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래리 홈즈·존 메켄로를 키운 스포츠의학의 대가

미국 올림픽대표팀 닥터 재미교포 ‘마스터 서’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5-04-11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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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스포츠계에서 서대식씨는 이미 유명인이다. 미국 전역의 헬스클럽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야단이다. 그가 한번이라도 특정 헬스클럽에 나타나면 다음날로 이 헬스클럽은 고객이 끓기 시작한다. 미국정부도 그를 인정했다. 2000년 1월 백악관의 공화당 중앙본부는 그를 초청해 보건행정에 관한 아이디어를 청취했다.
    미국의 프로권투 선수를 훈련시키고 올림픽 선수들의 건강 상태를 돌보고 레이건 대통령의 건강 담당 자문위원까지 지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있다. 미국인들이 ‘마스터 서(Master Seo)’라고 부르는 서대식씨(60)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 스포츠계에서는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의 프로권투 선수뿐만 아니라 올림픽에 출전하는 스키 선수와 농구, 야구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그의 트레이닝을 받았다. 무하마드 알리, 케리 렌치, 마이클 독스, 츄라비 비빅, 알렛세스 아월로, 알론 프라이어, 팀 레드스픈, 비니 페시엔저, 래리 홈즈, 에반다 홀리필드, 레딕 보, 존 메켄로 등 미국의 유명 프로선수들이 서씨의 지도를 받았다. 그의 지도를 받는 선수들은 반드시 승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포츠 트레이너, 스포츠 닥터, 재활 트레이너 등 스포츠와 관련한 그의 직함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권투선수 트레이너다. 그는 “복싱 선수를 가르치려면 경험과 복싱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 몸과 영양, 정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트레이너는 선수의 동작을 1초도 놓치면 안 된다. 1라운드는 비록 3분밖에 안 되지만, 트레이너는 단 1초라도 놓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는 좋은 권투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정신과 날카로운 눈, 몸에 대한 지식 등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공격보다는 효과적으로 수비하는 기술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름난 권투선수 트레이너

    “나는 수비 기술이 공격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힘을 아끼고 수비하는 데 진력하라고 요구한다. 만약 상대가 나를 향해 펀치를 1000번이나 날렸는데, 내가 번번이 이를 막아내면 상대는 곧 지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상대를 펀칭백 두드리듯이 공격할 수 있다.”

    방어 기술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도 그는 선수들이 자신의 몸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관리하라고 요구한다. 그는 선수별로 충고를 하기 전에 반드시 개별 복서의 신체 특성을 점검한다. 권투선수의 신체 조건과 컨디션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지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를 거쳐간 권투선수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이중 대표적인 이가 1980년대의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래리 홈즈다. 마스터 서는 우연한 기회에 래리 홈즈의 보디 가드인 크래프 램손을 치료하게 되었다.



    당시 크래프 램손은 무릎을 다쳐 절고 있었다. 서씨는 램손의 다리 힘줄을 만져 그 자리에서 걷게 만들었다. 그 솜씨에 감탄한 램손은 즉각 서씨를 래리 홈즈에게 소개했다. 래리 홈즈는 당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5년째 구부리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구부리지 못하니, 주먹을 제대로 쥘 수도 없고 그 상태에서 펀치를 날리니까, 엄지손가락을 계속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홈즈의 오른손을 지압과 마사지로 주물러서 바로 손가락을 구부릴 수 있게 치료했다.

    래리 홈즈의 스페셜 트레이너

    그 치료를 받고 난 래리 홈즈는, 그 자리에서 마스터 서에게 전속 트레이너 겸 닥터로 일해달라고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내용은 게임당 대전료의 10%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래리 홈즈의 대전료가 한 게임당 100만달러가 넘었으니, 막대한 수입을 거둘 수 있는 기회였다. 숙식비와 전화비 등 소모 경비도 별도로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전속 계약을 하면 집을 떠나 래리 홈즈의 캠프를 따라다녀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서대식씨는 이 조건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녀들의 교육을 돌보지 못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를 필요로 하는 다른 선수들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스터 서는 래리 홈즈와 ‘스페셜 트레이너’계약을 맺었다. 이는 특정 경기가 있을 때 두세 달 정도 몸을 살펴주기로 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마스터 서는 82년 9월부터 88년까지 래리 홈즈의 체력과 경기력을 7년 동안 관리했다.

