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이 일을 냈다. ‘영상세대’ ‘미디어세대’ ‘인터넷세대’로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들이, 평소에는 사회 각 영역에 흩어져 있던 그들이, 그러면서 어떤 중요한 계기마다 깜짝 놀랄만한 정치, 사회적 동원력과 방향성을 연출하는 그들이 한국사회의 중앙무대에 등장했다. 정계에서 주변인으로 떠돌던 노무현을
-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힘의 배경에 그들이 있다.
- 그것은 한국사회의 주류가 만들어낸 단단한 껍질을 깨는 대변혁의 신호처럼 보인다. 비주류의 주류 선언. 그 전복(顚覆)의 묘미에 감동하고 환호하는 풍경에 ‘5060’은 망연자실하다. 변화는 과정이 아니라
- 현실이 돼 다가왔다.
2002년 12월19일 밤 민주당사 앞에 몰려들어 환호하는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
1997년이 ‘좌절의 해’였다면, 2002년은 ‘전복의 해’다. 좌절과 전복 사이에는 정상회복이라는 중간 단계가 놓여 있기에 두 단어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거리가 먼 두 단어를 잇는 가교가 놓였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김대중 정부 내내 지루한 구조조정 과정에 처해 있던 정치와 경제가 정상 회복됐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좌절과 전복이 하나로 연결됐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12월, 학기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이 맛보았던 낭패감과 곧 차단될 취업시장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부터 ‘2002년’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5년 뒤 그들은 ‘붉은 악마’와 ‘노사모’와 ‘인터넷 세대’로 돌아왔다. FIFA 랭킹 40위 수준의 한국 축구가 월드컵 준결승전까지 진출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2002년 봄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동교동계가 장악한 민주당의 주변부를 맴돌던 풍운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계는 한국 축구의 승승장구보다 붉은 함성으로 도핑한 ‘붉은 악마’에 경악했고, 한국인들은 노무현의 당선보다 ‘노무현 상징’을 현실화한 인터넷 세대의 힘에 주목했다. 1997년의 좌절이 전복의 힘을 분출시킨 것인지, 그 속에 이미 전복의 가능성이 숨어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유동성 문화의 형성
한국인들은 2002년에 한국사회가 이미 변화했음을 실감했다. 전쟁의 상처와 성장시대를 아직도 금과옥조로 품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2002년은 충격 이상의 것이었다. 광화문의 거리응원에 덩달아 흥이 났고, 촛불시위에 은근히 걱정을 내비치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아찔해한 기성세대에 그것은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였다.
이런 점에서 젊은 세대 역시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교장 훈화’에 반기를 들면 체벌이 돌아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 거리 응원과 인터넷 유세는 세대적 연대감과 숨어 있는 역동성의 확인이었을 것이다.
‘2002년의 전복’을 통해 한국사회는 기존의 경계를 넘었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 필자는 한국사회를 가두었던 울타리를 넘게 해준 이 힘을 ‘2002년 세대’로 부르고자 한다.
변화의 물결은 기성세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해야 할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반면 젊은 세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냈지만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앞으로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결실을 이룰지는 잘 모른다. 이 변화의 내용과 방향을 읽어내는 것은 사회학자의 몫이다. 이 작업은 곧 한국사회 가치관의 변화를 분석하는 일인데,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성장시대 가치관의 퇴조와 유동성 문화의 형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유동성 문화 속에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대한 반감, 권위와 거대담론에 대한 혐오감, 탈출에의 끊임없는 욕구, 이성(理性)과 일사분란함에 대한 거역, 감성과 감성적인 것을 향한 욕망 등이 뒤섞여 있다.
유동성 문화는 현란한 TV 광고, 인터넷 콘텐츠,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월드컵을 통해 세대적·집단적 문화의식임을 증명해 보였으며, 2002년 대선에서 기성세대의 정치질서를 뒤집었다. 해방 후 한국이 왜곡된 근대를 살아왔다는 점에서 유동성 문화의 등장은 본격적인 근대를 출범시키는 징후라고도 해석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 권위, 거대 담론 같은 근대적 전유물들을 혐오한다는 점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듯 한국 특유의 포스트 모던(post-modern)한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공공성을 거부하지도 않으며 출세지향적 의식과 물질주의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딱히 유럽식 포스트 모던의 범주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아무튼 가변성(fluidity), 유연성(flexibility), 이동성(mobility)의 의미를 모두 함축한 이 유동성 문화는 성장시대의 고정적 목표 추구의식과 규칙 준수적 행위양식에 대한 대립항이다.
젊은 세대의 로고와도 같은 이러한 문화의식과 가치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고 있으며, 향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주류 가치관을 대체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회학적 주제다. 젊은 세대의 감각과 의식은 대학 강의실에서, 옷차림과 동아리 모임에서, 가정과 거리에서, TV 드라마와 인터넷에서, 기업과 일터에서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잡았지만, 그것의 본질은 아직 블랙박스로 남아 있는 듯하다.
