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대령은 약간 기가 죽은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령관님께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앞장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분명히 이한림 장군은 아침에 자기 관사에서 우리를 만나기로 약속한 바 있는데 대령이 안내하는 곳은 비행장 옆에 위치한 KMAG(미국 ‘고문단’ 막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1군사령부의 불안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김비서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좀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한림 장군은 큰방에서 혼자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친서를 전달하기에 앞서 1군단 산하 5개 군단에 대한 현황을 물었다. 이 장군은 “여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서울 이야기나 해주시오” 했다.
나는 16일 아침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청와대를 방문한 일부터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께서 박정희 소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 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이장군은 “그가 우마노호네까 이누노호네까, 알고나 있습니까?” 하며 일본어를 섞어가며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우리말로 하자면 “박정희가 말뼈다귀인지 개뼈다귀인지 알고나 있습니까?”라는 뜻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한림 장군이 박정희 소장의 성분을 의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박정희는 별것도 아닌데 왜들 야단이냐?’ 하는 식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16일 아침의 참모장회의에서 이한림 장군은 박정희 소장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장군과 막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출입문이 열리면서 “메이 아이 컴인(May I come in)?” 하는 소리가 들렸다.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과 회담을 마치고 L19편으로 2군단장 민기식 장군을 만나러 춘천으로 향했다.
1군사령부가 있는 원주와 춘천은 자동차로 30∼40분 거리다. 1군사령관으로부터 “여기(1군)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장담을 들은 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었건만 2군단에 도착한 순간 이한림 장군의 장담이 얼마나 허무맹랑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민기식 군단장은 KMAG이 아닌 군단장 관사에서 만나자고 했다. 군단장관사는 소양강을 굽어볼 수 있는 별장과 같이 호화로웠다.
민군단장은 이한림 1군사령관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군단장은 우리를 만나기가 무섭게 장면 정부를 터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보, 김형.”
그는 나를 김형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면 정부는 안 됩니다. 신·구파가 매일 싸움질만 하고. 그리고 횃불 데모가 다 뭡니까?”
“서울 시내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놈이 있다면서요?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장면이가 약해서 안 됩니다”라고 막말을 했다. 명색이 국군통수권자에 대해 “장면이가”라고 반말로 운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치색이 짙은 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이가 약해서…”
숨쉴 사이도 없이 민장군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돌연 노크도 없이 덜컥 하고 출입문이 열렸다. 철모를 쓰고 권총으로 무장한 ‘원 스타’ 장군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들어왔다. 나는 무례한 ‘원 스타’ 장군을 나무랄 용기조차 없었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나 사단장 박춘식(朴春植)이라고 합니다.”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 난 다음 큰 소리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나 박춘식은 누구의 명령도 안 듣습니다. 나는 혁명을 지지합니다.”
군통수권자인 장면 총리를 가리켜 “장면이가” 운운하는 군단장이 있는가 하면 직속 상관인 군단장 바로 앞에서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사단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캄캄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제 우리나라 군인들이 막가는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춘식 사단장이 소란(?)을 부리자 민기식 군단장은 “나는 저 사람과 생각이 같습니다” “저 사람과 생각이 똑같다니까요” 하고 두 차례나 되풀이해 말했다.
“여기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던 한 시간 전 이한림 1군사령관의 모습이 또다시 내 눈에 아른거렸다. 1군사령부의 최단거리 직속군단이 바로 2군단이 아닌가?
내가 내민 대통령 친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민군단장은 박춘식 사단장을 내보낸 다음 또다시 장면 정권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김남 비서관이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사태를 큰 사고 없이 수습해달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헌정을 중단시키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하는 군대 조직까지 허물어버린 것이 아닌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민기식 군단장과 나 사이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장면 정권 당시 대통령이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민기식 장군의 관할 지역을 통과한 일이 있었다. 민장군은 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직할공병대를 시켜 군사도로를 완전 보수했으니 대통령에게 자랑 좀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어렵고 해서 지프를 타고 가면서(지프에는 대통령과 민장군 그리고 내가 타고 있었다) “이 근처의 도로가 다른 곳에 비해 정돈이 잘된 것 같다”고 슬며시 민장군 편을 들었다.
대통령은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몇 번이나 치러본 대통령이 아닌가.
“지역 책임자가 자기 관할을 잘 챙기니까 그럴 수밖에.”
대통령의 말에 민장군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후부터 민장군은 나를 보면 “김형”이라 불렀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