    권투선수 프레디 로치를 치료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 선수는 오른쪽 손등 뼈에 금이 갔다. 권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부상이라, 손 전문 외과 의사들은 수술해도 소용 없다며 은퇴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마스터 서는, 이 선수를 만난 자리에서 주먹을 쥐고 샌드백을 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권투선수만 돌본 것이 아니다. 격렬하게 신체를 놀리는 운동선수라면 모두가 그의 잠재적 고객이었다. 그는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트레이너 노릇에 덧붙여 부상 선수들을 치료하고 재활 훈련까지 시킬 수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어깨든 무릎이든 발목이든 탈골, 탈근된 부위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또 그가 처방해주는 체조법은 체력을 관리하는 비방이었다. 훈련은 그의 치료법과 별개가 아니었다.

    이런 능력으로 그는 농구, 배구, 축구 등 여러 분야의 선수들을 치료했다. 그는 태권도, 권투, 유도, 기계체조, 농구, 축구, 육상 등 모든 부문에 능한 체육감독이자 코치였다. 또 발레를 한 탓에 무용에도 능했다. 말하자면 만능 스포츠맨이고 트레이너 겸 스포츠의학 전문가였다.

    두 번째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선수는 코트의 악동이라 불린 프로 테니스 선수 존 메켄로였다. 1983년은 존 메켄로가 윔블던 대회 등 유명 테니스 대회를 휩쓸며 최고 명성을 떨치던 해였다. 그러나 서대식씨는 텔레비전을 통해 존 메켄로의 경기장면을 지켜보며 그의 선수 생명이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예견했다고 한다. 메켄로의 자세가 허리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텔레비전을 통해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예견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존 메켄로는 1년 뒤인 1984년, 미네소타주에서 체코계 선수인 이반 렌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패배한 뒤 메켄로는 계속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1986년에는 허리 통증으로 아예 드러누웠다.

    이런 존 메켄로를 서대식씨에게 연결해준 사람은 당시 미 하원 예산분과위원회 위원장이던 보브 오컨 의원(현재는 워싱턴 DC에서 NBC 방송국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었다. 보브 오컨 의원은 존 메켄로와 절친한 사이였고, 서대식씨에게는 태권도를 배운 제자였다. 서씨는 일찍이 태권도 제자인 오컨 의원에게 존 메켄로가 허리 통증으로 드러누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1987년 6월, 오컨 의원의 소개로 서대식씨는 존 메켄로를 처음 만났다. 그는 메켄로의 발바닥을 만져 척추 맨 끝에 있는 꼬리뼈 4번과 척추 4번이 한쪽으로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스터 서는 우선 존 메켄로의 허리 부위를 뜨거운 스팀 타월로 데웠다. 마사지하기 전 예비작업으로 혈액 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한 조치다. 그는 모든 치료에 앞서 더운물 찜질을 한 뒤 마사지를 시작한다.

    그가 마사지할 때면, 피부를 절개하지 않고도 손가락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속으로 눌러 넣어 부러진 뼈를 맞추고 찢어지고 끊어진 근육을 이어 붙인다. 마사지를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에 메켄로는 허리와 발바닥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양과 서양의 의학을 접목한 마스터 서의 시술을 처음 맛본 메켄로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마스터 서는 메켄로에게 14일간의 재활훈련을 처방했다.

    재활훈련을 마친 뒤, 메켄로는 거짓말처럼 재기했다. 선수생명이 끝났다던 의사들의 진단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치료가 끝난 직후인 1987년 7월 메켄로는 데이비스컵에서 보리스 베커와 6시간30분 동안 듀스를 거듭한 끝에 우승컵을 따냈다. 당시 존 메켄로의 재기를 놓고 미국 언론들은 “존 메켄로 뒤에는 ‘하얀 옷을 입은 동양의 도사’가 있다”고 보도했다.

    1983년 11월 월드컵 노르딕 컴바인 스키 3회 연속 챔피언인 케리 렌치의 부상을 고친 일화도 유명하다. 담당 코치가 마스터 서에게 전화를 걸어와 케리 렌치가 스키 점프를 한 뒤, 선수 생활을 못할 정도로 다쳤다는 사실을 알렸다. 서씨는 다칠 당시의 점프 장면이 들어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요구했다. 어떤 자세에서 다쳤는지를 알아야만 정확하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디오를 본 뒤 무릎 부상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여기에 기초해서 렌치를 치료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미국 스키 선수단의 팀닥터 겸 트레이너가 되었을 때, 미국 스키선수단은 “We have secret weapon”이라며 마스터 서를 추켜세웠다. 마스터 서는 운동선수들에게 특유의 이론을 강조한다. 기계적으로 운동할 것이 아니라 리듬과 철학이 있는 운동을 하면 능률이 더 오르고 육체와 정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스포츠맨으로서 수명도 더 길어진다고 했다.

