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vs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5-05-06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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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북정책이다. 지난해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김대통령을 비롯한 이 시대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이 회담을 남북 통일을 향한 초석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남북 교류를 통일 물꼬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할 것인가.

    통일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남북한군 사이에 군사력 감축(軍縮)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은 병영국가이기 때문에 군축에 매우 소극적일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군축 협상에 끌어내고 실질적인 군축을 이뤄낸다면, 한국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이 된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과연 그럴까? 북한을 군축 협상에 끌어내 군축 합의문에 서명케 하는 것이 북한을 굴복시켜 역사적인 남북통일로 가게 하는 첩경이 될 것인가?

    북한에서는 군사력 감축을 ‘축감(縮減)’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에서 실력자로 있다가 귀순한 엘리트 탈북자는 “한국인들이여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다. 그는 “정상회담 후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들에게 2004년까지 통일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통일 시기를 정해 놓은 것은 통일방안을 마련해 놓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열심히 축감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축감은 오히려 북한이 잘할 것이다. 축감 협상 주도권은 북한이 쥘 것이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6·15 공동선언 제1항에는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가자’는 문구가 있다(自主 조항). 한국 사회에서는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이 사라졌지만, 북한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잘 이행하자는 목소리가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왜 북한은 6·15 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그들 주도 통일의 초석으로 보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군사력 축감을 위한 예비 회담을 가지면, 북한은 6·15 선언의 자주 조항에 따라 미국을 배제하고 본회담을 갖자고 주장할 것이다. 한국 역시 민족주의가 강한 만큼 이를 받아들여, 남북한은 단독으로 군사력 축감을 위한 본회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은, 병영국가 북한이 군사력을 축감하는데 부정적일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때문에 북한은 축감을 피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 주한미군을 줄이는 만큼 인민군을 줄이겠다’고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다. 물론 협상 초기에는 북한이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다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한국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주한미군 주둔에 동의해 주면 한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역공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이 역공이다.



    여기서 북한은 단물(경제적 지원)을 최대한 짜낸 뒤, ‘주한미군은 상징적으로만 축감하라’고 제의해, 한국의 동의를 받아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은 국군과 주한미군을 합쳐 15만을 축감하고 북조선 인민군도 15만 명을 축감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을 상징적으로만 철수했을 뿐 실제적으로는 축소하지 않아, 한국은 군축회담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고 자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전략에 말려든 결과가 된다.”

    “북한은 군축에 적극적이다”

    북한은 왜 주한미군 철수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이 소식통의 분석은 예리하게 이어진다.

    “한국군에서 제대한 15만 병사는 뿔뿔이 집으로 흩어져 생업에 종사하게 된다. 생업에 들어가면서 동원예비군이 되겠지만, 동원예비군은 과거의 전우가 아닌 생소한 사람들과 편성되는 것이므로 이들의 전투력은 급격히 저하된다. 그러나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북한은 제대 병력을 뿔뿔이 흩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북한이 병영국가로 불리는 것은 기업소와 관공소 등이 모두 군대 체제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기업소의 총사장은 사단장이고, 반장은 소대장이다.

    따라서 군복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총대신 망치를 잡게 해, ‘고향 앞으로’가 아니라 ‘기업소 앞으로 헤쳐 모여’를 명령하는 것이다. 광산이나 기업소에는 한국의 동원예비군에 비교되는 교도대 조직이 있다. 이들은 사단 편제 그대로 여기에 편입된다.

    이러한 교도대는 하루아침에 현역 사단으로 변모할 수가 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1개 군단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는데, 그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의 축감은 실질적인 군사력 저하지만, 북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북한은 축감에 적극적일 수 있다.

    북한은 주한미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칭 관계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 철수를 고집해 2004년 통일이라는 목표를 놓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한국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켜 통일을 이루는 방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의 축감 회담에 응해야 한다.

    두 번째로 한국은, 인민군 축감이 실제적인 축감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즉 광산이나 기업소의 교도대로 전환된 인원이 다시 현역화할 수 없도록, 이들이 쓰던 무기를 폐기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북한은 한국이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 축감도 주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나 러시아와 비밀 협정을 맺어, 축감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 축감될 병력이 사용하던 무기를 두 나라로 옮길 가능성이 있다. 최근 북한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는데 노력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의 무기 빼돌리기가 시작되면 미국은 이를 눈치채고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한국은 미국이나 UN을 동원해 북한의 무기 빼돌리기를 감시케 하려고 할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은 6·15 공동 선언 제1항의 자주를 거론하며 ‘외세는 개입하지 말라’고 맞설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준수하라’ ‘2004년에 통일하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군축과 연계한 대남공작

    소식통은 북한은 한국민을 상대로 자주 조항을 더 강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민을 자극해, ‘김정일=민족주의자’라는 등식을 심어줘, ‘김정일=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암암리에 한국 흔들기에 들어간다. 지하당을 이용한 대남 공작을 강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 협상 과정을 보면, 조선로동당 대남비서 김용순(金容淳)이 계속 전면에 나서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김용순은 조선로동당에서 대남 업무에 참여하는 통일전선부·작전부·사회문화부·대외정보조사부를 책임진 ‘비서’이자, 북한의 통일 방안을 마련하는 통일전선부의 부장이다. 그러한 김용순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 장소로 유력시되는 제주도를 사전답사하고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대남공작 최고책임자가 남북협상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남북협상과 대남공작을 한 묶음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조선로동당 4개 대남 부서에 대항하는 한국의 4대 기관은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경찰청 보안국·국군기무사령부 방첩처 그리고 국군정보사령부이다. 앞의 3개 기관은 북한에서 파견한 공작원을 잡는 대공수사기관이고, 국군정보사는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기관이다. 기무사 방첩처는 주로 군대에 침투한 간첩이나 좌익 사범을 추적하고, 경찰 보안국과 국정원 대공수사국은 일반 사회에서의 간첩사건을 추적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4개 기관은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합신조(합동신문조)’를 구성해 수사에 착수하고 있다.

