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IT업계 ‘막후 실력자’ 이건수의 야망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5-04-08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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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신 마피아’의 심장부… 영향력 막강
    • 중국 고위층과 ‘따거(형님)’로 통해
    • 억대 기부금·장학금 척척…불가사의한 친화력
    • ROTC중앙회 명예회장…명예박사학위 2개
    • CDMA 상용화로 진짜 돈 번 건 동아일렉콤
    7월13일 오후 11시 러시아 모스크바 세계무역센터 콩그레스홀. 2008년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한 제122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결과 발표를 위해 단상에 섰다. 팽팽한 침묵, 그리고 일성(一聲).

    “베이징, 차이나!”

    순간 붉은 재킷을 맞춰 입은 중국 대표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같은 시각 미국 뉴저지 루슨트 테크놀로지 본사. 한 한국인 신사가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슨트와 중국 현지 합작공장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방미(訪美)한 동아일렉콤(주) 이건수 회장(59)이었다. 중국의 올림픽 유치는 이회장의 삶에 또 한 번의 가슴 뛰는 도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CDMA 중국 진출의 막후



    이회장은 한국 통신산업 중국 진출의 주역이다. 정보통신부 노희도 국제협력관은 “한마디로 중국이 CDMA 방식을 채택하고 국내 업체 장비를 수입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회장과 가까운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이런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이회장은 재계에서 중국 공산당 및 군부 최고위층과 ‘따꺼(중국어로 형님)’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사실상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로비스트’인 셈이다.

    올림픽은 막 첫발을 내디딘 중국 통신 산업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이는 중국 진출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국내 통신업체들에도 가슴 뛰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전선에서 동분서주 해본 이회장이야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이회장은 독특한 인물이다. 매출액 812억6000만원(2000년)의 중소기업 회장에 불과한 그의 인맥, 활동범위, 영향력은 회사 규모를 훌쩍 넘어선다. 정보통신 업계는 물론 전·현 정권 실세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관계(官界), 언론계, 군부 인사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형님 아우’가 존재한다.

    이회장과의 인터뷰 중 언급된 인물만도 전두환 전대통령, 남궁석 전정통부장관,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 정장호 전 LG텔레콤 부회장, 허화평 민국당 최고위원, 허삼수 전의원, 최형우 전내무부장관, 엄삼탁 전병무청장,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 등 열 손가락에 다 꼽지 못할 정도였다. 모두 개인적 친분이나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최근에는 DJ 정권 ‘실세’ 박지원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 양승택 정통부 장관과의 ‘아주 오래된 인연’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회장은 또 내로라하는 그룹 총수들이 포진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비상근 상무이사이기도 하다. 회장단 회의에도 빠짐없이 초대된다. 15만명의 회원을 가진 ROTC중앙회 명예회장이며 한국통신학회 부회장이기도 하다. 스스로 “4대 대통령(전두환~김대중)이 주는 훈장을 다 받았다”고 할 만큼 상복도 많다. 1999년 경희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올해 5월엔 미국 페어레이 디킨슨대학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

    정보통신업계에서 이회장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전전자식교환기(TDX), CDMA 등 각종 통신장비의 중국·베트남·인도차이나 수출 막후에는 예외 없이 그가 있다. 정통부는 물론 한국통신, SK텔레콤, LG텔레콤, 삼성·LG·대우 전자 최상층부와도 빈번히 교류한다. 통신분야 연구의 심장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박한규 연세대 기계전자공학부 교수 등 통신학계 인사들과도 두루 친하다. 속칭 ‘통신 마피아’라 불리는 거대 산업계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회장은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에는 흑인폭동으로 고생하는 LA교민들을 위해 1억원을 내놓았다. 1995년 1월에는 간사이 대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재일동포를 위해 또 1억원을 기탁했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는 여러 해에 걸쳐 장학금 등으로 12억원을 기부했다. 정보통신대학원에도 운영비 10억원을 기탁했으며 ETRI엔 3억원을 들여 연구원 휴게실을 지어주었다. 1998년 수해 때에는 임직원과 함께 3260만원을, 다음해에는 1억원과 생수 14만병(2000만원어치)을 내놓았다. 올 가뭄 때에도 30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 밖에도 ROTC중앙회, 한국통신학회 등 관여하고 있는 단체에 재정 지원이 필요할 때마다 조건 없이 수천만원에서 1억원 이상의 돈을 기부하는 ‘큰 손’이다.

