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님은 날 버렸어도 나는…”

옥중 권노갑 DJ 향한 절규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4-09-07 16: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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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과 권노갑, 한국 야당사의 굵은 획을 그은 두 사람의 결속이 깨지려 하고 있다. 혹자는 지난 5월1일, 권노갑씨가 서울구치소 문을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연대의 끈은 이미 끊어졌다고 주장한다. 동교동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들 문제로 혼돈에 빠져버린 ‘아버지’ 김대중이 ‘가신’을 버렸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진실은 무엇일까?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DJ와 권노갑의 40년 동지의 연(緣)은 이렇게 끊어지고마는 것일까?
    지난 4월27일 저녁 서울 잠실체육관,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를 뽑는 경선이 한창이었다. 최고위원에 출마한 14명의 후보연설이 모두 끝나고 투표가 시작될 무렵, 몇 명의 중년 신사들이 투표인단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이들은 낯이 익은 대의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슬그머니 그들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들이 건넨 것은 담뱃갑 크기의 메모용지였는데 거기에는 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광옥 김태랑 김옥두 김경천’

    투표자 한 사람이 4명의 후보를 선택하는 연기명 투표이니, 이렇게 4명에게 표를 던지라는 메시지였다. 이 메모지를 돌린 사람들은 동교동 구파로 분류되는 당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 이 메시지가 적힌 쪽지를 돌렸던 것이다.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돌아다니는 모습은 과거 민주당 경선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날 지도부 선출 경선에서 쪽지를 돌린 쪽은 동교동계 구파가 유일했다고 한다.

    개표결과 동교동 구파가 ‘응원했던’ 4명 중 한광옥 김태랑 두 사람만이 당선권에 들었고 김옥두 김경천 의원은 탈락했다.



    당선자들의 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당초 한화갑 정대철 박상천 의원 등과 선두를 다툴 것으로 예상됐던 한광옥 최고위원은 이들 가운데서도 최하위인 4위에 그치고 말았다. 늘어난 영남 대의원에 힘입어 김태랑 최고위원은 8등으로 턱걸이에 성공한 반면, ‘믿었던’ 김옥두 의원의 탈락은 동교동 구파인사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4·27최고위원 경선은 정치세력으로서 동교동 구파의 몰락을 앞당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대다수 정치권 인사들이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4월30일, 동교동 구파를 향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 인사의 전언.

    “그날 오후 우리는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TV화면에 ‘권노갑 전의원 진승현 게이트 관련 검찰 소환조사’라는 자막이 뜨는 겁니다. 이를 본 권 전위원이 비서들에게 ‘저게 무슨 소리냐. 자세한 소식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비서들이 여기저기 전화하고 부산을 떨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 관계자들이 권 전위원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출두요구서를 들고서요.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겨우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출두요구서를 받아들고 권 전위원 진영에서는 설전이 벌어졌다. 검찰에 나가야 한다, 나가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조승형 이석형 노관규 변호사 등 권 전위원과 가까운 변호사들도 논의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권 전위원의 입에서 “나더러 장세동이가 되란 말이냐”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설왕설래 끝에 결국 권 전위원이 “검찰에 가서 당당하게 무혐의를 밝히겠다”고 출두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대통령 향한 권노갑의 침묵

    다음날인 5월1일 오전 10시 서울지방검찰청사에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미리 도착해 권 전위원을 기다리고 있던 지지자들과 기자들이 우루루 모여들었다. 불꽃놀이의 폭죽처럼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기자들의 질문도 잇따랐다. 권 전위원은 검찰청사 현관에 서서 쏟아지는 질문에 꼬박꼬박 답변을 했다.

    “그동안 모든 게이트에 내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나는 그러한 게이트 등에 관여한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더욱이 이번 진승현 게이트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진승현을 알지도 못합니다.”

    “진승현을 만나본 일도 없습니다. 국정원 김은성 2차장이 금감원 조사를 무마해달라고 나에게 얘기했다는데 그 자체가 명백한 불법적 범죄사실입니다. 나는 그러한 범죄사실을 알고 동조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가족, 명예를 걸고 국민에게 약속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허위 조작 날조된 것입니다. 진승현 일당이 저지른 허위날조입니다.”

    권 전위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시종 자신은 무죄이며 검찰조사결과 무혐의임이 드러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렇게 검찰청사 로비에서 언론 인터뷰가 진행중일 때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김대통령께 하실 말씀 없습니까?”

