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ML 올스타 박찬호

호텔경영 꿈꾸며 고급영어 배우는 베벌리힐스 백만장자

  • 송재우 < 스포츠평론가 > jwsong@sports.com

    입력2005-04-08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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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꿈을 이루는 사람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미국 진출 8년. 공은 빠르지만 컨트롤이 불안한 ‘반쪽짜리’ 투수였던 박찬호는 야구의 본고장에서 올스타로 선발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박찬호 신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목표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1994년 1월.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무 살의 젊은이가 메이저리그의 명문구단 LA다저스에 입단했다. 한국 야구 100년사에 길이 빛날 뜻깊은 순간이었다. 박찬호. 당시 한양대 2학년에 재학중인 공주고 출신의 투수였다.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에 야구인들조차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사실 그때까지 여러 명의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의 손짓을 받고 있었다. 최동원, 선동열, 김재박, 정민태 등이 그들이다. 또 프로야구 원년의 영웅 박철순도 일찍이 미국에 진출, 더블A까지 오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과 박찬호의 차이점은 분명했다. 다른 선수들이 국내에서 확실한 스타로서 대접을 받은 데 비해 박찬호는 야구계에서 속칭 ‘공만 빠른 투수’로 알려져 있었다.

    박찬호의 고교 시절 성적표도 그리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박재홍 등 동기생들이 차세대 스타로 자라나는 동안 박찬호는 이류에 머물러야 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박찬호는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매스컴의 추적을 덜 받았고 그 때문에 미국 진출이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임선동의 경우 연고구단 LG트윈스에 지명돼 법정까지 갔다가 늦깎이로 프로에 진출하는 홍역을 치렀다.

    태평양을 건너 낯선 미국 야구에 투신한 지 8년. 이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들이 벌이는 올스타전에 출전할 만큼 성장했다. ‘코리아특급’ 박찬호가 올스타로 성장하기까지는 엄청난 땀과 노력이 숨어 있다. 박찬호가 만들어온 ‘8년의 신화’를 되짚어 보았다.

    야구만큼 힘들었던 영어



    미국 땅을 처음 밟으면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영어다. 박찬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에만 전념해 온 박찬호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는 ‘Hello’ ‘Hi’ ‘Good morning’등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1994년 다저스의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박찬호는 회화책을 보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훈련장에 가보니 여기저기서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dude’였다. 1993년 시즌이 끝난 뒤 휴식을 보내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다저스 선수들이 반갑게 포옹하며 말하는 ‘dude’라는 말이 박찬호에겐 구세주와도 같았다. 흔히 친한 친구끼리 부르는 단어인 ‘dude’가 미국 진출 후 박찬호가 처음 배운 단어였던 것이다.

    여기서 박찬호의 첫 에피소드가 탄생한다. 이미 얼굴이 익은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감독이 동양 선수로는 처음 캠프에 합류한 박찬호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고, 박찬호는 큰 소리로 “Hey dude”라고 말한 것이다. 주변에 들릴 정도였기 때문에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소다 감독도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메이저리그 초년병의 실수를 애교로 받아주었다. 당황한 박찬호는 ‘dude’라는 말이 아주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윗사람에게는 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미국 진출 후 박찬호는 시즌이 끝나면 대학 랭귀지코스에 등록해 영어공부를 했다. 물론 오랫동안 야구를 해왔기 때문에 코치가 말하는 것은 눈치로 알아들었지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박찬호는 동료들과 얘기하는 걸 꺼리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익혀나갔다.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통역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한 말만 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메이저리그 초년병 시절 박찬호와 다저스 포수 마이크 피아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위기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가 뭔가 전달하려는 피아자와 표정만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박찬호를 보고 한때 국내에서는 ‘피아자가 너무 건방지고 투수를 배려할 줄 모른다’는 비난도 있었다.

