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11일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 남자테니스투어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일군 이형택. 비록 1월15일 세계 랭킹 2위 안드레 아가시에게 지긴 했지만, 그는 한국 테니스를 짊어질 대들보로 우뚝 섰다. 라켓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온 이형택의 도전과 야망.
누구도 감히 예상 못했지만 마침내 기적처럼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뒤 라켓 하나에 희망을 걸었던 강원도 횡성 소년 이형택(27·삼성증권). 그가 한국인 선수로는 그 누구도 밟지 못한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투어 챔피언에 올랐다.
1월11일 오전, 호주 시드니의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이형택은 반짝이는 아디다스인터내셔널대회 크리스털 우승트로피를 번쩍 치켜들었다. 한국 테니스 100년 역사의 오랜 숙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한 산골소년이 테니스 라켓을 잡은 지 17년 만에, 프로의 길로 들어선 지 8년 만에 큰일을 해낸 것이다.
시상식에서 이형택은 인사말의 대미를 “나는 시드니를 사랑합니다(I love Sydney)”로 장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형택에게 시드니는 평생 잊지 못할 황금의 땅으로 기억되고도 남았다.
“I love Sydney”
지난해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4강 제물은 스페인이었다. 한국은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120분간의 사투를 마감하며 감동적 승리를 맛봤다. 당시 홍명보가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골망을 흔든 뒤 두 팔을 벌리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지어보인 해맑은 미소는 4700만 국민의 머리 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이형택이 결승에서 만난 선수 또한 스페인 출신인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23). 월드컵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40위인 한국이 세계 8위의 강호 스페인과 맞섰듯 이형택과 페레로의 대결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이형택은 당시 세계 85위에 불과했고 페레로는 세계 4위의 스페인 최강.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단식 우승을 7차례나 차지한 신예 페레로는 ‘모기’란 별명처럼 쉴새없이 코트를 뛰어다니며 맹렬히 상대를 공략하는 스타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형택은 첫 세트를 내준 불리한 상황을 딛고 일어나 오히려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와 끈질긴 투혼으로 2시간43분의 사투 끝에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이형택도 홍명보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며 활짝 웃었다.
이 대회에서 이형택의 활약은 눈부셨다. 지난해 대회에서 8강전까지 올랐던 그는 랭킹이 낮아 예선 3경기를 모두 이겨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파죽의 3연승을 거두고 본선 티켓을 따냈다. 1회전부터는 ‘산 넘어 산.’ 첫 판에서 세계 29위 니콜라스 라펜티(에콰도르)를 제친 뒤 16강전에선 세계 10위 앤디 로딕(미국)마저 잠재우는 돌풍을 일으켰다. 통산 상대전적에서 5전 전패의 수모를 안겼던 로딕에게 ‘5전6기’의 승리를 거둔 데 이어 8강전에서 세계 3위 마라트 사핀(러시아)에게 기권승하는 행운까지 따랐다.
사상 첫 예선 통과자 우승
1968년부터 오픈대회로 치러진 이 대회 사상, 예선 통과자가 우승한 경우는 이형택이 처음. 예선을 거치면 체력 부담이 많아 정상으로 가는 길이 험난한 탓이다. 그러나 이형택은 지칠 줄 몰랐다. 이형택의 우승에 전세계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다. AP는 “이형택은 온갖 역경을 딛고 프로테니스 플레이어로 입문한 선수”라며 “놀라운 백핸드 스트로크로 페레로를 잠재웠다”고 칭찬했다. 로이터도 “감자를 기른 농부의 아들이 한국 테니스 역사를 다시 썼다”고 전했으며, 호주 언론들도 일제히 “대회 117년 역사상 최대 사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결승 상대였던 페레로도 기자회견에서 “내가 패한 게 아니라 그가 이긴 것”이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형택은 얼마나 대단한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남자 테니스대회에서는 국제테니스연맹(ITF)과 ATP가 공동주관하는 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US오픈의 4대 메이저대회가 최상급. 다음으로 ATP가 주관하는 마스터스컵과 마스터스시리즈가 있으며 보통 200만달러 이상의 상금 규모를 갖고 있다. 그 아래엔 총상금 30만∼100만달러인 인터내셔널대회가 있다. 이형택이 우승한 대회도 여기에 속한다. 굳이 서열을 따지면 세 번째 수준이지만, 호주오픈 개막을 앞둔 전초전이어서 비록 상금은 적어도 세계 ‘톱10’에 드는 선수가 6명이나 출전한 A급 대회였다.
