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도쿄발 세계공황의 불길한 전주곡

  • 채명석 < 자유아시아방송 도쿄 특파원 >

    입력2004-11-16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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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팬 애즈 넘버 원(JAPAN AS NO.1)’이 출판된 1987년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경제가 머지않아 세계경제를 제패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2년 뒤 출판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일본인들의 그런 자만심을 더욱 부추긴 책이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 ‘저팬 애즈 넘버 원’보다는 ‘차이나 애즈 넘버 원’이 더 널리 회자되고 있다. ‘21세기는 일본의 세기’라는 말 대신 ‘제2의 패전’과 같은 말이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는 더 심금을 울려주는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경제대란설’도 일본경제의 급격한 퇴조와 침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올초에도 경제대란설은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경제전문가에 따라서는 그것을 ‘3월 대란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4월 대란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경제대란이 도래하는 경로에 대해서 경제전문가에 따라 약간씩 견해 차이는 있지만, 일본경제가 올 봄 대란에 휩싸일 것이라는 예측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경제전문가는 거의 없다.

    ‘일본경제 대란설’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 ‘잃어버린 10년’, 즉 1990년대의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그같은 대란설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일본경제가 ‘최악’의 기록을 무수히 갱신한 작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금융시스템 불안이 고조된 1998년 4∼6월 기 이후 마이너스 행진이 시작돼 작년 12월에 발표된 7∼9월 기에도 연율로 환산하면 마이너스 3.1%를 기록했다.





    무디스의 낮은 평가


    일본 정부의 국채발행 잔고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연간 GDP에 필적하는 414조엔에 달할 전망이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체의 채무잔고를 합하면 GDP의 1.4배에 해당하는 666조엔에 육박하고 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경기대책이란 명목으로 10년간 10회에 걸쳐 136조엔에 달하는 재정자금을 퍼부었으나 경기가 되살아나기는커녕 날로 악화된 결과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작년 후반 일본의 이같은 재정악화를 이유로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에 대한 신용등급을 AA로 격하시켰다. 이는 선진국 7개국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다.

    또 다른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사의 평가는 더 엄격하다. 무디스는 작년 말 일본의 국채에 대해 대만과 슬로베니아의 국채보다 더 낮은 등급 판정을 내렸다. 닛케이 평균주가는 작년 미국에서 동시다발 테러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9월17일 9504엔41전까지 하락하여 거품경제 붕괴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후 미국 증권시장의 반발에 힘입어 연말에는 힘겹게 1만엔대를 회복했다. 그러나 7, 8할대의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는 고이즈미 정권이 등장한 이후 주가가 오히려 5000엔 가량 하락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보도에 따르면 재임중 갖은 실언으로 지지율이 1할대에 머물던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작년 9월 1만엔대의 마지노선이 무너지자 고개를 한참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재임중 고이즈미 총리의 높은 지지율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같은 지지율밖에는 못 얻었지만 주가는 1만5000엔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완전실업률도 작년 11월 시점에서 5.5%를 기록하여 사상 최악의 상황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 IT산업 불황의 여파로 일본의 IT관련산업에 대량 감원선풍이 불었다. 예컨대 컴퓨터업계 선두주자인 NEC는 세계적인 반도체 불황에 대비하기 위해 1999년 이후 1만5000명 감축계획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NEC는 IT 불황이 날로 심각해지자 4000명을 추가로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컴퓨터회사인 후지쓰는 작년 여름 1만6400명의 사원을 감원하고 4700명의 사원에 대해서는 직장내 부서를 배치전환시킬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가전업계에도 매서운 감원선풍이 불었다. 도시바의 1만7000명 감원, 히타치의 1만8000명 감원,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1만명 배치전환 발표가 바로 그것이다.

    도산 건수도 과거 최악의 기록에 접근했다. 데이고쿠 데이터뱅크의 조사에 따르면 작년 11월 부채총액이 1000만엔 이상인 기업이 도산한 건수는 전후 최악인 1851건에 달했다. 작년 연말까지의 누계 도산건수는 1984년의 2841건에 이어 전후 두번째로 2만건을 웃돌게 될 것이라고 데이고쿠 데이터뱅크는 예측하고 있다.