    1996년 시즌을 앞두고 필자는 박찬호와 전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박찬호에게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냐”고 물었는데 박찬호는 “얼마 전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혼자서 흥정하고 계약까지 했다”며 자랑했다. 값을 깎고 옵션까지 추가로 달았다며 영어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에이전트인 스티브 김에 따르면 박찬호가 본토 사람에게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 가히 ‘용감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라고 한다. 그런 ‘무모함’이 오늘날 TV 인터뷰에서도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초가 된 것이다.

    요즘도 박찬호는 영어 공부에 열심이다. 골프의 박세리처럼 박찬호도 개인교사를 두고 고급 영어를 익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과거엔 그냥 돌아다니면서 쓰는 영어가 필요했지만, 이젠 만나는 사람이나 모임의 성격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만큼 박찬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박찬호가 영어에 욕심을 부리는 이유는 또 있다. 요즘 들어 박찬호는 선수 생활 이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찬호는 은퇴 후 미국에서 호텔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결국 미래의 사업을 위해 영어 실력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투수왕국’의 선발투수

    1996년 제5선발을 노리면서 메이저리그에 재입성한 박찬호는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대기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을 한 박찬호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해야 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운드에 오른 박찬호는 시속 155km를 웃도는 특유의 강속구를 구사하며 처음 네명의 타자를 연속 삼진 처리했다. 하지만 곧이어 컨트롤이 불안해지며 네명의 타자를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토미 라소다 감독이 마운드로 걸어나갔다.

    “다음 타자가 투수니까 마음 편하게 상대하라.”

    그러나 박찬호의 컨트롤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투수마저 볼넷으로 내보내고 쓸쓸히 강판당한 것이다. 당시 미국 최고의 스포츠채널 ESPN의 해설자 조 모건은 “야구 인생 40년 동안 이런 장면은 처음 본다”며 박찬호의 ‘널뛰기’ 컨트롤에 혀를 찼다.

    그 후 박찬호는 에이스 투수 라몬 마르티네즈의 부상으로 예기치 않게 마운드에 올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리글리 필드에서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는 쾌거를 올린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박찬호의 1승을 월드컵의 1승과 맞먹는 승리라고 보도했다. 지금이야 1승이 ‘또 하나의 승리’일 뿐이지만, 메이저리그 진출 자체가 ‘기적’이었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1승은 ‘대사건’이었다.

    박찬호의 컨트롤 불안은 1999년까지 이어졌다. 2000년 시즌 전반기까지 박찬호의 유일한 단점은 컨트롤이었다. 1997년 풀타임 메이저리그 선발로 승격된 이후 박찬호는 매년 10승 이상을 올리는 선발투수로 자리를 굳혔지만, 춤추는 컨트롤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1999년 13승을 거두고도 기복이 심했던 박찬호는 필라델피아 원정경기에 나갔는데 당시 해설자는 이런 말을 했다.

    “박찬호의 공은 사이영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이다. 하지만 박찬호는 아직 투수로 불리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내 눈에 박찬호는 투수라기보다 돌팔매질을 하는 선수에 불과하다.”

    이것은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 투수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꾸준히 노력했고 어느덧 과거와 같은 돌팔매질 투수의 모습은 사라졌다. 지난 시즌 18승을 올리며 20승 투수의 터전을 닦았고 매년 9이닝당 4.5개에 이르렀던 볼넷도 이젠 3.5개로 줄어들었다. 면도날 컨트롤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 타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마냥 기다리는 시절은 이제 지나간 것이다. 실제로 최근 박찬호는 경기 후반 힘이 떨어졌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볼넷을 허용하지 않는다. 박찬호가 특급 투수의 대열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지 8년째를 맞이한 박찬호는 선수로서의 위상, 연봉, 주변 환경 등이 달라졌다. 그래도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성실한 연습태도다. 고교시절부터 연습벌레였던 박찬호는 ‘배고팠던 시절’의 습관이 여전하다. 그와 공주고 동기인 손혁의 말을 빌리면 “정말 지독했다”고 한다. 대학 진학 후 서울에 진출한 고교 동기들의 술자리 모임에서도 박찬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는 등 주위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이너리그 시절에도 구단주였던 피터 오말리가 경기를 보기 위해 구장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멋진 투구를 보이겠다며 욕심을 부리곤 했다. 언젠가 한번은 초반에 난타를 당했는데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구장에서 아파트까지 뛰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날마다 집까지 뛰어가는 ‘훈련’으로 변했다.

