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DJ는 이제 노동자의 우군이 아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5-04-08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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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파업투쟁과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검거령, 7월 총파업과 정부의 강경대응, ‘파국’이 예상되는 하반기 구조조정…. 노정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명동성당에 ‘지휘본부’를 차린 민주노총은 장기투쟁에 돌입할 태세다. 이런 가운데 단병호 위원장은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한 사태 해결방안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허허실실’이라던가. 6월28일 단병호 민주노총위원장은 사복경찰 10명과 전·의경 2개 중대가 지키고 있는 서울 명동성당에 진입했다. 6월14일 체포영장이 떨어진 지 보름 만이었다. 서울시내 31개 경찰서에서 차출된 361명의 전담체포조와 ‘포상금 500만원과 특진’을 내건 경찰 수뇌부를 비웃듯이 단위원장은 “검문도 받지 않고 들어왔다. 서울 시내 모처에서 지도부와 수시로 투쟁 방향을 협의했다”고 말했다.

    노동계 인사들에 따르면 단위원장은 수배중에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활동하는 강심장이라고 한다. 그는 원천봉쇄된 대학도 정문으로 걸어서 들어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골목길을 걷다가 경찰에 붙잡힐 만큼 여유롭다는 것. 지난해 10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만난 단위원장은 기자에게 수배시절의 무용담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한번은 경기도 안양 어딘가에 숨어 있는데, 그 집 아래층에 경찰관이 살았어요. 집 앞에는 지서가 있었는데 거기에 내 사진도 붙어 있더라고. 그런데 그 경찰이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같이 인사하면서 지냈지 뭐.”

    노동운동에 뛰어든 지 15년. 그는 여섯 번이나 수배자가 됐다. 1989년 3월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을 찾아가 파업중인 노동자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처음 수배대상이 된 이래 한국노동운동이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그는 몸을 숨겨야 했다. 인터뷰는 7월5일 오전 9시에 시작됐다. 이날은 민주노총이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며 2차 총파업을 선언한 날이다. 명동성당엔 아침부터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투쟁본부로 명동성당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대표가 외곽에 머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떤 형태로든 공개된 장소에서 위원장 노릇을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던 거죠. 그래서 여건이 좋은 조계사와 명동성당을 놓고 고심하다가 이리로 온 겁니다.”

    ―막연한 질문 같은데, 언제까지 명동성당에 머무르실 예정입니까.

    “정부의 대응이 일시적인 것 같지 않아요. 저는 민주노총을 무력화하려는 전면적 탄압이라고 봅니다. 정부가 그런 의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장기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1차로 추석까지는 갈 것으로 생각해요. 잘 안되면 연말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고요. 명동성당측이 그 문제로 몹시 고심하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입니다.”

    DJ는 철저한 신자유주의자

    9시25분. 손수레 한 대가 농성중인 천막 앞으로 왔다. 아침식사였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식당에서도 준비가 늦은 모양이다. 메뉴는 동태찌개와 김치찌개. 공기밥을 깨끗이 비운 단위원장은 “TV뉴스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검문이 너무 심해서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고, 단위원장은 현장에서 단련된 노동자답게 TV를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과연 기발한 생각이었다.