    마스터 서는 운동선수뿐 아니라 관절염과 디스크, 고혈압, 당뇨 등과 관련한 일반 환자들도 숱하게 치료했다. 그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은 일반 병원에서 포기한 중증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사지마비 장애자를 치료

    그 대표적인 환자가 1982년 8월16일 그를 찾아온 제니 마슨 양이었다. 당시 제니는 15세였으나 몸은 9세 수준이었고, 사지를 펴지 못하고 오그리고 있었다. 제니는 7세부터 사지를 못쓰는 장애아였다. 미국에서만도 병원을 27군데나 찾아다녔으나 효험을 보지 못했다. 제니의 어머니가 서대식씨를 소개하는 ‘에스콰이어’지의 기사를 보고 간절한 편지를 보내왔다.

    ‘에스콰이어’지는 1982년 8월호에 ‘stretching with master Seo’라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 기사가 난 뒤 해당호가 4만2000권이나 팔리고, 그를 찾는 문의전화가 3002통이나 이 잡지사로 걸려왔다고 한다. 서대식씨는 제니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나는 의사가 아니다. 둘째, 나는 미국사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시민권자가 아니다. 셋째, 나에게 오면 당신이 모든 여행 경비와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넷째, 내 지시를 100% 따르면 받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조건을 다 받아들이면 재활이 보장된다고 그는 제니의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당시 제니의 어머니는 메사추세츠에 있는 병원에 가기로 했는데 병원에 가기 전에 서대식씨에게 들렀다.

    당시 서대식씨는 의사들한테 공격받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했다. 정형외과 등 관련 부문 의사들한테 예약했던 환자들이 이를 취소하고 서대식씨를 찾는 사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주의회에 등록된 의사도 아니고,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았고, 그냥 평범한 태권도 사범이었다.

    제니는 사지를 오그린 채 펴지 못했는데, 무릎과 가슴 사이가 30cm 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을 펴고 싶어도 펴지 못했다. 서대식씨는 우선 제니의 병상기록을 보았다. 2세 때부터 시작된 제니의 병상기록은 쌓아놓고 보니, 10cm나 되었다. 제니의 병명은 ‘류머티스 아트라이디스’로 순환장애로 관절이 굳어진 병이었다.

    서대식씨는 원인을 2세 때부터 호흡장애로 복용한 약물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병상기록에 나와 있는 약물을 보니 어른도 장애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는 이 정도면 7세부터 다리를 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제니의 병상기록을 모두 살핀 뒤 부모에게 “오늘 세시간만 나에게 있으라.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치료에 들어갔다. 우선 제니의 전신을 지압(Deep layer stretch)했다. 한 시간 뒤, 붙어 있던 다리가 3cm 정도 벌어졌다. 두 시간째는 마사지(Bio mechanical massage)를 시술했다. 이 마사지는 500개가 넘는 근육선을 하나하나 만지는 세밀한 작업이었다. 마사지를 끝내니 30cm 정도로 붙어 있던 제니의 무릎과 가슴의 거리가 60cm 정도로 떨어졌다. 마지막 한 시간은 복합적인 근육 운동을 시켰다. 세시간 뒤 제니는 부모 도움 없이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니의 부모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을 만난 것 같았다. 이후 제니는 꾸준하게 마스터 서의 치료를 받아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994년 7월에는 뉴저지주에서 결혼까지 하고 잘살고 있다.

    서대식씨의 치료법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지압과 마사지, 물, 운동으로 치료한다.

    서대식씨의 치료법과 건강법의 핵심은 물이다. 모든 생물체는 하나의 세포에서 발생해서 특정한 기능을 이루는 장기로 발전하여 한 생명체가 된다. 이 세포들의 주요 성분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다. 이 성분들을 조합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이처럼 물은 모든 영양소와 산소, 염분, 열을 녹여 전신에 공급하고 신진대사 의 부산물을 희석하고 배설하는 용매작용을 한다. 심지어 뇌의 작용인 생각의 흐름도 물에 용해되어 있는 전해질이나 열의 이동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모든 영양소와 약, 산소도 물 없이는 몸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렇다면 물은 얼마나 필요한가? 몸을 이루는 세포와 조직은 물을 통해 구석구석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배설하고, 또 필요한 요소를 재흡수한다. 하루에 생산되는 소변은 700∼7000cc, 침은 1400cc, 위액은 2100cc, 담즙은 500cc, 대변은 350∼3500cc 정도 된다. 심장은 혈액(대부분이 물)을 1분에 6000cc 정도 뿜어서 몸 전체로 산소, 수분, 영양분을 공급한다.