간혹 사회학자와 문화비평가들이 그들의 경쾌한 몸놀림과 의식구조를 부분적으로 규명하기도 했지만, 한국사회의 전체적 맥락에서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갖는 변동론적 함의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그 변화의 내용과 방향을 보여주고, 사회 각 영역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질서의 본질과 한계를 밝히고자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벨라(Bellah)는 미국사회의 가치관을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으로 표현하고, 1980년대 미국 중산층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토크빌(Tocqueville)이 170년 전에 관찰했던 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바 있다. 벨라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등장은 해방 이후 50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마음의 습관’이 현격하게 바뀌었음을 의미하고, 한국인의 지배적 가치관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됐음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중앙무대에 등장한 ‘2002년 세대’의 화려한 데뷔가 의식과 가치관의 패러다임적 변화(paradigmatic shift)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향후 몇 년 동안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할 기성세대는 변화를 몰고오는 이 힘이 불가항력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고, 사회의 제반 영역에 차분히 스며드는 이 힘을 변형 또는 수용하거나 궁극적으로는 자리를 내줘야 함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한 토크빌이 조국 프랑스의 지배계급에 내린 경고, 즉 지각을 흔들면서 다가오는 민주주의 물결을 대세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배계급은 곧 몰락할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가 또 다른 의미에서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세대가 계급·계층·종교 등과 마찬가지로 변동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헝가리 태생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이었다. 세대는 역사적·정치적 사건을 공유한 연령집단으로서 소통 가능한 언어와 담론체계를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느슨한 형태의 연대감을 갖는다. 비록 느슨한 형태의 연대감이라 할지라도 특정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형성된 세계관에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세대는 곧 변동의 동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68혁명세대’와 미국의 ‘반전운동세대’처럼 주로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세대의 이름이 붙여진 것도 공유한 경험의 치열성과 그것이 역사발전에 미친 중대한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와 물질적 풍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4·19세대, 6·3세대, 유신세대는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전환의 획을 그은 정치적 사건을 주도한 연령집단을 각각 지칭한다. 어떤 연령집단에 특정 이름이 붙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역사발전의 특정시기에 대한 역사의식을 공유하고(역사적 공동체), 훗날에도 기억될 어떤 정치적·문화적 사건을 공모했다는 자부심과 강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경험의 공동체). 공동개입과 참여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훗날 그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행위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것이 세대의 특성이자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앞서 내가 ‘2002년 세대’로 부르고자 했던 연령집단은 요즘 흔히 2030으로 불리는 20대와 30대를 주축으로 하는 젊은 층이다(그 외연을 조금 넓혀 40대 중반까지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2545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미 사회의 지배층이 된 50∼60대 기성세대의 눈치를 보면서, 밑으로는 청소년 세대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거나 경제적·사회적으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집단이다. 교양과 사회적 비판의식을 나름대로 배양했고 경제적 부양능력도 키우고 있지만, 아직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기에는 경험·경륜, 지도력이 부족한 연령층이다.
20대, 30대라는 폭넓은 연령층을 구태여 ‘2002년 세대’로 압축해 부르려는 것은 월드컵과 대선으로 상징되는 ‘전복의 계기’를 합작했다는 단순명료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만하임이 세대의 조건으로 지목한 변동의 자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의식과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기성세대가 추구했던 목적과는 다른 것을 더 중시한다. 이들의 성장배경에는 ‘민주주의’와 ‘물질적 풍요’라는 두 개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주의와 물질적 풍요는 기성세대가 그토록 열망했던, 그러나 후대를 위해 유보하기를 강요당했던 최고의 가치였다. 기성세대의 경험 속에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빈곤과 경제적 풍요간 단층이 존재하지만, 2030에게는 그런 단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를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기성세대의 쓰라린 체험을 고맙게 생각하는 사려 깊은 마음을 간직하고는 있다.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민주화에의 공헌과 경제적 헌신을 무기로 그들의 기준을 자신들의 생활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2030이 20대로부터 40대 초반까지 20년에 걸쳐 있기에 그 내부에도 크고 작은 세대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젊은 층 내부에 그들끼리 중대하게 생각하는 사회적·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서로를 특화하려는 관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 차이는 젊은 세대 ‘내’ 차이보다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기성세대의 경험은 한국전쟁으로부터 출발해 4·19와 5·16, 유신, 박정희의 피살, 광주민주화투쟁, 전두환 통치에서 일단락되고, 1987년 6월 시민항쟁과 양김 시대의 개막, IMF 사태와 김대중의 집권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억이 전개된다.
투표 당일 최종 후보를 결정한 비율은 20대가 가장 높고(10.9%), 30대가 가장 낮다(6.3%). 그리고, 일주일 전에야 결정했다는 비율은 20대가 46%, 30대 37%, 40대가 38%, 50대가 30% 순이다. 한달 정도를 기준으로 잡으면 20대는 68%, 30대 60%, 40대 61%, 50대는 54%다. 나이가 들수록 이미 오래 전에 최종 후보를 결정한 비율이 높으며, 나이가 어릴수록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후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선거일 한 달 전까지(후보단일화가 결정된 날까지), 기성세대는 이회창과 정몽준 사이를, 젊은 층은 노무현과 정몽준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1월21일 단일후보가 노무현으로 결정되자 기성세대 중 다수는 이회창, 소수는 노무현(정몽준)으로 분절됐고, 젊은 층은 거의 대다수가 노무현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층에서 나타나는 높은 투표유동성은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를 오락가락했다기보다는 노무현 권영길 정몽준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유럽식으로 표현하자면 균열동맹 ‘내’의 모색이지, 균열동맹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황은 아니었다. 무엇이 이들을 노무현-권영길-정몽준 균열동맹에 묶어두었으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노무현으로의 결집을 만들어냈는가의 질문은 역시 2030의 문화적 연대와 표현의 변형된 방식 속에 그 해답이 찾아질 것이다. 필자가 ‘인터넷 데모(internet demonstration)’라고 부르고자 하는 2030의 사회참여 방식이 그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술할 예정이다.
박빙승부를 만들어낸 세대효과는 과 에 잘 나타나 있다. 은 선거 당일 출구조사의 결과며, 는 조선일보의 전화조사 결과다. 서로 다른 조사지만, 대체로 경향을 파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중요한 점은 최종 선택일에 2030은 균열동맹 내부의 모색이 노무현에게로 결집됐다는 이미 확인된 사실에 더해 고학력자들의 지지가 노무현에게로 결집됐다는 점이다.