    ―정부가 초강경 대응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하반기에 정부가 추진할 정책과 정권재창출 구도 때문으로 봐요.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정책을 지연시킨다는 판단을 내린 거죠.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인식도 작용한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 정책을 완성하고 정권재창출을 해야 하는데 노동운동이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까 강공책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은 1년 이내에 IMF를 극복하고 2년만 지나면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장담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2년 이내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완성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어요. 문제는 내년으로 넘어가면 선거 때문에 정책 추진이 더 어렵다는 데 있어요. 그러니까 올해 안에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발버둥치는 거죠. 자신들의 의도대로 구조조정을 끝내고 그것을 통해 기득권층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저는 현재의 노동운동 탄압에 정권재창출 프로그램이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단위원장이 신자유주의를 거론했다. 사실 요즘 각종 시위현장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신자유주의다. 국내외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민영화, 탈규제, 금융시장 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복지제도의 축소 등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반적 특성이다. 단위원장은 이 가운데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신자유주의가 반(反)노동자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한국경제의 특성상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구조조정의 경우 무작정 반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지금 대원군이 쇄국정책 하듯이 무조건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세계경제의 특성상 규정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얘기하고 싶은 건 신자유주의를 지상과제로 못박고 그것만 고집하는 자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확고한 원칙으로 삼고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얘기는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단위원장은 현재 벌어지는 노동운동 탄압의 이면에 정권재창출 음모가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통령이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노동자와 서민을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층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반대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 시점에서 김대중 정권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세력은 보수 기득권층이다. 결국 DJ정부는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보수세력이 김대중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도 있죠. DJ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 토대는 서민과 노동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도 서민층이 DJ를 지지할 것이냐? 저는 DJ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고 봐요. 그러니까 김대통령은 더 이상 서민층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나라당과 경쟁하면서 보수층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증거로 기득권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을 계속 양산하고 있잖아요.”

    ―김대중 정부가 보수층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보수층의 반응은 싸늘하지 않습니까.

    “정권재창출은 사실상 물 건너간 거 아닙니까?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집권 3년간 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를 솔직히 인정하고 새로운 정책을 선언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 서민층의 지지는 없을 겁니다.”

    7월4일 민주노총은 2차 총파업 돌입을 하루 앞두고 단위원장이 직접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에 대한 전면 탄압 중단,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 중단, 비정규직·주5일근무제 등 노동관련 법안의 국회통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민주노총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현실적으로 타협점이 나올 수 없는 선언을 한 셈이었다.

    ―민주노총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도 위원장과 사무총장을 한꺼번에 수배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민주노총은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고 있어요. 얼마나 많은 구속자가 나왔습니까? 김대중 정부 3년 6개월 동안의 구속자가 김영삼 정부 5년보다 많아요. 이런 식으로 가면 해답이 없는 거죠. 만일 정부가 민주노총을 계획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면 체포령과 검거령을 모두 철회하고 대표자의 대통령 면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민주노총은 현재 구조조정 중단, 비정규직 문제 해결, 주5일근무제 실시 등을 포함한 노동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볼 때 김대중 정권이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정부가 우리의 요구대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의 정부 정책이 계속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거든요. 우리는 이 투쟁을 단순히 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나라를 살리느냐, 나라가 망하느냐 하는 투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정부가 정책 노선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물론 DJ정부가 초지일관 추진해온 정책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겠죠. 그러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꾸지 않으면 김대중 정권은 역사적으로 나라의 재산을 가장 많이 팔아먹은 정권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정치성을 띠는 파업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가장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내건 이슈가 얼마만큼 국민들의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파업의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한 예로 1996년과 1997년에 걸쳐 진행된 총파업 투쟁의 경우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정리해고에 대한 경각심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당시엔 언론도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파업투쟁은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번 파업에 부정적 여론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언론이 합법적인 투쟁을 가뭄을 이용해 강도 높게 비판했잖아요.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고 왜곡 보도하고…. 저는 신문이 보도했던 것처럼 국민들이 느끼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만일 민주노총이 두 시간만 방송을 내보낼 수 있다면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있거든요. 국민들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르고 있어요.

    800만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의 40%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노동강도는 더 세고 고용안정성도 없어요. 지난 3년간 우리 국민 가운데 소득이 늘어난 사람이 얼마인지 아세요? 겨우 10%입니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가 철저히 기득권층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해왔음을 입증해주는 결과죠. 또 한국 경제의 50%는 이미 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어요. 알짜배기 민간기업을 다 팔아먹고 이젠 효율성이 떨어진다면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잖아요. 사정이 이런데도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민주노총을 이기주의적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가뭄과 파업사태를 연결해 보도할 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정말 참담했습니다. 도대체 가뭄과 파업이 무슨 상관입니까. 파업을 한다고 가뭄이 더 심각해지나요? 정말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언론은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은 사회적 약자인 소외계층의 절박한 삶을 간과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정부와 자본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편들면서 노동자의 인권을 매도했잖아요.”