    기자는 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을 알기 위해 앞의 3개 기관 공보실에 취재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경찰청 공보실은 보안국 요원과 전화 통화를 하는 데까지는 도와주었으나, 보안국 요원들은 하나같이 “시절이 시절인만큼 취재에 응할 수 없다. 양해해 달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국정원과 기무사에서는 아예 연락조차 없었다. 그러나 4년여 전부터 기자는 탈북자나 귀순자를 만나 차근차근 북한의 공작 조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귀순자들은 대개 국정원이나 경찰 관계자와 함께 기자를 만났다. 귀순자들은 이들을 의식해,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려 했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의 이야기를 수집해 가자 서서히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의 실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러한 취재를 통해 기자가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광복 전후 남한 땅에서 벌어졌던 남로당과 경찰 간의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였다.

    남로당은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간첩사건 때마다 거론되는 지하당을 거쳐,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조직을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로 통칭하기로 한다. 평양에서 이를 지휘하는 사람이 곧 조선로동당 대남비서인 김용순인 것이다(남로당과 조선로동당 관계에 대해서는 이 기사 말미에 있는 별도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

    광복 전후 이땅의 대공수사기관은 경찰과 SIS와 CIC로 불렸던 군 방첩부대(기무사의 전신)뿐이었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가 창설되면서 대공수사국이 추가됐는데, 이때부터는 국정원이 대공수사 기관의 대표가 되었다.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을 제치고 남조선 혁명을 완성하려는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의 지독한 투쟁이 ‘대남공작’이고, 이러한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를 뿌리째 뽑아내겠다는 것이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의 엄숙한 다짐이 ‘대공투쟁’인 것이다.

    조선로동당 4개 대남부서 중에서 ‘수석’은 통일전선부(통전부)다. 김용순은 물론이고 이효순·김중린·허담 등 역대 통일전선부장은 조선로동당의 대남 비서를 겸했다. 통전부는 북한이 추진하는 대남공작의 기본 골격을 만드는 곳이다. 북한이 추진하는 통일방안을 만드는 싱크탱크 격이다. 이산가족 만남을 위한 적십자회담이나 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회담은 전부 이곳에서 도맡는다. 남한 땅에 떨어지는 북한 삐라도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고 있다. 통전부 요원은 영사 직함으로 해외에 나가 해외교포 포섭활동도 한다. 일본에 있는 조총련도 이곳에서 관장하고 있다.

    한국에서 육군 소장을 달고 논산훈련소장을 지낸 최홍희(현재 캐나다 거주)와 육군 중장 출신으로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덕신(崔德新·사망)이 1979년과 1986년 북한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97년 발생한 황장엽 비서의 한국 망명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는데, 두 사람을 상대로 포섭 공작을 한 것이 바로 통전부였다. 최근 남북협상 과정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아·태평화위’와 그전에 자주 등장했던 ‘조평통’, 그리고 8·15 대회를 주도하는 범민련 북측본부 등은 전부 통전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

    통전부가 북한의 통일방안을 만드는 ‘두뇌’라면 사회문화부는 통전부가 만든 통일방안을 실행하는 ‘수족’이다. 사회문화부는 남한으로 침투해 지하당(서울지도부)을 만드는 일을 한다. 92년까지 지하당인 남조선로동당을 만들어 관리해 오다 북한으로 도주해 지난해 북한에서 사망한 ‘할머니 공작원’ 이선실, 95년 10월24일 부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된 ‘부여간첩’ 김동식, 97년 10월27일 부인 강연정과 함께 울산에 침투했다가 검거된 후 부인은 자살한 ‘울산부부간첩’ 최정남, 98년 12월까지 민혁당을 지도하다 여수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다 해군 광명함의 포격을 받아 반잠수정이 격침됨으로써 사망한 윤태림 등이 전부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유고급 잠수정 운영하는 작전부

    이러한 사회문화부와 일심동체로 움직이는 것이 작전부다. 작전부는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을 한국으로 침투시키고, 임무를 마친 공작원을 북한으로 데려오는 일을 한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침투 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작전부(당시는 조사부라고 했다)는 휴전선을 통해 주로 육상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한국이 남방한계선 전체에 철책을 친 다음부터는 해상침투가 많아졌다. 해상침투를 위해 작전부는 서해의 남포와 해주, 동해의 원산과 청진에 연락소를 운영하고 있다.

    작전부는 크게 두 종류의 선박을 운영한다. 하나는 유고급 잠수정이고 다른 하나는 반잠수정이나 자선을 싣고 다니는 공작모선이다. 유고급 잠수정은 수심이 깊은 동해에서 주로 이용되고, 공작모선은 동·서해 모두에서 활용되고 있다. 한국 해군은 그동안 자선은 여러번 격침시켰다. 그러나 반잠수정 격침은 드문 편이다.

    반잠수정은 대개 5t급으로, 275마력짜리 OMC엔진을 세 개 달고 있다. 30(시속 55km 정도)내지 35노트로 달리는 일반 모터보트에 붙이는 엔진의 대당 가격이 1000만∼1500만원인데 반해, OMC엔진의 대당 가격은 무려 5000여 만원이다. 이렇게 좋은 엔진을 세 개나 달고 있기 때문에 반잠수정은 57노트(시속 102km 정도)까지 달릴 수 있다. 한국 해군 함정 중에서 가장 빠른 고속정도 35노트 이상은 달릴 수 없다. 따라서 반잠수정은 보고도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해군은 이러한 반잠수정을 딱 두 번 격침시켰다. 1983년 12월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 이상규와 전충남을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상륙시키고 빠져나가던 반잠수정을 격침시킨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98년 12월 여수 해안에서 민혁당을 지도한 윤태림을 태우고 빠져나가던 반잠수정을 수십 척의 함정을 동원해 차단함으로써 완벽히 격침시킨 적이 있다.