물론 젊은 세대일수록 고학력자가 더 많이 분포돼 있기에 양자는 서로 중첩된 효과를 발휘할 것이지만, 2030의 60%, 고학력자의 절반 이상(52%)이 노무현을 지지했다는 것은 이른바 ‘세대효과’의 핵심이다. 젊고 배운 사람일수록 성장시대의 풍모와 엘리트 서클의 대변인 격인 이회창을 거부하고 그에 대한 반란의 상징을 택했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유권자 성향의 이동과 한국사회 가치관 변화의 중요한 흐름을 드러낸다. 고학력의 젊은이들은 노무현에게서 관습적·제도적 장애물을 뛰어넘는 의지를 보았을 것이며, 기성세대가 장악한 한국사회의 숨막히는 껍질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을 노무현에게 투사했다.
젊은 고학력자들의 반란
노무현이 2030의 세대적 정서를 실현해줄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그는 ‘2002년 세대’가 배양한 유동성문화의 중추신경과 접선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 유동성 문화가 뿜어내는 자기장 속에서 노무현 권영길 정몽준은 동명이인이었다.
2002년 1년 동안의 지지율 변화로 보건대 고정표는 이회창 쪽이 더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득표율 46.7%는 아마 거의 고정표가 결집된 결과인 반면, 노무현의 고정표는 지지율이 가장 낮았던 30%를 하한선으로, 40%대를 상한선으로 하는 그 중간 지점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데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11월 하순부터 균열동맹 내부의 표가 몰리기 시작해 결국 2.2%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흔히 언론과 방송에서 그 향배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던 30%에 달한 ‘부동층’ 속에는 노무현의 잠재적 지지자가 더 많았던 셈이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숨어 있는 5%’도 젊은 층에게 설득을 당해 투표를 포기했거나 소수는 노무현에게로 갔을 것이다.
이회창 지지자들은 혈혈단신으로 조용하게 자신의 한 표만을 던졌다. 그러나 노무현 지지자들은 근처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함께’ 갔다. 38%에서 48%로 지지율이 수직상승한 것은 균열동맹 내부를 돌아다니던 비판적 지지자들이 동맹군이 돼 한꺼번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동맹군의 탄생 과정에 바로 2030의 문화적 소통무기인 인터넷의 무서운 폭발력이 개입한다. 인터넷은 세대효과를 증폭시킨 ‘2002년 세대’의 인프라였다.
인터넷과 토네이도(Tornado)
정몽준이 지지철회를 선언하던 12월18일 밤 10시, 뉴스 속보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정몽준의 청운동 자택 문을 두드리다가 허망하게 돌아서는 노무현의 당황한 표정이 다음날 저녁에도 재현될 것임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권력의 드라마라니….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 씁쓸한 뒷맛을 마치 자신의 체험처럼 다지며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 기쁜 소식을 전국 지부에 타전했다. 후보단일화 이후 미발표 여론조사에서 줄곧 5∼10% 차이로 열세를 보여왔던 한나라당으로서는 이 무슨 신이 내린 선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부터 2030의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눈치챈 사람은 드물었다. 봉화는 밤새도록 전국 세대원들의 잠을 깨웠다. 휴대전화는 일시에 수십 개의 긴급 메시지를 세대네트워크에 실어 보냈다. 날이 새자 인터넷신문을 열어본 세대원들은 긴급사태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렸고, 여기저기서 올라온 제안문, 전략안, 선언문들의 내용을 검토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표적인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은 접속자가 증폭해서 한때 전산망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 날 하루동안 인터넷신문 접속건수가 300만을 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부모 세대로부터 민주주의와 물질적 풍요를 물려받은 젊은 세대는 전통과 권위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한다.
인터넷이 정치참여의 중요 창구로 등장한 것은 형식과 이념에 집착한 기성언론에 식상한 비판언론 사이트가 생겨나면서부터였는데, 안티조선운동과 낙선운동을 계기로 젊은 층 사이에 대단히 활발한 대안언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2002년 봄 민주당의 국민경선을 생중계하면서 인터넷 언론은 2030의 정치적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인기 있는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발전했다.
젊은 층은 언론시장을 독과점한 유력신문을 구독하는 대신 한겨레신문과 인터넷신문을 비판의식 형성의 주요 기제로 애용했다. 동시에 그들은 수십개의 사이트를 방문하고 넘나들면서 취미, 오락, 뉴스, 기호, 거래 등 생활의 모든 영역을 정보망과 연결했다. 부모들의 잔소리는 귓가로 흘리고 프리챌(freechal)과 다음(daum) 같은 사이트로 파고 들어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동료들과 접선했다.
한가했던 한나라당 사이트
한국 영화 ‘접속’과 미국 영화 ‘유브갓메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젊은 층의 현실이 영화화된 것일 뿐, ‘영화 속의 주인공’이 현실이 되기를 꿈꾸는 기성세대의 소망은 이미 촌스런 것이 됐다. 기성세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해 마지않았던 ‘붉은 악마’가 그렇게 탄생했으며, 선거 일주일 전 폐쇄명령을 받았던 ‘노사모’ 또한 그렇게 생겨났다.
