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해리 포터와 함께 상상의 나래를

  • 이옥순 < 한국아세아연구소 부소장·인도사학 >

    입력2004-09-16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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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부터 남독(濫讀)이 심한 내가 해리 포터를 만난 건 겨우 지난 겨울방학이 돼서였다. 명색이 학자인지라 전공서적이나 연구와 관련된 인접 학문의 책을 읽는 데도 늘 시간이 빠듯하다는 것이 그 책과의 늦은 상면(相面)에 대한 변명이라면 변명일 게다. 방학을 틈타, 모처럼 200여 국가에서 47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1억권 넘게 팔린 그 책의 비밀을 캐보고 싶었다. 그렇게나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듯싶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른바 ‘벤치마킹’의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교와 분석이란 합리적 잣대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나는 곧 작가 롤링이 정교하게 짜놓은 유머와 상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번개 흉터를 지닌 11세의 해리를 따라 킹크로스역(驛)의 9와 3/4 승강장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떠난 나는 그와 함께 빗자루(님부스 2000)를 타고 하늘을 날며 퀴디치를 하거나, 유령과 마술사들을 만났고, 악당인 ‘그 사람’과 대결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나는 독서삼매(讀書三昧)를 경험하며,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을 단숨에 읽었다.

    그렇게 이치를 따지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가던 어린 시절이 새삼 떠올랐다. 앞산과 뒷산의 거리가 1km도 채 안되는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내게 책 속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는 오늘날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는 아이들이 상상하는 마법의 세계처럼 흥미롭고 경이로웠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작은 산골마을의 일상은 대단히 지루했다. 현란한 TV도, 바깥 세상을 알려주는 그 어떤 미디어도 존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나는 자주 흑백의 일상을 탈출해 컬러의 책 세상으로 들어가곤 했다. 거기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서울이란 곳과 수많은 나라들,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이뤄내는 복잡한 삶의 궤적이 가득했다. 나는 그것들을 마음껏 상상하고 꿈꾸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도서반장이 되어 도서실 열쇠를 책임지는 ‘특권’을 누렸다. 돌이켜보면 작은 공간에 책장 서너 개와 1000여 권의 책이 전부인 초라한 도서실이었지만, 그곳은 어린 내게 광대한 우주와 다름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도서대장을 정리한 뒤 매일 두세 권의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엔 그 두 배를 읽은 적도 많았다. 동생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느라 빌려온 책을 곧바로 읽지 못할 때에는 마치 먹을거리를 두고 조건반사를 실험당하는 개처럼 애가 탔다. 그러다 마침내 침침한 등잔불 아래 책을 마주하면 동굴 앞에서 ‘열려라 참깨!’를 외치는 알리바바의 두근거리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나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듣지 못했다. 동생이 울고 있어도 잘 몰랐다. 결국 청각장애를 의심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대처의 병원을 구경하게 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러나 산골학교 작은 도서실의 책은 곧 바닥이 났고, 나는 배고픈 늑대처럼 책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 헤맸다. 오랜 남독 습관은 책이 귀한 그 시절의 유산이다. 지금은 어릴 적의 바람대로 늘 책에 묻혀 살지만, 욕심과 복잡한 생각을 가진 어른이 된 뒤에는 좀처럼 독서삼매에 빠져들지 못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으면서 경험한 몰입의 즐거움이 소중한 건 그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해리 포터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게 된 것은 인도에서의 오랜 유학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학교와 기숙사 제도를 본뜬 인도의 대학 기숙사에서 6년이나 생활한 내게는 해리와 친구들이 그리핀도르나 슬리데린의 기숙사에서 겪는 생활과 모험이 낯설지 않다. 상상의 세계를 다룬 책이라도 그 바탕은 이렇듯 현실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미 서양문화에 익숙한 우리 아이들이 서양의 환상문학 전통에서 자라난 이 책을 통해 더욱 그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수많은 아이들은 책을 통해 영국의 가치와 생활방식을 내면화한다. 그러한 상상의 세계는 때로 현실보다 오래 간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의 세계를 그렸다. 거기에다 마법의 세계를 더해, 산골동네에서 산 너머 넓은 세상을 두고 다년간 갈고 닦은 내 상상력을 한껏 뛰어넘는다. 착한 해리가 악의 화신을 물리치는 일차원적 주제. 그러나 수많은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과 우편배달부인 흰색 부엉이, 여러 마법사를 비롯한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여 아이들 세상인 학교를 배경으로 활동을 펼치는 까닭에 흥미진진하다. 국어와 산수가 아닌 마법과 약초제조법 등을 가르치는 학교의 여기저기에 비밀통로가 나 있고, 인근엔 ‘금지된 숲’이 있어서 금기(禁忌)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책 곳곳에 단서를 두어 문제 해결에 이르는 스릴러 형식을 취해 독자들을 끝까지 매혹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법과 마법사의 세상은 어른의 세상과 다르다. 아이들이 가진 불안, 바람(願), 두려움, 학교생활의 공정성 등에 관한 심리를 잘 파악한 작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험 가득한 세계를 그려내며 어른 세계를 코믹하게 꼬집는다. 현실세계에서 아이들은 작고 무력하며 단순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선 맘껏 날아다니고 어른처럼 의젓하며 강하다.