    대형기업의 도산도 줄줄이 이어졌다. 대형 유통 체인점 마이칼이 작년 9월 도산한 데 이어, 12월에는 중견 건설업체인 아오키건설이 도산했다. 작년에 도산한 상장기업은 모두 10여 개 이상이다.

    도산 예비기업도 상당한 수에 달했다. 작년 말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100엔을 밑돌았던 상장기업이 200여 개, 액면가를 밑돌았던 상장기업도 50여 개에 달했는데, 이런 기업들이 바로 도산 예비기업이다.

    내수를 진작하는 기업 설비투자와 개인소비도 최악의 상황이다. 기업 설비투자 증감의 선행지표인 기계수주액은 작년 7∼9월 기에 이어 10∼12월 기에도 연속 대폭 감소를 기록했다.

    개인소비도 작년 4∼6월 기가 재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1%, 7∼9월 기가 재작년 같은 시기에 비해 1.7%나 감소했다. 특히 소비자 물가가 1999년 10월부터 연속적으로 하락을 계속해 경기와 소비가 동시에 악화하는 디플레이션 악순환 현상이 심각해진 것이 큰 특징이다.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폭도 대폭 축소됐다. 작년의 경상수지는 재작년보다 2.6조엔이 줄어든 약 10조엔을 기록했다. 이는 무역수지흑자가 재작년보다 절반 가량 줄어든 8.6조엔으로 축소된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경상수지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시아 제국의 기술수준이 향상되어 경쟁력이 급격히 향상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고비용 체질 위에 산업과 고용 시스템이 경직돼 있어 신규사업 개척과 산업 고도화가 대폭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또 일본의 경상수지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내산업의 공동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 추세로 간다면 빠르면 3년 이내에 경상수지 흑자가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이런 ‘최악’의 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일본 국내에서는 5월 대란설, 9월 대란설, 연말 대란설 등이 난무했다. 그러나 올해에도 일본의 경제 여건이 나아질 전망은 거의 없다.

    일본 정부는 작년 말 경제대책 각료회의와 임시 각의를 열어 올해의 경제전망을 승인했다. 이 전망에 따르면 올해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0%며, 명목 성장률은 마이너스 0.9%다. 일본은 전후 일관되게 명목성장률이 실질성장률을 웃돌았으나, 1994년 이후 소비세 인상 등의 영향으로 명목과 실질 성장률이 반전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올해의 실질성장률을 대다수 민간 싱크탱크의 예측과는 달리 0.0%로 책정한 것은 최소한 제로성장을 달성하겠다는 단순한 목표치에 불과하다. 그것은 대다수 민간연구소가 일본경제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산와 종합연구소처럼 플러스 0.4% 성장을 예측하고 있는 연구소도 있으나, 24개 민간 싱크탱크 중 무려 22개가 마이너스 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가장 비관적인 것은 다이와 은행연구소가 예측한 마이너스 1.3% 성장이며, 22개 민간 싱크탱크 예측치 평균은 마이너스 0.7% 성장이다.

    가장 낙관적인 예측 시나리오를 펼친 산와 종합연구소는 올해 일본경제는 완만한 경기회복기에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경제가 올해 후반기부터 개인소비와 설비투자가 늘어나 연율 3% 정도의 성장을 보여 일본경제도 생산과 수출이 늘어나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반면 증권회사 계열의 연구소들은 비관론이 우세하다. 국제증권 산하의 국제 리서치센터는 마이너스 1.1%. 닛코 솔로몬 스미스 바니 증권은 마이너스 0.6%, 노무라 종합연구소는 마이너스 0.6%이다. 특히 노무라 종합연구소는 일본의 수출은 올해에도 계속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다. 중국의 수출공세와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비율(34.1%)이 더욱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경제는 올봄 어떤 경로로 대란을 일으킨다는 것인가.

    첫째 경로가, 3월에 예상되는 결산쇼크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작년 일본의 도산 건수는 전후 두번째로 2만건을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도산은 면했지만 주가가 액면가를 밑돌거나 100엔을 깬 상장기업도 25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증권시장은 더 이상 이런 회사들을 상장회사로 평가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외면당한 기업은 언젠가는 도태된다는 것이 요즘의 철칙이다. 예컨대 그룹 전체가 2조3000억엔의 이자부담 상환부채를 안고 있는 대형 유통업체 다이에가 전형적인 도산 예비기업이다.