기성세대들은 붉은 악마가 작동하는 내부 메커니즘을 눈치라도 챘다면 ‘전국기성세대모임(전기모)’ 사이트라도 개설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꾸깃꾸깃한 연애편지의 기억을 청년시절 자산 1호로 간직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이메일이 어쩐지 경박했으며, 회원명부에 빼곡이 적힌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들로서는 웹사이트 동호인이라는 것 자체가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on-line community)는 동향회, 동창회, 전우회, 종친회 등과 같은 인격적 공동체에 비하면 마치 아련한 그림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낡은 사회학 교과서에 적힌 것처럼 그들에게 사회집단이란 ‘1차 집단(가족)’과 ‘2차 집단(회사, 정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상공동체(virtual community)라니. 말 그대로 ‘가상적’이라면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상공동체가 일을 낸 것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선 사이트에 접속해본 사람은 한결같이 한나라당의 노쇠한 감각을 비웃는다. 민주당 사이트는 접속한 사람들을 위한 놀이마당과 게임룸을 설치해 일단 들어온 사람들이 쉽사리 퇴장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메뉴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과 민주당에 심한 욕을 퍼붓고 나가도 그만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사이트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어서 접속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한나라당이 선거 몇 주일 전에 무작위로 송달한 ‘e-회창’ 메일은 아마 곧장 휴지통에 던져졌을 것이다. 이회창과 ‘유브갓메일’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2002년 대선에서 홍보의 총아로 부상한 각종 미디어 덕분에 돈선거와 대규모 유세 같은 부정적이고 거추장스런 면이 많이 사라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 미디어선거에 쓴 비용은 민주당이 135억원, 한나라당이 152억원인 데 비해 각 당의 인터넷운영비는 고작 1억원 미만이고 보면 인터넷의 저비용 고효율 파워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정보기기와 미디어의 발달이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 활성화를 통해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소망인 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인구증가와 대중사회의 요건에 맞춰 도입된 대의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의(representation)’를 왜곡하는 요인이 늘고 정치권력과 주민 간의 격리현상이 가속화돼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화기제의 발전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 정치(Agora politics)를 부활시켜주는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누구든지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만 하면 자신의 의견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개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채택이 되는가의 여부는 상관이 없다. 다만 의견을 개진했다는(혹은 주권을 행사했다는) 시원함과 누군지 모르는 상대와 갑론을박했다는 실행의 만족감이면 그만이다.
그 의견이 또 다른 채널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해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는 수많은 유형의 수천, 수만 개의 아고라를 만들어 의견을 교환했다. 기성세대가 제도권 언론을 통해 채색된 세상의 일들을 접하는 동안 젊은 세대는 대안언론 사이트에서 크고 작은 아고라 정치를 실행해나갔다. 비판적·대안적 공론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Habermas)의 지적대로 공론장은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 어떤 뚜렷한 논리적 결론이 도출되는 곳은 아니다. 혹시 의사소통의 장에서 서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이 어떤 도덕적 권위를 수반한 신념을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목표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하버마스의 권고에 따라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그러는 동안 크고 작은 수천 개의 아고라는 서로 긴밀한 네트워크로 연결됐던 것이다.
낙관적인 정보화론이 강조하듯(예를 들면 Barber, 1984; Arterton, 1989) 전자민주주의가 반드시 긍정적인 기능만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몇몇 중소도시에서 정보화 프로젝트가 입증했듯 직접 참여를 가능케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주민회의, 교육과정, 공동체프로그램 등과 같이 여과기제가 없는 참여는 사안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 비용과 시간이 들고 종종 참여자간의 갈등이 첨예화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 벨(Bell)이나 헌팅턴 같은 다소 보수적 경향의 학자들은 규모가 커질수록 직접민주주의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루소(Rousseau)의 교훈을 소중하게 여긴다. 헌팅턴은 세련된 기제로 걸러지지 않는 직접민주주의에서는 참여욕구가 제도적 관리역량을 넘기 쉽기 때문에 체제불안정이 야기될 소지가 많다고 단언하는 것이다(Huntington, 1974). 사실상 2002년 대선에서 젊은 세대의 연결망을 타고 만들어진 공론장은 지배(governance)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체제불안정이 야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생활세계(life world)에 잠재된 신선한 욕망이 그것을 억압해온 체계(system)를 무너뜨리고,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보기 좋게 뒤엎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030이 그 날 축하파티를 열거나 환호해 마지않았던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앞에서 필자가 지적했듯 그것은 직접민주주의이기에 앞서 젊은 세대에게 가용한 데모방식, 즉 ‘인터넷 데모’라는 사실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기성세대가 거리 데모(off-line demonstration)를 감행했듯이, 젊은 세대는 온라인 데모(on-line demonstration)를 선택한 것이다(한국에서는 데몬스트레이션의 약자를 데모로 표현해왔지만 정확히는 저항(protest)이 맞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뚜렷한 타깃이 소멸된 시대에 그것을 대체한 시민운동의 생명은 ‘인지 동원(mobilization of recognition)’에 있다. 동류의 가치관과 시각을 공유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일, 그래서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쟁점의 정치(issue politics)’가 시민운동이라면, 인터넷은 시민운동의 본질에 딱 맞는 특성을 갖는 셈이다.
쟁점을 상징화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중적 인지를 동원하는 일련의 작업이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졌다. 가끔 거리시위를 기획하기도 하지만, 전국에 지역적으로 분산돼 있는 동맹군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행동지침은 웹사이트 항의방문과 항의메일 보내기 같은 것이다. 시민운동적 방식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정치적 요구를 표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바로 이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시민운동에는 의견을 걸러줄 본부와 지도자가 존재한다. 대선의 경우 익명의 시민이 투표의 방향을 수렴하는 지휘역할을 맡는다면 불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듯 선거 당일 인터넷 매체에서 투표의 방향성이 형성됐는데, 거기에 ‘동원의 혐의’는 없을까? 그것이 과연 하버마스가 기대한 대로 도덕적 권위를 수반한 방향성인가? 필자가 앞에서 표현한 것처럼, 수많은 접속자들의 의견이 토네이도로 수렴, 증발돼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개별 접속자들은 결과에 책임을 지려 할 것인가? 시민운동은 행동과 결과에 책임을 진다. 그러면 선거에서의 ‘인터넷 데모’는 어떠한가? 이 점을 조금 자세히 따져보아야 한다.
인터넷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그것이다. 전자를 편의상 프라이버시(privacy)라 하고 후자를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해두자. 프라이버시 영역에서 네티즌들이 나누는 담화는 밀담이거나 취미, 오락, 기호에 관한 것, 개인이 필요로 하는 정보다. 이 경우 인터넷은 밀회의 공간, 즉 밀실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터넷은 공적 쟁점에 대해 참여마당을 제공한다. 게시판, 여론, 공개토론 등인데, 이것은 광장에 해당한다.