1년에 열리는 60여 개의 투어대회 가운데 한 번이라도 우승한 선수는 30여 명에 불과하다. 전세계에 랭킹을 보유한 남자 테니스 선수는 무려 1600명. ‘별들의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은 이형택은 ‘바늘구멍에 들어간 낙타’였다.
남자 테니스는 백인의 전유물로 불린다. 엄청난 파워, 스피드,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데다 역사와 선수층, 신체조건 등 모든 면에서 동양 선수들은 절대 열세다. 현재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드는 아시아 선수는 파라돈 스리차판(태국·세계 14위)과 이형택(세계 67위) 둘뿐. 이형택과 우승을 다툰 페레로의 모국 스페인만 해도 100위권 안에 13명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선수로 투어대회 우승은 이형택이 여섯 번째.
테니스 투어대회 1승은 미국 프로골프(PGA)투어 1승과 맞먹는다고 한다. 오히려 나흘 동안 승부를 겨루는 골프는 하루를 못 쳐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테니스의 경우 ‘부진=패배’를 의미하므로 더욱 힘들다. 그래서 국내 테니스인들은 이형택의 정상 등극을 지난해 최경주의 미국 PGA투어 우승에 버금가는 쾌거로 평가한다.
그럼 계란으로 바위라도 깨뜨린 걸까. 이형택의 우승은 우연이 아니라 실력이 엮어낸 값진 승리다. 짧지 않은 그의 테니스 인생에서 최대 전환점은 2000년 메이저대회인 US오픈. 이형택 자신도 기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선을 거쳐 US오픈에 출전한 그는 세계 강호들을 연파하며 당당히 16강까지 올라 메이저대회에서 14차례나 우승한 피트 샘프러스와 맞붙어 아쉽게 패했다. 당시 이형택의 선전은 불과 1주일 사이에 신문·방송을 통해 40억원 이상의 홍보효과를 낸 것으로 추산될 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테니스에 새롭게 눈뜬 이형택은 거칠 게 없었다. 2001년엔 US클레이코트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선수론 처음으로 ATP투어 결승에 진출했다. ‘마의 벽’이라던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처음 진입해 2001년 8월 역대 최고인 60위까지 이름을 올린 것도 역시 그였다.
그의 성공비결은 뭘까. 한국축구 4강 신화를 이끈 히딩크의 축구철학은 ‘지배(dominate)’와 ‘압박(press)’으로 정리할 수 있다. 90분 내내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는 체력전과 스피드전을 펼쳐 경기를 ‘지배’하고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 수비수 사이를 30m 이내로 좁혀 ‘압박’하는 것이다.
현대 테니스도 마찬가지다. 경기 내내 쉴새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파워 테니스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또 축구의 멀티플레이어처럼 스트로크·발리·서브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포핸드와 백핸드 모두 다양한 구질을 섞을 줄 알아야 하고 코트 전면에 걸쳐 줄기차게 상대를 공략해야 승산이 있다. 반면 기존 한국 테니스는 이기는 플레이가 아닌 지지 않는 플레이 위주였다. 공격적 전술보다는 베이스라인에 붙어 스트로크 위주로 운영하며 상대의 실수를 기대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형택은 달랐다. 강인한 체력과 승부근성을 갖춘 그는 끊임없이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 강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약점으로 지적된 서브와 백핸드 보완에 구슬땀을 흘렸고 포핸드의 위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연습벌레의 부단한 채찍질
이형택은 연습벌레로도 유명하다. 한창 젊음을 즐길 나이지만 술자리는 피했고 취침·기상 시간도 늘 정확히 지켰다. 하루 12시간씩 볼을 때린 적도 있다. 국내외 대회에 나갈 때는 가방 속에 아령을 넣고 다니며 쉴 때도 근력을 키웠다.