    다이에의 주가는 작년 9월 하순 최저치인 94엔을 기록했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가 이 회사 채권의 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낮춘 CAA1로 격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후 주거래은행들의 자금지원 약속으로 주가가 100엔을 만회했지만, 중견 건설업체 아오키건설이 도산한 작년 12월 중순 주가가 다시 100엔을 밑도는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형 유통업체인 다이에가 도산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회계감사법인의 엄격한 결산서류 심사도 도산 예비기업군의 도산을 재촉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회계감사법인이 결산 내용을 승인한 기업이 만약 도산할 경우, 회계감사법인이 주주로부터 소송을 제기당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회계감사법인은 3월말에 결산기를 맞는 도산 예비기업들에 대한 감사승인을 엄격히 하게 될 것이며, 회계감사법인의 승인을 얻지 못한 기업들은 자연히 올봄 도태된다는 것이다.

    도산 예비기업들의 도산 행렬은 금융위기로 직결된다. 예컨대 아오키건설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아사히은행은 아오키건설이 도산한 직후 주가가 최저치인 85엔으로 급강하했다. 그후에도 아사히은행의 주가는 57엔까지 내려가 증권시장에서는 도산설과 흡수·합병설이 교차하고 있다.

    다이와은행, 야스다신탁은행 등도 아사히은행처럼 주가가 100엔을 밑도는 도산 예비 금융기관이다. 만약 다이에가 도산하게 되면 미쓰이스미토모은행, 후지은행, 산와은행, 도카이은행 등 다이에의 4개 주거래은행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은행의 존폐문제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올 4월에 실시되는 페이 오프(pay off)제도의 해제도 금융위기를 가속시킬 시한폭탄이다. 페이 오프제도란 금융기관이 도산하는 경우, 예금보험기구가 예금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한 뒤 도산한 금융기관을 처분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처음 생긴 것은 1971년이나, 1995년에 지방은행의 연속 도산으로 예금반환청구 소동이 일어나자 대장성은 당면한 금융위기를 회피하고 금융기관의 건전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 제도를 2001년 3월까지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5년간의 동결기간중 금융기관의 경영상태가 더욱 악화돼 자민당 등의 압력으로 이 제도의 해제는 올 4월로 다시 미루어졌다.

    페이 오프제도는 올 4월부터 두 단계로 나뉘어 해제된다. 우선 올 4월부터 정기예금에 대한 전액보장이 해제되어 1인당 1000만엔에 한해 원금과 이자가 보장된다. 내년 4월부터는 보통예금과 당좌예금에 대해서도 전액 보장이 해제된다.

    이 페이 오프제도가 해제되면 예금자들이 좀더 안전한 은행으로 자신의 예금을 이동시키는 예금 이전 소동이 벌어져 금융기관 전체에 큰 혼란이 빚어지리라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현재 무디스사의 신용등급에 따르면 도쿄미쓰비시은행과 신생은행이 D급이며, 나머지 은행들은 모두 E급이다. 도쿄미쓰비시은행과 같이 신용등급이 높은 은행으로 예금이 몰리게 되면 E급 은행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통예금에 대한 페이 오프해제가 1년 뒤에 실시된다는 점을 들어 올 하반기에는 페이 오프 해제에 따른 은행 도산 제1호가 생겨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그러나 작년 미국 엔론사가 도산한 후 MMF해약이 쇄도하여 약 한달 반 사이에 전체 잔고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은행 도산 1호가 언제 발생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페이 오프 해제에 따라 지방은행과 신용금고 같은 중소금융기관의 타격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래서 자민당 의원들과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페이 오프 해제의 재연기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시스템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페이 오프제도를 해제하면 금융시스템의 불안정 상태를 더욱 가속시켜 일본경제가 위기적 상황을 맞을 것이란 우려에서다.

    올봄 연쇄 대형도산으로 실업자가 크게 증가하고 금융위기가 가속되어 일본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일본발 디플레이션 공황’이 전세계로 파급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일본이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돈은 약 1조8000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이 발행하는 국채의 3분의 1을 소화해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인 것이다.

