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골부대는 강원도 철원지역 전방경계를 맡은 지난 37년 동안 북한군의 도발행위를 단 한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철벽방어’의 원동력은 부대원들간의 뜨거운 정과 합리적인 부대관리. ‘필사즉생(必死卽生) 골육지정(骨肉之情)’을 소리 높여 외치는 백골용사들을 찾았다.
지금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고요한 여느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질 따름이다. 훈련중인 장병들과 가끔씩 마주치는 일만 없다면 이곳이 북한과 코를 맞댄 최전방 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철의 삼각지대 기념관’이 차창 밖으로 스쳐가고 나서야 위치감각이 깨어났다.
민통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가려면 철저한 신분확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주위에는 주민들이 넉넉한 표정으로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다. 대민지원을 나왔는지, 논두렁에는 전투복 바지를 걷어붙인 장병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민통선을 넘어왔어도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철통방어’는 그렇듯 조용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위병이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면서 비로소 정적이 깨졌다.
“백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곳에 백골부대가 있었다.
밤낮 없는 ‘경계전쟁’
북한의 요새 격인 오성산과 마주보고 있는 중부전선 최고의 전략지 계웅산 OP. 오성산은 전쟁 당시 북한이 “국군장교의 군번줄 한 트럭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그곳이다. 낭랑한 여군 방송요원의 목소리가 온 계곡에 가득하다.
“인민군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도 여러분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전방의 대북방송은 비방이 아닌 홍보성 멘트로 바뀐 지 오래다. OP에 서면 북녘 산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아래로는 경원선과 남대천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으로는 휴전 직전 한국군 2개 사단과 중공군 4개 사단이 43일 동안 33번이나 주인을 바꿔가며 사투를 벌인 ‘피의 능선’이 뻗어 있다. 포병장교가 망원경을 건넸다. 비무장지대 건너편에 농사일을 서두르는 북한 병사가 보인다. 그 옆 초소에는 어린 병사가 피곤한 듯 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
노을이 곱게 물들 무렵, 백골부대 18연대 3대대 9중대원들이 철책 경계를 위한 전반야(前半夜) 투입을 위해 대오를 이뤘다.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야~”
“일병 박, 건, 우! 쫛탄창 쫛발 좌탄확인 이상무!”
어린 병사들의 함성이 다부지다.
중대장이 “지금부터 투입!”이라고 선창하자 병사들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막강 3소대 투입!”이라고 외치며 철책으로 향했다. 또 하루의 ‘경계전쟁’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늦은 밤. 남쪽 아랫마을의 환한 밤풍경과는 달리 북쪽에서는 불빛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OP 꼭대기에 자리잡은 진지에 오르자 한 병사가 뛰어나와 주변 지형의 특징을 조목조목 설명하더니 “오늘은 무월광(無月光) 취약시기”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그리도 지리에 밝으냐고 물었더니 “지형을 속속들이 암기하고 있어 눈 감고도 뛰어다닐 수 있다”고 덤덤하게 되받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멀리 북쪽에서 불빛 하나가 잠깐 깜박이다 사라졌다. 병사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특이사항 보고! 북측 신교대(신병교육대) 불빛 꺼졌다.”
아래쪽에 자리잡은 관측실에서는 첨단장비를 이용해 비무장지대 상황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었다. TOD(열감시장치)는 작은 야생동물 한 마리의 움직임조차 꿰뚫고 있다.
백골부대의 상징인 하얀 백골 마크는 좀 섬뜩해 보이긴 해도 국민적 인지도가 매우 높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잔혹한 단어이지만 ‘백골’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육군의 기상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품고 있다. ‘강인한 군인’의 대표명사인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백골부대가 올린 혁혁한 전과에서 기인한다.
해방 직후 월남한 서북청년단원들이 18연대에 자원 입대하면서 철모 좌우에 백골을 그려넣은 것이 백골부대의 유래다.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끝까지 싸워 북녘땅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오늘도 백골부대 전장병의 왼쪽 가슴에는 백골 마크가 선명하다.