    이런 씀씀이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각국 정부와 업계 인사들의 폭넓은 신뢰와 호의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른바 ‘KS마크’도 아니고, 대그룹 총수도 아니며, 명문가 태생도 아닌 이회장이 어떻게 지금의 지위와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을까. 취재를 위해 접촉한 20여 명의 각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그 동인(動因)으로 ‘큰 씀씀이’ ‘불가사의한 친화력’ ‘고래 힘줄 같은 끈기’를 들었다. 한 통신업계 인사는 “누구든 한번 만나면 형님, 아우가 된다. 직위도, 위상도 문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확실하게 사람 마음을 살 줄 아는 이는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비서실을 통해 몇 번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변 취재부터 시작했다. 원고 마감일이 코앞에 닥쳐온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접촉을 시도했다. 이회장은 중국 출장중이라고 했다. 취재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자 반응이 달라졌다. 한 시간 후 이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베이징이라고 했다. 이후 몇 차례 더 통화를 한 뒤 인터뷰 시간이 정해졌다. 그 사이 이회장은 주변 여러 사람들로부터 ‘신동아가 취재를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치권과 근거 없는 연결을 지으려는 의도라면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와 관련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했다.

    약속한 날 아침 7시30분. 이회장과 함께 검은색 벤츠600을 타고 용인의 동아일렉콤 본사로 향했다. 이회장은 다변(多辯)에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흥분하면 거친 말을 섞거나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 변화를 읽는 능력이 비상해 ‘불의(不意)의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이회장은 “먼저 회사를 본 뒤 나란 사람을 평가해달라”고 했다.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먼저 도착한 장소는 전원연구소와 지원부서가 자리잡은 곳이었다. 제조업체답지 않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15년 전 이곳으로 회사를 옮기면서 당시 돈으로 1억5000만원을 들여 조성한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연구소 1층에 있는 직원식당으로 향했다. 이회장은 식당 중앙의 한 테이블로 안내하며 “거기가 김대중 대통령도 앉았고 베트남의 당 반 탄 전우정총국장관도 앉았던 자리”라고 설명했다.

    아침식사 전 이회장은 식당 벽 양편에 죽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첫 사진은 이회장이 동아일렉콤을 인수할 당시 공장 모습이었다. 물이 종아리까지 들어찬 공장에서 장화를 신은 더벅머리 공원이 기계를 조립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진 속 풍경들은 몰라보게 달라져 갔다. 늘 봐온 사진들이련만 이회장의 얼굴에는 자랑과 긍지가 어려 있었다.

    이회장은 1942년 중국 허베이성 스자장(石家莊)시에서 태어났다. 항일운동에 관여한 아버지는 도피중이었고 어머니마저 투옥되는 바람에,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아기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이웃에 갓난아기를 잃은 중국인 여인이 있어 그 집에 맡겨졌다. 이름모를 여인은 제 젖을 먹여가며 아기를 정성껏 길렀다. 3년 뒤 일제가 패망하고 부모가 돌아오자 여인은 기른 정이 흠뻑 든 아이를 눈물로 보내주었다.

    고향인 신의주로 돌아온 이회장 일가는 소련군이 진주하자 다시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동생은 한겨울에도 불을 땔 수 없었던 을지로 부근 단칸방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어렵게 성장한 이회장은 경희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재학중에는 16개 4년제 대학 ROTC 위원장을 맡았다. 전방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는 1년 반 만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실업자 신세가 된 그는 고심 끝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미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1967년, 단돈 100달러와 수제 가발 100개가 든 가방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애초 생각은 가져간 가발을 밑천 삼아 돈을 번 뒤 경희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학위를 딴 후 한국에 돌아와 정치인으로 대성하는 것이 당시 그의 꿈이었다.