    만약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미국에 투자한 돈을 일시에 회수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금리가 수직상승해 미국의 경기를 강타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움직임이 미국에서 유럽지역으로 또는 아시아지역으로 확산되면 ‘일본발 디플레이션 공황’이 세계경제를 강타하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닛폰마루(日本丸)’가 올봄 타이태닉호처럼 빙산에 격돌해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작 닛폰 마루 선장 고이즈미 총리는 태연자약하다. 그는 페이 오프 해제 재연기 주장에 대해서 “엄정한 검사, 감독과 도산 처리 과정의 영구화 등을 통해 좀더 강고한 금융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재연기는 불필요하다”고 일축하고 있다.

    그는 연두기자회견에서도 “금융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정부는 대담하고 유연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예정대로 올 4월에 페이 오프 해제를 강행하겠다고 재천명했다. 그는 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처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 기업도산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이 도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어 착실하게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조개혁 없이 경제성장은 없다는 기본노선에 따라 올해에도 재정구조 개혁과 부실채권 처리, 특수 법인 통폐합,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가겠다”고 천명했다.

    작년 5월 발족한 고이즈미 정권은 ‘성역 없는 구조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지금도 7할대의 높은 여론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의 구조개혁 골자는 부실채권 처리, 재정적자 축소, 특수법인의 폐지 내지는 통폐합과 우정사업 민영화 등이다.

    즉 경기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약 150조엔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2∼3년 안에 일소하며, 연간 GDP에 필적하는 금액으로 부풀어오른 누적 재정적자를 삭감하기 위해 도로공단과 같은 특수법인을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우체국 업무를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같은 구조개혁 없이 경제성장은 있을 수 없다면서 ‘선 구조개혁, 후 경기부양’ 노선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선 구조개혁’을 외치는 고이즈미 정권이 등장한 이후 일본경제는 오히려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예컨대 디플레이션 악순환이 더욱 심화돼 경제성장률은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기업 도산이 늘어나 완전실업률도 6%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경기부양의 열쇠를 쥔 부실채권 처리도 오히려 경기가 악화됨에 따라 더욱 부풀어올라 그 실적이 매우 지지부진한 상태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구조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자민당 의원들을 ‘저항세력’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견제해왔다. 그러나 구조개혁에 따라 자신들의 이권을 상실하게 되는 자민당의 이른바 ‘족의원(族議員)’들뿐 아니라, 고이즈미 정권의 외골수 ‘구조개혁 정책’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경제전문가도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노무라 종합연구소의 우에쿠사 가즈히데(植草一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연초 산케이신문과의 대담에서 고이즈미 정권의 외곬수 구조개혁노선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개혁의 방향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 예컨대 규제완화나 재정지출의 발본적 개혁 등과 같이 일본경제의 질적 전환을 지향하는 개혁이라면 대찬성이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처리 즉 문제기업을 도태시키는 것과 긴축재정이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주된 내용이다. 이것은 단순한 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정책은 경기와 경제실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나아가 이런 정책이 계속되는 한 일본 경제의 부상은 기대할 수 없다. 일본경제 부상은 고이즈미 총리가 ‘개혁 없이 성장은 없다’는 노선에서 ‘성장 없이 개혁은 없다’는 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에쿠사씨는 일본경제에 대한 처방전으로 우선 2% 정도의 경제성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른 후에 재정재건과 부실채권 처리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같은 노무라 종합연구소의 리처드 쿠 주임연구원은 ‘일본경제의 생사의 선택’이라는 책에서 일본경제의 침체 원인을 ‘합성(合性)의 오류(誤謬)’라고 지적한다. 즉 모두 올바른 일을 했으나 결과는 그 역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늘의 일본경제라는 것이다. ‘선 구조개혁파’와 ‘선 경기부양파’들의 주장에는 각각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 내각이 외곬수로 구조개혁에 집착하다보면 일본경제는 또다시 ‘합성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선 경기부양파’들은 고이즈미 정권의 구조개혁정책 입안자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담당대신에 대해서도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다케나카 장관은 일본개발은행, 하버드대학 준 객원교수, 게이오대학 교수를 지내다 고이즈미 총리의 경제 브레인으로 발탁돼 입각한 민간인 출신 각료다.

