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이슬람 근본주의’는 유령일 뿐

  • 정수일 박사

    입력2004-09-16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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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사(史)에는 이슬람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이단(異端)이 나타난 바 없다. 이슬람 자체가 근본주의이기 때문에 따로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말이 생겨날 수가 없다. 이슬람은 또 정교합일(政敎合一)의 공동체적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지키려는 반(反)외세 투쟁으로 표출된다. 이슬람은 근본정신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서구사회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대안문명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슬람은 여느 종교와 달리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정교합일(政敎合一) 체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간여하게 되는데, 그러한 문제해결의 방도로 각기 다른 형태의 사회운동을 택하고 있다. 이슬람이 출현한 후 지난 1400여 년간, 특히 근·현대에 와서 기복무상(起伏無常)하게 일어난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그 지향성에서 대체로 종교로서 이슬람의 순화(純化)와 그에 바탕을 둔 이슬람사회의 개혁이란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왕왕 이상에 그치고 그 실현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작금의 이슬람 사회운동은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나름대로 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이슬람 역사 발전의 산물이다. 이를테면 일정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발생하고 발전하였으며, 그 성격과 결과가 규제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은 우선, 이슬람교의 전통교리에 대한 도전과 응전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 최초의 사회운동이라고 하는 이른바 ‘살라피야운동’의 출현이다. 압바스조 이슬람제국(751~1258)의 건립을 계기로 이슬람교가 다양한 문화전통을 가진 피정복지에 뿌리내리고 이슬람 신학의 정립이 불가피한 과제로 제기되자, 이슬람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었다.



    ‘이슬람통일운동’의 뿌리


    이러한 요청에 부응코자 사변신학파(思辨神學派, al-Mutakallimn)인 무으타질라파(al-Mu’tazilah)는 이성(理性, al-ra’y)과 유추(類推, al-qiys), 은유적 해석(隱喩的 解釋, al-ta’wl)의 방법으로 경전 ‘꾸르안’을 재해석하면서, 영원불변한 것은 오로지 알라뿐 경전도 알라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꾸르안 창조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더해 제7대 칼리파 마어문(재위 813~833)은 이 무으타질라파의 사변교리를 국교로까지 공인하였다. 이것은 ‘꾸르안’이야말로 천상에 영원히 보존되는 원판의 일부를,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하달했다는 정통적인 ‘꾸르안 영원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에 이맘 한발(780~855)을 비롯한 전통주의자들은 초기 무슬림들이 시종 믿어온 ‘영원설’을 고수하기 위해 ‘살라피야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을 시발로 그후 이슬람사회 곳곳에 만연한 수피즘(신비주의)과 범신론(汎神論), 심지어 미신적 관행, 그리고 근·현대의 종교적 세속화를 막기 위한 사회운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다음으로 그 역사적 배경은 이슬람세계의 약화 및 후진성과 그에 맞선 대응이다. 중세 전반 황금기를 누려오던 이슬람세계의 약화는 분열에서 비롯되었다.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칼리파를 정점으로 한 통일 이슬람세계의 존재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제국의 뒤를 이어 출현한 오스만제국 시대(1299~1922)는 이슬람의 다극화(多極化)·다중심(多中心) 시대로서, 지역성이 부상하고 외세의 분할통치마저 강요됨으로써 지난날 이슬람제국의 통일과 무슬림들의 연대에서 오는 영광과 위력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이슬람세계는 약화 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추이를 갈파한 일부 지성인들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정교합일의 킬라파제(繼位制)에 의한 초민족적, 초국가적, 초지역적 통일 이슬람제국의 재건을 구상하고 그 실현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들이 바로 19세기에 대두한 ‘범이슬람주의’ 신봉자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이념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산산조각이 난 이슬람세계를 다시 하나로 묶어보려는 현대의 ‘이슬람 통일운동’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세계의 약화와 더불어 나타난 후진성은 그 극복을 위한 사회운동을 유발시켰다. 특히 근·현대에 와서 경제와 문화를 비롯한 사회생활 전반에서 선진 유럽에 비한 낙후는 여러가지 사회적 갈등과 부조리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로 하여금 상대적 소외감에 젖게 하고 그들의 분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일부 선각자들은 사회개혁을 통한 현대화의 혁신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이슬람세계에 확산된 현대주의나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이슬람 사회주의가 그 좋은 본보기다.

    끝으로, 이슬람의 사회운동을 잉태한 역사적 배경은 서구문명의 영향과 그 대응이다.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효시(嚆矢)로 19세기 중엽부터 이슬람세계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침략이 본격화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거의 모든 이슬람국가들은 서구의 식민지라는 멍에에 짓눌려 있었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가혹한 정치적 박탈과 경제적 수탈 및 문화적 침투는 전통 이슬람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놓았다.