    뉴욕에 도착해 보니 한국에서 개당 12달러 50센트에 사간 가발이 미용실에서 5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가발들을 밑천 삼아 사업에 뛰어들었다. 도미 6개월 만에 맨해튼 아메리카애버뉴에 작은 가게도 냈다. 자신은 물론 고국에 있는 노부모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했던 상황에서 학업의 기회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

    그러나 잘 되던 사업은 한국, 인도 등 이민 사업가들 간의 출혈경쟁으로 고비를 맞았다. 결국 다시 빈털터리가 된 이회장은 1973년,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와병도 한 이유였다. 친구가 운영하던 제빵회사 삼립식품의 영업부장으로 취직했다.

    “마침 유류파동이 한창이었어요. 성남단지에 있는 공장에서 전국으로 빵을 나르려면 기름값이 더 들 판이었죠. 그래서 없앤 영업부를 제가 나서서 다시 살리자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도 팔지 못하면 그만이니까요.”

    그곳에서 이회장은 ‘알빵케이크 부장’으로 통했다. 유류 파동의 여파로 빵 봉지 구하기가 무척 힘든 때였다. 값도 비싸 봉지 가격이 원가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 문제로 고심하던 이회장이 빵을 종이상자에 넣어 파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당시로선 고급 제품인 샤니케익을 10개들이 종이상자에 넣어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원가 절감뿐 아니라 회사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됐다.

    장사가 한참 잘될 즈음 보사부 식품위생과에서 “변질이 우려된다”며 종이상자를 문제 삼고 나섰다.

    “점심시간 직전인 오전 11시30분쯤, 케이크 열 상자를 들고 식품위생과로 갔어요. 쫘악 돌리니 모두 맛있게 먹더군요. 그래 큰소리쳤죠. 이렇게 맛있는 빵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냐고.”

    결국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게마다 유리진열장을 설치한다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이회장은 일단 진열대를 설치해 주되 보증금을 받고, 가게가 빵을 주문하지 않을 경우엔 진열장도 되돌려받는 방식을 취했다. 공격적 마케팅 덕분일까, 취직 당시 경상남북도 통틀어 두 곳에 불과하던 대리점은 이회장이 회사를 떠날 즈음엔 29개로 불어나 있었다.

    이회장은 거기서도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으로 부하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빵 세일즈맨이 운전도 겸했어요. 다들 참 가난했죠. 직원들이 배달을 끝내고 돌아올 즈음이면 회사 앞 정육점 근처에서 기다리다 돼지고기 한 근씩을 사 줬습니다. 즉석에서 소주에 돼지불고기 파티를 열기도 했죠.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서로 달려가 회사가 책임질 테니 구속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어요. 사장보다 제게 더 깊이 고개 숙여 절할 만큼 사원들과 사이가 좋아졌죠.”

    1975년 아버지가 운명했다. 다시 미국에 들어가 재도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LA를 거쳐 샌디에이고로 갔다. 한 전자회사 부품공장에서 1년간 공장장 생활을 했다. 이듬해, LA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33세의 정춘화 씨를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LA 변두리 부도난 슈퍼마켓을 인수했다. 이어 중동에 원자재를 파는 무역업을 시작하고, 다시 통신장비 유통에 손을 대 거액을 벌었다. 마흔 살 즈음에는 2000만달러의 재산을 가진 거부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부터 이회장은 남다른 친화력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텄다. 박지원 수석과도 이때 만났다. 이회장이 가발 무역을 하던 당시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이던 박수석도 회사를 그만두고 같은 업종에 뛰어들었다. 첫 사업이라 어려움을 겪는 박수석에게 이회장은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우정은 오늘날까지 25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이회장과 박수석의 관계가 새삼 도마에 오른 것은 지난해 9월, 문광부장관으로 재직중이던 박수석이 한빛은행 대출비리 사건과 관련해 사임한 후였다. 이회장이 서울 남대문로 대우재단빌딩에 있는 동아일렉콤 사무실 한켠을 박수석의 집무실로 내준 것. 용인 취재 후 둘러본 문제의 사무실은 회장실에 딸린 1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이회장에게 박수석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회장은 “한마디로 내가 존경하는 친구”라고 말했다.

