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재 검찰’에 대한 여론 검증이 임박했다. “할 일을 제대로 한다”는 평가가 아직은 우세하다. 그러나 구태가 잔존한다는 지적 또한 없지 않다. 지난 1월 출범과 함께 명예회복이란 난제를 떠안은 검찰의 첫 ‘돌파구’란 점에서 이번 게이트 수사는 검찰에겐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명재 검찰은 정치권에 휘둘린 역대 검찰의 ‘망령’에서 벗어나 ‘국민의 검찰’로 거듭날 것인가.
한 지방검찰청 소장검사는 “검찰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기류가 지방 검찰조직까지 뒤덮고 있다”고 전력투구에 돌입한 검찰내 분위기를 귀띔한다. 검찰수사 관련보도가 언론을 달군 건 지난해 9월 G&G그룹 회장 이용호(43)씨가 부실기업 구조조정 자금 450억여 원을 횡령하고 주가조작으로 150억여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면서부터. 그러나 최근 들어 그 빈도는 더욱 잦아졌다. 특히 4월10일부터 시작된 ‘최규선 게이트’ 수사에서 양파껍질 벗겨지듯 매일같이 새로운 정황들이 드러나자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이 오히려 숨가쁠 정도다.
지난 3월25일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 차정일 특별검사팀으로부터 ‘이용호 게이트’ 재수사 사건기록 일체를 넘겨받은 대검 중앙수사부는 현재 ‘이용호 게이트’ 관련 의혹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1부는 ‘진승현 게이트’, 특수2부는 ‘최규선 게이트’를 수사중이다. 대검이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의 소환 방침을 최근 공식 표명했고, 5월14일 극비리에 귀국한 김대중 대통령 3남 홍걸씨가 5월16일 서울지검에 출두함으로써 ‘이용호·최규선’ 양대 게이트 수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1997년의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에 이어 5년 만에 현직 대통령의 아들들이 또다시 비리혐의로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불 꺼지지 않는 검찰청사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듯,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에선 서울지검 3차장 주관으로 매일 수사상황 브리핑이 이뤄진다. 정례 브리핑은 본래 매주 월·수·금요일. 그러나 ‘원칙’이 깨진 지 오래다. 이는 역대 검찰과의 차별화를 지상과제로 삼은 이명재 검찰의 긴박한 속내를 방증한다. “수사검사들은 요즘 거의 매일 새벽 2∼3시에나 퇴근한다. 손발이 다 게이트에 빠져버린 지금 형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려면 사력을 다할 도리밖에 더 있겠나.” 일선 검사들의 토로에서도 절박감은 짙게 묻어난다.
검찰 조사를 받는 사건관계자들의 말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어김없이 감지된다. 김홍업씨 수사와 관련해 참고인 자격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수차례 조사받은 아태재단 김모 전 행정실장은 “첫 소환일인 5월9일에만 16시간 동안 조사받았다”며 “‘의심 가는 부분 전모를 밝히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수사검사에게 위축감을 느껴 무리한 수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명재 검찰총장 역시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출퇴근 때를 제외하곤 사무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점심식사도 대검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면서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완전 차단한 상태다. “이총장은 지금 검찰의 명운을 걸고 고립생활중”이란 게 총장 비서실 관계자의 전언이다.
“위대한 검사는 좋은 보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의에 대한 신념과 열정에서 나온다.” 지난해 5월 당시 이명재 서울고검장은 이런 퇴임사를 남겼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올해 1월17일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지금 그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엄정하고 철저하게 수사하지 못한 채 적당한 선에서 얼버무린 ‘과거’와의 단절에 몰두하고 있는 걸까.