    권 전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질문이 세 차례 이어졌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권 전위원은 자신의 무혐의를 주장하는 말만 되풀이한 채, 본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사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권 전위원의 행동은 청사 입구의 혼란에 묻혀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평소 권 전위원을 아는 사람들은 대단히 이례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권 전위원 측근 인사의 전언이다.

    “평소 권노갑 전위원이라면 ‘대통령께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겁니다. ‘사건의 진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대통령께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검찰에 출두하던 날 권 전위원은 기자들의 질문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같은 질문이 여러 차례 되풀이됐으니까 질문을 못 들은 게 아닙니다. 결국 권 전위원은 무응답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신의 속내를 나타낸 셈이라고 볼 수 있죠.”

    ‘김대중과 권노갑’.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이는 없다. 40년 주군과 가신 사이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단면이 되기에 충분하다. 김대중과 권노갑으로 대표되는 가신문화(家臣文化)는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을 이겨낸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흘러 ‘청산해야 할’ 구시대 정치행태의 대표로 개혁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주군(主君)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던 동교동의 가신군단 가운데서도 권 전위원은 항상 으뜸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겪은 고초도 심했다. 고생을 도맡아하는 맏형이었기에 후배들도 그를 따랐다. 동교동 사람들 사이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같은 가신군단인 상도동과 구분짓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같은 남다른 유대감이 있었기에 동교동 가신들은 단순히 김대통령의 ‘정치적 아랫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때로는 김대통령의 ‘동지’로서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5월1일 권 전위원의 검찰출두와 이어진 구속으로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을 잇는 결속의 줄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는 얘기가 동교동 사람들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권 전위원 측근 인사들 사이에서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 ‘억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권 전위원을 꺾으려고 한 ‘기획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는 것이다.

    권 전위원의 태도에서도 그런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권 전위원은 검찰출두 하던 날은 물론, 구속된 뒤로도 한결같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권 전위원은 검찰조사 내내 진승현씨로부터 5000만원의 대가성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당초 진승현 게이트의 연장선상에서 수사가 진행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사범위는 확대됐다. 최택곤씨로부터도 5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최씨가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면서 이 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권 전위원 측근들은 최택곤씨의 진술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진승현씨로부터 5000만원을 수수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김은성씨의 주장에 허점이 많음에도, 검찰이 끝내 영장을 청구하고 구속이 집행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5월3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거친 끝에 권 전위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한보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1억5000만원을 받아 ‘포괄적 뇌물죄’로 구속 수감된 지 5년 만에 권 전위원은 다시 서울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4일 권 전위원은 늦잠을 잔 것으로 전해졌다. 2박3일간 계속된 검찰조사에 지쳐 한나절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부터 권 전위원은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분노를 참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사도 아침에 제공되는 죽 이외에는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면회객들에게도 불편한 심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당뇨 증상으로 얼굴은 검게 탔고 병색이 역력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무죄이며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충격과 흥분상태에서 벗어나면서 권 전위원 주변에서는 이번 사태의 내막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지금부터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사람이 아니라 권노갑 독자정치노선을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기류는 동교동 1세대가 아닌 권 전위원 사람으로 분류되는 범 동교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청와대와 권노갑의 갈등

