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말 날씨가 제법 쌀쌀한 때 친구를 만나러 도쿄에 갔다. 고교 동창생으로 일본 국제협력은행에서 일하는 그는 일본에서 산 지 20년 됐다. 그는 일본이 해외에 제공하는 차관을 심사하는 부서에서 일하는데 업무량이 많아 보였다. 잠시 틈을 낸 친구는 그 은행에서 가까운 고서점가를 둘러볼 것을 권했다. 고서점가는 걸어서 5분 거리인 진보초(神保町)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꽤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이 고서점가의 정취에 흠뻑 빠졌다. 정말 오래된 옛 책들이 빽빽이 차있었고 도서관처럼 잘 분류돼 있었다. 많은 책방 중엔 2층까지 있는 제법 규모 큰 서점도 있었다. 들어가 보니 직원 몇 명이 앉거나 서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허름한 차림의 헌책방 주인이 아니라 회사원처럼 세련된 복장이었다. 책값도 매우 비쌌다. 몇만엔은 보통이고 복사본도 꽤 비쌌다. 1774년에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해체신서’도 볼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고서점가를 둘러보면서 나는 마음이 흐뭇했다. 전에 읽은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동경편’(이케가요 이사오 지음/ 신한미디어)에 나왔던 고서점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가치 제대로 모른 척박한 문화 풍토
이 책은 한 면에 한 서점씩 직접 세밀하게 그린 스케치 밑에 간단한 설명을 달고 책 중간중간에 ‘장서가의 조건’과 같은 글을 싣고 있다. 예를 들어 진보초의 야구치서점 편은 위에서 내려본 듯한 각도에서 서점 전경을 세밀히 그려놓았는데 주인의 얼굴 표정, 특징이 되는 책들의 목록과 위치도 쓰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되고 정성이 깃든 느낌이다. 서점에 대한 저자의 간단한 소개도 덧붙였다. 이를테면, ‘영화·연극·시나리오 관련서적, 잡지, 문헌 등의 전문점. 좌측 선반엔 ‘키네마신보’의 백넘버가 있고 영화, TV드라마 시나리오도 풍부하다. 특히 ‘태양을 향해 외쳐라’의 시나리오가 충실. 영화 애호가나 시나리오 라이터를 지망하는 손님도 많다’라고 돼 있다.
책에 대한 단상은 어떨까. ‘장서가의 조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말해, 어느 정도 책을 가지고 있어야 장서가라고 부를까? 대개 3000권 이상이 그 기준으로 돼 있는 것 같다. 3000권의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숫자를 넘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어려운 일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보관 장소’ 외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고는 책 한 권을 두는 공간에 480엔이 소요되는 셈이라는 친절한 계산을 제시하며 짓궂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제부터는 고서점의 균일 진열대에서 한 권에 100엔인 책을 찾아냈다고 기뻐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 책 한 권에는 약 1000엔의 보관비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도쿄의 고서점들을 돌아보면서 고등학교 때 자주 배회하던 청계천의 헌책방이 떠올랐다. 1970년대 전반 청계천엔 많은 헌책방이 있었다. 작은 서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나는 이곳에 자주 갔었다. 친구들은 입시 공부에 열중했지만, 나는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오래된 책이 주는 분위기가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은 고서점이 아니라 헌책방이었다. 나는 헌책방을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으로 이해한다. 즉 출간연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중고서적을 파는 서점은 헌책방으로, 오래전 출간됐고 많은 사람이 찾지는 않지만 학술적 가치, 희귀함에서 부여되는 가치, 마니아를 갖고 있는 책을 주로 다루는 서점을 고서점으로 이해한다. 고교 시절 매일 등교길에 지나던 인사동의 서점들이 아마 고서점에 속할 것이다. 인사동 고서점 앞을 그렇게 자주 지나다녔지만 들어가본 적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은 아직도 기억한다. 약간은 어둡고 무질서하며 한문책이 주는 중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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