    ―민주노총에 비판적인 의견 중에는 힘들더라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서 합리적인 대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그 동안 입이 아프게 말했습니다. 이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요.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무슨 위원회가 필요합니까? 합의하면 뭐 합니까? 정부가 필요한 건 일사천리로 진행시키고, 노동계에서 요구한 건 지연시키고…. 삼미문제, 실업자 조직화 문제 다 안 지켰어요.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노조와 합의해서 처리하겠다고 약속하고 이틀 뒤에 진념 장관이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지시했어요.”

    DJ정부는 反노동자 정권

    기자는 지난해 10월 단위원장과 우연히 동행해 청평 유원지를 다녀온 일이 있다. 그 무렵 단위원장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고심한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2001년 1월 초 건설연맹 산하 노동자들이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고 나서자 단위원장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토론을 거쳐 김대중 정부의 퇴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대중집회에서 단위원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난해와 가장 큰 차이가 정권퇴진 구호인 것 같습니다. 퇴진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해 롯데호텔 노조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것이 너무 빠르다고 보았어요. 하지만 올 들어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더욱 노골화하는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져볼 생각을 전혀 안 하잖아요. 대우자동차만 해도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해외매각’ 한마디 던져놓고 그냥 밀어붙이는 식이에요. 저는 이런 모습에서 김대중 정권의 독선을 읽었습니다. 대우자동차시위 폭력진압을 보면서 ‘이 정권이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구나. 이 정부에서 합리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반영하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심정이 굳어진 거죠.”

    ―김대중 정권을 역대 정권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상대적으로 ‘친노동자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잘못된 평가라고 봅니다. 무엇을 가지고 친노동자적이라고 하는 겁니까?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수구적인 정책이 신자유주의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자본에 의한 노동통제 정책입니다. 이것을 가장 신봉하는 사람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역대 정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반노동자적 정권이라는 겁니다.

    옛것을 바꾸면 다 개혁입니까? 그건 아니죠.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 시장의 논리를 강화할 뿐입니다. 사회의 공익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료보험만 해도 의사들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갔잖아요. 수요자 부담은 더욱 커졌고…. 이게 개혁입니까? 우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말은 개혁이지만 철저하게 시장논리에 종속된 개혁일 뿐입니다.”

    ―최근 잇따라 국회를 통과한 모성보호법, 인권위원회법, 부패방지법 등을 놓고, 상대적으로 김대중 정권이 개혁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인권법과 부패방지법은 제가 잘 모르고요. 모성보호법은 하나의 개혁일 수 있겠지만, 그 속에 감춰진 본질을 봐야 합니다. 모성보호만 떼놓고 보면 산전후 휴가를 90일로 늘린 것은 좋은 거죠. 하지만 모성보호법은 여성노동자의 휴일, 야간, 초과 근무를 금지한 기존 조항을 풀어버렸어요. 그래서 기만적이라는 겁니다. 이제 비정규직의 70%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 휴일 노동을 강요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게 어떻게 개혁입니까?”