    “한빛 사건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정권에 누가 될까 봐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은행으로 걸었다는 전화만 해도 그래요. 그중 두 번째 전화는 제 부탁으로, 바로 제가 보는 앞에서 건 겁니다. 은행 간부로 일하다 퇴직 후 2년 계약직으로 근무중인 동서가 ‘딸아이 결혼식까지는 다녀야 할 텐데, 상황이 안 좋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합디다. 얼마 후 박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그 말이 생각나 ‘모가지 잘리는지 아닌지 한 번 물어봐 달라’고 했지요. 물론 그런 부탁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박수석은 전화를 했고 제 동서에 대해 ‘일 잘 하는 사람,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게 다였어요. 실제로 제 동서는 임기를 잘 마치고 지금은 또 다른 직장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 친구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대학 동문인 한 야당 의원과 모 중앙일간지 전무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를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회장은 박수석에게 사무실을 내준 것에 대해 “친구로서 그 정도 도움도 못 주느냐”고 되물었다.

    1997년 4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동아일렉콤을 방문했다. 그 때 상황을 이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출장중이었는데 직원한테 전화가 왔어요. 김총재가 공장 방문을 원한다고요. 내용을 알고 보니 저랑 ‘형님 동생’ 하며 지내는 모 일간지 정치부 기자가 권한 일이라더군요. 벤처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렇게 해서 방문하게 된 겁니다.”

    김대통령은 임원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등 공장에서 3시간30분을 머물다 갔다.

    여당 얘기가 나온 김에 내처,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권노갑 전최고위원, 박수석, 이회장이 조찬을 함께하는 모습을 봤다는 한 취재원의 증언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회장의 태도는 분명했다.

    “나는 권노갑 전위원을 알지 못합니다. 저녁 술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모를까 뭐 하려고 아침 밥을 같이 먹겠어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근거 없는 소문 퍼뜨리고 다니지 말라고 엄중 경고해야 할 겁니다.”

    그는 또 “나는 현 정권뿐 아니라 4대 정권 인사들과 두루 친하다. 예를 들어 허화평, 허삼수, 최형우, 엄삼탁 같은 분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전두환 전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다. 그런 내게 특정 정치색을 씌우려는 건 거짓이고 모함”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용인에 있는 그의 사무실 장식장 위에는 은탑산업훈장, 조세의날 표창 등과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의 미국 방문을 따뜻이 환영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내용의 감사패가 놓여 있었다.

    양승택 정통부장관도 ETRI 소장 시절 몇몇 임원들 앞에서 “이건수 그 친구 머리가 아주 좋다. 총선이 있으면 선거 2~3일 전쯤 돈봉투를 싸들고 전국을 돈다. 기껏해야 일인당 100만원 정도지만 막바지 돈가뭄에 시달리는 후보들에게는 한 줄기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런 식으로 많은 정객의 안면을 익혀 두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그에 대해 “나도 정치자금을 준다. 그러나 후원회 등 철저히 합법화된 창구를 통해서다. 나는 기술 중심 기업의 오너다. 정계와 가까워질 필요도 없고 가까워서도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라고 거듭 밝혔다.

    이회장을 잘 아는 업계 한 인사도 “이회장 모르는 사람이 있나 할 정도로 정계에 발이 넓지만 컨트롤을 잘 하는 편이다.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잘 가린다는 뜻이다. 자제력 뛰어나고 무리수도 두지 않는 인물이라 특정 세력과 유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장이 미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귀국한 것은 1986년의 일이었다. 1985년 말 이회장은 한 친구로부터 “통신용 전원장치를 개발해 놓고도 자금이 모자라 부도 직전에 몰린 기업이 있다. 인수해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미국에서 통신장비 유통업을 하며 첨단 분야에 어느 정도 식견을 쌓은 이회장은 “기술만 확실하다면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변사람들은 “어렵게 번 돈 다 날린다”며 극구 말렸지만 이회장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수한 기업이 동아전기(현 동아일렉콤)다. 이회장은 구리시에 있던 공장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옮기고 1987년에는 30억원을 투자해 전원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ETRI는 삼성반도체통신·금성반도체·대우통신·동양전자통신 등과 손잡고 국산 TDX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아일렉콤은 TDX의 ‘심장’ 역할을 하는 전원장치 개발 업체로 선정된 상태였다. 연구진은 이회장의 독려에 힘입어 TDX용 전원장치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어 디지털 옥외용 정류기, CDMA용 전원시스템, 고주파 정류기, IS-95 PCS 옥외 전원시스템 등의 개발에 잇따라 성공해 관련 시장을 독점하는 선두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1996년부터는 세계 굴지의 통신장비 제조회사 루슨트 테크놀로지에 제품을 납품했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해 10~15%의 매출 신장세를 기록했으며, 매출액 대비 순익·세금납부 비율도 대단히 높아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동아일렉콤은 대기업 수준 이상의 연봉을 지급하는 것으로도 이름 높다. 보너스가 1300%, 부장 연봉이 7000만원을 넘는다. IMF 시기에도 800%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사내에는 노래방, 테니스장, 사우나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재능이 뛰어난 직원은 야간대학은 물론 외국 유학도 지원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유학 갔던 직원 한 명이 귀국한다며 자못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학까지의 자녀 학자금도 전액 지원한다. 그래서일까, 공장은 깔끔하고 직원들의 태도는 절도가 있었으며 표정도 밝은 편이었다. 직원 300여 명 중 100여 명이 연구 인력이라는 점도 이채로웠다.