    공작모선은 대개 80t급으로 북한에서 제작한 1100마력짜리 라시보 엔진 4대를 달고 있어, 최고 53노트까지 달릴 수 있다. 한국 해군은 이러한 공작모선을 딱 한번 격침시켰다. 1983년 8월13일 울릉도 부근에서 작전하던 구축함 ‘강원함’(DD-922)은 ‘어선인지 상선인지, 또 국적이 어디인지’가 불분명한 선박을 발견하고 정선(停船)을 명령했다. 작전부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도 침투한다(일본 침투에 대해서는 뒤에서 밝힌다). 이 선박은 ‘풍산호’라는 위장 명칭을 붙이고 일본으로 가던 공작모선이었다.

    정선 명령을 받은 풍산호는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강원함의 최고 속도는 30노트에 불과했으나 이 함정에는 헬기가 실려 있었다. 간첩선이라고 판단한 강원함은 헬기를 띄워 풍산호를 격침시켰다. 해군 함정 중에 유일하게 공작모선을 잡은 강원함은 2000년 12월 퇴역했다.

    1999년 3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은 수상한 선박을 발견해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이 선박은 소총을 쏘며 고속으로 청진까지 도주했다. 불심검문을 거부하고 했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불심선(不審船)’으로 불렸던 이 선박도 작전부가 운영하는 공작모선이었다.

    80t급인 유고급 잠수정은 아예 발견조차도 않되는 경우가 많은데 98년 6월 22일 속초 앞바다에서 우연찮게 걸려들었다. 잠수함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어선들이 쳐놓은 그물이다. 그물이 잠수함 스크루에 걸리면 오도가도 못 하므로 물 위로 부상한 다음, 사람이 나가서 칼로 그물을 잘라내야 한다. 이날 유고급 잠수정은 어민들이 쳐놓은 꽁치 그물에 걸려들었다. 물위로 부상한 잠수정은 승조원을 밖으로 내보내 칼로 그물을 뜯어내다가 어민에게 발견되었다. 어민 신고를 받는 해군 함정이 달려오자 승조원들은 잠수정 안으로 들어가 폭사(爆死)했다(유고급 잠수정은 작전부에서 운용하나 덩치가 큰 300t급의 상어급 잠수함은 인민무력성(인민군) 산하 정찰국에서 운영한다. 상어급 잠수함은 96년 9월 강릉에서 좌초한 바 있다).

    간첩은 포경수술을 하지 않는다

    공작모선으로 침투할 경우에는 해안에서 40해리(약 72km) 떨어진 곳에서 반잠수정을 내린다. 그러나 유고급 잠수정으로 침투하면 1∼2km까지 바짝 접근한다. 해안까지의 거리가 1km 내외일 경우 작전부 소속 안내조와 사회문화부 소속의 공작원이 오리발을 신고 수영해서 침투한다. 그 이상일 경우에는 추진기를 타고 들어온다. 추진기는 스크루를 가진 소형 엔진인데, 수중에서 이를 붙잡고 있으면 수영보다 훨씬 빠른 3∼5노트의 속도로 침투할 수가 있다(추진기는 스쿠터라고도 하는데, 스쿠버를 즐기는 사람들은 잠수시 스쿠터를 자주 이용한다. 스쿠터는 이미 레저 용품이 된 지 오래다).

    추진기는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 아니라 작전부 소속의 안내조를 침투시킬 때 주로 이용한다. 2명으로 구성된 안내조는 육상에 올라가 약정한 드보크에 공작원에게 전달할 물품(돈이나 무기, 난수표 등)을 묻어놓거나, 공작원이 드보크에 묻어놓은 물품을 갖고 돌아온다. 추진기에는 통상 3명이 타는데, 추진기를 조작하는 추진기 기수는 육상에 올라간 안내조가 돌아올 때까지 추진기를 갖고 해안에서 기다린다. 공기통은 추긴기 기수만 매는데, 공기통에서 3개의 호흡대를 뽑아내 추진기 기수와 안내조 2명이 입에 물고 호흡을 한다.

    98년 7월12일 묵호 앞바다에서는 이러한 추진기와, 공기통을 맨 채 사망한 추진기 기수 시체가 발견되었다. 수면의 기압은 1기압이나 10m의 바닷속은 2기압이다. 2기압 속에 있다가 갑자기 1기압으로 나오면 허파 속에 있던 공기와 혈관 속에 있던 공기의 부피가 두 배로 커진다. 이렇게 되면 혈관 속에 있던 작은 공기방울이 커져 머리로 연결된 뇌혈관을 막는다. 공기방울이 뇌혈관을 막아 피를 흐르지 못하게 하면 사람은 입과 코로 피를 흘리며 사망한다. 잠수 세계에서는 이를 ‘공기 색전증(塞栓症)이라고 하는데, 추진기 기수는 공기색전증으로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추진기를 타고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조 2명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작전부의 안내조는 사격이나 특공무술 훈련도 받기 때문에 테러나 암살 임무도 수행한다. 울산부부간첩 최정남의 진술에 따르면 96년 분당에서 김정일의 처이질 이한영을 저격 사망케 한 것도 작전부였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남자 시체가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합신조가 달려가 죽은 사람이 무기를 갖고 있는지, 이 사람의 지문이 남한에 있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해 간첩인지의 여부를 판단한다. 그런데 대공수사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에 따르면 한눈에 죽은 자가 간첩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거시기’에 ‘고래가 잡혀 있으면’(包莖수술을 했으면) 남한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북한인이다. 북한 공작원들은 왜 포경수술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에는 아직 포경수술을 하는 문화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원도 그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 지내는 것이다. 때문에 합신조에 참가한 사람들은 과학적인 수사에 앞서 변사자의 생식기부터 살피게 된다.

