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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엄정식 교수의 ‘전원일기’

자아와 자연, 그리고 자유

  • 엄정식 교수

자아와 자연, 그리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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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장작의 크기에 따라 다른 장작과의 거리가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잔 가지를 가까이 모아두지 않으면 불꽃이 작아서 혼자 타다가 꺼지고 만다.

한편 굵은 장작들을 너무 가까이 배치하면 마찬가지로 좀처럼 불길이 일지 않는다. 결국 잔 가지일수록 가깝게 하고 굵은 장작일수록 멀리 배치하여 각기 그 개성을 유지하도록 배려해야 자기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게 돼 텅 빈 아궁이에 한줌의 재만 남기고 전소하는 것이다.

나는 군불을 때면서 가끔씩 “하나의 장작개비가 영생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일까?” 하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곤 한다. 그것은 한줌의 재가 될 때까지 전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로서는 하나의 마른 장작개비에 영혼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타버린 다음에도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하는지, 그리하여 내세에 윤회를 거치거나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어떠한 존재이든지 그것이 스스로 지닌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그러한 뜻으로 그것은 자신을 초극한다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영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영생은 자기 초월의 한 형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미의 영생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적 자아의 인식이 전제돼야 그리스도적 영생이나 석가모니적 해탈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거나 기능할 수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자기를 초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의 욕구와 능력과 당위를 제대로 가늠하고 그 한계 내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 실천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하나의 장작개비가 다른 장작개비와 어우러지듯이 좋은 이웃을 만나고 원만한 인간관계 속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영생할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한다든지 자비를 베푼다든지, 혹은 어진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장작개비가 시커먼 아궁이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면서 나에게 가르쳐준 상징적 의미다.

한 달에 두세 번, 혹은 일에 쫓겨서 그보다 더 뜸하게 이곳 산촌을 찾아오면 군불 때는 일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우선 뒤뜰에 있는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하고 집안을 치워야 하며 찢어진 창호지를 바르는 등 여기저기 부서진 곳을 수리해야 한다.

자연과 자아의 개발

그 중에서도 한 여름에는 거의 허리까지 올라오도록 자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고달픈 일이다. 낫질이 아직 서투른 나로서는 앞마당이며 집 주위에 가득 적군처럼 진주해있는 잡초를 대할 때마다 일종의 ‘전쟁’을 연상하게 된다. 비지땀을 흘리며 온몸이 뻐근해질 때까지 풀을 베어 나가다가 나는 문득 ‘잡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잡초가 어떤 과에 속하는 식물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특정한 종류의 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문제는 왜 그 일군의 식물들을 우리는 ‘잡초‘라고 부르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잡초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거나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잡’자가 붙는 어휘, 가령 ‘잡상인’ ‘잡배’ ‘잡동사니’ ‘잡것’ 등이 그렇듯이 잡초도 쓸모 없고 때로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러한 통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혹시 우리가 너무 편협하게 유용한 것만을 협소한 관점에서 추구하기 때문 아닌가.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서 바라보지 않고 그 기능과 역할에만 집착해서 조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웃에 사는 박씨나 최씨는 ‘잡초와의 전쟁’이라는 나의 표현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잡초에 대해 늘 부정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잡초라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없어져야만 할 대상도 아니다. 그들은 잡초를 모아서 소죽을 쑤기도 하고 썩혀서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며 말려서 군불을 때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용도가 있을 것이다. 가령 농지 근처에 잡초가 없다면 폭우가 있을 때 어떻게 홍수와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식으로 바라보면 결국 잡초는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폭을 넓혀준다. 그렇게 관점을 넓히면 어떤 사물에서 많은 측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이 풍요로워지고 삶이 ‘살아낼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곳 산촌에서 생활하노라면 잡초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뱀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뱀은 일반적으로 기분 좋은 존재가 아니다. 각종 전설이나 신화에도 뱀은 사람을 해치며 죄악의 구렁으로 유혹하는 사악한 동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뱀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이곳에서 자주 강박관념에 빠진다.

어느 해 초봄에는 꽃뱀 한 마리가 앞마당에까지 기어들어 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나는 최씨를 찾아가 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는 나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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