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위암수술 역경 딛고 내일을 향해 쏜다

‘주부 총잡이’ 부순희

  • 이영미 < ‘일요신문’기자 >

    입력2004-09-16 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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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폐암과 위암으로 언니와 시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 자신마저 위암 판정을 받아 절망 상태에 빠졌던 부순희는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아 현재 집에서 요양 중이다. 주위에선 재기를 부추기지만 허약해진 체력 탓에 아직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현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얼굴은 무척 창백했다.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이미 단호히 거절한 터라 무작정 집으로 찾아간 기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어하는 그에게 “일단 들어가서 얘기나 좀 하자”고 설득하면서도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부담이 컸다.

    몸무게가 준 것 같다고 슬며시 운을 떼자 “수술 후 48kg이던 체중이 43kg으로 떨어졌다”고 답한다. 수술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여전히 수술 부위에 통증이 온다며 인상까지 찌푸린다.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하는 ‘취재원’과 어떻게든 성사시키려 머리를 짜내는 기자 사이에 한동안 어색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픈 사람에게서 무슨 얘기를 듣겠다고 그러느냐”며 항의까지 할 땐 마땅히 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인터뷰 대신 살아가는 얘기나 나누자고 시작한 게 시간이 지나며 인터뷰가 돼버렸고, 그도 이젠 포기했다는 듯 그동안 굳게 빗장을 걸었던 마음속의 짐들을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부순희에게 지난 2000년 한 해는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들 동규(7)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시어머니가 위암으로 그해 10월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국가대표 사격선수였던 언니 신희씨마저 13개월 동안 폐암으로 시달리다 눈감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친정 외할머니도 위암으로 돌아가신 터라 그의 가족사는 암과 지긋지긋한 악연을 맺어온 셈이다.





    청천벽력 같은 위암 판정


    그런 암이 올해초 그에게까지 찾아왔다. 평소 약간의 신체 이상만 있어도 병원을 찾고 종합검진도 정기적으로 받은 터여서 어느 정도 건강엔 자신 있었는데, 이때만큼은 자꾸 배가 아프고 몸이 좋지 않은 게 이상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혹시나’ 하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차례 검사를 받으면서 제발 자신만은 암이 아니길 간절히 기원했다. 짧은 시간에 이미 소중한 가족들을 잃은 데다 그마저 암으로 판명 난다면 더 이상 지탱할 힘조차 없을 것 같았다. 며칠 뒤 결과를 알아보려 다시 병원을 찾은 그는 혼자였다. 남편이 출장으로 집을 비운 것이다.

    “정말 무서웠어요. 느낌이 안 좋았거든요. 담당의사의 방문을 노크하는데 너무 떨려 도무지 진정이 안되더군요. 그런데 예감이 적중했어요. 위암 초기란 거예요. 일찍 발견해서 수술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지만,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언니가 생각났어요. 언니라도 옆에 있다면 이렇게 떨리지 않을 텐데…. 병원 문을 나서는데 남편 얼굴이 떠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너무 불쌍한 거예요. 가족들이 저마다 암으로 고생하는 걸 지켜본 제 입장이 어땠겠어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진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과를 전해들은 형부가 그새 남편에게 전화했던 모양이에요.”

    아내마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최재석씨는 출장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관에서 아내를 껴안고 한참 통곡했다고 한다. 어떤 위로도 필요없었다. 그들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암 판정을 받은 뒤 부순희는 17년간 분신처럼 붙이고 다닌 권총을 손에서 놓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한편으로 한국여자권총계 1인자로 화려한 시절을 구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났다. 돋보이는 국제대회 수상 경력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무대를 평정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으로 남았지만,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삼성의료원에서 받은 수술의 결과는 대성공.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완쾌될 수 있다는 의료진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퇴원하는 날, 남편이 이런 얘길 했어요. 새롭게 태어났으니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요. 그동안 사격한다는 핑계로 굉장히 이기적이고 예민하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시합 앞두고선 긴장감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신경이 곤두서곤 했죠. 그런 나 자신도 힘들고 지겨운데, 옆에서 지켜본 남편은 오죽했겠어요? 그런 남편의 존재와 배려에 새삼 감사하게 됐습니다.”

    “전 언니 때문에 사격을 시작했어요. 언니의 지도 덕에 일찍 태극마크도 달았고, 운동이 힘들 때마다 언니에게 의지하며 정신적 지주로 삼았죠. 처음엔 엄마나 형부조차 언니의 병을 제게 정확히 알리지 않았어요. 폐암 초기라 수술 안하고 항암치료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니의 상태가 영 좋지 않더라고요. 7개월 될 때까지 몰랐으니 제가 너무 무심했던 거죠. 나중에 알고 나서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죽음을 기다리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어요.”