    대외정보조사부(조사부)는 영사와 무역원으로 위장해, 해외에서 교민이나 외국으로 온 한국인을 상대로 공작한다. 작전부가 조사부던 시절, 대외정보조사부는 작전부 산하의 조사실이었다. 그러다 81년 조사부가 작전부가 되면서 조사실이 독립해 대외정보조사부가 되었다. 1978년 홍콩에서 최은희·신상옥 부부를 북한으로 납치한 것이 조사부다. 그러나 한국에 있던 두 사람을 홍콩으로 가게 한 데는 사회문화부의 공작이 있었다. 87년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시킨 ‘위장 일본인 부녀(父女)’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김현희), 그리고 96년 7월에 검거된 ‘교수 간첩’ 무하마드 깐수(정수일)도 조사부 소속이었다.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조선로동당의 4개 대남 부서를 북한에서는 ‘3호청사’로 부른다. 대남공작 부서가 3호 청사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총무처는 경기도 과천시에 여러 동의 건물을 지어놓고 정부 기관을 입주시켰는데 이를 가리켜 ‘과천 정부청사’라고 한다. 1982년 그와 똑같이 조선로동당도 중앙청사를 짓고 로동당 산하 부처를 입주시켰다. 이러한 건물에는 1호 청사·2호 청사…7호 청사란 이름이 붙었다.

    정부 부처 중에는 업무 성격상 타 기관과 함께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국방부나 국가정보원·대검찰청·감사원·경찰청처럼 비밀을 다루는 군사·정보·사정 기관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기관들은 종합청사에 들어가지 않고 단독 청사를 마련하고 있다.

    조선로동당도 같은 이유로 비밀을 지켜야 하는 대남공작 기관은 단독 청사를 갖게 했다. 통전부를 비롯한 4개 부서는 일련 번호에 따라 3호 청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3호 청사는 평양시 대성구역 합장동에 따로 지어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남공작=3호 청사’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왜 남조선 혁명인가

    현재 한국에는 전문적으로 대북공작원을 양성하는 기관이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HID로 불렸던 육군 첩보부대 예하에 대북공작원을 양성하는 기관을 운영했다. HID가 관리했던 대북공작원들은 북한에 들어가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첩보를 수집했다.(‘신동아’ 2001년 1월호에 실린 ‘피의 보복 부른 공작원의 세계’ 참조). 그러나 한국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후 테러와 폭파로 점철된 대북공작을 중단했다.

    하지만 북한은 7·4 남북공동성명 후에도 76년의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83년 아웅산 사건, 87년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테러와 폭파를 거듭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해, 북한과의 경제 교류를 일체 봉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 한국이 북한과의 경제 교류를 늘리려 하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가 대신 ‘불량국가(rogue state)’로 지정했다. 테러지원국가와 불량국가는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북한 분석가들은 미국은 김대중 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주는 척 하기 위해 불량국가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의 4대 공작기관이 노리는 것은 남조선 혁명이다. 1980년대 대학 운동권에서는 한국의 사회의 발전단계를 놓고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단계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다’ 등의 논의가 있었다. 식민지 반자본주의를 줄여서 ‘식반자론(植半資論)’,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는 ‘신식국독자론(新植國獨資論)’이라 불렸다. 이 두 이론은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로 보는 차이가 있지만 미국의 식민지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또 남한의 경제발전 단계는 반(半)자본주의냐, 정부가 자본주의를 이끄는 국가독점자본주의냐의 차이는 있으나 자본주의 단계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식민 지배를 벗어나 독립하는 것을 북한에서는 ‘해방’이라고 한다(마찬가지로 북한 인민을 공산 독재 체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도 ‘해방’이라고 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는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는 역사 발전 이론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이러한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자본가 세력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세력을 꺾고 사회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한다(그러나 동구권이 무너져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세계 언론은 이를 ‘혁명’ 혹은 ‘시민혁명’이라고 표현했다).

    남조선 혁명이란 남조선을 식민지배와 모순된 자본주의의 질곡에서 일거에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북한 통전부는, ‘북조선은 1945년 공산화와 더불어 이러한 과제를 달성했으나, 남조선은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해방과 혁명 그리고 통일을 동시에 이루는 길이다’는 신념을 창출했다. 이러한 남조선 혁명을 이루기 위해 발로 뛰는 조직이 사회문화부다.

    한국은 북한보다 20배나 잘 산다. 그런데도 지하당을 구축하기 위해 장기간 체류해 남한 실상을 잘 아는 사회문화부 요원들은 자수하는 경우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공작원들이 품은 ‘신념’에 있다.

    한국의 대공수사관은 약간의 수사 교육과 이념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경험과 노력만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다. 그러나 북한은 대학 과정을 통해 대남공작원을 양성하고 있다.

    교육을 책임진 작전부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이 대학은 광복 직후 강동학원으로 출범했다가 3·1학원→서울정치학원→금강학원→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되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발전해 왔다(금성정치군사대학의 ‘금성’은, 김일성에서 ‘일’자를 빼고 김을 ‘금’으로 읽어서 만든 이름이다).