    투수의 강속구는 강한 하체에서 나온다. 시간만 나면 뛰고 또 뛰는 박찬호는 1970년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톰 시버에 버금가는 강한 하체를 갖게 되었다. 체격 조건이 우수한 미국 선수들도 박찬호의 하체를 보면 놀란다. 보통 사람의 허리와 맞먹는 박찬호의 허벅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찬호가 연습에 열중하는 모습은 평상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지 특파원이나 지인들을 만나더라도 박찬호는 연습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털고 일어선다. 만약 그 자리를 피하기 어렵다면 일단 연습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연습은 꼭 하고야 마는 ‘독종’이다.

    박찬호가 1996년 처음으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을 때 가장 힘들어한 것은 바로 이동이었다. 땅덩어리가 넓어 LA에서 뉴욕까지는 비행기로 5시간 걸린다. 시차가 3시간이기 때문에 경기의 피로보다도 이동에 따른 체력의 열세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벤츠를 몰고 드라이브

    30℃를 웃도는 날씨에 투수가 1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면 보통 2~3kg의 체중이 준다. 박찬호는 187cm의 키에 93kg의 당당한 체격이지만 선천적인 체력에서 미국 선수들에게 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이 뛰고 몸관리를 철저히 한다. 그런 까닭에 힘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면승부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6개월에 걸친 페넌트 레이스의 절반은 원정경기다. 보통 팀들은 원정경기를 갈 경우 숙소를 한 군데 정해놓고 그 도시에 갈 때마다 같은 호텔을 이용한다. 혈기 방장한 젊은 선수들에게 다소 따분할 수도 있는 생활이다.

    국내 프로 선수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자신만의 독특한 취미 생활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애쓴다. 어떤 선수들은 게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호텔방에서 게임을 즐기고, 메이저리그 경력이 짧은 선수들은 볼 만한 곳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박찬호는 ‘아이 쇼핑’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박찬호는 올시즌 소득이 990만달러에 달하지만 결코 호화 쇼핑을 하지 않는다. 배고팠던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서인지 박찬호는 철저하게 ‘알뜰 쇼핑’을 고집한다. 백화점을 둘러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 도시 사람들에게 물어서 가격이 싸면서도 물건이 다양한 곳을 찾아다닌다.

    시즌이 끝나고 국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 박찬호의 패션 감각이 상당함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눈썰미가 있다는 말이다. ‘박찬호식 쇼핑’의 특징은 싸더라도 비싸보이는 물건을 고르는 것이다. 1997년 뉴욕 원정경기에서 돌아온 박찬호는 현지 특파원들에게 새로 산 시계를 자랑한 적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비싸 보이는 고급 시계 같았다. 박찬호는 특파원들에게 시계 가격을 맞혀 보라고 했는데 특파원의 대답과 박찬호가 밝힌 실제 가격에 큰 차이가 있었다. 당시 박찬호의 표정은 득의만면 그 자체였다.

    매년 참가하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도 박찬호는 시간만 나면 쇼핑을 간다. 주로 구입하는 품목은 캐주얼 스타일의 스포츠 웨어, 또는 부모님과 LA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는 동생에게 줄 선물 등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스포츠 카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꿈꾸듯이 박찬호도 시간이 나면 드라이브를 즐긴다. 처음 구입한 차는 일본의 지프. 위상이 높아진 다음에는 무상으로 빌려주는 벤츠 2인승 스포츠 카를 타다가 안전을 생각해 올해부터 벤츠 세단으로 바꿨다. 10만달러를 호가하는 8기통에 300마력이 넘는 성능 좋은 자동차이기 때문에 속도 위반을 하지 않는 선에서 틈나는 대로 속도의 매력에 빠져든다.

