때껏 핵심부문에서 기술을 개발해온 고참 기술진에게 각각 독립채산제로 협력회사를 만들어 내보냈다.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사람을 잘라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노하우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재배치한 것.

    그는 “우리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직원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력은 무시하고 무조건 잘라내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 100년 가까이 장인정신을 길러온 외국 기업들과는 경쟁이 안 된다”고 한탄한다. 현재 이렇게 내보낸 협력업체는 모두 7개.

    수출로 활로 개척

    그는 이렇게 세대교체를 이루면서 기술개발 기술관리 상품기획 상품관리 디자인 무역 애프터서비스 등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마무리한 96년부터 해외시장 개척에 뛰어들었다.

    “우리라고 안 될 게 뭐냐면서 조아스 브랜드로 제품 만들고 상자 만들어 무작정 외국 판매상을 만나러 갔어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어요. 세계 시장을 돌아보니 미국은 너무 저가 시장이고, 동남아시아는 우리보다 여건이 낙후해 시장이 없고, 일본은 너무 까다로웠어요. 그나마 유럽 쪽이 좀 만만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유럽을 가장 먼저 공략했습니다.”

    3년 동안 매달 두 명씩 직원을 내보냈더니 저쪽에서 “좋다. 하지만 거래를 할 경우 애프터서비스는 어떻게 해줄래?” 하고 물어왔다. 오사장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해외 지사도, 해외 애프터서비스 조직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물건 팔면서 애프터서비스까지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줄 수 있는 업체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제조업과 영업을 겸하고 있는 한 회사를 찾아 뜻을 전했더니 자신들의 브랜드로 팔게 해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인증도 문제였다. 한번은 말레이시아에서 협상을 다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인증서는 있겠지?” 하고 물었다. 그래서 KS 인증서를 내보이며 “이게 코리아 스탠더드다”고 했더니 그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세계 인증서를 꺼내 보이며 “우리가 원하는 건 이것이다”고 했다.

    놀랍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우리보다 경제여건이 못한 말레이시아도 유럽과 상호 인증을 하고 있는데,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라는 한국 기업이 그처럼 무지했다니….

    수출보다 인증이 급선무였다. 그는 “다시 제출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오자마자 규격을 갖추고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인증서를 만들었다. 조아스전자는 98년 CE(유럽 안전규격), 99년 ISO(국제표준화기구 규격) 9001, 2000년 UL(미국 안전규격), VDE(독일 안전규격)를 취득했다. 유럽 CE를 취득하고 비로소 프랑스 베이비리스사와 면도기와 이발기 수출계약을 맺었다.

    외환위기로 내수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수출의 물꼬가 터진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직원도 늘렸고 지금의 공장도 짓게 됐다. 이는 차입경영을 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믿을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던 오사장은 평소에 유동성을 확보해뒀던 것.

    요즘 주 5일제 근무를 놓고 한창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조아스전자는 13년 전인 87년부터 5일제 근무를 실시했다.

    “82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토요일 오전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봐야 겨우 서너 시간 일하고 가는 거예요. 그거 일하자고 토요일에 굳이 회사에 나오게 하느니 평소에 시간을 잘 활용하게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 5일 근무를 하는 대신 평일엔 출근시간 정확히 지키고, 출근 즉시 일 시작하고, 퇴근시간 되기 전에 미리 일 정리하지 말고 퇴근시간까지 정확히 일하라고 했어요.”

    조아스는 99년 마케팅부를 신설했다. 기술 면에서는 해외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데도 이미지 관리에 미숙해 그만큼 빛을 못 보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동안은 기술만 좋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고 같은 건 낭비라고 외면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앞으로는 ‘이미지 업’ 하는 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직과 성실, 기술력이라는 무기에 ‘날개’를 달겠다는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