    이중에 4ℓ 정도는 신장을 통과하여 독물을 걸러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평상시에 우리 몸으로부터 배설되는 물의 양은 적어도 2000∼4000cc로 적어도 이만한 양의 물을 매일 마셔 보충해야만 세포를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만약 물을 마시지 못하면 배설되려던 물이 거의 다시 흡수되어 전체 수분 량을 보존하려는 것이 우리 몸의 적응 기능이다. 따라서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몸 속에 노폐물과 독소가 쌓이는 것이다.

    서씨는 특히 감기 걸린 사람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라고 충고한다. 세포가 마르거나 피로할 때 찾아오는 것이 감기인데, 물을 많이 마시면 이런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을 많이 마시면 인체 근육에 필요한 산소가 잘 공급된다는 것이다. 물을 많이 마시지 않으면 혈관이 독소를 빨아들이고 혈관에 노폐물이 끼며 심하면 터질 수도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 우리 몸은 피부에서 산소를 빨아들이는 피부호흡도 하는데, 여기에도 물이 필요하다. 물이 많이 마시지 않으면 피부호흡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치를 즐기는 민족으로 소금 섭취량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20∼27배 높다. 서대식씨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증이 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물을 마시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1975년에 도미

    서대식씨의 고향은 경남 하동군 하동읍이다. 하동다압국민학교를 거쳐 하동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광주사범대학으로 진학한 것은 학생운동의 주모자라 경찰이 항상 따라다녀 경남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졸업 후 충북으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제자를 길렀고, 전국체전에 육상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체육발레를 전공한 그는 국제예술협회 현대 발레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으며, 중앙무용기술협회 심사위원을 맡았을 정도로 발레부문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그는 35세 되던 해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 1975년 11월15일 부인 박희분씨, 어린 네자녀와 함께 뉴햄프셔주 보스턴 공항에 도착했다. 최초 목표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체육의학박사학위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보스턴의 통조림 공장 노동자. 도착한 지 2주일 뒤 도살장을 가진 통조림 공장에서 그는 주 60시간 근무에, 시간당 3달러 15센트의 급료를 받는 고달픈 이민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1차 오일 파동으로 직장내 휴직이 시작되고 공장분위기도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한 지 3개월 뒤, 그의 일생에 전환점이 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갱조직의 일원인 한 남미계 노동자가 잭나이프로 그의 목을 겨눈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에 그는 태권도 8단, 유도 2단, 합기도 6단의 무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노동자 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돌려차기로 잭나이프를 든 이 남미계 노동자를 때려눕혀 버렸다.

    당시 보스턴 지역에는 중국의 쿵푸와 일본의 가라테가 알려져 있었을 뿐, 태권도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사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신문에 보도되고, 마침내 쿵푸와 가라테 사범들이 서대식씨를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미국에 먼저 와 있던 동생의 소개로 그는 맨체스터 경찰서 소속 형사들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이 시범에서 서씨는 순식간에 형사 7명을 제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근 학교 체육학과 담당자와 학생과장들은 앞다퉈 그를 대학에 초빙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운이 른 것이다.

    그러나 서씨는 태권도 사범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스포츠 의학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지 않고 공부했다. 뉴햄프셔주 주립대학과 프리메스 주립대학에서 생리학과 해부학 수업을 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그는 자녀들의 맹장염 수술을 집에서 직접 할 정도로 의술이 상당했다.

    이런 공부 때문에 그는 스포츠맨들이 안고 있는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고통, 또 권투선수의 경우 자세와 스타일까지 교정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자녀교육에 누구보다 열성이었다. 자녀들이 유치원에 들어간 뒤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주 학교를 방문하고 교장 선생님과 담당 교사로부터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일일이 전달받으면서 학교가 요구하는 학부형의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서대식씨의 열성적인 자녀교육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해외로 출장을 가거나 계약한 프로선수들을 살피기 위해 다른 주(州)에 나가 있을 때도 학교로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근황을 확인했다.