당초 이명재 검찰체제 출범을 주시한 여론의 향배는 ‘기대 섞인 우려’보다 ‘우려 섞인 기대’에 가까웠다. 오랜 기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 준수에 대한 ‘기대’였다. 권력형 비리의혹 사건들을 비교적 소신 있게 수사중인 현재의 이명재 검찰은 분명 예전 검찰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울지검 특수2부가 수사 착수 10여 일만에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41)씨를 구속하고 홍걸씨가 최씨로부터 돈 받은 사실을 밝혀낸 것, 홍업씨의 고교동창인 김성환 전 서울음악방송 회장이 건설업체 등으로부터 공사수주 등의 대가로 수차례 돈을 받은 혐의를 대검 중수부가 확인한 것들이 그런 예다. 때문에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낙마’ 직후 대안으로 빼든 ‘이명재 카드’를 두고 “청와대가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뒀다”는 ‘조크’까지 나돌 정도다.
그러나 그간의 수사진전 상황을 찬찬히 뜯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우선, 지금까지 검찰의 ‘분투’가 이른바 ‘외생(外生) 변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검찰이 ‘최규선 게이트’ 수사에 착수한 것은 4월9일. 이날 최규선씨 관련 비리 고발장을 최씨의 운전기사였던 천호영(37)씨로부터 접수한 검찰은 이튿날 사건을 서울지검 특수2부에 배당했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이는 천씨가 고발에 앞서 3월2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이트에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 의혹’을 제기한 폭로에 뒤이어 나온 ‘결과물’에 불과하다. 천씨의 폭로 내용이 3월30일 언론에 보도되고, 이에 자극 받은 최씨가 4월9일 자청한 해명기자회견에서 “홍걸씨가 내 사무실을 2~3차례 방문한 적이 있고, ‘용돈’ 명목으로 1000만~2000만원씩 수시로 주었다”며 홍걸씨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차정일 특검이 수사기록을 검찰에 넘긴 시점인 3월25일부터 천씨의 폭로와 최씨의 기자회견이 속속 잇따른 10여 일 동안 검찰의 수사전개가 지지부진했다는 점이다. 홍업씨와의 돈 거래 의혹을 받던 김성환씨의 잠적으로 검찰의 ‘이용호 게이트’ 관련 의혹 수사는 특검팀의 수사결과에서 단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한 답보상태였다.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 의혹’의 주역인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에 대해서도 고위층과 정치인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는 첩보를 입수해 검찰이 지난해 말부터 내사해오긴 했지만, 수사 착수 여부를 전혀 결론짓지 못한 단계였다. 차특검과의 ‘비교우위’를 위해 ‘무엇인가 보여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애써 감춰야 했던 바로 이 시기, 갑작스레 불거져나온 천씨의 ‘글’과 최씨의 ‘입’ 덕분에 검찰 수사는 ‘최규선 게이트’로 대폭 궤도수정을 하며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폭로의 파장이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게 정작 천씨의 얘기다. 그는 고발장 접수 이후 3∼4일 가량 서울지검 특수2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검찰에서 한 진술은 기존의 폭로 글에 담긴 내용이 전부라고 한다. 천씨는 5월12일 기자와 만나 “점포 임대를 둘러싼 최씨와의 개인적 분쟁만이 폭로의 계기였을 뿐이며, 그 어떤 외부인사로부터도 폭로를 권유 또는 종용당한 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어쨌든 ‘컴맹’인 천씨가 ‘순수’한 동기에서 PC방의 한 대학생에게 3만원을 주고 대신 작성하게 한 폭로 글의 내용들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면서 검찰의 칼끝은 자연스럽게 홍걸씨를 겨냥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천씨는 이명재 검찰을 ‘슬럼프’에서 건져낸 ‘은인’일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런 논리의 성립이 가능한 것은 ‘최규선 게이트’ 수사에 따른 홍걸씨 소환이 홍업씨의 소환 여부까지 조속히 매듭짓는 데 하나의 비교기준이 돼주었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양대 게이트 수사의 진전속도엔 차이가 있지만, ‘최규선 게이트’의 등장은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 대한 ‘할로 이펙트(halo effect·어떤 특정 현상을 보고 한 인간의 다른 측면까지 미뤄 짐작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로 ‘후광효과’를 의미함)’가 되어줌으로써 검찰의 고민을 덜어준 측면이 강하다.
