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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형 가방들어주며 무쇠팔 키웠다

한국 테니스계의 희망 이형택 스토리

  • 글: 김종석 kjs0123@donga.com

소아마비형 가방들어주며 무쇠팔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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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형 가방들어주며 무쇠팔 키웠다
그럼 계란으로 바위라도 깨뜨린 걸까. 이형택의 우승은 우연이 아니라 실력이 엮어낸 값진 승리다. 짧지 않은 그의 테니스 인생에서 최대 전환점은 2000년 메이저대회인 US오픈. 이형택 자신도 기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선을 거쳐 US오픈에 출전한 그는 세계 강호들을 연파하며 당당히 16강까지 올라 메이저대회에서 14차례나 우승한 피트 샘프러스와 맞붙어 아쉽게 패했다. 당시 이형택의 선전은 불과 1주일 사이에 신문·방송을 통해 40억원 이상의 홍보효과를 낸 것으로 추산될 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테니스에 새롭게 눈뜬 이형택은 거칠 게 없었다. 2001년엔 US클레이코트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선수론 처음으로 ATP투어 결승에 진출했다. ‘마의 벽’이라던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처음 진입해 2001년 8월 역대 최고인 60위까지 이름을 올린 것도 역시 그였다.

그의 성공비결은 뭘까. 한국축구 4강 신화를 이끈 히딩크의 축구철학은 ‘지배(dominate)’와 ‘압박(press)’으로 정리할 수 있다. 90분 내내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는 체력전과 스피드전을 펼쳐 경기를 ‘지배’하고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 수비수 사이를 30m 이내로 좁혀 ‘압박’하는 것이다.

현대 테니스도 마찬가지다. 경기 내내 쉴새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파워 테니스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또 축구의 멀티플레이어처럼 스트로크·발리·서브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포핸드와 백핸드 모두 다양한 구질을 섞을 줄 알아야 하고 코트 전면에 걸쳐 줄기차게 상대를 공략해야 승산이 있다. 반면 기존 한국 테니스는 이기는 플레이가 아닌 지지 않는 플레이 위주였다. 공격적 전술보다는 베이스라인에 붙어 스트로크 위주로 운영하며 상대의 실수를 기대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형택은 달랐다. 강인한 체력과 승부근성을 갖춘 그는 끊임없이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 강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약점으로 지적된 서브와 백핸드 보완에 구슬땀을 흘렸고 포핸드의 위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연습벌레의 부단한 채찍질

이형택은 연습벌레로도 유명하다. 한창 젊음을 즐길 나이지만 술자리는 피했고 취침·기상 시간도 늘 정확히 지켰다. 하루 12시간씩 볼을 때린 적도 있다. 국내외 대회에 나갈 때는 가방 속에 아령을 넣고 다니며 쉴 때도 근력을 키웠다.

시련도 있었다. 2001년 9월 기자는 이형택이 출전한 US오픈 취재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 전년도 대회에서 16강 돌풍을 일으켰던 이형택은 1년 만에 달라진 자신의 위상에 놀라워했다. “예전엔 연습파트너 구하기도 힘들었으나 정상급 선수들이 앞다퉈 훈련 요청을 한다. 또 팬들도 알아보고 사인해달라고 한다. 숙소와 코트를 오가는 전용 승용차도 나왔다. 한마디로 대접이 달라졌다.”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이형택은 1회전에서 힘 한번 못쓰고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상대 선수들의 경계대상이 되면서 전력이 노출된 탓. 초반 탈락의 수모를 안은 이형택은 US오픈 이후 세계 랭킹이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비운을 곱씹었다. 이 경기에서 패한 뒤 한국식당에서 가진 저녁 회식자리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김치찌개를 떴다.

지난해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그는 노 골드의 수모를 안았다. 대회를 앞두고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었고 테니스협회의 무관심에 분통을 터뜨렸다. 투어에 전념하려 정중히 태극마크를 반납했으나 되레 ‘자기밖에 모른다’는 비난의 글이 웹 공간에 쏟아졌다. 테니스를 시작한 뒤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동계훈련에 매달렸고 지난 연말 요코하마 챌린저대회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며 재기의 시동을 걸었다. 평소보다 강도 높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스트로크에 더욱 힘이 붙었고 다양한 서브와 네트 플레이도 연마했다. 볼 컨트롤에 자신 있던 그는 라켓 줄을 평소보다 10파운드 줄여 매는 모험으로 파워를 늘렸다. 같은 동양인인 파라돈 스리차판(태국)의 활약도 큰 자극. 한때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던 스리차판이 지난해 투어 2승을 포함해 세계 10위권으로 치솟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나 홀로 노력만으로 천하를 얻을 순 없는 법. 이형택 역시 삼성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소속팀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은 챔피언 이형택을 만든 숨은 주역.

성균관대에서 무명의 현역시절을 보낸 주감독은 ‘코트의 돈키호테’로 불린다. 1993년 부산 동호여상에 재학중인 박성희를 발굴, 삼성물산의 지원을 끌어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0년간 매년 2억원의 스폰서 계약을 성사시킨 주감독은 박성희를 통해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테니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박성희는 4대 메이저대회에 단골로 출전했고 1995년엔 역대 한국 테니스 사상 두 번째로 높은 57위에까지 올랐다.

주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국 테니스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남자선수가 앞장서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무모한 짓 아니냐고 손가락질 받았다. 솔직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용돈 줘가며 눈독을 들였던 이형택과 윤용일을 영입, 1995년 삼성물산에 남자팀을 창단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두 선수는 총상금 1만달러짜리 서키트대회를 전전했고, IMF사태를 맞아 가망 없는 팀을 없애야 한다는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주감독은 그러나 이형택과 윤용일이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따낸 금메달 2개를 무기삼아 삼성 고위층을 설득, 1999년 초 삼성증권으로 소속사를 옮겨 팀을 존속시켰다. 주감독은 지난해부터는 미국 유학파로 전문 테니스아카데미 출신인 최희준 코치를 이형택에게 붙여 아무 불편 없는 투어 생활에 밑거름을 제공했다.

삼성증권은 해외대회 출전경비와 포상금 등 연간 15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 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넉넉한 뒷바라지는 다른 아시아권 선수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오죽하면 아시아 최강이라는 스리차판이 삼성측에 스폰서가 돼달라고 애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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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종석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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