    그러나 이러한 동아일렉콤의 발전상에 대한 동종 업계의 시선은 싸늘한 편이다. “특혜와 독점으로 다른 중소기업을 쓰러뜨리고 정상에 올라섰다”는 비난이다.

    “이회장은 권부와 선이 닿아 있는 사람이다. 통신업계 리더들과도 두루 통한다. 해외 시장 개척을 미끼로 대기업에 자사 제품을 시세보다 비싼 값으로 납품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동아일렉콤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한 기업 대표의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청와대, 감사원 등에 동아일렉콤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거나 독점 조장 업체라는 내용의 투서가 들어가 정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투서 내용이 사실로 밝혀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회장은 “그런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며 “기술력에 있어 우리 회사를 따라올 만한 국내 업체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라고 맞받아 쳤다.

    정장호 전 LG텔레콤 부회장도 “1993년 베트남에 TDX를 납품할 때, 동아 제품 보다 더 싼 규격품이 있다기에 그걸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비가 들이치고 벼락이 떨어지자 그만 다 고장 나 아주 애를 먹었다. 그래서 동아 제품을 갖다 썼더니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더라. 좀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쓰는 것이 맞는 일 아니냐”고 했다.

    ‘정통부 눈치 보지 않는 사람’

    사실 이회장은 정통부 고위 관리 앞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큰소리칠 수 있는 몇 안되는 재계 인물 중 하나다. 괄괄한 성격 탓도 있지만 그만큼 부처 수장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정통부 수장 중 이회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은 배순훈 전 장관이 유일하다고 한다. 남궁석 장관 때에는 아예 정통부 장관 상임고문으로 위촉받아 지금까지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회장은 “중국, 베트남 등 외국을 상대로 국가적 비즈니스를 진행하다 보면 그에 걸맞은 ‘타이틀’이 필요하다. 일개 기업체 대표로 움직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오피셜한 문제를 고려해 주어진 감투”라며 “상임고문이 된 다음이나 그 전이나 사실상 하는 일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역대 장관 중 이회장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역시 양승택 현 장관일 것이다. 양장관은 ETRI 근무 시절 TDX 개발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일했다. 그 때부터 친분을 맺어 왔으니 어언 15,6년의 세월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 개각 당시 양장관이 정통부 수장 자리에 오르자 업계에서는 “박수석을 통한 이회장의 천거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한달쯤 전,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야당 의원 한 명이 그와 관련해 양장관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대화 내용을 증언에 따라 재구성해 보았다.

    의원: CDMA 수출 건으로 중국에 다녀오셨다고요. 이건수 회장하고 같이 가셨지요?

    장관: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의원: 이회장하고 잘 아신다면서요.

    장관: 안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의원: 권노갑 전 위원, 박지원 수석 쪽에서 양장관님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장관: 전 원래 박수석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에 뉴저지에서 공부했지만 그 때도 몰랐어요. 이회장을 통해서 알게 됐지요.

    의원: 이회장이 양장관님을 추천했다는 말이 있던데요.