    북한 귀순자들은 북한 최고 명문인 김일성대학(김대)의 군사학부가 바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라고 주장한다. 김대 군사학부인 만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입학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우선 고등중학교(우리의 중고교를 합쳐 놓은 것으로 6년제다)의 성적이 좋아야 한다. 이러한 학생들 중에서 성분이 좋고 신체검사를 통과한 학생만 입교하는데, 입교자는 매년 2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여학생은 선발하지 않는다고 한다(작전부에는 여자가 없다는 뜻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는 7개 반(班)이 있다. 항해1반·항해2반, 기관1반·기관2반, 통신반, 안내1반·안내2반이 그것이다. 항해1·2반은 공작선 운영자를 키우는데, 이 과정을 이수하면 공작선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된다. 기관1·2반은 공작선의 엔진 부분을 책임진 기관사를 양성한다. 항해와 가관반의 차이를 비유해서 말하면, 자동차 운전술과 도로 지리를 배우는 것이 항해 과정이고, 자동차 정비술을 배우는 것이 기관 과정이다. 한국해양대학을 비롯한 한국의 학교에서도 항해와 기관 과정은 분리돼 있다.

    통신반은 공작모선과 연락소의 통신을 담당한다. 이러한 통신을 감청·해독하고, 공작모선의 움직임을 좇는 것이 ○○○○부대로 불리는 한미연합 감청부대다. 한미연합 감청부대는 98년 12월 한국에서 민혁당을 지도해온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 윤태림을 태우기 위해 여수 쪽으로 접근해온 공작모선의 통신을 완벽히 추적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북한 공군의 미그 19기 두 대가 야간 비행 훈련을 하다 공중 충돌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처럼 한미연합 감청부대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공작모선과 연락소는 반드시 음어와 암호로 교신한다. 때에 따라서는 한미연합 감청부대를 속이기 위해 허위 전파를 발사할 때도 있다. 일반 언어를 음어나 암호로 바꾸는 것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로직(logic)이 있다. 통신반에서는 이 로직을 배운다.

    안내 1·2반은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을 한국에 침투시키는 안내조 요원을 키운다. 공작모선에서 내린 반잠수정을 몰고 가 공작원을 한국에 침투시키고, 북한으로 복귀하는 공작원을 싣고 오는 것이 안내조다. 안내반에서는 사격·폭파 같은 특수 공작, 남한 해안의 특성과 조류 변화 따위를 학습한다. 이러한 교육 때문에 안내조는 인민군 정찰국 요원만큼 강인한 체력이 요구된다.

    작전부가 운영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당연히 학비가 없다. 학생들은 좋은 식사를 제공받으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월급은 없지만 담배와 사탕·과자를 제공받는다. 이 학교에서 학생 1명을 키우는 데 드는 돈은 김대생 5명을 키우는 교육비와 맞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자부심을 심어주기 때문에 작전부 요원을 비롯한 북한 공작원은 남한의 발전상을 보아도 쉬 귀순하지 않는 것이다. 학업을 마친 학생들은 100% 작전부 등에 취직한다. 건강이 나빠 퇴교한 학생도 워낙 신분과 실력이 좋기 때문에, 각군(郡)에 있는 조선로동당 군당 위원회 지도원으로 채용된다고 한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마치고 작전부에 배치된 사람은 165원의 월급을 받고, 1년이 지나면 185원을 받는다. 북한 일반 노동자들의 봉급이 60∼70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고소득이다. 결혼하지 않은 북한 공작원들은 사회안전성(경찰청에 해당) 산하 인민경비대가 지켜주는 위수구역 안의 관사에서 생활한다. 위수구역 안에는 처녀가 없어 이들은 위수구역 밖에 사는 여자들 중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신원조회를 한 후 이상이 없을 때만 결혼한다. 결혼 후 여자는 위수구역 안에 들어와 경제적으로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림을 한다.

    사회문화부는 위탁교육

    작전부가 운영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사회문화부를 비롯한 타 부서가 뽑은 요원을 위탁 교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작전부로 갈 학생들과 뒤섞여 공부하지 않고 별도의 장소에서 개별교육을 받는다. 일반 대학을 다니다 이 학교로 옮겨오는 학생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울산 부부간첩으로 생포된 최정남이다. 최정남은 사리원대학을 다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이 대학에 들어와 교육을 받았다.

    대남공작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사회문화부 요원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작전부 요원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이루어진다.

    해상으로 침투할 경우 공작모선을 이끌고 연락소를 출발해 반잠수정을 내릴 때까지는 항해반 출신의 선장이 최고 책임자다. 공작모선에서 반잠수정을 내려 해안으로 침투할 때까지는 안내조 조장이 ‘왕’이다. 그리고 한국 해안에 상륙한 다음부터는 사회문화부의 공작조장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

    잠시 북한 공작원들이 작전 중에 먹는 음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98년 묵호 앞바다에서 공기색전증으로 사망한 추진기 기수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팀이 부검했다. 국과수는 추진기 기수가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호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왜 간첩은 호박을 먹은 것일까.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정된다.

    앞서 밝혔듯 공작모선과 반잠수정은 속도가 매우 빠르다. 빠른 배는 하나같이 요동이 심하다. 더구나 날씨가 나빠져 파도가 거세지면 80t에 불과한 공작모선은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다. 유고급 반잠수정은 이보다 낫겠지만 원체 배가 작기 때문에 날씨가 나쁘면 많이 흔들린다고 한다. 심한 요동에 시달리면, 아무리 뱃사람일지라도 항해조·기관조·통신조·안내조 그리고 한국으로 침투할 공작조 모두 멀미에 시달리게 된다. 이럴 경우 밥은 아예 먹지 못하고 생계란이나 호박죽을 먹는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 출신들은 “한국 해안을 지키는 육군 향토사단이나 해병대는 별것 아니다. 그러나 해상에서 날씨가 나빠지면 정말 괴롭다”고 말한다. 96년 9월 강릉에서 좌초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은 조선로동당이 작전부가 아니라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이었다. 잠수함 내부를 조사한 합신조는 ‘신라면’ 봉지를 발견했다. 이 봉지를 근거로 유일한 생포자인 이광수를 추궁하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잠수함은 작은데 정찰조와 안내조 등 많은 사람을 태우다 보니 밥을 해먹기 위해 불을 피울 공간이 없다. 그래서 남조선에서 탁아소 어린이들에게 주라고 지원한 신라면을 실었다. 신라면을 맹물에 넣고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퍼지면 먹는다.”