    제주여상 1학년 때인 1983년 처음 총을 잡은 그는 운좋게도 3년 6개월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언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니는 은퇴 후 소속팀인 국민은행에 근무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릴 때마다 제주 대표로 동생과 함께 출전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때마다 잔소리처럼 했던 충고가 있었다. 총 쏘는 오른손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당부였다. 잘 때도 왼쪽 방향으로만 자고, 오른손으론 절대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동생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한 언니. 엄마처럼 다정했고 친구처럼 허물 없었으며 애인처럼 사랑을 아끼지 않던 그가 2000년 12월29일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는 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한동안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언니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데다 무덤 앞에서 통곡해봤자 가슴만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러다 자신의 병을 알고 난 후 수술받기 바로 전날 처음으로 언니한테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주저앉아 신세 한탄하며 언니의 위로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언니를 너무도 좋아하고 그리워한 나머지 병까지 닮아가는 것 같다”는 탄식과 함께 언니의 영혼을 가슴에 묻고 돌아와야 했다.

    88사격단에서 훈련받던 당시 체육부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중인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던 그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준 이가 바로 남편이었다. 1992년 결혼 후엔 그때껏 맛보지 못했던 행복감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나 아들 동규가 태어나면서 가정은 ‘전쟁터’로 변했다. 사격선수로 활동하면서도 주부, 며느리, 엄마, 아내의 다양한 역할까지 욕심껏 소화하려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몸이 축난 것.

    아이는 시어머니가 맡아주었지만 한시적이었다. 동규가 유치원에 갈 시기까지 키워주시고 나서 시부모가 분가를 한 것. 자연히 유치원에서 돌아온 동규를 돌봐줄 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어머니께 죄송한 부탁을 드리려는데 시어머니가 암에 걸린 사실이 밝혀졌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신 바람에 언니를 찾아갔는데 이번엔 언니까지 아프더라고요. 아이 문제에다 시어머니와 언니의 병까지 겹쳐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투병중인 식구들을 남겨두고 출전한 시드니올림픽 성적이 좋을 리 있겠어요? 그때까지 쏴본 적 없던 최저 기록이 나왔어요. 어이가 없었죠.”

    그는 주종목인 스포츠권총 본선에서 최악의 기록인 573점(대표선발전 기록은 585점)으로 25위에 그쳐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꼭 금메달을 따 투병중인 시어머니와 언니에게 기쁨을 안겨주려던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됐다. 94세계선수권, 97밀라노월드컵, 98뮌헨월드컵, 99월드컵파이널스 등을 제패하며 스포츠권총과 공기권총에서 10년 넘게 세계 정상에 오른 그이지만,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에 데뷔한 뒤 그가 줄곧 갈망한 것이 올림픽 금메달. 그러나 92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선발전에서 탈락해 출전하지 못했고, 96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불운은 계속됐다. 마지막 희망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한 2000시드니올림픽에서조차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하자 상심은 더욱 커졌다.

    뒤늦게 사격을 시작했음에도 천부적인 ‘총잡이’로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그의 장점은 155cm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위압할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국제대회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인 것. 10년 이상 정상에 있었으니 때론 지치고 흔들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을 법한데, 단 한번도 그런 일탈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시합 때 다 잊어요. 10점 만점을 받았을 때는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지요. ‘이번에 못했으니 다음엔 잘하자, 난 잘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어 마음을 진정시키죠. 다음 대회를 기다릴 때마다 맛보는 긴장과 스릴의 느낌도 아주 좋아요.” 그는 의무와 책임 때문에 총을 쏜 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며 고독한 승부의 정점에 서는 치열함에 매료됐다고 한다.

    흐트러진 가정을 추스르기 위해 시드니올림픽 후 한동안 사연 많은 태극마크를 반납하기로 했다. 집안 형편상 국가대표 생활을 계속하기가 힘들어 다시 국가대표에 소집되더라도 응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가정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태극마크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연맹과 가족들의 권유로 지난해 다시 권총을 잡았다. 가정이 안정을 찾아갔고 아이를 맡아줄 사람도 나타나 집을 비우는 데 대한 걱정을 덜었기 때문. 그러다 다시 암으로 쓰러진 것이다.

    요즘 부순희는 김미영 한빛은행 감독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하루 빨리 컨디션을 회복해 옛 명성을 되찾으란 주문인데, 솔직히 자신이 있다가 없다가 한다. 재기 가능성을 70% 정도 확신하지만 과연 체력이 뒷받침해 줄지 여부로 갈등을 겪는다는 것. 남편은 체중을 예전처럼 회복시킨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며 펄쩍 뛰고, 그 자신도 누웠다 일어나면 현기증이 심해 권총을 잡는다 해도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올해 우승기를 2개나 다른 팀에 넘겨줬는데 아직 하나도 되찾지 못했다. 네가 없으니 후배들까지 힘이 빠진다.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김감독의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팀 관계자와 후배들 볼 면목이 없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사격에 매달려 살아왔는데도 사격은 여전히 그를 잡아끄는 매력과 숙명으로 다가온다.