시련도 있었다. 2001년 9월 기자는 이형택이 출전한 US오픈 취재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 전년도 대회에서 16강 돌풍을 일으켰던 이형택은 1년 만에 달라진 자신의 위상에 놀라워했다. “예전엔 연습파트너 구하기도 힘들었으나 정상급 선수들이 앞다퉈 훈련 요청을 한다. 또 팬들도 알아보고 사인해달라고 한다. 숙소와 코트를 오가는 전용 승용차도 나왔다. 한마디로 대접이 달라졌다.”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이형택은 1회전에서 힘 한번 못쓰고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상대 선수들의 경계대상이 되면서 전력이 노출된 탓. 초반 탈락의 수모를 안은 이형택은 US오픈 이후 세계 랭킹이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비운을 곱씹었다. 이 경기에서 패한 뒤 한국식당에서 가진 저녁 회식자리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김치찌개를 떴다.
지난해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그는 노 골드의 수모를 안았다. 대회를 앞두고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었고 테니스협회의 무관심에 분통을 터뜨렸다. 투어에 전념하려 정중히 태극마크를 반납했으나 되레 ‘자기밖에 모른다’는 비난의 글이 웹 공간에 쏟아졌다. 테니스를 시작한 뒤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동계훈련에 매달렸고 지난 연말 요코하마 챌린저대회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며 재기의 시동을 걸었다. 평소보다 강도 높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스트로크에 더욱 힘이 붙었고 다양한 서브와 네트 플레이도 연마했다. 볼 컨트롤에 자신 있던 그는 라켓 줄을 평소보다 10파운드 줄여 매는 모험으로 파워를 늘렸다. 같은 동양인인 파라돈 스리차판(태국)의 활약도 큰 자극. 한때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던 스리차판이 지난해 투어 2승을 포함해 세계 10위권으로 치솟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나 홀로 노력만으로 천하를 얻을 순 없는 법. 이형택 역시 삼성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소속팀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은 챔피언 이형택을 만든 숨은 주역.
성균관대에서 무명의 현역시절을 보낸 주감독은 ‘코트의 돈키호테’로 불린다. 1993년 부산 동호여상에 재학중인 박성희를 발굴, 삼성물산의 지원을 끌어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0년간 매년 2억원의 스폰서 계약을 성사시킨 주감독은 박성희를 통해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테니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박성희는 4대 메이저대회에 단골로 출전했고 1995년엔 역대 한국 테니스 사상 두 번째로 높은 57위에까지 올랐다.
주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국 테니스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남자선수가 앞장서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무모한 짓 아니냐고 손가락질 받았다. 솔직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용돈 줘가며 눈독을 들였던 이형택과 윤용일을 영입, 1995년 삼성물산에 남자팀을 창단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두 선수는 총상금 1만달러짜리 서키트대회를 전전했고, IMF사태를 맞아 가망 없는 팀을 없애야 한다는 해체설까지 나돌았다. 주감독은 그러나 이형택과 윤용일이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따낸 금메달 2개를 무기삼아 삼성 고위층을 설득, 1999년 초 삼성증권으로 소속사를 옮겨 팀을 존속시켰다. 주감독은 지난해부터는 미국 유학파로 전문 테니스아카데미 출신인 최희준 코치를 이형택에게 붙여 아무 불편 없는 투어 생활에 밑거름을 제공했다.
삼성증권은 해외대회 출전경비와 포상금 등 연간 15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 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넉넉한 뒷바라지는 다른 아시아권 선수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오죽하면 아시아 최강이라는 스리차판이 삼성측에 스폰서가 돼달라고 애원했을까.