인터넷의 특징은 프라이버시와 공론장 사이를 쉽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티즌은 광장만을 갖고 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두 개를 모두 향유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프라이버시와 공론장의 양면적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는 독특한 참여방식이다.
그런데 네티즌들이 공론장에 나갈 때 과거의 기성세대와는 달리 인격체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 환기돼야 한다. 거리 데모에는 인생을 걸어야 했다. 자신의 이념이 얼마나 투철한지,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지, 부모의 절망을 견딜 힘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지 못할 때 비겁하고 초라한 자신을 탓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용기가 있다면 감옥에서 어두운 청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에 비하면 민주화 시대의 광장은 이런 엄청난 비용이 없어졌다. 참여의 비용이 인터넷의 속도와 익명성으로 인해 소멸된 것이다. 의견을 개진하다가 싫증이 나면 빠른 속도로 퇴장하면 그만이다. 혹시 신바람나게 참여했다가도 밀실로 몸을 숨기면 책임을 따져 추적할 사람도 없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인격체로서의 네티즌 명제’를 곧바로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그것을 따져 물을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의 성격이 바뀌었고, 기성세대는 물먹은 당나귀처럼 축 처져 있으며, 구 엘리트 집단은 나라를 잃은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네티즌과 상징권력
누군가 취기로 내뱉었듯 혁명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기성세대들이 찍은 표는 정당하고, 젊은 세대의 표는 경박하다는 뜻이 아니다. 2.2% 차이로 승부를 가른 ‘인터넷 데모’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중요한 점은 아무래도 ‘익명성’에 숨어 있는 듯하다. ‘토네이도’는 익명이자 동시에 네티즌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것은 자율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자기검열의 책임이 따르지만, 결과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는 면제돼 있다. 그러므로 그 행위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노사모는 신원을 등재한 회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사모 내에서 정치집단화가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어떤 사회의 질서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시민들의 역량이라고 할까. 아무튼 사회적 자본을 쉽게 말하면 사회성원간의 신뢰인데, 신뢰가 형성되려면 시민공동체에의 인격적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 R.퍼트넘(Robert Puttnam)의 지적이다.
인격적 참여는 교육과 학습과정을 동반한다. 어떤 규율과 상호작용의 도덕적 가치를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시민적 훈련을 뜻한다. 시민적 훈련은 이름을 가진 구체적 인격체와의 소통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참여자는 언제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훈련과정에서 자율적으로 퇴장할 수 있으나 시민윤리(civic moral)에 의한 도덕적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손쉬운 은닉처와 도피처를 갖고 있는 온라인 공동체에의 참여는 인격체로서 나서는 시민적 참여(civic participation)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익명의 네티즌들이 상징권력을 만들어놓고 다시 최첨단 사무실과 은밀한 밀실로 퇴장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책임 없는 사회적 자본, 생명이 길지 않은 신뢰일 우려가 많다.
토네이도는 세대적 연대감이 일시에 증류된 폭풍이었는데, 그 결과를 책임질 만큼 공적 이익에 투철한 것인지? 여기서 기성세대는 어땠는가의 반문은 일단 유보해두자. 개입과 퇴장의 비용이 너무 작기 때문에 혹시 그들은 치고 빠지는 행위에 익숙한 것은 아닌가? 그들은 혹시 공리적·실용주의적 개인주의를 자신들의 행동지침으로 내면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체 ‘2002년 세대’의 행위양식과 사고방식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2002년 세대’의 등장이 한국사회 가치관의 전반적 변화에 미친 영향, 이제 그것을 논의할 차례다.
◇ ‘2002년 세대의 가치관’ : 결핍과 탈주
선거일 하루 전인 2002년 12월18일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서울 도심에서 마지막 거리유세를 펼치고 있다.
나는 이 명제를 특별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마도 한국처럼 식민지, 전쟁, 쿠데타, 학생혁명, 시민 학살 등의 처절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자주 겪었던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과 부정을 거듭해도 끝내 변하지 않는 매우 끈질긴 사고방식과 관습이 있다. 그것을 사회학적 용어로는 원규(mores)라고도 하고, 토크빌 개념으로는 습속(folklore)으로 명명된다. 습관은 오랫동안 한 사회 다수의 성원이 자발적으로 형성해 스스로 따랐던 공통적 행위규칙과 사고방식, 그리고 규범을 지칭한다.
어떤 이는 그냥 ‘전통’으로 해석하고 싶어하겠지만, 습관은 전통을 포함해 사람들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기준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역사적 잔여물’이자 ‘마음의 관습’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개인은 역사화된 습관의 담지자다. 그런데 2030은 역사적 잔여물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려 했던 것이며, 1980년대 이후 그들의 성장과정은 역사화된 습관을 거부하기에 적합한 토양이었다.
필자는 앞에서 민주화와 세계화가 2030의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두 축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는 그들에게 집단우위적 사고를 거부하는 탈주의 이념인 ‘개인주의’를 선물했고, 세계화는 국가중심적·권력개입적 규율과 대척점에 서 있는 ‘시장합리주의적 성향’을 내면화하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성장시대의 유산에 대한 거부이자 아버지 세대에 대한 거역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시장합리성의 공간으로 이동한 그들은 그것의 준거가 될 역사적 잔여물 또는 마음의 습관은 발견되지 않음을 알아차려야 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와 시장합리주의는 아버지 세대,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에게는 낯선 이념이자 문제아적 소수자의 신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는 개인적 권리 및 시장합리적 규칙과 상충하는 ‘기존의 모든 것(즉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를 자신의 생활양식으로 습득하는 경향이 확산된다. 국가는 전통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개입주의적·간섭적·가부장적 질서와 집단우선주의 등 국가의 중심성을 보강해온 성장시대의 이념적 요소들이 한꺼번에 부정된 빈 공간에 시장과 개인이 자리잡는다.