    장관: 이회장이 절 워낙 좋게 생각하니 박수석에게도 얘기를 잘 해 준 것 같아요.

    의원: 이회장이 통신업계 막후 실세로 통하더군요. 한빛은행 청문회 때도 그렇고, 재계에서도 다 아는 일이라면서요. 그 때문에 오해받으시는 일은 없습니까?

    장관: 이회장은 애국자입니다. 자기 돈 들여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이같은 내용을 전해들은 양장관 측은 “장관 자리가 일개 기업인이 추천한다고 해서 결정될 일이냐.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다. 그 같은 말은 정부의 기능과 역할, 시스템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다. 그리고 양장관이 장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냐. 경력, 실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며 강하게 맞받아쳤다. 또한 “모의원과는 아예 그런 대화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을 했다.

    사실 이회장이 업계에서 오늘과 같은 위치를 점하기까지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의 중국·베트남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 큰 힘이 됐다. 이회장은 1992년부터 TDX, 그리고 CDMA의 해외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다.

    “기업인이 새 시장을 뚫을 때는 철저히 자사 이익을 우선합니다. 물론 국산 장비가 외국 시장에 들어가게 되면 전원장치를 공급하는 동아일렉콤도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5년 후, 10년 후의 일입니다. 지금 당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이회장은 10여 년을 하루같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사명감이나 애국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통부 노희도 국제협력관의 말이다.

    “수출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정부 대 정부로 다가가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정통부로서는 아무래도 보수적 채널을 쓸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다고 그룹 소속 전문경영인이 나서자니 이 또한 제약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회장은 오너라 자유로운 점이 많지요. 접대도 편하게 할 수 있구요. 특히 중국에 뭔가를 팔려면 권력자와 주무부처 정책결정권자를 설득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연속성의 문제도 있는데, 예를 들어 중국 신식산업부(정통부) 우지촨 부장(장관)은 1993년부터 9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거든요. 우리 쪽에서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동일한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는 공직자, 기업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박한규 연세대 교수의 설명이다.

    이회장은 “난 영어도 잘 못하고 중국어는 더더욱 낯설다. 하지만 마음은 눈으로 주고받는 것. 상대방의 마음 가까이, 솔직하고 사심 없는 자세로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것이 접근 어렵기로 유명한 중국 고위층과 ‘말’을 트고 지낼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회장은 1992년부터 중국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중국을 방문해서는 출생지인 스자장시에 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중국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이회장은 스자장에 있는 중국 정부의 국장급 관료 재교육장인 우전학교에 10만달러를 쾌척했다. 단 세 대의 구형 컴퓨터 밖에 없던 곳에 최신형 PC 30대, 프린터, 의자는 물론 교실 3개를 지어주었다. 이후로 이회장은 그 학교에 매년 10만달러씩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 우전대학에도 장학금을 쾌척했다.

    이회장과 중국 고위층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199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우편박람회 참관 차 방한한 신식산업부 루첸지안 수석부부장 이하 40여 명의 관료들을 이회장이 도맡아 영접하면서 시작됐다. 이회장은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원까지 직접 데려가는 열성으로 이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류차관은 이회장의 집까지 찾아와 노모와 스자장시에 얽힌 추억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회장의 ‘중국인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중국 관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우지촨 신식산업부 부장이 방한했다. 이회장은 중국 측의 요청에 따라 우부장의 수행을 도맡았다. 경상현 당시 정통부장관, 박재윤 상공부장관, 김무성 내무부 차관 등을 동원해 김영삼 전대통령과 우부장의 만남을 주선했다. 중간에 ETRI를 방문해 우부장이 직접 CDMA를 시연하는 모습을 연출했고, 이를 주요 신문에 게재토록 해 비즈니스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이후로도 이회장은 중국 상층부와 친분을 계속 넓혀갔다. 우부장은 물론 중국의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쩡칭훙 공산당 조직부장, 조선족 출신의 조남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우방궈 부총리, 좡보린 공산당 조직부 부부장, 왕자루이 대외연락부 부부장 등이 이회장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중국 최고위층의 면면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주룽지 총리의 회담에서 CDMA 수출 관련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면에도 이회장이 있었다.