    LA에 머물 때는 가끔 영화도 즐긴다. 시즌 중 이런 시간을 많이 갖기는 어렵지만 비시즌에는 속이 후련한 액션 영화를 자주 본다(사실 박찬호의 베벌리 힐스 저택은 아직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주변에 가수 마돈나의 집이 있는 만큼 호화로울 것이라는 추측만 나돌 뿐이다. 측근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미니 영화관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가족 등 극히 가까운 지인들뿐이다. 일 년 내내 박찬호를 따라다니는 특파원조차 집 안을 구경한 적은 없을 정도. 박찬호가 집 공개를 꺼리는 이유는 사생활 보호도 있지만, 자칫 국내팬들에게 사치로 비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시즌 중 박찬호가 가장 즐기는 여가 활용법은 바로 잠이다. 박찬호는 잠을 푹 자야만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평일 경기가 주로 야간에 치러지기 때문에 경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어머니 정동순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면 아침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난다. 원정경기를 가서도 오전 10시나 11시까지 잠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오후 2시 이후에는 경기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잠을 푹 자고 경기장에서 몸을 푼 다음 경기에 임하는 것이다.

    일본 선수와의 경쟁

    1994년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며칠 못 가 마이너리그로 떨어졌다. 그가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것은 1996년이다. 그 사이 팀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중남미에서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다저스가 일본 프로야구의 노모 히데오를 영입한 것이다. 아직 아마추어 때를 벗지 못한 박찬호와는 다르게 노모는 1995년 메이저리그 데뷔와 동시에 순항을 계속했다. 그해 4월 데뷔전에서 샌프란시코에게 5이닝 동안 특유의 꽈배기 폼에서 나오는 포크볼을 구사하며 삼진 10개를 잡아냈다. 이때부터 노모의 애칭 ‘토네이도’가 메이저리그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1996년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박찬호는 주로 불펜 투수로 가끔씩 선발 로테이션에 구멍이 생겼을 때 선발로 올라가는 처지였다. 때문에 16승을 올리며 팀내 에이스로 대우받던 노모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시 박찬호는 노모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인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박찬호는 “앞으로 2~3년 뒤에, 프로로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뒤 진정한 비교를 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찬호의 이 말은 실제로 2년 뒤 현실로 나타났다. 1998년 박찬호는 15승을 올리며 메이저리그에서 돋보이는 투수로 성장했고 노모는 6승 12패라는 비참한 성적을 거두며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됐다. 또한 99시즌을 앞두고 노모는 마이너리그 계약을 요구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맞았고 밀워키에서 겨우 자리잡는 듯했으나 지난해 다시 디트로이트에서 8승 투수로 주저앉았다. 그 사이 어깨 수술을 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던 노모에 비해 박찬호의 성장세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박찬호와 노모가 한국과 일본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들의 성공으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매년 한국과 일본을 찾아 스카우트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많은 선수가 제2의 박찬호나 노모가 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현재 아메리칸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 몸담고 있는 노모와 다저스의 박찬호가 맞상대를 하려면 월드시리즈에서나 가능하다. 그 동안 박찬호는 일본인 투수 이라부, 요시이 등과 맞붙어 일방적인 우세를 보였다. 이제 이치로와 신조라는 일본 프로 출신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불꽃 튀는 투타의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같은 동양인 선수로서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하지만 지기 싫은 오기가 발동하는 것이 메이저리그에서의 한·일전이다. 특별히 일본 선수와의 대결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고 짐짓 여유를 보이는 박찬호. 그래도 국내 팬들은 일본 선수와의 대결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박찬호는 대식가로 알려져 있다. 앉은자리에서 갈비 6∼7인분은 게눈 감추듯 먹는다. 여기에 후식으로 제공되는 냉면 한 그릇도 시원하게 비우고 주위 사람이 남긴 음식도 마다하지 않고 깨끗이 치운다. 그래서 박찬호에게 저녁식사 대접을 제대로 하려면 지갑이 두둑해야 한다. 박찬호는 양식보다 한식을 즐기며 특히 어머니가 끓여주는 찌개류를 좋아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원정 경기에서도 꼭 한식집을 찾는다.