    이런 기류가 형성되기까지 청와대와 권 전위원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5월1일 검찰출두는 두 진영 불화의 극단적 표출이었을 뿐,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 사이의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사건들은 끊임없이 발생했다는 것이 권 전위원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권 전위원과 청와대 사이가 멀어지게 된 1차적 사건은 2000년 4·13총선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권 전위원은 1997년 한보사태로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느라 김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의 현장을 떠나 있었다. 권 전위원은 김대통령의 당선소식을 수감생활 중 심해진 당뇨병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해있던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권 전위원을 대신해 동교동의 얼굴로 1997년 대선 때 김대통령의 옆을 지킨 사람은 한화갑 의원이었다. 자연 정권 초기, 한의원은 여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면복권된 권 전위원이 정치 일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2000년 4·13총선은 사실상 권노갑 전위원의 작품이었다. 공천과정을 조율했고 정치신인들에 대한 자금지원도 권 전위원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런데 공천과정에서 권 전위원은 김대통령의 아들들과 불화를 겪게 된다. 권 전위원은 김홍일 의원의 전남 목포 출마에 반대했다. 몸이 불편하니 신병치료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아버지인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있는데, 아들이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는 것이 국민정서상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홍일 의원 측의 반발은 거셌다. 14대 국회 때 목포에서 당선된 적이 있는 권 전위원이 목포지구당을 되찾기 위해 김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게 김의원 측의 생각이었다. 권 전위원 측의 한 인사는 “이 일로 김의원의 동생인 홍업씨와 권 전위원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갔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권 전위원은 사실상 대통령의 아들문제에 대해 입을 닫았다고 한다. 이 무렵, 이미 아들들의 비리의혹이 나돌았지만 권 전위원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통령 아들들과의 갈등에 권 전위원도 적지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권 전위원 주변에서는 집권 후반기 들어 각종 게이트로 어려움에 몰린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에게 끊임없이 희생을 요구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권 전위원 입장에서도 수용 가능한 정도를 벗어나면서 결국 양측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8·30전당대회에서 권 전위원은 선출직 최고위원에 출마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그의 출마에 반대했다. “임명직 최고위원이 있으니 그쪽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권 전위원의 이름 뒤에 ‘전최고위원’이라는 직함이 붙은 계기가 바로 8·30전당대회 직후 임명직 최고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위원직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권 전위원은 당 쇄신을 요구하는 정풍파의 반발에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권 전위원과 정풍파의 첫번째 대결은 권 전위원의 2선후퇴로 막을 내렸지만, 6개월 뒤 마치 재방송을 보듯 다시 한번 권노갑 대 정풍파의 힘겨루기는 재연됐다.

    한편으로는 정풍파와의 싸움이 전개됐지만 다른 한편에서 권 전위원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김대통령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을 쏟아야 했다. 2000년 4·13총선까지만 해도 힘의 중심에 서 있던 권 전위원이지만, 정풍파문 이후 사방의 적과 싸워야 하는 고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장 최근에 언론에 알려진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의 독대는 지난 2001년 9월4일의 만남이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권 전위원은 청와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대권도전의사를 밝힌 한화갑 의원을 당대표로 하는 새로운 지도부 안(案)을 받고는 한의원을 만났다. 하지만 한의원은 “조건이 있는 당대표는 하지 않겠다”며 대권도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양갑 갈등’이 최대 화제로 떠올랐고, 권 전위원은 또 한 명의 동지를 잃은 대신 만만찮은 경쟁자를 얻었다.



    대통령 뜻 거절한 권노갑


    그 후 권 전위원은 두세 차례 더 김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 사이에 오간 얘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권 전위원 주변에서는 “이 때부터 김대통령이 아들문제로 권 전위원과 중대한 의논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한 인사의 전언.

    “9월4일 회동 이후 두세 차례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청와대를 다녀온 것으로 압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은 당시 정치권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던 아들들의 비리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권 전위원에게 모종의 결단을 요구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권 전위원이 김대통령의 뜻을 거부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됐던 거죠.”

    또 다른 여권 인사는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에게 상당기간의 외유를 제안했다고 귀띔했다.

    “지난 연말 한나라당은 여권의 ‘3K’가 비리의 주범이라며 정치공세를 펼쳤습니다. 3K에는 권 전위원과 함께 대통령의 아들도 포함돼 있었는데 대통령은 권 전위원에게 모든사태의 책임을 지고 상당기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밖에 나가있는 권 전위원이 비리의 책임을 뒤집어씀으로써 아들들은 보호할 수 있지 않느냐, 대통령은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끝내 장기 외유의 길을 떠나지 않은 권 전위원은 결과적으로 김대통령의 뜻을 거절한 셈이 된다. 김대통령의 아들들이 비리의혹의 주인공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은 현 상황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해준다.