개인은 집단에 대한 대립항이고, 시장은 권력적 개입과 그에 따른 특혜의 대립항이다. 이들이 아버지 세대로부터 쓸 만한 것을 찾아냈다면 그것은 아마 평등주의일 것이다.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다, 또는 성공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던 성장시대의 신조는 평등주의적 제도를 실현하는 지렛대로 작용하기보다는 권력집단과의 연줄로 성공한 사람들의 부조리를 공격하고 그것을 못 누린 자신을 위로하는 신념으로 기능했다.
평등주의와 기회균등의 차이
2030 역시 평등주의의 이런 유용성을 발견했다. 학력 위주의 경쟁을 성공의 유일한 사다리로 고정시킨 기성세대의 편협성과 그것에 기반을 둔 엘리트 서클의 배타성을 공격하는 데에 이처럼 신나는 무기가 없기 때문이고, 사회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에 실패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에, 그리하여 더 많은 탈락자와의 연대성을 배양하는 데에 이처럼 유용한 정신적 무기는 없었을 터이다.
IMF 사태 이후 소득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2030은 종종 권력자들의 정책적 실패를 비난하는 데 평등주의가 의외로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런데 평등주의는 개인적 영역에서는 아무런 부대낌이 없었지만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바로 자유주의와 상충된다. 타인의 권리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2030은 기성세대와 꼭 마찬가지로 평등주의를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에 적용하기보다는 성공한 사람과 자신의 불이익을 견주는 데에 활용하는 것을 더 즐긴다.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덕목인 시민윤리를 배양하는 공적 기제가 없기는 기성세대와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다.
토크빌이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건인 ‘제조건의 평등(equality of conditions)’이 무리 없이 이뤄지려면 타인을 위해 자유를 유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성세대나 2030이나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넘실거리며 들어오는 개인적 자유를 발견하는 데 도취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유형의 평등주의관은 ‘능력위주의 경쟁과 보상’ 및 ‘기회 균등’이라는 시장합리성의 두 가지 핵심 요소 중 기회 균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시장합리성에 대한 2030적 해석일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면’ 시장경쟁은 합리적이라고 믿는 신념이 평등주의의 촉매를 타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기회균등을 파괴하는 불평등 현상에 대한 강한 배척감이 형성됐던 것이다. 2030이 연고주의, 소득격차와 계층 재생산, 교육기회의 불균등, 재벌독점 같은 한국의 사회적·경제적 쟁점에 대해 놀랄 만큼 획일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회 균등’이라는 2030의 강조점은 사실상 국가와 사회가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함을 부각시킨 개념이다. 다시 말해 2030이 세대적 가치관의 핵심요소로 내면화한 세 가지 덕목인 개인주의·시장합리성·평등주의에서 ‘개인적 책무’는 오히려 소실되고, 국가와 정치권의 책임, 또는 잘사는 계층과 입신출세한 엘리트 집단의 책임이자 그것을 방기한 지배집단의 비윤리성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나는 것이다.
인터넷 토론광장에 자주 출현하는 정치권과 사회에 대한 비난은 2030의 이런 의식의 프리즘이 배태한 산출물이다. 그것은 종종 취기를 못 이겨 쏟아놓은 토사물과도 같고, 사회를 송두리째 뒤집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배설물과도 같다.
12·19의 ‘인터넷 데모’에 이런 혐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기성세대를 공격하기 위한 이 정신적 무기를 만들어낼 때, ‘사회에 대한 개인적 책무’와 ‘공동체적 윤리의식’이 비어 있는 것 역시 아버지 세대가 책임져야 할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성세대에게 자율적 책임과 시민윤리(civic moral)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형성될 토양은 국가중심적·집단우위적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철저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윤리의식이 결여돼 있다고 2030을 비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율적 책임과 시민윤리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공적 기구인 학교, 정부, 가족의 권위를 지키지 못한 기성세대에게 2030을 비난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되는 공교육의 붕괴는 성적 향상에 학교 선생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통상적 의미가 아니라 학교 교육이 시민윤리의 배양에 오히려 방해가 됨을 뜻한다. 교실에서는 모범생이 왕따가 되기 일쑤며, 왕따 현상을 주도하는 건달패를 선생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새 정권이 들어서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부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던 세대에게 기성세대가 어떤 믿음직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정부가 사회적·정치적 문제아로 줄곧 등장하는 한 도덕적 규제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한편 가족 또한 자율적 규제권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동안 부모와 자녀간의 친밀도가 높아지면서 양 세대간 권력거리는 매우 짧아졌지만 그에 비례해 가족의 교육 기능과 사회화 기능 역시 급속하게 약화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버지는 경제를, 엄마는 교육을 분업하는 동안 자녀들은 본래의 중대한 임무를 상실한 학교에서 하루 종일 별 쓸모 없는 지식을 주입 받는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보여줄 자산은 별로 없다. 상층집단의 아버지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쏟아 어떻게 입신에 성공했는가 하는 비법을 전수하고 상층신분을 수성(守成)하는 데 필요한 교활한 지혜를 가르친다.
중산층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권력과 금력을 좇아 어떻게 바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줄 뿐이며, 그것을 충분히 성취하지 못한, 불만으로 가득 찬 ‘공허한 자아’를 남겨줄 뿐이다. 그들의 ‘기억의 공동체’에는 전쟁, 쿠데타, 권위주의적 동원과 경제성장 외에 물려줄 자산이 빈약하다. 그것의 대립항으로서 자유, 평등, 시장합리성을 선택했을 때 젊은 세대 역시 무엇인가 결핍된 ‘공허한 자아’에 직면한다.