백골부대는 1949년 대구에서 창설되어 올해로 창설 53주년을 맞았다.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단행한 총 반격작전에서 1950년 10월1일 38선을 최선봉으로 돌파했다. 10월1일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념해 제정됐다. 대한 육군의 ‘대표부대’로 손색없는 역사다.
38선을 넘은 백골부대는 한·중 국경과 인접한 최북단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가리봉전투, 피의 능선 전투, 김일성 고지 및 화천지구 전투 등에서 적 사살 4만521명, 생포 1만1647명, 귀순 650명, 그리고 소화기 1만316정, 기관총 6446정, 포 200문, 전차 22대, 대전차포 98문 노획이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1965년 이래 지금의 위치에 주둔한 이후에도 38회에 걸친 대(對) 국지도발 작전에서 136명의 적을 사살, 단 한번도 침투를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1992년 일명 은하계곡으로 침투를 시도하던 북한군을 완전 소탕한 522작전은 군 작전 교범에 모범사례로 올라 있다.
철원지역으로 옮겨온 이래 백골부대의 평상시 임무는 ‘경계’로 바뀌었다. ‘전투에 패한 병사는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는 고전적인 격언이 있다. 경계는 아무리 잘해도 밖으로 티가 나지 않지만, 한치의 빈틈도 허용해서는 안되는 중차대한 임무.
마침 사단에서는 부대창설 기념일인 5월12일을 대비하여 수색대대 병사들이 특공무술을 시연했다. 특공무술은 언제 적과 마주칠지 모르는 수색대원들에겐 필수적인 ‘전신무기’라 백골부대에서 특히 강조하는 훈련분야다. 특공무술은 낮은 자세와 신체의 균형, 신속하고 정확한 동작을 특징으로 한다. 맨손이나 대검 등을 사용, 다양한 상황에서 즉각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유형화해 눈 깜짝 할 사이에 적의 급소를 공격한다.
이들 수색대대 병사를 인솔한 하경호 주임원사는 1992년 은하계곡 522작전의 주역. 당시 행정보급관으로 근무하던 중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의 3인 침투조를 사살, 1계급 특진하면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자그마한 키지만 검게 그을린 피부와 다부진 근육이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세 놈이 총을 들고 다가오는데 왜 겁이 나지 않았겠어요. 너무 긴장해서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병사 하나는 큰 부상을 입었지요. 마음을 가다듬고 교전수칙대로 침착하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하원사는 수색대대의 후배 병사들에게 당시 경험을 들려주며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언제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 중 하나다. 한국전쟁의 전과도 뛰어났지만, 그후로도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1973년 3월7일 백골부대는 북한군측에 사전에 방송으로 통보를 한 뒤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MDL(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북한군이 기습공격을 감행, 아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사단장이던 박정인 장군은 이 소식을 전해듣자 즉각 포병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아군이 쏜 포탄 1발은 북한군 GP에 정통으로 명중해 북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뒤이어 박장군은 백골부대 전 차량을 불러모은 뒤 북한군 진지를 향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군은 ‘백골부대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되는 부대’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 후일담도 흥미롭다. 사건 12년 후인 1985년 9월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평양에 갔을 때 호텔로 북한 정치보위부의 고위 간부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함경남도 출신에 박가 성을 가진 그 요란한 사단장은 요즘 뭘 하오?”
또한 1975년에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으며, 최근 귀순해 백골부대에서 초빙강연을 한 북한군 통신단 출신의 김모씨도 “북한에 있을 때 ‘치가 떨리도록 악랄한 놈들’이라고 들었던 백골부대에 와서 강연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국군이 강한 전투력을 확보하는 첫 단계는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신병교육대에서 시작된다. 백골부대장이 신병교육대에 쏟는 열정 또한 남다르다. 초여름 더위가 찾아든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선 사격술 예비훈련(PRI)이 한창이었다. 전투병의 기본인 사격술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간의 방심으로 사고가 일어나면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어느 부대나 사격훈련장의 군기는 엄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훈련병들이 PRI를 가리켜 “‘피’가 나고 ‘알’이 배기고, ‘이’가 갈린다”고 표현할까.