    대전 후에는 이슬람세계의 심장부인 중동에, 아랍인들이 ‘심장에 꽂힌 비수’라고 개탄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세워놓음으로써, 급기야는 풀기 어려운 팔레스타인문제가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미·영의 7대 메이저(Majors, 국제적 대석유회사)들이 세계 석유 매장량의 60%를, 세계 석유 수출량의 70%를 차지함으로써, 이 지역은 항상 일촉즉발의 ‘경제전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오늘날 중동이라고 하면 으레 일촉즉발의 화약고(火藥庫)나 전쟁다발지역으로 연상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침탈과 불안의 역사는 서구문명에 대한 무슬림들의 불신과 저항을 조장해 왔다. 서구식 배금물신주의(拜金物神主義)가 무슬림들의 정신세계를 좀먹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만 없으며, 지난날 서구 메이저들이 타작하고 난 뒤 떨어뜨리고 간 이삭이나 줍는 가냘픈 처지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세계 주인들의 한결 같은 의지이고 분발이다. 이러한 의지와 분발은 지위나 직업, 사상이나 이념을 뛰어넘어 한 곳으로 모아져 왔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사회운동에서 보수건 혁신이건 간에 다같이 유해한 서구문명의 침투를 방어하고 그 영향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세르는 이슬람 사회주의가 정통 사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해명하면서 주요 차이점으로 종교의 신봉, 계급독재의 부정, 사유제의 유지, 폭력혁명 거부 등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 사회주의는 이슬람의 근본원리와 전통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사회주의적 시책들을 절충적으로 받아들여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의 세속화나 실용화의 우를 범하게 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작금 이슬람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혼미스러운 것이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다. 13억 인구에 50여 개 나라를 아우르는 이슬람 세계에서 보수나 혁신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모든 이변들, 특히 조그만 외향성을 띤 일이 일어나면 싸잡아 이슬람 근본주의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언론계나 학계의 중론이다. 이러한 중론의 진원(震源)이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용어에서부터 개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애매모호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슬람근본주의’란 허상(虛像)을 실상(實像)인 양 사변화하고 오도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차제에 한 가지 밝힐 것은 ‘근본주의’와 ‘원리주의’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이슬람 원리주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지칭이라는 점이다.

    계기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얼토당토 않은 일종의 허상이요 유령이다. 원래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미국의 한 기독교 교파인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일어난 보수주의 종교운동이다. 18세기 전반 미국에서 성행한 ‘천년왕국운동(千年王國運動)에 뿌리를 둔 이 운동 가담자들은 1902년에 ‘미국성서연맹’을 결성하고 1910년부터 1912년 사이에 ‘근본적인 것, 진리의 증언’이란 제하의 소책자 12권을 시리즈 형식으로 발간하여 자기들의 반모더니즘적 입장을 설교하였다.

    여기에 연유해 그들의 주의주장을 ‘근본주의’라고 명명하였다. 19세기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부정하는 이른바 ‘성서비판학(신앙상의 예수 분리론)’ 등이 대두되어 기독교의 세속화와 자유화가 심화되자 성서의 무오류와 축자적(逐字的) 해석, 예수의 신성, 동정녀의 탄생, 그리스도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출현한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의 근본주의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근본을 살리기 위한 운동(사상)으로서, 용어와 개념은 적절한 선택이고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오늘에 이르는 1400여 년간의 이슬람 역사에서 근본교리나 6신(信) 5주(柱)(여섯 가지 믿음과 다섯 가지 종교의무)를 비롯한 ‘근본적인 것’이 도전받거나 거부되어 그것을 회복하거나 지키기 위해 ‘근본주의’ 같은 것이 필요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슬람에서의 경전 ‘꾸르안’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이어서 비판의 여지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이슬람은 자체가 근본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따로 어떤 ‘근본주의’ 같은 것이 이슬람과 병존한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근본이 없는 ‘근본주의’를 떠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원래부터가 이슬람에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경전 언어인 이랍어에는 ‘근본주의’란 단어가 없다. 근간에 하도 외부에서 왈가왈부하여 ‘우수릿야’(al-Is lya, 근원적이란 뜻)라는 유사 조어(造語)가 나왔으나 정통 이슬람학자들은 무시하고 있다. 사실 ‘이슬람 근본주의’란 낱말은 유럽인들이 처음 만들어냈다.

    영국의 이슬람 연구의 태두(泰斗) 왓트는 1988년에 펴낸 책 ‘이슬람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에서 전통적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대로 실현하려는 자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전통적 세계관을 몇 가지 측면에서 수정하려고 하는 자들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하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편찬한 세계종교 부흥관련 연구논문에는 ‘다른 적절한 대체어가 없지만’ 이슬람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에는 ‘전투성’이란 상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이슬람 근본주의’란 말을 채택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통 고수의 보수주의이며, 그 용어는 ‘전투성’ 때문에 차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를 근본주의로 보는 것은 기독교적 개념이다. 이 개념대로라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의당 보수사상만을 망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 근본주의 주창자들은 보수주의뿐만 아니라 ‘개혁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행동주의’, 즉 혁신주의마저도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오류와 혼탁은 연구의 가설(假說)이나 분석의 방편에 불과한 차용어가 ‘본래의 것’으로 착각되어 용어와 개념이 불일치 내지는 괴리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 정치사상사에는 통칭 근본주의라는 실체가 없다. 사상조류사 측면에서 보면 역대 이슬람사회에도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항시 손등과 손바닥 관계와 같은 보수와 혁신이라는 위상적 대립관계만이 존재해 왔다. 지난 1, 2세기 동안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종교신앙과 사회정치 및 생활규범의 복합체로서의 이슬람에도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여 여러 가지 사상조류와 그에 따른 사회정치운동이 발생하였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그 흐름은 크게 보수주의와 혁신주의의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외에 따로 근본주의란 사상조류는 없었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논자들이 지적하는 내용(일부 극단행동 포함)은 이러한 보수와 혁신의 두 가지 사상조류에 두루 섞여 있을 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한낮 유령에 불과한 허상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단지 ‘전투성’이란 상사성(相似性) 때문에 차원이 전혀 다른 타종교의 근본주의에 어거지로 접목시켰다는 데 있다. 원래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출발할 때부터 많은 분파들의 출몰이 이어지고 그 발전과정에서, 특히 후기에 오면 비타협적인 전투성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비난을 받게 되자 스스로 ‘복음주의’니, ‘보수적 복음주의’ 등의 이름으로 바꾸어버렸다.