이형택을 말할 때 어머니 최춘자씨(61)를 빼놓을 수 없다. 3형제 중 막내인 이형택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릴 적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때문에 어머니 최씨는 생계를 위해 시어머니에게 3형제를 맡기고 홀로 서울에서 식당 일을 했다. 주감독은 “형택이는 체력을 타고났다. 특히 손목과 어깨 힘이 대단하다”고 했다. 이런 체력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맏형 경택씨(35)를 도우며 자연스레 길러졌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큰형의 가방과 도시락을 대신 날라주면서 1km가 넘는 산길을 왕복해야 했던 것.
초등학교 4학년 테니스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대대로 선비·교육자 집안에서 무슨 운동이냐”며 만류했던 것. 하지만 이형택의 황소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는 3만5000원의 거금을 들여 그라파이트 라켓을 사서 소포로 부쳤다. “어릴 때 우상은 없었다. TV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변변한 잡지도 구하기 힘들어 누가 잘 치는 줄도 몰랐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형택은 라켓 휘두르고 달리는 일이 마냥 좋았다고 했다.
춘천 봉의중으로 테니스 유학을 떠난 이형택은 운동이 너무 힘들어 숙소에서 도망간 적이 있다. 당시 어머니는 아들 걱정에 숙소에서 며칠 밤을 지샜다. 이형택이 배가 고파 제 발로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의 손을 붙잡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형택은 “다시는 나가지 않고 테니스만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한 뒤 그 후로 테니스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춘천 봉의고에 진학한 이형택은 3학년 때 국내 무대 42연승을 거두며 6관왕에 올랐다. 탄력과 파워가 뛰어나 ‘고무공’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스카우트 전쟁을 일으켰던 이형택은 자신을 잡기 위해 27차례나 춘천을 찾은 전영대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는 건국대에 진학, 대학 무대를 휩쓸었다.
이형택은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최씨는 아들의 경기를 직접 보러 간 기억이 별로 없다. 응원 가면 지는 경기가 많았던 탓이다. 최씨는 “내가 가면 엄마가 눈에 밟혀 공이 잘 안 맞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코트 근처에도 안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저 멀리서 아들 걱정을 하며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면 성적이 좋다고 말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고 한다.
최씨는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서 2001년부터 다시 횡성에 내려와 시어머니 이옥순씨(81)와 살고 있다. “뒷바라지도제대로 못해줘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약물검사 때문에 보약도 마음껏 해줄 수 없다. 아프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건강이 나빠진 할머니 안부를 자주 묻는 걸 보니 다 컸나 보다.” 최씨에게 이형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다.
“세계 50위 진입 향해 다시 뛴다”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이형택이지만 계속 승승장구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속단이다. 세계 1위의 선수가 1회전에서 어이없이 무명의 상대에게 무너질 수도 있는 게 세계 테니스의 현실. 주감독은 “주니어 시절 변변한 해외대회 한번 나간 적 없는 순수 국내파 이형택이 계단 오르듯 한 걸음씩 발을 떼던 단계는 이미 지났다. 몇 계단 점프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자기 노력으로 현 수준을 얼마나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형택도 경기마다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야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기술보다 자신감과 경기운영이 나아졌다. 랭킹 높은 선수와 붙어도 주눅들지 않고 위축되지 않는다. 전에는 한번 지고 나가면 뒤집지 못했는데 근성도 더 붙었다. 그래도 서비스 리턴과 세컨드 서브는 여전히 밀린다. 서비스의 정확도를 높이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해야 한다.” 이형택이 지난 연말 기자에게 밝힌 자기진단이다. 국내 테니스 지도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이형택은 1월15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 2회전에서 세계 2위 안드레 아가시(미국)에게 단 1게임을 따내며 0-3으로 힘없이 졌다. 이 대회 직전 세계 10위 안에 드는 강호를 2명이나 제쳤지만 세계의 벽은 역시 높다는 냉엄한 현실에 곧바로 부딪친 것이다.
“배우는 과정으로 생각하겠다. 세계 테니스가 강하고 험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교훈을 얻었다. 언젠가 다시 이길 날이 올 것이다. 세계 50위 진입을 향해 다시 뛰겠다.”
숱한 좌절에도 꿈을 버리지 않은 이형택의 억척스런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형택은 여전히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