    요즘은 예전처럼 심하게 고집하는 편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등판을 앞두고 점심 식사로 꼭 육개장을 먹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대개 자신만의 징크스가 있기 마련인데 박찬호도 육개장을 먹어야만 경기가 잘 풀린다고 믿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한때 ‘타격의 달인’으로 불렸던 웨이드 복스가 경기 있는 날에는 꼭 닭고기 요리를 먹어야 했던 것처럼 박찬호에게 육개장은 승리의 부적과도 같은 음식이었다.

    특별히 보약을 먹지 않는 미국 선수들에게 적절한 음식 섭취는 아주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들과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한 끼 평균 식대는 연봉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5∼6달러에 만족한다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평균 40달러 이상의 고급 음식으로 컨디션과 품위를 유지한다.

    박찬호가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길거리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는데 이를 라소다 감독이 보았다. 평소 양아버지를 자처하며 박찬호를 아들같이 아껴주던 라소다 감독은 정색을 하고 박찬호를 꾸짖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자신의 품위를 지켜야 하고 항상 최고의 영양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햄버거 같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라소다 감독이 박찬호에게 주려고 했던 가르침은 아직 신체적으로 여물지 않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거로서 갖추어야 할 체력적 밑바탕과 메이저리거로서의 자부심이었다.

    치솟는 박찬호의 몸값

    원래 박찬호는 매운 음식을 즐겨 먹었지만, 최근에는 아무래도 서양 음식을 많이 접하다 보니 매운 음식에 자신 없어 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한국에서 사온 무교동 낙지볶음은 땀을 흘리면서도 잘 먹었다. 박찬호는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식탁에 오르면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진다. 대접하는 사람이 흐뭇해 할 만큼 열심히 먹는다. 박찬호가 체력을 키우기 위해 먹는 보약이 있다면, 부모님이 한국에서 가져다주는 한약을 들 수 있다.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선수의 가치는 몸값이 대변한다. 기량이 뛰어나고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연봉에는 계약 당시 리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 면에서 박찬호는 행운의 사나이다. 지난 5년간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연봉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게다가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다년간 계약까지 보편화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5년 정도의 계약이면 선수들이 만족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는 10년 계약도 많았다. 또한 박찬호의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의 협상력을 감안하면 박찬호의 내년 연봉은 2000만달러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당시 120만달러의 계약금을 받았던 박찬호는 1996년부터 정식 메이저리거로 최소 연봉을 수령했다. 그 후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박찬호의 연봉은 올 시즌 990만달러에 이르렀다. 또 올 시즌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옵션 계약으로 5만달러를 추가해 1000만달러에서 5만달러가 부족한 스포츠 재벌로 성장했다.

    현재까지 투수로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 선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좌완 마이크 햄튼으로 연평균 1560만달러다. 타자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연평균 2500만달러가 메이저리그 기록이다. 이것은 지난 2년 동안 연봉 1위를 지켰던 다저스의 팀 동료 케빈 브라운의 1500만달러보다 무려 1000만달러가 많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당분간 깨기 힘든 기록이다.

    1996년 당시 10만달러를 약간 넘는 수준에 불과했던 박찬호의 연봉은 5년 만에 99배나 올랐고 올시즌도 몸값을 올릴 수 있는 호재가 속출하고 있다.

    시장경제의 원리상 상대적인 비교를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상황에서는 올 시즌이 끝나고 자유계약 시장에 나오는 선발 투수 중 박찬호가 최대어로 꼽히고 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부자 구단은 한번쯤 군침을 흘려볼 만한 선수가 박찬호인 것이다. 그 동안 팀 내 에이스로 군림했던 케빈 브라운이 36세란 나이가 부담이 되는 듯 서서히 부상 등이 표면화하며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듣는 반면 박찬호는 28세의 전성기에 접어든 떠오르는 선수라는 면에서 평가는 한층 높아진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2년 전 다저스는 박찬호에게 3년 동안 3000만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한 적이 있었고 박찬호는 스캇 보라스에게 전화로 자문했다. 보라스는 박찬호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고 앞으로 다가올 시장 변화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결국 보라스의 조언을 받아들인 박찬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부진한 99시즌을 보낸 박찬호를 두고 무모한 결정이었다는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지난 시즌 박찬호가 18승을 올리자 다년간 계약을 포기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자인 로드리게스의 에이전트이기도 한 보라스는 이미 박찬호의 인터리그(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경기) 성적을 운운하며 아메리칸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선수라는 말을 흘리고 있다. 물론 이것은 뉴욕 양키스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 등 재정이 풍부한 아메리칸리그 팀들을 의식한 발언이다. 또 현 소속팀 다저스의 거액 배팅을 유도하는 미끼이기도 하다. 박찬호가 내년 시즌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 투수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 꿈은 아닌 셈이다.