    40년 가까이 김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면서 권 전위원은 김대통령의 뜻을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권 전위원 본인도 김대통령과의 이런 인연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통령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지금껏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동일한 생각과 사고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것이 내가 그분을 충심으로 모시는 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통령과는 40년 인연 동안 단 한번도 의견이 어긋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예로, 당직자 인선 때나 선거 공천 심사 때에도 대통령은 내 의견을 인정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대통령께 어떤 일을 문의하면 일단, ‘권의원에게 가서 상의해 보시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다. 이런 연유로 내게 ‘김대중의 대리인’이라는 닉네임이 붙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권 전위원이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는 대통령의 청을 끝내 뿌리쳤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권 전위원 주변 사람들은 “무엇보다 권 전위원 가족들의 만류가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인사는 “특히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아들 정민씨의 만류가 권 전위원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정민씨는 아버지에게 40년간 김대통령을 위해 헌신했으면 이제는 아버지 인생을 살아가시라며 아버지의 장기외유를 반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과연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에게 장기외유를 부탁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김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의혹을 감싸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사자인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이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권 전위원의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측근인사는 “우리 역시 김대통령에게 섭섭한 것이 많다. 우리에게는 김대통령보다 권노갑 전위원이 정치적 리더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김영삼 전대통령의 처신과 비교해 김대통령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아들이 구속되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이 다치는 것은 막았다. 홍인길씨 한 사람이 구속됐을 뿐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한결같이 충성을 바친 가신을 희생하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이런 생각과 달리 권 전위원은 최근까지 김대통령에 대한 걱정과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의 측근인사는 “우리들끼리는 지난 가을 이후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 사이의 관계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권 전위원은 청와대의 전화를 기다리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권 전위원은 그를 따르는 정치권 인사들과 송별 모임을 갖기로 했다. 권 전위원이 참석한다는 말에 평소보다 많은 수의 정객들이 약속장소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권 전위원은 참석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 모임 소식을 들은 청와대에서 모임을 자제하라는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권 전위원이 참석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이날의 해프닝은 주변의 생각과 달리, 권 전위원 자신은 그때까지도 김대통령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쯤해서 김대통령과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각별한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정치권력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결사를 맺는지를 두 사람의 히스토리 만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례도 없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 역시 정치권력의 또 다른 생리다. 김대중과 권노갑 두 사람은 바로 이런 정치권력의 비정한 현실을 40년간 함께 헤쳐온 사이다. 고난도 함께 겪었지만 영광의 자리에도 함께 올랐다. 물론 권 전위원 주변에서는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과정에서 권 전위원은 철저히 소외됐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장세동은 비록 전두환 대통령을 대신해 감옥에 갔지만 2인자로서 권력도 함께 누렸다. 하지만 권 전위원이 이 정부 들어 누린 권력이 뭐가 있느냐”고도 주장한다.

    정치권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도 힘들지만 정상에 오른 그 순간, 공복감에 더 고통받는 것이 정치권력의 생리다.

    권 전위원은 자서전에 학창시절 만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평생 김대통령을 바라보고 살아온 까닭에 권 전위원의 회고에는 김대통령과의 인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 김대통령의 회고록에는 가신들의 얘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앞장서 산을 오르는 사람과 앞사람의 뒤만 보고 오른 사람이 등산과정에 본 것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소방차 타고 나타난 김대중


    김대중과 권노갑 두 사람의 인연은 코흘리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김대통령과 권 전위원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김대통령이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고의 전신) 30회 졸업생이고 권 전위원은 34회 졸업생이다. 두 사람이 재학시절은 6년제였으므로 김대통령이 5학년일 때 권 전위원이 신입생으로 교문에 들어선 셈이다. 학년으로는 4년 차이지만 나이로는 김대통령이 다섯살 위다.

    목포상고 시절 김대통령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을 합쳐 한 학년 180명 중에서도 늘 1등을 맡아 놓고 하는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잘생긴 학생’ 김대중은 한국학생들 사이에 긍지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년 권노갑이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심취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모교쟁탈전’ 이라 불리는 폭력사건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전쟁자원을 양성하기 위해 상업학교이던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송정리공업학교(목포공고의 전신)와 합병시켜 공업학교로 만들어버렸다. 해방이 되자 합병된 두 학교의 원상회복 문제로 목포상업 학생들과 송정리공업 학생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은 마침내 교사(校舍) 쟁탈전으로 확대됐는데 두 학교 학생들은 병을 깨들고 상대방 학교에 쳐들어가는가 하면 반대쪽에서는 실탄이 장전된 총까지 들고 나와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험악해졌다.

    이때 갑자기 소방차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소방차에는 한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상선이라는 회사에 취직해 있던 김대중이었다.