검찰수사의 무게중심이 ‘이용호 게이트’에서 ‘최규선 게이트’로 이동하면서 수사의 빠르기는 ‘안단테(느리게)’에서 ‘알레그로(빠르게)’로 급전환했다. “검찰이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여론의 평가 또한 이때부터 나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최규선씨는 여전히 검찰에게 엄청난 부하(負荷)의 대상이다.
“최씨가 사실 여부를 가리기 쉽지 않은 일방적 진술을 지나치게 많이 쏟아낸다. 그러나 중요한 수사를 진행중인 상태에서, 현실성이 희박한 그의 진술에만 집착해 수사력을 분산할 수는 없다. 그의 진술에 대해선 수사 필요성이 분명한 사안만 다루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대검 관계자)
그러나 최씨 스스로 ‘최후진술’격으로 녹음해둔 테이프 내용이 5월7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개된 것과 같이, 검찰이 최씨로 인한 ‘돌발상황’과 맞닥뜨릴 가능성은 상존한다. 당시 공개된 테이프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자기과시욕이 섞인 일방적 주장들로 밝혀지긴 했지만, 최씨가 홍걸씨에게 100만원권 수표 300장(3억원)을 준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이 테이프가 만일 공개되지 않았다면 검찰수사가 좀더 단선적(單線的)으로 흘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지금은 잠잠한 상태지만, 구속된 최씨의 주변에서 언제 다시 그의 이름 석자를 언론에 수없이 오르내리게 할 만큼 ‘폭발력’을 지닌 정황들이 터져나올지 몰라 검찰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른바 ‘팩트(fact)’든 아니든 최씨와 관련된 의혹이 하나라도 더 공개되면 일단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 것. 검찰이 ‘나오는 대로 수사한다’는 원칙으로 일관하는 것도 자칫 늑장을 부리다간 자신과 관련된 각종 내용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최씨의 특성 때문에 도리어 덤터기를 쓸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진술이든 정황증거든,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 자신에 의해 많은 것들을 ‘생산’해낸 최씨는 검찰수사의 속도를 빠르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그는 녹음테이프 공개 여파로 ‘공공의 적’이 됐다. 천씨의 비리 폭로로 위기에 처한 최씨가 청와대를 겨냥한 ‘엄포용’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지만, 테이프 내용에 정치권 인사들이 상다수 거론되는 바람에 여·야 모두로부터 ‘과대망상증 환자’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
그러나 최씨의 녹음테이프 내용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됐다. 최씨는 테이프 공개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얘기다. 그의 테이프를 언론에 흘린 사람은 자서전을 대필해주기로 한 작가 허모씨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선 녹음테이프 공개가 최씨의 ‘작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그런 의혹의 실체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최씨의 변호인 강호성(39) 변호사는 “접견시 녹음테이프 내용이 보도된 사실을 최씨에게 알려줬더니 그가 매우 격분하면서 곤혹스러워했다”며 “그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만은 사실이어서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얘기는 빼고 법률적 문제에만 한정해 얘기해달라고 변호인으로서 주문했다”고 밝혔다.
강변호사가 최씨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건 수년간 이어진 최씨와의 인연 때문. 강변호사는 “검사로 재직중이던 6∼7년 전 최씨를 처음 알게 됐다”며 “일주일에 네 차례 정도 수감된 최씨를 접견한다”고 말했다. 강변호사가 소속된 법무법인 ‘두우’는 연예·문화 등 엔터테인먼트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청담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그와 최씨는 마이클 잭슨 공연을 계기로 서로 알고 지내왔다.
이명재 검찰이 양대 게이트 수사에서 ‘축배’를 들기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다. 우선 최규선씨 등으로부터 28억여 원을 받은 혐의가 뚜렷한 홍걸씨의 경우 사법처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일요일인 5월12일에도 서울지검 청사에선 최근 들어 굳게 입을 다문 타이거풀스 대표 송재빈(34)씨의 진술을 닥달하는 수사검사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검찰이 ‘속도전’을 펴는 방증인 셈이다.