    인터뷰 도중, 라이벌로 삼았던 선수는 누구였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국내엔 라이벌이 없었어요. 모두 후배라 누굴 의식하며 총을 쏜 적이 없었죠. 국내대회보다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이 나왔는데 상대 선수를 잘 모르는 마음 편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러 집중이 잘됐던 것 같아요. 그래도 외로웠어요. 선배가 없다보니 운동이 힘들 때도 하소연할 대상이 없어 마음이 아팠죠. 그래서 결혼한 남자선수들과도 곧잘 어울렸습니다.”

    그는 지난 35년간의 인생살이 중 어느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플까.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도 92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치른 대표선수 선발전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결혼 후 총 쏘는 데 안정감을 얻었고, 성적이 계속 상승곡선을 이뤄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한 발을 실수하는 바람에 출전 티켓을 후배에게 넘겨야 했던 것. 당시 사격에서 이은철과 여갑순이 금메달을 목에 걸어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터라 그 모습을 TV로 지켜본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올림픽에서 메달 하나 정도는 딸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엔 경험 부족에다 위기관리 노하우가 없어 아쉽게 탈락하는 바람에 올림픽 노메달의 한이 지금까지 남은 거죠.”

    고리타분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사격계의 ‘대모’로서 후배들에게 전하는 단소리 쓴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전엔 체력보다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아프고 난 뒤론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 한 정신력이 살아날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시드니올림픽 때 인기 스타로 떠올랐던 강초현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비쳤다. “초현이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어린 나이에 분에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하늘을 날다 어느날 정신 차리고 보니 예전에 걸었던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면, 순간적 인기에 도취된 선수와 그 선수를 한낱 ‘전시용’으로 전락시킨 사격 관계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죠. 실력 있는 선수여서 언젠가는 다시 진짜 실력을 뽐낼 기회가 반드시 있을 거예요.”

    부순희란 이름 앞에 항상 따라붙는 타이틀 ‘주부 총잡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한동안 국내 스포츠계에 결혼한 미시 선수들의 복귀가 붐처럼 일면서 ‘주부’란 이미지에 많은 관심이 쏠린 데 따른 별칭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엔 결혼하고도 선수생활 하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주부들이 총을 쏩니다. 우리 팀만 봐도 8명 중 6명이 아줌마들인데요? 이젠 주부가 ‘총잡이’ 노릇해도 특별하지 않아요. 사격 인구가 줄다보니 생겨난 현상인데, 은퇴 연령 제한이 없어 앞으론 미혼보다 기혼자들을 찾는 게 훨씬 빠를 거예요.”



    재기 꿈꾸는 ‘돌아온 총잡이’


    한창 대화중인데 학교에서 돌아와 낮잠을 즐기던 아들 동규가 일어나 엄마를 찾는다. 아들을 품에 안은 그의 얼굴이 모처럼 환해진다. “전에는 동규를 맡길 데가 없어 마음 졸였는데 지금은 동규와 함께 지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얘기를 흘린다. 그때 소속팀 김감독의 딸 지현이가 동규를 찾아왔다. 동규의 장래 색시감이라고 소개한다. 동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엄마 빼고 지현이만큼 예쁜 여자는 보지 못했다”고 해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그는 가끔 동규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면 인형을 잔뜩 가져온다고 했다. 장난감 총으로 인형을 맞추면 그 인형을 상품으로 주는 게임이 있는데 그가 한번 총을 잡으면 진열된 인형을 거의 다 쓰러뜨려 게임장 주인의 눈총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그래도 동규가 워낙 좋아해 신분을 숨기고 장난감 총을 든다며 활짝 웃는다.

    작은 체구지만 그에게선 특유의 강단이 느껴진다. 그 강단으로 17년을 사격계에서 버티며 단 한번도 1인자 자리를 내주지 않고 공기권총의 대모로 지내온 사실이 왠지 새삼스럽다. 마지막으로 언제쯤 복귀할 것이냐고 모르는 척 다시 물어보았다.

    “남편은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두라지만, 은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일단 목을 빼고 기다리는 팀을 위해서라도 6월쯤에 다시 나갈 생각이에요. 물론 그전에 몸을 원상태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죠. 벌써부터 총이 그리워지네요.”

    재기를 확정짓지 않으면서도 말 곳곳에선 재기를 향한 강한 욕구가 감지됐다. 다시 암으로 고생할 일은 없지 않겠냐며 안도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연민까지 전해왔다.

    그에게 더 이상 무서운 적은 없을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은 지금 좌절과 시련은 옛 일이 됐다.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다시 사선으로 나설 희망을 품은 그가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또 한번 ‘주부 총잡이’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으면 한다. 그런 간절함을 뒤로 하고 ‘초대받지 않은’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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