    2000년 3월에는 대통령 특사 고문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원래는 제가 특사로 갈 예정이었는데 정보기관 쪽에서 민간인이 특사가 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해 고문 자격으로 수행했습니다.”

    2000년 10월 ASEM회의 때는 주룽지 총리와 10분 남짓 독대를 했다. 당시 주룽지 총리는 인민해방군 중심으로 추진 중이던 CDMA사업에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며 사업권을 회수하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만찬 석상에서 중국 대사의 안내로 주룽지 총리 곁에 다가간 이회장은 대뜸 “지난번 특사 고문으로 중국에 갔을 때 뵙기를 청했지만 안 만나주셔서 할 수 없이 우방궈 부총리만 만나고 돌아왔다”며 ‘투정’을 늘어놓았다. 통역을 통해 이 말을 들은 주총리는 재미있다는 듯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분위기를 기회 삼아 이회장이 CDMA의 장점을 한껏 홍보했음은 물론이다.

    올 4월, 이회장은 다시 한번 대통령 특사 고문이 돼 중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양승택 장관, 우지촨 부장 등과 함께 주총리를 면담할 수 있었다.

    “몽골 방문 일정도 있었는데 그 쪽 정통부 장관과 약속이 잡히지 않아 고민이었습니다. 이회장이 쩡칭훙 부장에게 전화 한 통을 거니 문제가 해결되더군요. 그것도 비행기 안에서 말입니다. 몽골 장관과도 저녁 식사 한 번에 곧 형, 아우가 돼 버리는 걸 목격했지요.”

    특사 방문에 동행한 한 정통부 관료의 증언이다.

    “현금 400억~500억원 있다”

    재무 상태가 매우 건실함에도 동아일렉콤이 코스닥 진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를 두고 “회사 자금을 마음껏 사용하려면 주식 공개를 하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덧붙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회장의 설명은 조금 달랐다.

    “코스닥에 올린다는 건 주식 가치를 높여 이윤을 취하겠다는 건데, 저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회사는 지금도 현금이 넘쳐요. 어디 통장 한 번 보여드릴까요? 400억~500억원은 기본으로 들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기술 개발에 집중하기 위해선 선장이 여럿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신기술 개발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혹해 갈팡질팡하다간 이도저도 안되지요. 확신과 비전을 가진 ‘선장’ 한 명이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회장은 ‘무식해서 오직 기술개발, 기술수출밖에 모르는’ 자신을 자꾸 정치권과 연결시키려는 세상의 시선이 불편하고 곤혹스럽다고 했다.

    “저는 오픈된 사람입니다. 퍼블릭한 사람이예요. 식당 아줌마도 한 번만 보면 절 잊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친구처럼, 이웃처럼 다가가거든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은밀하고 소리 없이 움직여야 하는 정치판에 끼여들 수 있겠습니까. 여권 인사건 야권 인사건 다 친구일 뿐입니다. 정파나 이익을 따져가며 우정을 키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회장은 또 “자리잡고 살던 미국에서 그 재산 다 정리해 돌아올 땐 어떤 마음이었겠느냐”며 “뜬금없이 들릴 지 모르지만, 동아일렉콤을 포함해 수많은 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무기 삼아 세계로 뻗어나가고 그를 통해 후손들에게 더 좋은 나라를 물려주고픈 것이 나의 진정한 소망”이라고 말했다.

    단돈 1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 15년만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 부도 직전의 고국 중소기업을 인수해 세계적 첨단통신장비업체로 성장시킨 입지전적 인물. 아울러 타고난 친화력과 남다른 열정으로 대기업 총수도 흉내내지 못할 해외 시장 개척의 수훈을 세운 애국자.

    그러나 이회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렇듯 단순하지만은 않다.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는 만큼 정권 유착설이 끊이지 않고, 지나치게 큰 영향력은 동아일렉콤의 독주와 맞물려 불공정 경쟁의 수혜를 입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해외시장 개척 역시 정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자사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라고 폄하하는 시각이 있다.

    무엇이 그의 진짜 얼굴, 야망의 실체인가. 통신 시장 지각 변동과 대선을 앞둔 지금, 이회장의 행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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