    전술한 시카고대학의 연구논문을 보면, 이른바 이슬람의 ‘전투성’에서 오는 공통성을 감안해 ‘이슬람 근본주의’란 대체용어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따질 때 표출양식이나 행동방식에서 어떤 비본질적인 한두 가지의 공유성이나 상사성만을 근거로 하여 정연한 내재적 논리구조를 가진 주의나 학설에 무턱대고 연유시킨다는 것은 무리이고 비과학적인 접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원래 종교와 폭력은 양립할 수 없다. 종교가 종교임을 그만두기 전에는 사랑과 평화를 자기의 이념으로 추구하는 법이다. 종교로서의 이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대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스콜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아퀴나스가 느닷없이 내뱉은 ‘한 손에는 꾸르안,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것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양, 경전 속의 어느 한 구절인 양 오인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이슬람은 폭력의 종교로 비치게 됐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호전성’이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된다는 식의 연역논리로까지 이어졌다. 바로 이러한 이슬람의 ‘전투성’이나 ‘호전성’ 때문에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가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기실 이슬람사상은, 극단을 배격하는 동양적인 중용사상(中庸思想, al-wasatya)이다. 오늘날 이슬람세계에서 대표적인 ‘근본주의’ 집단으로 지목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운동의 사상이론가인 까르다위마저도 현대 이슬람부흥운동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조류는 ‘이슬람적 중용조류(中庸潮流)’라고 하면서, 그 내용으로 원초(전통)주의와 혁신주의의 배합, 불변요소와 가변요소의 균형, 경직성과 외세 추종으로부터의 해방, 이슬람에 대한 포괄적(신앙, 사회, 정치, 입법 등 측면)인 이해 네 가지를 꼽고 있다.

    평화와 중용을 지향하는 이슬람과 무모한 폭력이나 극단적 행동은 애당초 불가상용적(不可相容的)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중동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세계는 동·서의 틈바구니에 끼여 역사상 빛나는 기여도 했건만, 근·현대에 와서는 너무나 많이 찢기고 당하면서 약자로 변모했다. 인간이 항시 화약고(중동에 대한 비유) 속에서 살다보면 비운에 떨기도 하지만 악에 받치기도 한다. 그래서 부득불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사회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소수의 급진파나 극단파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전체일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도 없다.

    이상에서 근·현대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대표적인 사회운동을 보수와 혁신의 2대 부류로 나누어 간략하게 고찰하였다. 복잡다단한 이슬람의 사회운동을 통관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은 우선, 모든 사회운동은 이슬람교란 특정 종교를 기조로 하여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보수주의운동은 물론이거니와 혁신주의운동도 예외 없이 이슬람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운동의 방향이나 내용을 설정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주의 같은 급진적인 사상조류마저도 경전 ‘꾸르안’의 경문 속에서 그 입지를 찾고 있다.

    다른 종교사회와는 달리 정교합일의 이슬람사회에서는 이슬람교가 모든 사회운동의 기조를 이루면서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항시 병행한다. 이슬람교를 떠난 사회운동이란 상상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사회운동이 이슬람교란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격이나 내용 면에서 서로를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범이슬람주의의 주창자인 아프가니가 현대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경우에서 보다시피 운동의 이중성이나 위상적 관계의 변화를 자주 찾아보게 된다.



    反외세는 공통적 슬로건


    다음 특징은, 이슬람의 모든 사회운동은 부흥이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사회운동을 무슨 ‘주의(主義)’니 무슨 ‘운동’이니 하고 일일이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일괄하여 ‘부흥(아랍어로 나흐돠, 쏴하워, 바아스)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때 시리아와 이라크의 혁신주의운동을 주도한 바아스당이 바로 부흥당이다. 그들은 수구적인 보수주의운동도 이슬람적 전통생활규범을 회복하여 사회를 정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부흥운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부흥’이란 명분이 극단적으로 강조되거나 왜곡될 경우, 여권(女權)을 무시하는 등 현대문명에 역행하는 폐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부흥’은 사회진보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이슬람의 사회운동, 특히 보수주의운동의 성격에 관해서는 실사구시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같은 보수주의라도 서구와 이슬람의 보수주의는 그 지향성에서 다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서구 보수주의는 대체로 현상 유지와 기득권 보호를 중심과제로 삼고 있지만, 이슬람 보수주의는 여기에다가 혼탁과 퇴색으로부터 이슬람 고유의 전통과 순수성을 되찾고 지킨다는 복고와 수구의 지향이 추가된다.