    해리는 전지전능하다. 미숙한 아이가 마치 성숙한 탐정인 셜록 홈스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어린 날 내가 책 속에서만 그 산골을 벗어날 수 있었듯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상상과 환상의 매력이자 그 정수다. 그러나 해리는 그런 능력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에게 능력은 제대로 쓸 때 가치 있는 법이라고 일러준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선한 마법사와 어둠의 마법사가 엇갈리는 건 그 어디쯤에서다. 나는 아직 선과 악이 분명히 구분되는 세상이 좋은지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일도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상상, 그 ‘마법적 현실’의 시작


    그렇다면, 현실을 망각하고 마법의 세계에 빠져든다고 해서 해리 포터를 읽는 아이들과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일단의 성인 독자들을 경계하는 우려는 타당한 것일까.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는 욕망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라 욕망이 드러나는 무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을 하나 더 가진 셈이다. 어릴 때 산골소녀인 나는 상상 속에서 ‘날아가는 양탄자(해리의 님부스 2000과 같은)’를 타고 산을 넘어 먼 세상을 여행했다. 그 꿈 또는 욕망은 어린 날의 상상 속에서 충족되지 않고, 어른이 된 뒤 상상력의 보고(寶庫)인 인도에 유학하는 것으로 귀결됐을 가능성이 있다. 상상은 이렇듯 종종 현실의 시작일 때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놀라운 환상의 세계를 그려낸 작가 롤링의 인생 반전이야말로 상상이 현실로 바뀐 좋은 예증이리라. 그녀의 이른바 출세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여 마법의 세계에서나 가능해 보인다. 가난한 작가 지망생이던 그녀가 순식간에 근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들면서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일부 사람들은 주인공 해리를 돕는 덤블도어 교장의 마법을 연상한다. 그것을 우리 ‘머글(보통 사람)’은 희망이라고 부른다. 아이와 어른의 간격을 줄인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까지도 가깝게 만든 것이다.

    산골에서 바깥 세상을 꿈꾸던 나는 나이를 먹은 지금도 날아다니거나 절벽 같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꿈을 자주 꾼다. 그런데 얼마전 만난 어떤 동양학자가 전생의 업(業)이 가벼워서라고 일러줘 짐을 한결 덜었다. 그렇다. 브레히트의 표현을 바꿔 말하면, 너무 끈질기게 상상의 세계를 쫓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다 지나쳐서 상상의 세계가 우리 뒤에 남겨질지도 모르므로. 그런 이유로 이번 여름엔 상상과 사실의 중간에 자리한, 어릴 적 즐겨 읽은 셜록 홈스를 다시 찾아 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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