결핍을 채우려는 허기가 2030의 문화적 연대감을 만들고 가끔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집단의례와 축제로 표출되는 것이다. 붉은 악마가 태어난 배경에는 결핍을 채우려는 이런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현장참여의 대체 욕구
이렇게 보면 유권자의 지지성향의 변화를 분석한 에서 가치관 이동의 두 개의 축인 ‘자유주의’와 ‘탈주의 이념’은 역사적 잔여물 또는 마음의 습관이 부재한 공간에서 전통에 대한 대립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킨다.
사회적 책무와 시민 윤리는 예나 지금이나 결여되기는 마찬가지다. 개인적 책무가 결여된 자유주의(liberalism)는 그것을 겸비한 자유주의(libertarianism) ― 예를 들면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이 자유주의사회의 폐해를 시정하고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거리가 있다. 국가 중심적·집단 중심적 이념의 단순 대립항으로서의 탈주 이념은 공공 이익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반쪽과 공동체주의의 반쪽을 서로 무리 없이 접합시키는 접착제가 한국 특유의 평등주의이며, 사적 이익의 평등에 대한 강조가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자유’와 ‘공동체로부터의 가벼운 이탈’을 촉진한다.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폭증은 인격체로서 자발적 결사체 활동을 결여한 대부분의 젊은 층이 심리적 보상욕구와 현장 참여의 대체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여러 방면의 시민운동에 가담하는 미국과 독일의 젊은 층이 한국에 비해 정보빈자(貧者)로 인식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시민단체와 근린회의 참여가 일상화돼 있는 선진사회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미국도 이러한 측면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학자 벨라(Bellah)의 지적처럼 무한한 자유만을 갈망하는 개인주의가 기독교적 윤리(성서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개의 습관에 의해 견제되고 세련되면 그것에 시민적 윤리라는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개인주의라는 ‘제1의 언어’와 시민윤리라는 ‘제2의 언어’가 결합되는 이치다. 미국에는 오랫동안 시민적 참여와 공공이익에 대한 자발적 헌신을 결합하는 괜찮은 습관이 존재해 왔다.
개인과 사회적 책임, 자유와 시민윤리 간의 ‘분리의 문화’는 정보화 기제를 이용한 의사소통의 양식에서 증폭될 위험이 있다. 앞에서 지적한 ‘익명성’ ‘진입 및 퇴장비용 소멸’ ‘사적 공간과 공론장 간의 빠른 이동성’이 서로 융합해서 자유와 윤리 간 분절을 가속화한다. 또한 시민적 책임을 털어낸 자유와 평등의 담론이 인터넷 네트워크를 타고 세대원들에게 빠르게 전파된다.
앞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했던 ‘2002년 세대’의 문화적 연대감은 이쯤에서 다소 우려할 만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성세대가 그것을 탓할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상기하기만 한다면, 2030의 세대관이 반쪽만의 결핍과 불균형 상태로 성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함께 성찰해야 할지가 떠오를지 모른다.
2030은 탈주한다. 성장시대의 유산과 전통으로부터,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으로부터,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듯이 보이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이해(interest)를 버리고 정념(passion)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경쟁에서 축제마당으로, 자신과 교감할 수 있는 익명의 동호인에게 막연한 신뢰의 부호를 송신하면서 자신을 키워준 사회와 빠른 속도로 결별하고자 한다. 한국사회는 지배집단과 우월한 조직들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권력화되면서 정념을 체계적으로 죽여온 삭막한 세계임을 그들은 유보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현실적 이해관계로 얽히고 설킨 한국사회의 추한 모습을 자신들의 소박한 정념의 거울에 비추려고 한다. 정념은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허위를 허위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의 저수원이다.
풍요의 시대를 거치면 이런 세대가 태어난다.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과 반전세대가 그랬고, 프랑스에서 68혁명세대가 그러했다. 그들을 숨막히게 하는 기성세대의 지배이념을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앙리 레비(Levy)가 묘사했듯, 야만에서 문명으로, 억압적 이성에서 해방적 감성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의 ‘2002년 세대’는 거부해야 할 짐이 인권세대나 68세대보다 더 무겁고 거부를 정당화해줄 이론적 무기가 빈약하다. 자유주의, 평등주의, 시장합리성을 그들의 놀이마당으로 수용했지만,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고, 경쟁과 기회균등이 충돌하고, 기회균등은 사적 이해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적어도 당분간은 유보하고자 한다. 자유, 평등, 시장이 한데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해결하는 것보다 허위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30이 서 있는 지반의 허약함을 환기시키는 것보다 그들을 탈주하게 만든 현실세계의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 옳은 태도다. 고개 숙인 5060이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 가식으로 가득 찬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여옥의 ‘대한민국은 있다’는 그런 관점에서 흔치 않은 고백이다. 남성과 여성, 파워엘리트, 조직결속문화의 세 가지 주제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은 기성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그들의 습관이 얼마나 비굴한 형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무슨 일이든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서 아는 사람부터 찾고 보는 ‘연줄 지향적 습관’, 집단과 조직 속에 개인은 숨어버리고 ‘홀로 서지 못하는 습관’, 엘리트집단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부재’ 등 기성세대의 병리적 현상이 젊은 세대를 어떻게 서서히 질식사시켜왔는가를 일깨운다.
“그들에게 방향타를 넘겨줘라”
기성세대의 행위양식은 한국사회를 ‘복지부동한 기술관료주의’ ‘권력지향적 인격’ ‘성공지향적 교육’에 매어놓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 출신이어서’ ‘끌어주고 밀어주는 힘이 없어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변으로 밀려난다. ‘박사님’ ‘의원님’ ‘사장님’ 앞에서는 일동 차렷 자세로 자발적 순종을 보이며, 심지어는 그들의 사모님에게까지도 눈도장을 찍어두어야 하는 사회. 그러고는 돌아서서 ‘저 양반 저러면 안 되는데’를 속삭이는 사회.