    흔히들 이슬람세계에 상존하는 정교합일의 국가체제를 후진성으로 비난하기도 하는데, 그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구 기독교세계에서는 당초 로마제국 속에 비로마적인 기독교가 침투해 장기간 마찰을 빚어오다가 마침내 정교분리(政敎分離, 수평분리)의 국가체제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에 반해 이슬람세계에서는 처음부터 이슬람 공동체(움마)라는 국가체제가 복합체적인 이슬람과 결합되어 출현함으로써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가 없이 줄곧 합일(유착)관계를 유지해 왔다.

    끝으로, 이슬람의 사회운동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보편적인 반외세(反外勢) 경향이다. 종교적 및 사회적 정화를 지향하고 있는 이슬람 사회운동에서 그 대상이 되는 종교의 세속화나 사회의 변질은 이슬람사회 자체의 요인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서구를 비롯한 외부세력의 침투와 그 영향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보수건 혁신이건 간에, 방법과 내용·정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반외세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슬로건이 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친외세, 특히 친서구적인 세력이나 운동이 개재되어 있지만, 반외세의 대세 속에 그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변변치 않다. 한편, 이러한 반외세 경향은 이슬람세계의 일체성 확보나 민족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9세기 살라피야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간 이러저러한 형태로 전개되어 온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비록 철저성이나 건전성·참여성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지만, 시종 이슬람사회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기능하였다. 이슬람 초기 살라피야운동에 의해 사변적인 ‘꾸르안 창조설’이 부결되고 전통적인 ‘꾸르안 영원설’이 고수되었으며, 와하비야운동을 비롯한 근·현세의 전통주의운동으로 인해 장기간 성행하던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여러가지 폐단이 극복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사에는 이슬람교의 근본교리를 부정하는 이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식 ‘근본주의’ 같은 이상조류(異常潮流)는 형성될 수가 없었으며, 이슬람교의 근본정신과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여기에 이슬람교의 생명력이 있다. 오늘 세계가 이슬람문명을 대안문명(代案文明)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슬람교의 생명력에 있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이슬람세계의 일체성을 유지하고 그들 문명의 실체성을 보존하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전통주의나 범이슬람주의운동이 없었더라면 외세의 분할통치로 인해 이슬람세계는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이슬람문명은 일찍이 정체문명(停滯文明)이 되어 생존문명의 반열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사회운동, 특히 각종 형태의 혁신운동은 이슬람사회의 발전에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비록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신문명의 세속화로 인한 폐단을 방지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점은 있으나, 선진문명과 과학기술을 도입함으로써 물질문명의 향상이나 사회경제여건의 개선에는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사회운동을 유발하고 추진시킨 역사적 배경은 시·공간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다. 이것은 이슬람의 사회운동이 그만큼 다양하고 또 폭이 넓음을 뜻한다. 아울러 이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그것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논쟁 역시 다양하고 다기적(多岐的)이다. 언필칭 각인각설(各人各說)이라 하겠다. 그 갈래는 고사하고, 이 운동의 세부에 붙여진 이름만도 ‘원리주의’ ‘근본주의’ ‘부흥주의’ ‘전통주의’ ‘세속주의’ ‘복고주의’ ‘이슬람주의’ ‘과격주의’ ‘혁신주의’ ‘개혁주의’ ‘이슬람사회주의’ ‘이슬람-아랍주의’ ‘아랍-이슬람주의’ ‘근대주의’ ‘실용주의’ ‘온건원리주의’ ‘급진원리주의’ ‘범아랍주의’ ‘나세르주의’ ‘이슬람적 상징주의’ ‘이슬람-아랍민족주의’ 등 다양하다. 이때문에 연구자들은 당혹함을 금치 못한다.

    이와 같이 복잡다단한 이슬람의 사회운동은 논자에 따라 갈래짓기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무릇 사회운동이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성격과 역할에 따라 크게 보수와 혁신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념이다. 문제는 무엇을 보수로 보고, 또 무엇을 혁신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보혁구도의 설정이다. 여기에는 진보냐 퇴행이냐 하는 성격 규정이 우선 포함된다. 그런데 역사에서 보다시피, 보혁구도의 설정은 시대와 대상(지역)에 따라 다르며 가변적이다. 따라서 경직된 교조주의를 피하고 구체적 실정에 맞게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컨대 서구에서의 보수는 현상 유지와 기득권 고수가 중심과제라면, 이슬람세계에서의 보수는 여기에다가 복고(復古)와 수구(守舊)가 추가된 것이다. 이에 비해 현상과 기득권을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혁신이라는 인식에는 별 이의가 없는 성싶다.

    원래 인간사회에 항시 병존해온 보수와 혁신은 시대상황과 현실적 이해에 따라 그 판단이 좌우되는 위상적(位相的) 개념으로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유동적이다. 오늘날 여러가지 내재적 논리구조를 가진 이슬람세계의 사상조류와 그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을 성격상 크게 보수와 혁신으로 나누는 것은, 이슬람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복잡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다. 이슬람의 사회운동사를 돌이켜보면, 이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보혁관계는 대립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리바꿈까지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서로 뒤섞여서 분간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지난 수세기, 특히 지난 한두 세기 동안 이슬람의 사회운동 흐름을 통관(通觀)하면, 역시 크게는 보수와 혁신의 두 갈래로 나눠 진행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 두 큰 흐름은 크고 작은 냇물들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첫째 흐름은 이슬람의 근본교리와 신앙에 입각해 혼탁한 사회와 종교를 정화하고 초기의 순수한 이슬람적인 생활규범을 회복하려는 수구적인 보수주의(al-muhfazah)이고, 둘째 흐름은 이슬람의 근본교리와 신앙을 보존하면서 각종 사회개혁을 통해 이슬람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조화시키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진취적인 혁신주의(al-tajdd)이다.