그러나 대가성 여부에 대해 홍걸씨가 입을 다물거나 부인할 경우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등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밝혀내기까진 좀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계좌추적은 범죄 추궁을 위한 수사자료일 뿐, 그 자체로만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홍업씨 처리문제는 전자에 비해 더 미묘한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홍업씨가 김성환씨와 금전거래를 하면서 돈 세탁을 했다는 부분은 계좌추적을 통해 이미 밝혀졌지만, 당사자들이 단순한 대차관계라고 고집할 경우 이권개입 등 대가성 입증이 힘들게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경우 비록 출처가 불분명한 돈거래에 대해 조세포탈혐의로 구속기소할 수는 있지만, 이는 5년 전 김현철씨를 뇌물수수가 아닌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과 같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식 사법처리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더욱이 아직 홍업씨와 이용호씨간 돈거래 여부는 밝혀진 바 없어 홍업씨와 김성환씨에 대한 수사는 사실상 ‘이용호 게이트’ 수사와 별개로 진행되는 감이 짙다. 또 최규선씨 쪽에서 홍걸씨 쪽으로 일방적으로 돈이 흘러간 것과 달리, 홍업씨와 김성환씨의 경우는 서로 돈을 주고받은 큰 차이가 있다.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말들이 새어나오는 것도 이런 점들과 무관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돈의 출처라는 점이다. 때문에 검찰은 홍걸씨 구속기소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도 홍업씨 처리문제에서는 대조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홍업씨에 대한 수사를 작심한 대검이 대강의 혐의로만 현직 대통령 아들을 사법처리할 수는 없는 이상 그 어떤 ‘확실한 물증’을 이미 확보해두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대검은 물증 확보 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한다.
‘이용호 게이트’ 수사의 경우 늑장수사라는 비판도 만만찮다. 실제 대검의 이번 수사는 2000년 서울지검 특수2부, 지난해 대검 특별감찰본부, 올해초의 차정일 특검에 이은 네번째 수사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특검팀이 이미 반 이상 해놓은 수사결과를 넘겨받고도 검찰이 뚜렷하게 더해놓은 게 뭐 있나. 계좌추적에 시간이 걸린다지만 사건 하나를 두고 한 달 이상 질질 끄는 것을 제대로 된 수사라고 보긴 힘들다”고 꼬집었다.
반면 특검팀은 검찰에 우호적인 분위기다. 특검팀의 한 관계자는 “이명재 검찰의 수사는 비교적 순조롭다고 본다. 홍업씨 수사의 경우 홍걸씨 수사에 비해 계좌추적할 부분이 많아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라며 “김대웅 광주고검장 문제도 좀더 지켜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럼에도 김대웅(57·사시 13회) 광주고검장 사법처리 문제는 여전히 검찰의 ‘아킬레스건’이다. 지난해 11월 이수동 아태재단 전 상임이사에게 공무상 기밀인 대검 중수부 수사상황을 알려준 혐의를 받는 그를 검찰의 분열상 극복을 위한 ‘새 판 짜기’ 차원에서라도 사법처리해야 할 검찰이 필요 이상으로 ‘여유’를 부린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4월9일 밤 검찰은 대검 기자실에 출입기자들을 불러놓고 수사기밀을 유출한 검찰 간부가 김고검장이라고 공표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 발표는 같은날 최규선씨가 홍걸씨에게 ‘용돈’을 줬다는 기자회견을 한 후에 이뤄진 것이다. 검찰수사에 이상기류가 감지된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도 그래서 잦아들지 않는다. 2주일 뒤 검찰은 김고검장을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으로 소환했지만, 기밀 누설 발표가 있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검찰내 특정지역 출신 검사들의 반발 때문이 아니냐는 항간의 의혹과 달리, 김고검장 문제로 인해 검찰 수뇌부와 일선 검사들 사이에 각종 사건처리를 놓고 삐걱거리는 징후는 아직 불거지지 않았다. 이른바 ‘정치검사’들의 ‘파워게임’ 행태도 특검 이후 자취를 감췄다. 때문에 검찰 내부에선 그동안 검찰의 노른자위를 두루 거치며 ‘실세’로 군림했던 김고검장이 도리어 ‘호남 검찰인맥의 수장’ 운운하며 ‘버티기’에 나섰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석들은 표피적 성격이 강하다.