    ―여권 사람들은 국민의 정부가 민주노총에 합법성을 부여한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통령도 그와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고의 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죠. 노동단체의 합법화는 외국에서 보편적인 시민권리에 속합니다. 당연한 것을 해놓고 뭔가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건 곤란하죠. 생각해보세요. 김대통령도 당선되기 전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무수히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역대 정권이 묶어놓았던 것을 풀어주었다는 측면에서 억지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요즘 노동계 사람들을 만나면 김대중 정부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느낄 수 있다. 대우자동차 폭력사태를 기점으로 격한 감정을 터뜨리는 사람이 한층 많아졌다. 현실 정치로 돌아와보면 이러한 흐름은 분명 야당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번 기회에 노동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총의 일부 관계자들은 10월에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 김대중 정부와 맞서고 있는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당에 대해서는 특별히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은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혹자들은 민주노총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니까 한나라당에 반사이익이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나라당에 무슨 기대를 걸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원칙에 따라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정치조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서울 동대문을 등의 지역구에 후보를 내서 민주당에게 쓴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돕는 효과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없죠. 우리 때문에 한나라당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아주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설사 한나라당이 나중에 집권하더라도 우리는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 겁니다. 야당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점이 묵인되거나 은폐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총의 목적이 현 정권과 대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결코 아닙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싸울 뿐이죠. 정부가 정말로 민주노총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 주장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지지를 하든 힘을 보태든 결정할 게 아닙니까? 아무 얘기도 듣지 않는데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단위원장은 간절하게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현재의 난국을 획기적으로 풀 수 있는 책임자들의 담판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파업사태와 정부의 강경대응을 둘러싼 노정간의 극한 대치국면을 풀기 위해 단병호 위원장의 대통령 면담을 공식 요청한 일도 있었다. 비록 단위원장이 수배된 몸이지만, 노동계가 먼저 정부를 향해 대화를 제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민주노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26일 대통령 면담을 공식 요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정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해결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봅니다. 정부는 그 동안 실질적인 노정간의 대화에 한번도 응한 적이 없어요. 이것이 오늘의 사태를 부른 요인으로 작용한 거죠. 정부가 이 문제를 풀려는 의지가 있다면, 민주노총과 큰 틀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대화를 해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대통령에게 물어보고 싶은 얘기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 탄압이 민주노총을 무력화하려는 음모에서 출발했다고 보는데 정말 그런지 대통령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단위원장의 대통령 면담신청에 대해 정부는 ‘수배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만나겠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문제를 풀려면 책임질 수 있는 대표가 만나야지, 다른 사람이 만나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체포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 그렇게 따지면 대우자동차 파업 때는 노동부장관이 왜 찾아왔습니까. 우리는 대통령이 직접 이곳으로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내가 대통령을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달라는 겁니다.”

    ―반드시 대통령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문제는 노동부 장관이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장관을 만나보았지만 한번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했어요. 아예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대표자를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DJ의 개혁의지 확인하고 싶다

    ―만일 대통령 면담이 성사된다면, 무엇을 얘기할 생각이십니까.

    “우리는 현재의 구조조정 국면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행중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즉각 중단하고, 공기업은 해외매각 방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살려낼 길을 찾아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도 지적할 생각입니다. 비정규직이 800만에 달하는데 이건 위험수위라고 봐요. 이젠 정부가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800만을 하루아침에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는 없겠지만, 비정규직을 양산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노동시간도 본래 목적에 맞게 줄여나가야죠.

    김대통령이 과연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반드시 확인하고 싶어요. 사립학교법만 해도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자민련 핑계를 대고 있는데, 과연 처리할 생각이 있느냐? 우리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의료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재정대책을 서둘러 발표했지만 수요자 부담만 더욱 커졌잖아요. 이런 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결국 또다시 원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김대통령과 단위원장이 만나서 의견의 일치를 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대표자의 담판이 성과를 거두려면 어느 정도 의견이 조율된 상태라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김대통령과 단위원장의 시각 차이는 너무도 뚜렷했다. 결론적으로 김대통령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동의 유연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고, 단위원장은 그것이 잘못됐으니 전면 포기하라는 주장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양측이 대충돌을 각오하고 마주 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 파업에는 노동계를 재편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개입돼 있다고요. 다시 말해서 민주노총 내의 강경파를 밀어내고 정부와 대화가 가능한 세력의 입지를 세워주기 위해 강공 드라이브를 주도하고 있다는 거죠.