    이슬람 보수주의는 그 내용에 따라 이슬람 전통주의와 범(汎)이슬람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복고적인 이슬람전통주의의 발단은 9세기에 이슬람의 4대 정통법학파의 하나인 한발리야(al-Hanbalya)파의 창시자 이맘 아흐마드 빈 한발이 주도한 ‘살라피야운동’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운동은 전통 이슬람교리에서 벗어난 ‘무으타질라파’가 엉뚱하게도 사변신학(思辨神學)적인 ‘꾸르안 창조설’을 들고 나와 그것이 국가적 공인에까지 이르자, 이에 맞서 한발리야파가 초기의 참된 무슬림들인 살라프(아랍어로 ‘선조’ ‘선인’이란 뜻)들이 견지한 ‘꾸르안 영원설’을 고수함으로써 일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14세기의 저명한 교의학자(敎義學者)인 이븐 타이미야(1263~1328)에 의해 계승되었다. 타이미야는 살라피야(al-Salafya) 사상을 체계화하고 ‘순수한 살라프’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근세에 와서 이슬람전통주의를 이어받은 보수주의운동은 18세기 중엽 사우디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와하비야(al-Wahabya)운동’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국 기초와 이념이 된 이 운동은 서구 현대문명의 충격과 전통 이슬람사회의 변질을 억제하며 움마(초기 이슬람공동체)식 이슬람제국을 창건하려는 일종의 사회정치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압둘 와합(1703~1792)은 종교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청년시절 메디나, 바스라, 바그다드 등 이슬람 문명의 요람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이슬람사회의 병폐를 직접 목격하였다.

    특히 그는 살라피야운동의 계승자인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슬람세계가 낙후한 주원인을 전통이슬람으로부터의 탈선에 있다고 보고, 그 치유방법으로 이슬람교의 근본교리와 ‘참 정신’의 회복, 그리고 ‘꾸르안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과 알라 사이에 ‘중개자’가 개재해 있다는 유일신 부정설(否定說)과 수피즘(신비주의)에서 성행하는 성도(聖徒), 성묘(聖墓), 성물(聖物) 숭배를 배격하고 음주나 흡연, 춤이나 도박, 비단옷이나 화려한 장식을 비이슬람적인 ‘악습’으로 신랄히 규탄하였다.

    한편, 와합은 정략적 혼인 등의 방법을 통해 디르이아(Dirya)에 웅거한 사우디 일가와 제휴하고 나서 그들과 함께 무장력을 조직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민족적 독립을 이루어냈다(1926). 종교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와하비야운동은 근세 이슬람세계의 전통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근세 전통주의운동이 바로 19세기 중엽 북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일어난 사누시야운동과 마흐디야운동이다.

    사누시야(al-Sanusya)운동은 19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가장 큰 이슬람의 사회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의 전통 복고주의와 수피즘의 결합물로 이슬람의 전통 회복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다. 선행한 와하비야운동과 마찬가지로 정교합일의 기층조직을 꾸리고 부족들을 규합하여 오스만제국의 통치와 외세의 침입을 다같이 반대하는 지하드(성전)를 선양한 일종의 종교운동인 동시에 사회정치운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파가 수피즘을 수용하고 수피교단을 운영했다는 면에서는 수피즘을 이단시한 와하비야파와는 구별된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알제리 태생의 무함마드 븐 알리 사누시(1791~1859)는 메카에 가서 저명한 수피스트인 이븐 이드리스를 사사(師事)하고 ‘자위야’란 수피즘교단을 설립(1837)하였다. 얼마후 리비아에 돌아와 이 교단을 중심으로 사하라사막 내의 여러 부족들 속에서 수피즘에 입각한 ‘초기 이슬람정신의 회복’운동을 정력적으로 펼쳤다. 사누시는 경전 ‘꾸르안’과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의 관계, 사누시야운동의 신비주의적 이념 등에 관한 4부의 책을 연이어 펴내 이 운동의 이론적 기초와 성격 및 내용을 천명하였다.

