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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그 황홀함과 씁쓸함에 관하여 · 중

공짜 구경, 심야의 가출 그리고 도둑질

축구에 미쳤던 시절의 만화 같은 이야기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공짜 구경, 심야의 가출 그리고 도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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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엔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고, 박상인은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며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아마도 이때가 박상인의 축구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박상인의 회고다.

“범근이의 헤딩 패스가 날아오는 순간, 골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골키퍼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나는 오른쪽을 노렸다. 내 생애를 통해 이처럼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역전골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인 불과 1분 뒤 이번엔 수비수 최종덕의 장거리 캐논포가 터져 운동장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공격에 가담한 최종덕이 약 40m 떨어진 지점에서 슛을 날려 이스라엘 골문의 왼쪽 모서리를 꿰뚫은 것이다. 3대1. 한국의 완벽한 승리이자, 1년 전 패배의 통쾌한 설욕이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본부석에 앉아 있던 코미디언 남보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관중들을 흥겹게 했다. 다음날 어느 신문엔 ‘3월20일을 한국축구의 날로 정하자’는 사설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드디어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왔다. 그날은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일요일이었다. 접전 끝에 결승에 올라온 팀은 대구 대륜고와 서울 우신고였다. 나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시민운동장으로 향했다. 형은 모교(대륜고)가 결승에 진출하는 바람에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당시 대륜고 감독은 프로축구 전북 감독을 지낸 김기복씨였고, 우신고에는 최강희가 뛰고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스탠드는 이미 만원이었다. 관중들은 게임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국가대표팀이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에 앞서 오픈게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표선수들이 연습하는 쪽 스탠드에서 구경하다 경기가 시작될 무렵 재빨리 자리를 옮겨 대표팀 벤치 바로 뒤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던 최종덕 허정무 박성화 선수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망원경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자꾸만 주전 선수들보다 후보 멤버였던 조광래 김희태 박종원 등에 시선이 쏠렸다. 세 선수는 벤치 쪽에서 함께 헤딩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얼굴이 시커먼 사람들을 처음 봤다. 망원경으로 봐도 얼굴 윤곽이 제대로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조광래의 별명이 ‘깜상’이라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우연인지는 몰라도 세 선수 모두 연세대 동기에다 나중에 프로팀 대우에서 뛰었다).

경기를 앞두고 볼보이를 맡은 중학생 선수들이 대표팀 벤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더니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조폭문화’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요즘에야 ‘그 흔한 대표선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태극마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만, 당시엔 대표선수가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선수가 소개되었다. 대표선수들이 스탠드 한쪽 구석에 숨어있다가 호명되면 그라운드 한가운데로 달려나오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선수가 달려나올 때마다 밴드가 반주를 넣고 태극기를 든 학생들이 선수 주변을 호위했다. 선수 이름도 밋밋하게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전에서 40m 롱슛을 통쾌하게 꽂아넣은 한국 최고의 장거리 슈터, 최-종-덕!”

“한국축구의 대들보, 아시아의 호랑이, 차-범-근!”

마지막으로 차범근을 소개할 때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맞춰 3만 관중이 일제히 “차-범-근!”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요즘 유럽축구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20년 전 한국축구에서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기는 예상대로 국가대표팀이 영남대를 4대1로 눌렀다. 한마디로 대표팀이 가지고 논 게임이었다. 관중들을 의식해서인지(?) 영남대 선수들이 악착같이 마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대표선수들의 개인기가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흥미만점의 게임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데도 축구에 굶주린 대구시민들은 미동조차 없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대표팀 경기가 끝났는데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선수 학부모와 동문들이나 자리를 지킬 고교대회 결승전에 3만 관중이 집중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물론 대구시민들은 고향팀 대륜고를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결국 일방적인 성원을 받은 대륜고가 우승을 차지했다. 대륜고는 네덜란드 아약스팀을 그대로 흉내낸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동문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어내려와 선수들을 무동 태운 채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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