    그는 게이오대학 교수 시절 IT산업 전문가로 매스컴에 자주 출연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당시 그는 일본경제 재생의 시나리오로 IT산업의 급성장을 들었다. 즉 구조개혁에 따른 디플레를 IT산업의 성장으로 커버하고, 구조개혁에 따르는 대량의 실업자를 IT산업이 흡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세계적인 IT산업 불황여파로 NEC, 후지쓰, 도시바, 히타치와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IT관련 기업이 대량 감원을 시작했다. 때문에 ‘선 경기부양파’들은 IT산업 육성에 의한 경제재생 시나리오는 이미 파탄을 맞았다고 다케나카 대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IT산업 육성에 의한 경제재건 시나리오가 파탄을 맞았다면 대안은 있는 것인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일본 정부는 과거 10년간 136조엔의 재정자금을 투입하여 10회에 걸친 경기부양책을 실시했다.

    일본은행도 1999년 2월부터 약 반년간 단기금융시장금리를 제로로 유도하는 이른바 ‘제로금리 정책’을 실시했다. 2000년 8월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해소됐다고 판단해 일단 제로금리정책을 해제했지만, 작년 3월 금리 대신 자금공급량을 금융정책 목표로 하는 ‘양적 완화 정책’을 도입해 실질적으로 제로금리정책을 부활시켰다. 작년 8월에도 양적 완화정책을 확대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10회에 걸친 재정 출동과 일본은행의 제로 금리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악화일로를 걸어 왔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더 이상 유효한 경기부양 카드를 모두 상실한 상태다.

    나아가 작년 9월에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에 의한 미국경제의 침체로 일본경제는 회복의 기폭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다.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일본경제의 최대 문제로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들고 있다. 즉 물가하락-기업수지 악화-구조조정과 임금인하-소비 감소-물가하락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게이오대학의 후카오 미쓰히로(沈尾光洋) 교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경제’라는 책에서 “일본의 물가는 실질적으로 1995년부터 7년간 하락을 계속하고 있으며, 전후 선진국에서 이처럼 장기간 물가가 하락한 예가 없다는 점에서 이상사태”라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작년 일본에서는 유명한 쇠고기덮밥 체인점인 ‘요시노야’가 쇠고기덮밥 가격을 반액인 280엔으로 인하하고,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이 햄버거를 평일에 반액에 판매하는 등 가격파괴 경쟁이 일어났다. 중국에서 주문생산한 의류를 판매하는 염가 의류 체인점 ‘유니크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모든 물건이 한 개 100엔씩 하는 ‘100엔 숍’의 경쟁도 치열해져 ‘99엔 숍’이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후카오 교수는 물가가 하락하면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분명히 혜택이 돌아가나 일본경제 전체로 보면 큰 마이너스라고 지적한다. 즉 연속적인 물가하락으로 기업의 매출액이 줄어들어 실업자가 증가하며, 은행의 부실채권이 늘어나 금융기관이 파탄할 위험성이 커진다.

