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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계 ‘막후 실력자’ 이건수의 야망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IT업계 ‘막후 실력자’ 이건수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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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날 아침 7시30분. 이회장과 함께 검은색 벤츠600을 타고 용인의 동아일렉콤 본사로 향했다. 이회장은 다변(多辯)에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흥분하면 거친 말을 섞거나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 변화를 읽는 능력이 비상해 ‘불의(不意)의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이회장은 “먼저 회사를 본 뒤 나란 사람을 평가해달라”고 했다.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먼저 도착한 장소는 전원연구소와 지원부서가 자리잡은 곳이었다. 제조업체답지 않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15년 전 이곳으로 회사를 옮기면서 당시 돈으로 1억5000만원을 들여 조성한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연구소 1층에 있는 직원식당으로 향했다. 이회장은 식당 중앙의 한 테이블로 안내하며 “거기가 김대중 대통령도 앉았고 베트남의 당 반 탄 전우정총국장관도 앉았던 자리”라고 설명했다.

아침식사 전 이회장은 식당 벽 양편에 죽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첫 사진은 이회장이 동아일렉콤을 인수할 당시 공장 모습이었다. 물이 종아리까지 들어찬 공장에서 장화를 신은 더벅머리 공원이 기계를 조립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진 속 풍경들은 몰라보게 달라져 갔다. 늘 봐온 사진들이련만 이회장의 얼굴에는 자랑과 긍지가 어려 있었다.

이회장은 1942년 중국 허베이성 스자장(石家莊)시에서 태어났다. 항일운동에 관여한 아버지는 도피중이었고 어머니마저 투옥되는 바람에,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아기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이웃에 갓난아기를 잃은 중국인 여인이 있어 그 집에 맡겨졌다. 이름모를 여인은 제 젖을 먹여가며 아기를 정성껏 길렀다. 3년 뒤 일제가 패망하고 부모가 돌아오자 여인은 기른 정이 흠뻑 든 아이를 눈물로 보내주었다.

고향인 신의주로 돌아온 이회장 일가는 소련군이 진주하자 다시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동생은 한겨울에도 불을 땔 수 없었던 을지로 부근 단칸방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어렵게 성장한 이회장은 경희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재학중에는 16개 4년제 대학 ROTC 위원장을 맡았다. 전방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는 1년 반 만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실업자 신세가 된 그는 고심 끝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미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1967년, 단돈 100달러와 수제 가발 100개가 든 가방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애초 생각은 가져간 가발을 밑천 삼아 돈을 번 뒤 경희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학위를 딴 후 한국에 돌아와 정치인으로 대성하는 것이 당시 그의 꿈이었다.

뉴욕에 도착해 보니 한국에서 개당 12달러 50센트에 사간 가발이 미용실에서 5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가발들을 밑천 삼아 사업에 뛰어들었다. 도미 6개월 만에 맨해튼 아메리카애버뉴에 작은 가게도 냈다. 자신은 물론 고국에 있는 노부모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했던 상황에서 학업의 기회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

그러나 잘 되던 사업은 한국, 인도 등 이민 사업가들 간의 출혈경쟁으로 고비를 맞았다. 결국 다시 빈털터리가 된 이회장은 1973년,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와병도 한 이유였다. 친구가 운영하던 제빵회사 삼립식품의 영업부장으로 취직했다.

“마침 유류파동이 한창이었어요. 성남단지에 있는 공장에서 전국으로 빵을 나르려면 기름값이 더 들 판이었죠. 그래서 없앤 영업부를 제가 나서서 다시 살리자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도 팔지 못하면 그만이니까요.”

그곳에서 이회장은 ‘알빵케이크 부장’으로 통했다. 유류 파동의 여파로 빵 봉지 구하기가 무척 힘든 때였다. 값도 비싸 봉지 가격이 원가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 문제로 고심하던 이회장이 빵을 종이상자에 넣어 파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당시로선 고급 제품인 샤니케익을 10개들이 종이상자에 넣어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원가 절감뿐 아니라 회사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됐다.

장사가 한참 잘될 즈음 보사부 식품위생과에서 “변질이 우려된다”며 종이상자를 문제 삼고 나섰다.

“점심시간 직전인 오전 11시30분쯤, 케이크 열 상자를 들고 식품위생과로 갔어요. 쫘악 돌리니 모두 맛있게 먹더군요. 그래 큰소리쳤죠. 이렇게 맛있는 빵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냐고.”

결국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게마다 유리진열장을 설치한다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이회장은 일단 진열대를 설치해 주되 보증금을 받고, 가게가 빵을 주문하지 않을 경우엔 진열장도 되돌려받는 방식을 취했다. 공격적 마케팅 덕분일까, 취직 당시 경상남북도 통틀어 두 곳에 불과하던 대리점은 이회장이 회사를 떠날 즈음엔 29개로 불어나 있었다.

이회장은 거기서도 특유의 열정과 친화력으로 부하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빵 세일즈맨이 운전도 겸했어요. 다들 참 가난했죠. 직원들이 배달을 끝내고 돌아올 즈음이면 회사 앞 정육점 근처에서 기다리다 돼지고기 한 근씩을 사 줬습니다. 즉석에서 소주에 돼지불고기 파티를 열기도 했죠.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서로 달려가 회사가 책임질 테니 구속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어요. 사장보다 제게 더 깊이 고개 숙여 절할 만큼 사원들과 사이가 좋아졌죠.”

1975년 아버지가 운명했다. 다시 미국에 들어가 재도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LA를 거쳐 샌디에이고로 갔다. 한 전자회사 부품공장에서 1년간 공장장 생활을 했다. 이듬해, LA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33세의 정춘화 씨를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LA 변두리 부도난 슈퍼마켓을 인수했다. 이어 중동에 원자재를 파는 무역업을 시작하고, 다시 통신장비 유통에 손을 대 거액을 벌었다. 마흔 살 즈음에는 2000만달러의 재산을 가진 거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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