    “저도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정부가 정말 그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면 참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정부가 민주노총을 무력화해 ‘협력적 노사관계’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재 지도부를 어떻게 해서 ‘친정부적 지도부’를 세우고자 한다는 건 치졸할 뿐만 아니라 가당치도 않은 얘기죠.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지만 정부의 의도를 수용할 만큼 허약하지는 않아요. 정부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다면 아마도 더욱 대립적인 국면을 초래할 겁니다.”

    ―일부에서는 ‘민주노총이 어차피 내년 선거에서 도움이 안 되니까 이번 기회에 아예 선을 긋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던데.

    “정부로서는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민주노총은 현재 스스로 정치세력화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세워놓았으니까요. 정부가 지난 3년간 추진해온 정책으로 볼 때 더 이상 노동자의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노동자의 지지와는 무관한 방향이고…. 그렇게 볼 때 내년 지자체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총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죠. 김대통령이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건 정말 불행한 일인데….”

    ―지난번 개각에서 이태복씨가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갔을 때, 노동계와 물밑대화가 재개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습니다. 이태복 수석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보다 먼저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을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그분이 청와대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권력이거든요. 개인이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결국 우리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잖아요. 이런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 이수석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를 수석 한 사람이 어떻게 풉니까?”

    6월부터 시작된 파업사태와 관련, 정부와 노동계 인사들의 얘기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부와 노동계가 한 목소리로 “진짜 싸움은 하반기에 펼쳐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볼 때 현재의 대치국면은 본게임을 앞둔 양측의 힘겨루기라는 분석이 가능할 듯하다. 단위원장이 인터뷰 초반부에 “연말까지 명동성당에 머물 수도 있다”고 말한 것도 하반기 투쟁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아니었을까.

    ―정부나 노동계나 다같이 이번 싸움은 오픈게임이고, 하반기에 본게임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십니까.

    “정부는 하반기에 구조조정을 완결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았어요. 노동법도 더욱 개악할 태세고요. 그렇다면 노동대치 국면은 지금보다 훨씬 치열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현재 국면은 노동자들의 하반기 투쟁을 견제하기 위한 사전탄압이기도 해요.”

    ―하반기 투쟁의 핵심은 철도, 한국통신, 전력, 협동조합 등의 구조조정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극한 대결말고는 다른 해법이 없겠습니까.

    “공은 이미 정부에 넘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물러설 길이 없어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문제해결의 관건입니다. 지금과 똑같은 국면으로 간다면 우리로서는 피할 길이 없는 거죠.”

    대정부 연대투쟁에 나설 것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의에 비해 단위 사업장에서는 과연 하반기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단위원장은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크게 두 가지 투쟁의 축을 형성해야 할 겁니다. 하나는 민주노총 자체의 투쟁중심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세력을 광범위하게 묶어서 대정부 투쟁전선을 만드는 겁니다. 정부가 지금처럼 반개혁적 정책을 펴나간다면 이념과 노선을 떠나 김대중 정권에 저항하는 연대의 축이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인터뷰는 여러 차례 끊겼다. 농성장으로 여러 부류의 손님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일본인 변호사 10여 명이 방문해 한국의 구조조정 문제에 대해 묻는가 하면, 한국노총 집행부가 찾아와 짧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노총 조천복 사무총장이 “부당노동행위가 심각하다. 정부가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자, 민주노총 이홍우 사무총장은 “부당노동행위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반기 투쟁에서 ‘한 배’에 오를 수밖에 없는 양대 노총 사이에도 이처럼 엄청난 시각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4시간에 걸친 인터뷰. 단위원장은 시종 상기된 표정으로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딱 한 번 단위원장이 평범한 50대 가장의 모습으로 돌아간 장면이 있었다. 올해 외국어대 법학과에 입학한 딸 정려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버지와 딸은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빠가 보고 싶다고? 아빠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네가 찾아오면 되잖아. 시간 나는 대로 오너라. 아빠 옷도 챙겨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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