    이 파는 비록 금욕과 고행 등 수피즘 고유의 정신적 및 도덕적 수양법을 도입했으나, 정통 수피즘과는 달리 내세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사회생활이나 정치활동만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오스만 터키의 민족적 억압과 외세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면서 서구문명의 침투를 백방으로 거부하고, 지역 내의 농목축업과 상업의 발전을 위해 진력함으로써 대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자구적인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발족 후 신속하게 확산되어 19세기의 80년대에 이르러서는 100여 개의 기층조직에 총 300만의 추종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수단에서는 무장투쟁을 동반한 마흐디야(al-Mahdya)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의 장자 하산(625~669)의 후예를 자칭한 수단 출신의 무함마드 아흐마드(1834~1885)이다. 그는 성예(聖裔)로서 교조 무함마드를 친견했는데, 그로부터 마흐디(재림 이맘)로 임명받았다고 하면서 이슬람의 순화와 이민족의 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해 무장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도처에서 행한 설교내용을 보면 그의 교의(敎義)는 일종의 혼합교의다. 일찍부터 수피즘 교단에 몸 담아 온 그가 쉬아파의 ‘재림 이맘’으로 자처한 것부터가 이율배반적이지만, 음악이나 무용·흡연·음주를 금기시하고 성물(聖物)을 거부하는 면에서는 와하비야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운동의 확충을 위해 지하드(성전)가 무슬림들의 중요한 종교의무의 하나인 성지순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지하드를 중요시하였다.

    아흐마드는 백나일강에 있는 자그마한 섬에 자신의 교단을 차려놓고 선교활동을 적극 펴는 한편, 무력을 바탕으로 당시 중앙정부 격인 하르툼의 영국-이집트 연립정부와 당당하게 담판을 진행하면서, 수차에 걸쳐 정부군의 공격을 분쇄하였다. 이러한 승전에 힘입어 수단 동부에 ‘마흐디야국’을 건립하고 한때 수도 하르툼을 공략(1884)하여, 영국군 주둔사령관을 사살하는 전공까지 올렸다. 그러나 영국-이집트 연합군의 보복정벌로 인해 10여 년간 유지해온 마흐디야국은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현대에 이르러 전대의 이슬람전통주의 이념을 이어받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조직은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전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들’이다. 이집트의 하산 알 반나(1906~1949)가 1928년에 창설한 무슬림형제단의 기본이념은 초기 이슬람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킬라파제를 복원하며 순수한 이슬람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행한 전통주의의 맥을 실천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은 대중동원조직으로 성장하면서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여 2차대전 말기에는 조직원 수가 무려 100만명에 달하고 산하에 5천여 개의 지부를 두었다. 그들은 ‘꾸르안은 우리의 헌법이고, 예언자는 우리의 안내자다. 알라를 위한 죽음은 우리의 가장 큰 숙원(꿈)이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슬람의 세속화와 세속화한 위정자들을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형제단은 이집트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반나는 암살당했다. 해산된 후에는 지하에 들어가 비밀결사활동을 벌이면서 수단, 시리아, 요르단, 쿠웨이트 등 인근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무슬림형제단과 이념이나 활동방식에서 유사한 운동조직으로는 마울라나 알 마우두디(1903~1979)가 창설한 인도의 ‘이슬람연맹(al-Jmi’atu’l Islamya)’이 있다. 이 운동도 인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카슈미르 등지로 조직을 확대하여 이른바 이슬람화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이슬람 전통주의운동이 지닌 기본특징은 초기 이슬람의 기본교리와 율법을 토대로 한 정교합일의 이슬람 공동체적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전통적인 이슬람의 생활규범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이념과 행동이 이슬람교의 전통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진행되는 반(反)외세투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극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보수주의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보수주의 범주에 속하는 다른 하나의 사상적 조류와 운동은 19세기 중엽에 일기 시작한 범이슬람주의다. 이 운동의 창도자(唱導者)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자말 딘 아프가니(1839~1897)다. 고향과 페르시아에서 이슬람 전통교육을 받아 다방면의 학문지식을 쌓고 6개 국어에 능통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일약 수상직에 오른다. 그러나 범이슬람운동의 웅지를 품은 그는 이에 연연하지 않고 사직한 후 메카와 인도를 거쳐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당대 이슬람학문의 최고 전당인 아즈하르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다가 파리에서 이집트 제자 무함마드 압두와 함께 ‘알 오르와툴 우스까’(al-’Urwatu’l Uthq, 가장 견고한 연대, 이슬람을 지칭) 협회를 결성하고(1884) 같은 이름의 신문을 발간해 그의 범이슬람주의사상을 홍보하는 한편 이슬람국가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영국의 식민수탈행위를 규탄하였다. 2년 후에는 페르시아국왕의 요청을 받고 페르시아에 가서 종교 및 사회개혁을 주도했으나 반대파들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만년에는 터키에 천거하여 사양길에 접어든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한 칼리파 압두 하미드 2세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범이슬람주의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슬람 나라들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아프가니의 범이슬람주의운동이 담고 있는 기본내용은 전세계 무슬림들이 한 사람의 칼리파(계위자)를 추대하여 이슬람교법에 준한 초국가적, 초민족적, 초지역적 통일이슬람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방 기독교국가들의 침투와 서구문명의 영향을 막는 것과 동시에 이슬람국가들은 개혁과 자강(自强)을 도모해야 한다. 그는 이슬람교야말로 어떤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고 어떠한 도전도 이겨낼 수 있는 종교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조직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이러한 개혁은 반드시 사회개혁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종교와 과학을 조화시키고, 무슬림들이 서방 선진 과학기술과 문화를 배워 이슬람세계의 후진성을 퇴치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이 점에서 아프가니는 근대 이슬람개혁운동의 기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철저히 배격하고 인간과 물질, 정명(定命)과 자유의지간의 관계에서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면서 염세적인 비관주의를 부정하고 ‘현실 중시’의 낙관주의를 표방한다. 아프가니의 범이슬람주의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이슬람 각국의 위정자들로부터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스만제국이 망하자 범이슬람주의운동은 일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슬람세계가 직면한 새로운 역사적 환경에 걸맞게 그 내용과 형식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 킬라파제의 회복이나 통일이슬람제국 건립 등이 구태의연한 주장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고 신앙이나 문화전통에서의 공통성을 우선시하고 이슬람국가들간의 연대나 합작, 단결을 강조하면서 배타적인 반기독교 주장 따위는 지양하고 있다. 그러나 신식민주의나 시오니즘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공동대응은 다방면으로 강구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범이슬람주의는 무슬림들과 이슬람국가들간의 국제적 연대로 구체화되면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후 이슬람세계에는 세계이슬람대회, 이슬람대회, 이슬람세계연맹, 이슬람국가수뇌자회의 등 국제적 이슬람조직기구가 출범하여 각이한 형태의 범이슬람주의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슬람세계대회는 1926년 메카에서 출범하였으나 활동을 중단하다가 1949년에 활동을 재개하고 본부를 예루살렘에서 파키스탄의 카라치로 옮겼다.