    북한에 대한 라면 지원이 전면 중단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간편하게 제작된 남한의 인스턴트 식품은 북한 공작원들에게는 아주 좋은 휴대식량이 되고 있다. 98년 6월 꽁치 그물에 걸려든 작전부 소속 반잠수정 안에서도 한국 음료수 PET 병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마쳤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대남공작에 투입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 간첩사건 관련 보도에서는 ‘초대소’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 공작원은 초대소에서 밀봉 교육을 받았다고 발표된다(밀봉 교육이란 외부와 접촉을 끊고 고립된 공간에서 받는 교육을 말한다).

    그렇다면 초대소는 간첩 교육 장소란 뜻일 텐데 북한은 지난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백화원 초대소로 안내했다(그러나 북한은 회담 직전 이곳을 백화원 영빈관으로 바꿔 불렀다).

    여기서 독자들은 초대소의 정체를 몰라 적잖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초대소란 우리 개념으로 말하면 ‘초특급 리조트 호텔’에 해당한다. 대형 건물 안에 여러 개의 방을 마련한 호텔이 아니라, 풍광이 수려한 곳마다 드문드문 ‘스위트 룸’을 만들어 놓은 호텔이 초대소다. 북한 공작원은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이러니 이들은 남한의 물질적 부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위수구역에 살지 않는 공작원에게는 평양에 있는 고급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가 제공된다. 부여간첩 김동식이 대표적인 데, 90년 10월17일 이선실 황인오와 함께 북한에 들어간 그는 평양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벤츠 승용차를 제공받았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북한은 성(性)이 문란하다’는 고정관념이다. 김정일이 용모가 뛰어난 젊은 여성을 뽑아 ‘기쁨조’를 만들고, 여러 여자와 생활했다는 것 때문에 이러한 고정관념이 생겨났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북한을 비롯한 공산체제는 부화(간통)나 풍기문란 같은 행위는 강력히 처벌한다. 지난호 신동아는 99년 북한군 보위사령부가 혜산시를 대숙청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때 숙청 이유로 거론된 것이 부화와 풍기문란, 그리고 자본주의화였다. 공산주의는 성을 상품화하고 성을 이용한 쾌락을 즐기는 데 대해 유교(儒敎) 이상으로 반대한다.

    이러한 공산주의의 특성을 잘 드러낸 책이 ‘강철’ 김영환씨가 쓴 ‘강철서신’이다. 이 책에서 혁명가의 품성을 정리한 품성론을 읽어보면 혁명가는 세계 최고의 도덕군자다.

    여기서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 김정일로, 김정일은 최고 권력에 올랐기 때문에 많은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탈북자는 “한국 언론은 김정일이 이혼녀인 성혜림과 결혼해 아들(김정철)을 낳았다고 보도했는데, 북한 최고 권력자의 아들인 김정일이 어찌 이혼녀와 결혼할 수 있겠는가. 성혜림과 한때 관계했는지는 몰라도, 김정일은 성혜림과 결혼한 적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은 ‘600工數’ 처녀와 결혼”

    “성혜림은 월북작가 이기영씨의 며느리인데, 이기영씨는 며느리에게 ‘배우를 그만두라’고 했다. 성혜림이 이를 거부하면서 이기영의 아들과 이혼했다. 이러한 성혜림을 로동당은 해외 공작 파트 요원으로 내보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이 시퍼렇게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김일성식 공산주의 사상이 극성하던 때였으므로, 김일성은 공산 사상에 투철한 ‘서민(庶民)’ 여성을 김정일의 배필로 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600공수(工數)’라는 별명을 가진 서민 출신의 협동농장 농장원과 결혼했다.

    협동농장에서는 농장원이 정해진 하루 일을 마치면 1공수(工數)를 마쳤다고 기록해 둔다. 1년은 365일인데 이중 공휴일에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일반인들은 대개 일년에 300공수를 기록한다. 그런데 이 처녀는 하루에 두 곱씩 일을 해 1년에 600공수를 기록해 ‘600공수’란 별명을 얻었다. 이 처녀는 꽤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60년대 후반 김정일은 이 처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특성상 ‘600 공수 처녀’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이 여성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김정일은 이 여성과 헤어지고 무역원을 가장해 해외에 공작원으로 나가 있던 성혜림을 만난 것이다. 북한이 어떤 사회인데 이혼녀가 최고 권력자의 ‘안방’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한국인들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대학을 다닐 때는 성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지만 직업 공작원으로 초대소에서 밀봉 교육을 받을 때는 미묘한 여성 심리를 이용해 여성을 낚는 법을 배운다. 필요한 경우에는 ‘비아그라급’ 정력을 갖는 방중술도 배운다고 한다. 이러한 비법은 남한에 침투한 후 무역가로 위장해 한국 여성을 유혹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한국 여성과 정식으로 결혼해 가정을 꾸미는 것이 주위의 눈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북한 공작원들이 조선로동당으로부터 “누구 누구를 만나 어떠한 지하당을 세우라”라는 지령을 받고 내려온다고 믿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나야 할 사람까지 할당받아 내려오는 사람은 공작원이 아니다. 진짜 공작원은 ‘죽은 나무에서 새싹을 틔우듯’ 지하당이 없는 곳에 내려와 지하당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

    초대소에서 교육을 반복하는 사이,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가 이렇게 공작하겠다’는 공작안(案)을 만들어 제출한다. 자의적으로 남조선 혁명안을 만들기 때문에 한국의 물질적 풍요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60, 7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은 대개 남한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개 가족들과 접선을 시작으로 지하당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공작원들이 죽거나 은퇴하면서, 이러한 공작 방법은 사라졌다. 80년대 들어 새로 채용된 북한의 젊은 공작원들은 남한의 ‘자콤’(자생적 코뮤니스트=자생적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해 지하당을 구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마침 80년대에는 주사파까지 생겨날 정도로 공산사상에 경도된 젊은이가 많았으므로, 이 전략은 주효했다.