검찰의 진짜 고민은 김고검장의 범죄혐의 입증이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김고검장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 데다 검찰이 확보한 물증이라곤 이수동씨의 일방적 진술을 제외하면 두 사람간 전화통화 기록이 고작이다. 공무상 기밀누설죄는 직무수행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외부에 흘렸을 때 성립한다. 때문에 구속사안이 되느냐는 ‘판단’ 자체부터 힘든 형편이다.
김고검장에 대한 계속적인 수사도 검찰로선 난감한 부분이다. 끝까지 파고들려면 당시 수사라인이 아니었던 김고검장에게 수사기밀을 전달한 내부 정보제공자를 찾기 위해 검찰 내부로 칼끝을 들이대야 한다. 김고검장이 수사상황을 유출했다는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 문제는 더 커진다. 또 한번 검찰의 위신이 실추되고, 이는 곧 조직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 김고검장이 끝까지 혐의를 부인할 경우 그에게 국가공무원법 위반 여부를 검토해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검찰의 모양새가 흐트러지긴 마찬가지다.
김고검장 사법처리는 홍업씨에 대한 수사가 끝난 뒤 결정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구체적인 내부 방침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자발적으로 옷을 벗어주면 좋겠지만, 당사자가 완강히 버티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라는 심경을 털어놨다. 김고검장이, 이용호씨 비리 비호의혹으로 “조직에 누를 끼쳤다”며 지난해 10월 자진사퇴한 임휘윤 전 부산고검장의 전철을 밟아주길 다분히 바라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때문에 김고검장 문제가 이명재 검찰의 짧지 않은 고민거리로 남을 것이란 추론은 자연스럽다.
일부 언론에서 김대웅 고검장 문제와 함께 검찰내 ‘이상 기류’ 형성의 논거로 꼽는 것이 타이거풀스 대표 송재빈씨의 진술 공개 건이다. 검찰은 5월8일 “최규선씨가 20만달러를 이회창 총재에게 전달했다고 한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말을 들었다”고 한 송씨의 진술 내용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몇몇 언론은 이를 ‘물타기 수사’ 아니냐고 비판했다. 의혹의 근거는 송씨 진술이, 홍걸씨가 최규선씨에게서 3억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 직후에 공개됐다는 점. 게다가 수사중인 피의자의 진술, 그것도 전문(傳聞)에 불과한 내용을 왜 굳이 공개했는가 하는 점이다. 진술 내용은 공보업무를 맡은 서울지검 김회선 3차장이 공개했지만, 서울지검장의 사전결재가 있었다. 때문에 검찰 일각에서는 청와대 파견 경험이 있는 데다 지난해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구속)와의 ‘골프회동’으로 물의를 빚은 이범관 서울지검장을 이명재 총장이 완전히 신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 아니냐고 관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검찰 안팎의 시각을 종합해보면 송씨 진술 공개는 일종의 해프닝 성격이 짙다. 송씨의 진술 내용을 먼저 알게 된 한 언론사 기자가 이날 검찰에 따로 확인을 요청했고,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특정 언론사에만 확인해줄 수 없어 서울지검이 브리핑 형식을 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 검찰이 브리핑을 자청한 것은 결국 언론과 여론을 의식한 부담에서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권노갑 구속은 물타기?