    또 정부의 세수가 줄어드는 반면 실업수당 등 재정 지출은 늘어난다. 후카오 교수는 디플레이션을 이대로 방치하면 부실채권처리를 비롯한 고이즈미 정권의 구조개혁정책이 곧 좌초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근절할 타개책은 있는가. 작년부터 일본의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돼 온 것이 바로 ‘인플레이션 타깃론’과 ‘엔저 유도정책’이다. ‘인플레이션 타깃론’이란 인플레이션율의 목표를 정해 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중앙은행이 자금공급을 늘려가는 정책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뉴질랜드나 캐나다, 영국 등에서 실시된 적이 있으나, 디플레이션의 타개책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의 억제책으로 도입됐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역으로 디플레이션을 퇴치하는 수단으로 도입이 검토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인플레이션 타깃론자들은 통화량 증대에 따라 물가상승률이 인플레이션 목표치인 3%정도로 올라가면 세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666조엔에 달하는 공공부채를 탕감할 수 있고, 주가와 토지가격이 상승하므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처리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도산 예비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설업체나 유통업체의 재건도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인플레이션 타깃론은 일본은행의 제로금리정책 부활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회복될 전망이 보이지 않은 데서 나온 일종의 극약처방전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일본은행은 인플레이션 타깃론이 제기될 때마다 “경기대책에 유효한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고이즈미 내각이 그 책임을 일본은행에 전가하려는 음모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엔화는 작년 연말과 연초에 걸쳐 급격히 하락했다. 그 배후에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엔저(低) 유도정책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이와 종합연구소에 따르면 엔화 시세가 1달러 125엔에서 135엔으로 하락할 경우, 일본의 실질 GDP가 0.4% 상승하게 되며 도매물가지수는 0.2%, 소비자 물가지수는 0.1%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엔저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경기가 부양되고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퇴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엔저 유도 정책도 인플레이션 타깃론처럼 비아그라와 같은 효험을 가진 회춘제는 결코 아니다. 일본은 현재 1400조엔, 달러로 환산하면 약 11조달러에 달하는 금융자산을 갖고 있다. 만약 엔화시세가 20엔 가량 하락한다면 약 2조달러에 상당하는 금융자산이 거품처럼 날아가는 셈이 된다. 이는 일본의 연간 세수 48조엔의 5년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일본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엔화는 1998년의 엔저 때처럼 150엔대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엔저가 급격히 진행되면 일본에 대한 신인도가 하락하여 ‘일본 팔자’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일본 주가가 폭락하고, 일본 국채에 대한 신용등급 하락과 금리 상승을 유발하여 오히려 경기회복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게이단렌의 이마이 다카시(今井敬) 회장도 “급격한 엔저 현상은 반갑지 않은 일”이라고 전제하면서, “일본에 대한 신인도가 떨어져 장기 금리가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엔저 현상은 수출기업들에는 단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본 기업의 해외생산비율이 3할대에 접어든 지금 모든 수출기업이 엔이 하락한 만큼 수지가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엔이 급격히 떨어지자 오히려 주가가 하락한 것이 좋은 반증이다.

    엔저 유도 정책은 ‘근린궁핍화(近隣窮乏化)’ 정책이나 마찬가지다. 엔저가 급격히 진행되자 중국 정부는 위안화의 평가절하 가능성을 내비치며 엔저 현상을 용인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비난한 바 있다. 엔저 현상이 더 이상 진전되면 아시아 각국이 경쟁적으로 자국통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할지도 모른다. 일본이 궁여지책으로 엔저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국제경쟁력 저하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크스’의 야마다 신지로(山田眞次郞) 대표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연재한 ‘일본의 고민’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1980년대의 일본제품은 중급품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는 고급품의 ‘상(上)의 하(下)’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10년 동안 아시아는 거의 모든 제품에서 일본을 따라잡아 이제는 저급품뿐 아니라 일본의 장기인 중급품, 나이가 고급품의 ‘상의 하’까지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일본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자동차를 제외하면 ‘중의 상’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중국 위협론’과 ‘중국 포용론’이 크게 교차하고 있다. 중국 위협론자들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의 값싼 제품 때문에 중소기업의 도산이 증가하고,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근절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가 작년 4월 중국산 양파와 버섯 등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를 200일간 잠정 발동한 것도 중국 위협론이 그 배후에 깔려 있다.

    반면 포용론자들은 이미 ‘세계의 공장’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국에 적극 진출해 거대 시장을 끌어안는 것만이 일본의 살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들은 또 한국, 중국과도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세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아시아 중시정책과 경시정책을 반복해왔다. 처음에는 조선,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메이지시대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갑자기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면서 조선과 중국을 적대시했던 것이 좋은 예다.

    미국과의 무역마찰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1980년대에도 ‘탈미 입아론(脫美入亞論)’과 ‘엔 공영권 구축’과 같은 구호가 크게 유행했었다. 요즘의 ‘중국 포용론’이나 ‘아시아 회귀론’과 같은 것도 일본이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대두하는 구호에 불과하다. 물론 일본이 응분의 경제적 책임과 경제적 희생을 각오하면서 아시아 중시정책을 외친다면 그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재판에 불과한 것이다. 극심한 ‘쇼와 불황’을 겪으면서 군국주의가 대두해 아시아제국을 침략했던 일본의 과거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구조개혁정책이 국내 저항세력의 반발로 실패할 경우, 이른바 ‘고이즈미 불황’이 일본경제를 강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반면 고이즈미 총리가 외곬수로 구조개혁정책을 고집하는 경우에도 일본경제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세계 제2의 경제거함 ‘닛폰마루’가 지금 어디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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