    할머니 공작원 정경희 미스터리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이 ‘정경희(鄭慶姬·사망)’다. 73년 정경희는 한국에서의 장기 공작을 마치고 북한에 돌아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연락부(사회문화부의 전신) 부장이 되었다. 정경희는 지하당 구축과 관련해 대단한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부장이 된 것인데, 아직도 한국의 대공수사기관들은 정경희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도 우리만큼 콩가루 집안이다. 6·25전쟁 전에 박헌영이 남로당의 위세를 과장했듯, 연락부에서도 과장 보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70년대 초반 대남사업총국(지금의 3호 청사)을 폐지하는 등 대규모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 와중에 정경희가 연락부장이 됐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기 때문에 과장 보고를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선실이나 정경희처럼 오랫동안 공작을 한 사람들은 꾀가 나서 제출한 안대로 공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당히 잘 되고 있다는 보고나 올리고 공작금을 유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공작원이야말로 조선로동당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정부 부처에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조사하는 감사원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한 공작원 세계에서도 남파 공작원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검열하는 ‘검열간첩’이 있다. 부여간첩 김동식이 바로 ‘검열간첩’이었다. 당성이 강한 혁명가도 검열관이 내려와야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조선로동당은 잘 알고 있었다.

    공작 계획서가 채택된 공작원은 서해의 남포와 해주 연락소, 동해의 청진과 원산 연락소로 옮겨와, 작전부 요원들과 침투 연습에 들어간다. 작전부는 그 동안 남한 정찰을 통해 수백 군데의 침투점을 확보해 놓는다. 특정 침투 지점은 국정원과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한번 침투한 후 10여 년간 내버려 두기도 하고, 어떤 곳은 수시로 이용하기도 한다. 침투지점이 선정되면 이들은 그곳과 지형이 유사한 곳을 택해 2∼3개월 집중적으로 침투 연습을 한다.

    각 연락소에는 대개 5개의 ‘방향’이 있는데, 방향별로 1년 2∼3번 공작모선을 출항시킨다. 5개 방향이 있는 연락소라면 매년 10∼15번 침투를 시도하는 셈이다. 그러나 해주와 남포 연락소는 매우 커서 방향이 1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원산연락소의 1개 방향은 일본 침투를 담당한다.

    일본으로 침투한 공작원은 일본인으로 위장해 한국으로 침투한다. 이러한 인물의 대표자는 지난해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에 돌아간 신광수(辛光洙)다. 일본으로 침투했던 신광수는 일본인 신분증을 획득해 이 일본인 명의로 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온 후 검거되었다. 일본 방향은 조총련과 연계해 대남공작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도 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조선로동당은 1년에 연 60회에서 90회 정도 공작원을 남파하는 셈이 된다. 공작조는 대개 2명으로 구성되므로 120명에서 180여 명의 공작원이 한국 침투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투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반잠수정에 탄 안내조는 대개 음력 그믐을 전후한 3일 사이에 공작원을 상륙시킨다. 그런데 공작모선이 항해하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나쁘거나, 침투 지점으로 선정한 곳에서 한국군이 훈련을 벌이고 있으면 침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76년 남해안으로 침투를 시도했던 한 공작원 출신 귀순자는 “서해를 빙 돌아 일본 규슈 앞바다까지 왔는데, 마침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항공모함이 제주도 앞바다에 와 있어 침투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을 출항한 공작모선은 한국 영해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를 빙 돌아 한국 영해로 접근했다 빠져나간다. 이렇게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공작모선은 운항 중 한번은 연료와 식수·식품을 보급받아야 한다. 서해로 출항하는 공작모선은 중국 상해에 있는 북한 기지에서 보급받는다. 동해에서 출항한 공작모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있는 명태 어장 대화태에 큰 어선을 가장해 떠 있는 배에서 보급받는다.

    정확치는 않지만(정확한 것은 작전부만 알 것이다), 조선로동당이 시도한 침투 중에서 약 절반은 기상악화나 한미연합군의 훈련, 기타 기밀 누설 등으로 중지된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의 침투를 막는 최대 세력은 해안 경비를 서는 육군 향토사단이 아니라 일기 불순을 일으키는 조물주의 조화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정도는 침투에 성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침투 중에서 한국 대공수사기관에 걸려드는 것은 1년에 채 1건도 안 되니, 연간 50~100명의 사회문화부 소속 북한 공작원이 한국을 드나드는 셈이 된다.

    사회문화부 소속의 공작조를 한국으로 침투시키기 위해서 작전부에서 항해조·기관조·통신조·안내조를 동원한다. 작전부에서는 사회문화부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 최소한 1000명이상을 매년 동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작전부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자 160명을 매년 선발해도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해군대학(우리의 해사와 유사)이나 해군전문대학을 나온 사람을 특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에 지상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지상요원과 이러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훈련 요원, 그리고 이들의 지휘관 등을 합치면, 작전부의 인력은 대략 1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작전부보다는 적지만 사회문화부와 통전부, 대외정보조사부에도 상당한 인력이 근무할 것이다. 한 소식통은 “조선로동당의 4개 대남부서에는 최소한 2만여 명이 근무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인력도 인력이지만 4개 부서가 쓰는 예산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말이다.