    “나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시내에서 이 학교에 충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들인가? 36년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때에 힘을 모아야할 학생들이 서로 폭력을 휘둘러서야 되겠는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김대중은 20여 분에 걸쳐 일장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에 학생들은 저절로 손에 들었던 무기를 놓았다고 한다. 권노갑도 부끄러운 마음에 들고 있던 38소총을 내려놓았다. 아울러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머릿속 깊이 각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정치적 동지가 된 계기는 1961년 5월에 치러진 강원도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선거에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데 권 전위원은 목포상고 동창회 대표로 무작정 DJ를 찾아가 선거운동을 거들면서 정치적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산전수전 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DJ는 국회의사당 근처에도 못가보고 초선 의원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5·16쿠데타가 터지면서 국회가 해산되고 만 것이다. 쿠데타가 직후 DJ는 구속됐고 곧이어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1963년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고 민주당 신파를 중심으로 민주당이 재건된 뒤 DJ는 당 대변인으로 정치일선에 돌아왔다. 그해 DJ는 고향인 목포로 옮겨 출마해 당당하게 당선됐는데, 이때 선거를 도운 권 전위원은 당선 뒤 정식으로 국회 등록 비서관이 되었다. ‘DJ의 비서 권노갑’의 개인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 권비서는 정치인 김대중과 풍상(風霜)을 함께 겪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선거 지원유세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오늘날까지 오른쪽 다리를 절게 만든 골반관절 부상을 당했을 때도 권 전위원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권 전위원도 늑골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지만 이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DJ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된 직후 권 전위원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한달 가까이 고초를 겪었다. 이를 시작으로 권노갑은 주요한 국가적 변란이 있을 때마다 DJ와 함께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고 조사과정에서 고문을 당했지만 권노갑은 1980년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가 가장 지독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DJ였지만 그의 측근들도 몸서리처지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가담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현직 민주당 의원으로 아직까지 DJ와 정치적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엄청난 사건이었던 만큼, 이 사건을 계기로 DJ와 척진 인물도 적지 않았는데 김대통령의 아들 홍걸씨를 미국까지 쫓아가 그의 비리를 파헤친 이신범 전의원 같은 이가 ‘반DJ’의 길을 가는 대표적 인물이다.

    엄혹한 시절, 김대중의 가신으로 정치적 고난을 겪다보니 권 전위원은 남들과 다른 기능 몇 가지를 익혔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체득해야 했던 기술이란 다름 아닌 암기술.

    권 전위원은 지금도 수첩을 갖고 다니지 않는 정치인이다. 웬만한 전화번호는 200개쯤 외우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권 전위원의 별명은 ‘동교동 금고지기’. 숱한 정치자금이 그의 손을 거쳐 갔지만, 권 전위원은 경리장부를 작성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몽땅 집어넣었다. 군부독재 시절 경리장부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폭발물을 끌어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피한 현실 탓에 암기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권 전위원을 보고 김대통령은 ‘인명사전’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사람이름이든 전화번호든 한번 들으면 잊지 않는 권 전위원의 능력에 김대통령도 감탄을 했던 것이다.



    묘비명 ‘김대중의 비서실장’


    권 전위원은 김대통령의 어머니 장수금 여사와도 절친했다. 39세에 늦장가를 간 권 전위원은 결혼 전까지 김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에서 장수금 여사와 한 방에서 잠을 자면서 모자간 이상의 정을 쌓았다고 한다. 장수금 여사와의 추억을 권 전위원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결혼 전까지 여사의 방에서 함께 자곤했다. 그야말로 아들이나 다름없이 대해주셨기 때문에 먼저 어머니를 여읜 외로움을 그분의 따스한 손길로 달랠 수 있었다. 잠들기 전, 여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참 정겹게 떠오르곤 한다.”

    권노갑 전위원이 DJ에 대해 정치적 인연을 뛰어넘는 유대감을 갖게 된 데는 이 같은 동교동 생활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DJ에게 맹목적이다시피 한 충성을 바쳤음에도, 권 전위원이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존재를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권 전위원은 1992년 14대 총선에 준비도 없이 전남 목포에서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대통령의 비서로 30년의 세월을 보낸 뒤 환갑도 지난 나이에 단 금배지였다.

    ‘김대중씨의 비서실장 권노갑’

    권 전위원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달라고 했다 한다. 죽어서도 충성으로 김대통령을 모신다는 각오로 그런 유언을 해두었다는 것이다. 권 전위원은 자신을 비롯한 동교동 사람들이 고난의 세월을 이기며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은 이유도 충성이었다고 회고한다.

    평생을 김대중과 동일한 생각과 사고로 살려고 노력했다는 권노갑씨. 서울구치소에 갖힌 권노갑씨의 지금 생각은 어떨까?

    어쩌면 더 이상 김대통령과 자신은 같은 생각과 사고로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는 한계를 확인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구속과 때맞춰 아들들 문제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김대통령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 권노갑의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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