어쨌든 검찰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은 4월23일 이재오 총무를 단장으로 한 항의방문단을 꾸려 이명재 총장을 방문, “검찰내에 청와대 수사를 지연시키고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를 은폐하려는 세력이 있다”며 강도 높게 검찰의 목을 죄었다. 그러나 서울지검 관계자는 “검찰의 사활이 걸린 시점에서 여·야 어느 일방에 대한 편들기가 상식적으로 가능하냐”며 “전통적으로 검찰에 비판적인 야당이 수사의 공정성에 시비를 거는 검찰 위상 흔들기”라는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20만 달러 전달’건은 증거를 보강하는 중이지 수사를 안하는 게 아니다. 다만 아직 ‘익지 않았을’ 뿐”이라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진승현 게이트’를 수사중인 서울지검 특수1부에 의해 5월3일 구속된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은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의혹 건과는 별개다. 그의 혐의는 알려진 대로 2000년 7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재직할 당시 진승현씨로부터 진씨 계열사에 대한 금감원의 조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받은 것이다. 권씨가 수뢰혐의를 부인하지만, 검찰이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때 정권의 ‘넘버2’였던 그를 구속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견해가 많다.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의혹을 덮기 위한 방편으로 권씨를 전격 구속해 ‘물타기’를 했다는 초기의 음모론은 쑥 들어갔지만, 권씨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진승현씨와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허위진술을 했다는 권씨측의 불만은 여전하다. 거물 정치인에게 5000만원이란 액수가 지나치게 적은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오지만, 기소독점권을 가진 검찰이 뇌물을 전했다는 진술을 검토한 뒤 혐의를 인정하고 구속한 것에 절차상 하자는 없다. 5000만원이란 액수도 구속사유가 된다. 더욱이 진승현씨와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이 이같은 진술을 흘려 사실상 특별히 덕 볼 만한 여지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중요할 수 있다.
“구속엔 무리가 없다. 항간의 주장대로 대통령 아들들을 보호하려면 당초부터 홍업·홍걸씨보다 권씨를 먼저 수사했어야 선후가 맞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다. 검찰과 핵심권력간 사전조율을 위한 ‘창구’도 사라졌다. ‘각본’ 없이 전방위 수사를 펼친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호남 출신인 한 검찰지청 부부장 검사의 말이다. 4월26일 대통령의 사과 발언으로 ‘날개’까지 단 검찰이 정권 말기에 굳이 ‘모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젠 월드컵에 신경 써야 하지 않겠느냐.” 대검 석동현 공보관은 “수사결과를 지켜봐 달라. 검찰은 ‘선을 긋지 않은 수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검찰수사의 ‘마지노선’이 될까. 검찰 안팎에선 홍업씨와 홍걸씨 둘 다 사법처리되면 사실상 이번 비리수사가 종료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최성규 전 총경 등 현재 해외도피중인 관련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 해도 ‘대통령의 아들’ 이상의 정점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 일부에선 권력의 최정점인 김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에 대한 의혹들과 아태재단의 정치자금 관리 의혹 등까지도 낱낱이 수사해야 한다는 공세를 취하지만, 검찰과 정치권간 ‘대타협’의 공감대는 홍걸·홍업씨 구속 선에서 형성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더욱이 이번 수사의 ‘본류’가 아닌 정치자금 등 기타 부분은 정치적 판단을 전제해야 가능한 사안이어서 검찰이 먼저 손댈 가능성은 희박하다. 검찰은 지난 3월부터 6월 지방선거와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 지방단체장, 고위 공직자들의 이권 개입과 금품수수 비리, 벤처기업 주가조작 등 경제부정 사건, 조직폭력·마약 등 민생 치안사건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진행중이지만,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사건 수사는 자제하고 있다.
이명재 검찰의 캐릭터를 예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큰 틀에서만 보면 사심 없이 불편부당한 수사를 진행한다고 볼 여지가 많다. ‘최규선 게이트’란 ‘돌발 호재’를 접한 이명재 검찰의 운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예기치 않은 ‘행운’을 ‘이명재 검찰의 성공’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지 여부다.
여론은 꾸준히 검찰의 소신을 요구한다. 현재 수원지검 특수부가 맡고 있는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의혹사건’ 수사를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의혹사건 전반으로 확대하라는 요구가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월드컵기간엔 뜸하겠지만, 본격 선거국면에 들어서면 여·야간 총력전이 전개돼 검찰에게 어떤 또다른 ‘돌발상황’을 던질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검찰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최규선 게이트’란 호재(好材)를 뒤로 한 시점부터 비로소 이명재 검찰은 사실상 첫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 셈이다. 밤 늦도록 꺼지지 않는 서초동 청사의 불빛은 이런 검찰의 속앓이까지 비추고 있을까. 위신 실추보다 더 뼈저린 것은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