    “북한 뉴스를 유심히 보면, 풀리지 않던 일들이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가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수십 년 동안 빌빌 거리던 숙원사업을, 김정일이 단번에 해결해 주는 비결이 무엇일까. 정답은 김정일이 통치자금을 풀었기 때문이다.

    조선로동당의 1년 예산이 얼마인지는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아마도 김정일 통치자금으로 가장 많은 비율이 할당되고 두번째로 대남공작 사업에 많은 금액이 할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예상이 할당되기 때문에 공작원은 초대소에서 생활하고 전 작전부 요원은 위수구역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일 통치자금 중 상당수는 대남공작부서의 숙원 사업을 해결하는 데 할당되므로 북한 공작원들은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다.”

    북한 財政을 말리는 대남공작

    한국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북한 공작원이 대공수사요원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우리의 역공작이 성공했을 때다. 역공작은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한국인을 붙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공수사기관은 이 한국인으로부터 언제 북한 공작원이 오는지를 알아내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자는 전문을 치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접선이 이뤄지는데 접선으로 북한 공작원 잡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접선은 “동지 그 동안 수고 많았소” 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접선은 ‘언제 어디서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꽁초를 주워서 갖고 가라’는 식이기 때문에, 접선하러 온 사람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접선할 때는 북한 공작원도 접선 정보가 누설되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수류탄과 권총 등 온갖 무기를 휴대하고 나오므로 매우 주의해야 한다.

    고첩으로 활동하는 한국인을 붙잡아 역공작을 펴 북한 공작원을 검거한 대표적인 사례가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이다. 접선이 약속된 날 경찰 보안국 요원들은 등산객과 신도로 가장해 부여 정각사로 나갔다. 이런 가운데 두 남자가 올라오자 이들은 시험삼아 권총을 빼들고 “꼼짝 마”를 외쳤다. 일반인이라면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것이므로 그냥 ‘미안합니다’ 하고 물러나면 된다. 그러나 간첩이라면 이상한 행동을 보일터니 그때 붙잡자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너무 빨랐다. 이들은 순식간에 옆산으로 뛰어올라가 권총을 쏘며 대항했다. 상대의 저항이 너무 빠르면 권총을 겨눈 쪽에서 오히려 당황한다. 두 사람을 놓친 경찰 보안국 요원들은 군과 전경대까지 출동시켜 산을 에워싼 후 한 명은 사살하고 총상을 입은 한 명(김동식)은 붙잡았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은 ‘그렇다면 북한에는 우리 쪽에 협조하는 고첩이 있을까’란 의문이다. 북한에도 내심 한국 쪽으로 마음이 기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7·4공동성명 이후 대북 공작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북한을 드나드는 중국 동포를 통해 북한 정보는 구해도, 북한에 고첩을 심어 놓는 공작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러 계층의 북한인이 북한을 탈출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북한 정보는 그리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은 남조선 고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형사고가 일어나면 북한은 항상 “남조선 고첩이 일으켰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그러한 발표가 있지만 남조선 고첩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북한은 대남공작에 많은 예산은 소모할 뿐 아니라 대남공작을 하다 죽거나 붙잡힌 공작원의 가족을 끝까지 보살핀다. 북한의 각 행정기관에는 혁명 유가족을 돌보기 위해 ‘11과’라는 기구를 별도로 설치해 놓았다. 한 대공 수사관은 “비전향 장기수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남한에서 소외된 채로 사느니 평양에 가서 대우받고 살겠다며 그들은 출옥 후에도 전향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너지는 대공수사국

    조선로동당의 대남부서와 대남공작 분석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군축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앞서 지적했듯 북한은 군축 회담에 적극 임하면서 동시에 막강한 대남 공작조직을 동원해 남한 흔들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군을 상징적으로만 감축시키되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감군하자고 주장해 대외적으로는 명분을 쌓은 후, 테이블 밑으로는 남한 내의 지하당을 움직여 ‘혁명 만조기’를 만들려 할 것이다.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는 여러 지하당을 거쳐 한민전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지금도 한민전이 평양에 파견했다는 박광기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혁명 만조기에 대응할 한국의 대공수사관들은 무력하기만 하다. 첫째 이유는 그들에게 있다. 86년 경찰청 대공(보안국의 전신)은 박종철군을 고문치사했다. 그로 인해 사회적 비난이 높아지고, 그들의 근거법인 국가보안법 개정이 거론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조차 보안법 개정을 지지할 정도가 되었다.

    한 대공 수사관의 지적이다. “80년대의 운동권 학생과 북한 공작원은 엘리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공수사관들은 이들의 지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논리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니까 먼저 두들겨 패서 기를 꺾은 후 조사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 참담한 결과가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다. 이제 대공수사관은 ‘네 죄를 네가 알렷다’며 고문하는 식의 수사를 탈피해야 한다.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그저 총이나 잘 쏘는 수사관은 더 이상 필요없다. 대공 수사관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

    둘째 이유로는 대공수사를 대표하는 국정원이 정치 싸움의 소재로 전락한 데 있다. 구여권이 96년 총선과 97년 대선에서 안기부 자금을 썼다는 검찰 조사는, 국정원을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북한 공작원을 잡기 위한 역공작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사관이 나올 수 없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국정원의 국내 파트가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 한, 국정원은 정치 싸움의 소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대공수사력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국정원의 북한 및 해외 파트를 국정원에서 떼어내 별도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공수사기관의 월권만 비난하기에는 남북간의 역학관계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북한과의 교류를 늘리는 유화정책과 함께 남조선혁명을 모의하는 자들을 차단하는 정책을 병진해야 한다. 이것이 군축회단에서 북한의 공세를 막고 우리 주도의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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