    이는 유명 프로선수와 계약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선수의 전속 트레이너가 되면 경기를 따라 해외든 지방이든 선수와 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서씨는 자녀교육 때문에 이를 모두 거부했다. 보수를 갑절로 주겠다고 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계약 조건은 항상 출퇴근 계약이었다.

    경기 일정상 어쩔 수없이 출장을 간다 하더라도,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자녀들의 공부를 챙겼다. 존 메켄로를 7년 동안 보살피면서도 그는 이 계약 조건을 고수했다. 5년 동안 계약한 래리 홈즈도 매년 재계약 때마다 출퇴근 근무를 관철했다. 그는 “우리 이민 1세가 이민한 가장 큰 이유로 자녀교육을 종종 거론합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이 돈을 벌겠다는 의지로 쉽게 바뀌고 말더군요”라고 말한다.

    이런 열성 탓에 그의 3남1녀는 하나같이 미국 사회에서 성공했다. 그의 자녀 현황은 이렇다. 장녀 서연옥(36)씨는 미국 동부의 법학 명문 설폭스대학에서 국제무역법, 배심원법을 전공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보스턴에서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장남 서병용씨(32)는 설폭스대학에서 국제무역법과 투자학을 전공한 뒤 역시 변호사 개업중이다.

    차남 서병숙씨(30)도 미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공군으로 근무하다 대위로 예편한 뒤, 덴버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덴버의 법률사무소에서 역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3남 서병도씨(28)는 현재 보스턴대학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3남1녀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아 태권도 유단자다.

    그는 자녀를 키울 때 네가지 원칙을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라. 한국의 좋은 점은 지키고 나쁜 점은 버리고, 미국의 좋은 점은 익혀라. 둘째, 학문과 체력에서 확실한 실력을 연마하라. 셋째, 한민족은 백의민족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라. 넷째, 형제간에 우애를 지켜라. 긍정적인 삶을 형제간에 나누라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원칙이 자칫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국 땅에서 동양인으로 살아야 하는 서씨의 자녀들에게 이런 원칙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그만큼 자신을 다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대식씨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교포 사회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다. 이는 처음 미국 올 때부터 그의 원칙이었다. 그는 재미 동포들이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보다는, 서로 아웅다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그럴려면 한국에 살지, 왜 미국에 왔느냐?”며 비판한다.

    “대부분의 재미 동포들은 세금도 잘 안내고 탈세를 많이 합니다.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영주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가 더욱 힘듭니다. 미국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한국 국익에도 도움이 됩니다. 미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보면 한국인보다 훨씬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교포사회에 참여 않는 이유

    그가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뉴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지역에 정착한 것도 이런 결심이 크게 작용했다. 이곳은 무엇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한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현재 보스턴 북부 맨체스터에 있는 대형 종합체육관에서 운동지도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이 체육관은 보통의 헬스클럽과는 다르다. 적당한 시간에 찾아와서 자전거를 타고 샤워를 하고 음료수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 영양을 자문하고 부상을 치료하고, 감량 지도와 스포츠에 관한 모든 신체 훈련을 시킨다. 이런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스포츠 센터는 미국 어디에도 없다.

    미국 스포츠계에서 그는 유명인이다. 그래서 미국 전역의 헬스 클럽에서는 그를 모셔가려고 야단이다. 그가 한번이라도 특정 헬스클럽에 나타나면, 그 다음날로 이 헬스클럽에는 고객이 끓기 시작한다. 미국에는 골드 짐(Gold Gym)이라는 전국 체인망을 가진 헬스클럽이 있다. 골드 짐은 서대식씨를 특별 초청 지도자 겸 컨설턴트로 대우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서도 그를 인정해주고 있다. 그는 2000년 1월 백악관에 있는 공화당 중앙본부의 초청까지 받았다. 미국 전역에서 의료 전문가 200명을 초청해서 보건행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는 자리였는데, 한국인인 그가 뉴햄프셔주 대표로 선발된 것이다.

    이제 미국생활을 시작한 지 26년째. 그의 가장 큰 보람은 3남1녀가 훌륭하게 자란 사실이다. 그는 이민 오던 해부터 지금까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절대 수면량이 모자라 그 동안 자동차 사고도 14번이나 났다. 그는 최근 20년 넘게 계속하던 직업병에 대한 연구를 끝낸다. 이 연구결과는 ‘32개 직종에서 생기는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영문과 국문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남은 계획이 있다면 자서전을 출판하고, 평생 동안 쌓은 국민 건강에 대한 노하우를 조국에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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