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전 기자가 보내준 인터뷰 녹취록을 읽어본 이문열(53)씨는 이메일 답변을 통해 “지금은 내가 왜 이 곤혹스런 인터뷰에 응했던가 후회가 됩니다”라며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무엇이 이 노련한 작가를 난처하게 만들었을까.
이른바 ‘이문열 파동’의 전말은 이렇다. 6월29일 국세청이 언론사 세무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분개한’ 이씨가 7월2일자 조선일보 시론을 통해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판했다. 다음날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당4역회의에서 “일부 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장한 지식인이 곡학아세를 하고 있다”고 이씨를 공격했다.
이때부터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네티즌들의 공방으로 난장판이 됐다. 7월5일 추미애 의원의 취중욕설은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문열같이 가당치 않은 놈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조선·동아일보를 비난하던 추의원이 ‘덤으로’ 이씨에 대한 감정까지 드러냈던 것. 다음날 조선일보가 이를 보도하자 대부분의 언론이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이씨는 한차례 더 신문에 글을 써 논란을 부채질했다. 7월9일자 동아일보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론을 올린 것이다. 이후 각 신문과 방송은 이씨 글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을 앞다퉈 다뤘다.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문화권력’으로 불리는지를 새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인터뷰는 7월9일 오후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진행됐다. 서가용 사다리까지 있을 정도로 책숲을 이루고 있는 집필실의 서재는 바깥의 더위를 한순간에 잊게 해줄 만큼 서늘했다. 며칠 전 앓던 이 2개를 뺐다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난 20여 년간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쓰면서도 가욋일로 시론 독후감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언론매체에 발표하고 각종 문학상심사위원으로 활약해온 이 왕성한 정력의 작가는 여간해선 남들의 비판에 개의치 않는 대단한 뚝심을 갖고 있다. 타고난 낙천주의자는 아닌 듯싶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참 나쁜 놈들이네” 하고 껄껄 웃고 넘어간다.
이씨의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요 몇 년 동안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가 좋다.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고 예전에 쓴 작품들은 부동의 스테디셀러다.
지난해 10월 동아일보와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한국 작가로는 이씨가, 외국 작가로는 시드니 셸던이 꼽혔다. 그 이유를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글쎄요, 다른 말로 하면 인기의 비결이 뭐냐는 것이겠지요? 일종의 자기 분석인데,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글을 쓰되 시류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시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거지요. 그 다음, 나 자신이 독자라는 사실, 혹은 내가 독자였던 때를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독자였을 때 작가한테 원했던 것을 쓰는 것입니다.”
―예전에 마광수 교수가 이선생의 인기비결이 교양주의라고 분석한 바 있지요.
“그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지요. 나 스스로도 어떤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을 통한 교양의 확충을 기대하니까요. 재미라든가 쾌락적 측면이 아닌 지적 기대지요. 마교수 말고도 몇 사람이 그렇게 얘기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선생께서는 작품에서는 사회참여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사회적인 이슈가 생길 때마다 언론매체에 등장함으로써 여론형성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가요?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없지는 않지만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어떤 시비거리가 생기면 꼭 나한테 물으러 와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터인가 중대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내가 곧 끌려 들어가겠다 싶은 예감이 들곤 합니다. 내 지지를 바라는 사람들이 나한테 각자에 유리한 정보를 전해주며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한 10여 년 된 현상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지지하는 쪽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이상하게 몰리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가게 된다”는 말에서 그의 타고난 ‘전투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정권 들어와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해 (중앙일보에) 홍위병 얘기를 한 번 썼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거론하며. 이 정권 들어 그때까지 신문에 쓴 칼럼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내 기억으로는 (정권 출범 후) 만 2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나는 그 만 2년을 이 정권에 대한 예우기간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정부가 성립하는 데 정말 도움이 안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수가 원해 이 정부를 만든 것이니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처음부터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조합에 지배되는 신문
―이선생께서는 작가 또는 지식인으로서 정국에 대해 일정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말하자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 뒤에 벌어질 사태가 추측되고 상상이 됩니다. 그 뒤에 전개될 상황이 끔찍하고 견디지 못할 측면이 있다고 추측되면 쓰지 않을 수 없죠. 이 정부가 들어선 후 (신문에) 시론을 세 개 썼는데 그중 두 개가 홍위병 얘기라. 지난번 조선일보에 나간 칼럼에 빠진 얘기가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걸(세무조사를) 하면 신문이 둘 중에 하나가 되리라는 추론, 하나는 정부에 코가 꿰인 신문이고 또 하나는 사주 없이 다중·우중이 주인인 신문, 말하자면 대자보 같은 신문이 되는 것인데, 둘 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신문의 경우 노동조합 내의 역학관계가 모든 걸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춘투(春鬪)인가 추투(秋鬪)인가, 뭐 그런 것의 결과에 따라 신문사의 ‘라인’이 다 바뀐다는 겁니다. 논조는 그 라인의 것이 되고.”