    이슬람대회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주동이 되어 1955년 카이로에서 발족하였으나 그의 사후 유명무실해졌다. 이슬람세계연맹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주도로 1962년 메카에서 성립된 후 오늘날까지 그런 대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상의 세 조직은 민간연대기구의 성격이 다분하다.

    이에 비해 1969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개최된 이슬람국가 수뇌자회의는 최고위급 관방(官邦)기구로서 이슬람세계의 연대와 화합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회의에서는 이슬람국가 수뇌자회의·외교부장급회의·상설 서기처 등 3급의 조직기구를 개설하여 구체적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수뇌자회의 헌장에는 ‘회원국들은 그들간의 공동신앙이 무슬림들의 상호접촉과 단결의 강력한 요인임을 확인한다’고 하면서 ‘이슬람의 정신과 윤리, 사회와 경제의 가치를 옹호 유지할 것을 결의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 이슬람개발은행과 이슬람국제통신사, 국제이슬람단결기금 등 부문별 범이슬람 국제기구들도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1백여 년간의 범이슬람주의운동은 이슬람교라는 공통 신앙에 기초해 이슬람세계의 일체성을 확보하려는 운동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표현형태에서 2차 대전 전에는 킬라파제에 의한 통일이슬람제국의 건립을 지향했으나, 그 이후에는 이슬람국가들간의 연대와 협조를 통한 공동번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이슬람세계에서 뿌리 깊은 보수주의에 대비해 때로는 급진적 성향마저 보이면서 급부상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 혁신주의다. 이슬람 혁신주의도 이슬람 보수주의처럼 각양각색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 현대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다.

    이슬람 현대주의는 19세기 말 서양에서 현대교육을 받고 돌아온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처음 제창되었다. 이슬람 현대주의의 3총사로 알려진 사람은 인도의 사이드 아흐마드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압두,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이끄발이다. 이슬람 현대주의자들은 대체로 문화결정론(文化結定論)의 신봉자들로서, 이슬람세계의 후진성을 퇴치하려면 이슬람사회의 전통문화 가치를 고수하면서 현대문명의 발전에 부응하도록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들은 현대 과학기술의 수용을 권장한다.

    인도 델리의 무갈(Mughal)왕조(1526~1875)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한 사이드 아흐마드(1817~1898)는 청년시절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다 식민정부의 지방법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영국을 방문해 황후와 황태자를 알현하고(1869), 영국사회의 이모저모를 관찰하였다. 귀국 후 ‘윤리개혁자’란 월간지를 발간하여 자신의 개혁의지를 피력하였다. 그는 인도 무슬림들의 빈곤과 후진은 교육을 받지 못한 데 기인한다고 믿고, 그 퇴치를 위해 이슬람 동방학원을 세웠다. 그리고 매해 한번씩 ‘무슬림 교육회의’를 열어 무슬림들로 하여금 서구의 선진문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그는 신생 미국과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무슬림들이 부흥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라고 믿었다.

    이슬람 현대주의운동의 3총사 중 한 사람인 이성적 신학자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이집트의 한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수피즘(신비주의)에 빠져 명상과 금욕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아즈하르대학에 입학해 낯선 서구문명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즈음 그는 범이슬람주의운동의 창시자인 아프가니를 사사하고 그와 함께 이슬람 개혁에 관한 논지를 펴면서, 영국의 강점을 반대하는 오라비(‘Orabi) 봉기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파리로 추방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스승과 함께 ‘가장 견고한 연대’ 협회를 결성하여 이슬람세계에 대한 서방 열강의 무모한 침투를 비난하면서 이슬람사회의 현대화 구상을 무르익혔다.