백골부대 신병들은 교관의 반복되는 구령에 따라 연신 엎드려 쏴 자세를 연습하느라 흙투성이가 돼 있었다. 자세가 좋지 않은 두 신병은 조교로부터 ‘특별교육’을 받고 있다. 밤에는 춥지만 낮에는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운 특유의 대륙성 날씨 탓인지, 훈련병 전원이 땀으로 뒤범벅된 채였다. 조성우 훈련병은 “무척 힘들지만 백골부대원으로 거듭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참고 견딘다”며 연신 숨을 헐떡인다.
신교대에서 6주 동안 이렇듯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나면 백골부대 예하부대로 배치되어 백골부대원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아직은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 같지만,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백골부대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신병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땀을 뿌릴 것이다.
백골부대가 자랑하는 분대장 교육은 부대의 전통과 역사를 대변한다. 백골부대에서 분대장이란 장교와 부사관 못지않은 중요 직책이다. 백골부대는 분대장만을 위한 식당을 따로 마련할 만큼 분대장에게 남다른 정성을 기울인다. 분대장은 병사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유사시 전투력 발휘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간부가 퇴근한 후 내무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백골부대는 이런 취지로 ‘백골 분대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분대장 후보생이 되면 다시 신병교육대로 가서 4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최말단 지휘자로서의 기본교양과 자질을 함양하는 엄격하고 치밀한 교육이다. 훈련을 마치면 수료식에서 사단장이 분대장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분대장 배지를 달아주고 준(準) 간부의 역할을 부여한다.
전방지역에서 근무한 병사들의 복지는 지휘관들의 공통된 고민거리다. 전방지역에 배치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불편한 교통과 부족한 편의시설 등이 군생활을 힘들게 한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전방 부대의 복지수준이 후방 부대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도 있다.
백골부대 역대 사단장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보니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OP나 GOP도 사정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 여름의 혹서, 겨울의 폭설과 혹한을 견디기에는 30년씩 된 건물들이 그리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부족함 없이 자란 신세대 병사들은 불편을 느낄 법도 한데, 이젠 웬만큼 익숙해졌는지 내색하지 않는다.
고기원 사단장은 “역대 사단장들이 전방 격오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설개선에 힘써 왔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한계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부족한 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부대환경은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지역주민과 돈독한 유대
백골부대는 인근 지역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대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민들을 초청해 즐거움을 나누는 것은 물론, 대민지원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군의관들이 지역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검진해주고, 또한 부대여건이 허락하는 한 체계적이고 공평하게 민통선 이북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준다. 홍수나 가뭄이 찾아오면 전 부대원들이 주민들과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한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백골 장병들을 이웃 청년처럼 친근하게 대한다.
주변 마을에서 실시하는 작전과 훈련이 많은 데다 지뢰가 매설된 곳도 있기 때문에 백골부대는 지역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를 필요로 한다. 어쩌다 지뢰사고가 발생하거나 거동수상자가 나타나면 주민들은 지원군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백골용사들의 ‘정 나누기’는 야생동물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부대 주변으로 내려오자 아예 정기적으로 먹잇감을 주고 있다. 민통선 지역에서 날아오는 독수리며 철새들도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는 백골부대 신세를 진다. 백골장병들은 야산 곳곳에 놓인 불법 사냥도구들을 제거하고, 기동순찰반을 운영해 밀렵행위를 막고 있다.
그래서인지 백골부대 곳곳에는 ‘골육지정(骨肉之情)’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뼈와 살의 관계처럼 끈끈한 전우애로 하루하루 열어감을 의미한다.
초여름에도 새벽녘 찬바람이 매서운 계웅산 OP에 몇 번의 근무조 교대가 이뤄지자 어느새 아침이 밝는다. 근무를 마치고 내려오던 한 병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아침노을을 보며 잠들 때의 희열과 보람을 아십니까?”
여드름 자국이 도드라진 앳된 병사가 갑작스레 더없이 어른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