―그런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전에 소설심사를 할 때 결심(結審)에서 그걸 소재로 한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싸움에서 승리한 계열이 다 가져가는 걸로 돼 있더군요.”
―사주가 있어 단일한 라인을 가진 신문사와는 달리 다양한 계열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지금은 모 신문도 그런 식으로 바뀌는가봐요. 말을 잘못하면 시비 걸릴지도 모르지만, 노동조합의 패권이 그 신문을 좌지우지하는 거죠. 이념투쟁을 통해 패권을 잡는 쪽은 선명성이나 순정성을 중시하고, 선동성과 공격성을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다분히 중우적(衆愚的) 직접민주주의라고 할까, 대중선동에 목표를 둔 논조를 띠게 되죠.”
이씨는 노동조합의 패권에 의해 움직이는 신문으로 2개 신문을 꼽았으나 “(기사에서) 신문사 이름은 빼자”고 제의했다. 이어 “이거 굉장히 예민한 얘기인데,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하며 기자의 ‘협조’를 구했다.
―이선생을 싫어하는 쪽에선 반발하겠죠.
“그런 신문들에서는 전통적인 논조라는 게 없고 그때그때 구성원들의 세력 향배에 따라 논조가 결정되죠. 그래서 다분히 대자보 같은 신문이 되는 거죠.”
―그 얘기는 곧바로 반론에 부닥치지 않을까요. 뒤집어 말하면 사주가 있는 신문에서만 올바른 논조가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렇겠죠. 자칫 신문사에 꼭 사주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니고요.”
―논조의 방향이 옳다면, 또 보도의 객관성을 유지한다면 노동조합이 어떻게 하든 문제될 건 없잖아요? 너무 소유구조에 치우친 논의가 아닐까요?
“논의를 소유구조로 좁힌다면 답이 없어요. 미국 신문들도 그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요. 이상적인 것은 그야말로 경영과 편집이 완전히 분리돼 편집이 편집 내부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겠지요. 그렇지만 그 합의가 노동조합이 관련된 세력투쟁의 결과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면 다분히 걱정스럽죠. 미국식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제도는 우리나라 일부 언론에서 실현된 사원주주제와 다른 것 같던데요.”
―프랑스 르몽드지의 경우 사주가 없는 사원주주제 신문인데, 편집권이 독립돼 있고 세계적인 정론지로 정평이 나 있지 않습니까. 아주 잘된 경우죠. 반면 미국에는 사주가 있으면서도 편집권 독립이 잘 보장된 신문들이 있죠.
“80년대의 후유증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잘될 거라는 예측은 지금 아무런 위로가 안 되고 현재의 수준이 미덥지 않은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전개되는 양상에 비춰 말이죠?
“예. 그리고 지금 운동의 양상으로 추구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잘 돼가는 데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사주가 있냐 없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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