    처음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미국팬들은 그저 신기한 동양 선수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타자들을 강속구로 삼진시키는 모습에 매료됐다. 또 경기가 시작될 때 심판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동양적인 매너에 신기해했다. 그러면서도 그저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만 생각해왔다.

    신화를 만드는 사나이

    하지만 지난 시즌부터 박찬호는 그 이상의 선수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 올스타전 출전은 박찬호가 전미의 야구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 박찬호는 매년 평균 34회 등판한다. 이중 미국 전지역에 중계되는 경우는 2~4회로 그리 많지 않다. 박찬호는 올스타전을 계기로 지역 스타에서 전국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확실하게 잡은 셈이다.

    30개 팀에서 1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오르내리는 선수들은 줄잡아 1200여 명. 이들 중 각 리그에서 30명씩, 모두 60명에게만 돌아가는 영예가 올스타다.

    12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17번째 선수인 박찬호.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2년이나 눈물 젖은 빵을 삼켰다. 중간 계투로 메이저리그 적응기를 거치고 한때는 선발투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뛰고 또 뛴 시절도 있었다. 한 계단씩, 하지만 쉼없이 박찬호는 성장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LA지역을 벗어나면 박찬호를 모르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웬만한 야구팬이라면 박찬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약간의 후퇴도 있었지만 박찬호의 성장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박찬호가 진정한 메이저리그의 스타로, 그리고 강자로 크기 위해서는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야 한다. 물론 단체 스포츠인 야구에서 혼자 힘으로 팀을 이끌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반드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통해 20승 투수, 사이영상 수상, 그리고 200승을 따내는 것이 박찬호의 원대한 꿈일 것이다.

    이제 박찬호는 단순히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가 아니다. 마치 지난해 뉴욕 원정경기에서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에 맞추어 ‘한국의 날’이 만들어진 것처럼 민간 대사 구실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 5월에는 LA지역에서 박찬호를 ‘아시아를 빛낸 인물’에 선정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는 ‘야구의 세계화’에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3년 연속 메이저리그 개막전을 미국이 아닌 제3국에서 개최하는 것이다. 지난해 개막전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열렸다. 그렇다면 박찬호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가는 시점에 국내에서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벌어지는 것은 상상속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1997∼1998년. 온 나라가 IMF의 거센 풍랑에 휘청거리고 있을 때 박찬호의 시원한 승전보는 잠시나마 찌들었던 마음에 한 줄기 소나기였다. 마운드에서 역투하는 그의 모습과 그에게 아낌없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미국 팬들의 모습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국내팬들도 적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집까지 뛰어오던 시절에서 벤츠 스포츠 카까지, 직구 커브에만 의존하던 단순한 투구 패턴에서 슬러브,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기까지, 공주의 허름한 전파상집 아들에서 베벌리 힐스의 200만달러짜리 저택에 사는 갑부가 되기까지, 박찬호라는 이름 석 자가 생소하기만 했던 과거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최고의 남편감 1위로 꼽는 현재까지, 놀란 라이언의 강속구에 반해 그의 폼을 흉내내던 풋내기에서 수많은 야구 지망생들의 표본이 되기까지…. 박찬호는 쉼없이 그리고 숨가쁘게 그 길을 달려왔다.

    노력하고 꿈을 이루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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