    귀국(1888) 후 모교 아즈하르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이듬해에는 이슬람교의 최고 종교법 결정권자인 대무프티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성과 계시, 종교와 과학간에는 근본적인 대립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적 신학자로서 이슬람사회의 후진은 비이슬람적 신앙과 폐쇄적 전통주의가 만연하였기 때문이라며 선진학문과 과학의 수용을 적극 호소하였다. 압두는 교과 과정을 현대화하고 전통교육에 현대식 교수법을 접목시키고 기피된 신학이론을 개방하는 등 아즈하르대학의 교육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또 제자 라쉬드 리돠와 함께 창간한 ‘마나라(al-Manr)’지에 여러가지 새로운 사회적 문제에 대한 파트와(al-fatwa, 법적 견해)를 개진하여 종교와 사회의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유럽식 복장의 허용에서부터 은행 이자, 혼인, 여성의 지위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관련된 합리적인 파트와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경전 ‘꾸르안’에 대한 현대주의자로서의 재해석 방법도 대담하게 내놓았다. 이렇듯 압두는 이슬람 현대주의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유능한 신학자이자 사회운동 이론가였다.

    인도의 아흐마드나 이집트의 압두와 더불어 이슬람 현대주의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현 파키스탄(당시는 인도)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무함마드 이끄발(1877~1938)이다. 그는 영국과 독일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럽세계를 주유(周遊)하는 과정에서, 유럽사회에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슬림들이 본받을 바는 못되며, 이슬람의 전통에는 유럽인들에게 없는 좋은 점들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끄발은 귀국(1908) 후 일시 대학 교직에 몸담았다가 홀연히 뿌리치고 철학 연구와 문예 창작에 전심하는 한편, 사회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0년 그는 전인도무슬림연맹 총재로 선출되고, 이듬해에는 이 연맹 대표 자격으로 런던에서 열린 영-인 원탁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끄발은 수많은 글과 연설, 시 등을 발표하여 당면한 종교와 사회문제, 그리고 민족독립문제에 관해 명철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인도 무슬림들이야말로 단일민족으로서 공동의 문화실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가치’를 지닌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구사회에 대해 시종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온 그는 ‘자본주의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끄발의 ‘공동문화실체론’과 민족독립사상은 2차대전 후 파키스탄의 분리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현대주의운동을 개도(開導)한 3총사의 주장과 활동에서 보다시피, 이 운동의 기본 특징은 이슬람교리와 경전의 현대적 해석과 샤리아(이슬람법)의 현대화, 종교교육과 과학교육의 병행, 과학기술의 도입 등 전통이슬람문화와 현대문화의 조화 및 절충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서구문명의 그늘에 싸여 빈곤과 후진성을 제대로 극복 못한 오늘의 이슬람사회에는 현대화라는 과제가 여전히 미결로 남아있다.

    현대주의와 함께 이슬람 사회운동의 혁신주의 사상조류를 이루고 있는 다른 하나는 이슬람 사회주의다. 이슬람 사회주의란 이슬람의 근본원리와 전통을 준수하면서 사회적 평등이나 부의 공정분배, 반억압, 외세배격 등 사회주의 고유의 일부 원리를 접목시킨 이슬람사회 특유의 사상조류다.

    이에 관해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우리의 사회주의는 우리의 유산과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원래 이슬람 사회주의는 1차대전 후 일부 계층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몇몇 이슬람국가에서 그 신봉자들로 소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후 국가이념이나 국가건설의 실천방도로서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국제적 추이에 맞추어 이슬람세계, 특히 아랍-이슬람지역에서 그 표현방식은 각각 다르나 이슬람 사회주의란 독특한 이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 선구자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다. 그의 뒤를 이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아스당,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당이 이슬람사회주의 실현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리비아를 비롯한 일부 급진 아랍 국가에서도 이 사상을 국가이념과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알라(신) 플러스 혁명’으로 불리는 이슬람 사회주의는 수구적인 보수주의와는 물론이고 혁신적인 현대주의나 서구의 전통적 사회주의와도 엄연히 구별된다. 그 특징은 우선 이슬람교의 근본교리와 사회주의의 일부 원리가 융합되었다는 점이다. 이슬람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융합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이슬람의 경전 속에 내포돼 있었다는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당의 초대 지도그룹의 한 사람이었던 븐 벨라는 이에 관해 “우리의 사회주의는 외래의 사상체계 속에서 탈태(脫胎)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실, 아랍과 이슬람교의 정수(精髓)에서 탄생한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리비아의 카타피도 “우리의 사회주의는 다름 아닌 이슬람사회주의다”라고 못박고 있다. 어떤 사람은 경전 ‘꾸르안’에 나오는 ‘인간에게는 노력한 것만큼만 차려지나니 그 노력의 결과는 장차 보게 될 것이고, 그에게는 완벽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53:39~41)라는 구절과 ‘…실로 대지는 알라의 것이니,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종복들이 상속하리라…’(7:128)라는 구절을 사회주의 원리로 예시하고 있다. 즉 전자는 불로소득을 불허하고 일한 만큼 얻는다는 내용이고, 후절은 토지의 공유와 만민의 소유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런 것이 바로 사회주의 원칙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그 특징은 나라의 부강과 발전을 위해 유효한 사회주의의 경제원리들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무지와 몽매, 빈곤과 후진에서 탈피시키는 것은 이슬람이나 사회주의 모두가 추구하는 목표이기 때문에 국유화나 계획경제, 협동경영, 복지향상, 무상치료 등 사회주의 본연의 제반 사회경제시책들은 이슬람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에서는 예외 없이 많든 적든 간에 이러한 시책들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이 없는 한 그 성과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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