이런 형태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또다시 그런 경쟁법칙을 재생산하는 지배층이 앞다투어 모여드는 강남이 ‘대한민국 특구’로 자리잡은 사회. 지방민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명실공히 이류시민이 된 사회.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평생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는 사회. 월급의 절반 이상을 주택비와 교육비로 충당해야 하는 사회. 초등학생부터 과외로 단련시켜야 입신의 기본조건이 갖추어지는 사회.
이런 짐들을 물려받고 싶지 않은 2030에게 ‘대한민국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다. 과거에는 그것을 ‘거역하고 싶은 아픔’으로 접어야 했으나, 이제는 깨뜨리지 않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임을 2030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참을 수 없는 대한민국’이 노무현 상징으로 폭발한 것에 분노를 느끼다 못해 무기력증을 호소한다면 보수특권층은 노블리스 오블리쥬 망각증을 또 한번 드러내는 꼴이 된다.
2030의 탈주는 거대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현장과 일상생활에서 작은 이탈을 꿈꾸고 실천한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듯, 세대원의 작은 손짓이 모여 미래의 거대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들의 모반에 세대갈등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여전히 성장시대의 유산을 누리고 싶어하는 엘리트집단의 낡은 저항일 뿐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방향타를 넘겨줘라. 그들은 기성세대가 우려할 만큼 강렬한 반미감정을 표출하면서도 미국 중산층의 모던한 생활을 다룬 시트콤 ‘프렌즈’에 열광할 줄도 안다. 이들에게 평생직장 개념이 이미 낡은 것이 됐다고 직무 헌신도와 생산성이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일과 즐기는 것에 구분을 두지 않는 2030은 직장에서 밤을 새워도 초과근무수당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꿈이 투영되고 그것이 실현되기를 더 바라는 태도에서 벌써 기존의 조직문화는 효율성을 상실한다.
직위 호칭은 이들에게 촌스런 지위의식만을 나타낼 뿐이다. 신분과 지위상승 욕구가 없을 리 없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무만족이고 자아실현이다. 구태의연한 승진 가능성보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종을 선호하는 이들은 직장과 일터에서 크고 작은 이탈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열려야
이런 이탈들이 문화적 코드로 변화돼 한국사회의 모든 일상 공간에 스며들고 있다. 이들은 기능보다 디자인과 아름다움을 소비한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구현된 것들에 자신의 소득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저축을 강조해온 기성세대들이 명품관을 찾아 과시 소비를 하는 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감각을 표현한 상품들에 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이 2002년 세대의 작고 건강한 양심일 것이다. 이 작고 건강한 양심이 기성세대의 허위를 질타하듯 2.2%의 격차를, 경직된 정치질서의 번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누군가 지적했듯 그것은 2030의 아름다운 승리일 것이다. 이들의 모반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한민국만의 상품이자 자산”으로 “앞으로의 개혁가도에서 10년 이상 희망의 배터리를 충전”한 것이다.
유동성 문화는 이렇게 낡고 고정된 것으로부터의 탈출로 시작됐다. 기성세대의 경직성과 허위의식이 그들에게 탈주를 부추겼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해줄 아무런 유산도 없이 자유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피터 드러커(P. Drucker)의 말대로 다가오고 있는 미래는 이들의 자유로운 항해를 뒤엎을 만큼 격렬한 변동의 물결로 요동칠 것임에도 말이다.
승자가 패자로 바뀌고, 경쟁자가 동업자로 둔갑하는 극한적 유연화, 극한적 경쟁의 시대가 한국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관료는 독일의 관료와 경쟁하고, 한국의 기업은 미국의 기업과 무한경쟁에 나설 시대가 이미 코앞에 와있는 것이다. 거대기업은 수십 개의 작은 단위로 쪼개져 수십 명의 CEO들이 병존하는 연합체가 될 것이다.
노동자는 지식전문가로 변모하고, 여러 개의 파트타임으로 나눠진 다중 취업이 보편화된다. 평생 동안 두세 차례 전직을 감행해야 하고, 취업자의 평균연령은 50대 중반, 청·장년은 교육과 지식습득에 막대한 시간을 쏟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정보기술과 인터넷으로 연결된 그 사회에서는 지식전문가와 자본가가 권력을 공유하며 조직과 생산과정을 자유자재로 기획한다.
몇 개의 문명권으로 쪼개진 세계에서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툴 것이며, 일본과 한국이 그 뒤를 이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은 외국인들의 거점도시로 변모한다. 이런 미래의 세계 모습은 우리에게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권고한다. 2030은 기성세대의 단단한 패러다임 중 가장 강력한 것 하나를 무너뜨렸다. 이제 2030의 네트크라시(Netcracy)는 기성세대를 향해 열려야 한다.
이에 비하면 2030에게는 앞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이라는 집단적 상처가 추상적 공간에 존재할 뿐이며, 4·19, 유신, ‘서울의 봄’ 같은 엄청난 정치적 사건들이 역사교재의 중대한 장의 형태로 인식된다. 역사인식을 통한 추체험(追體驗)은 의식과 행동양식의 배경일 뿐 그것을 구성하는 직접적 질료가 되지는 않는다.
30대 후반과 40대 초반 연령이 ‘서울의 봄’과 전두환의 폭정을 직접 겪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2002년 세대’의 세대원이 되는 데에는 별로 장애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한 짧은 투쟁의 기억은 권위주의체제로 편입되기보다는 1987년 민주화에 편입되는 것이 통상적이기 때문이다. 1987년은 2030 윗연령층의 반 권위주의 투쟁경험을 민주화로 수렴시키는 결정적 계기였으며, ‘2002년 세대’의 세대관에 머릿돌을 놓은 원초적 체험이었다.
2030의 30대는 1987년 6·10 시민항쟁을 주도한 이른바 ‘넥타이 부대’이자 민주화와 세계화의 파고를 동시에 경험한 386세대이기도 하다. 1987년이 2030에게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이었다면, 1997년의 외환위기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구조법칙을 각인시킨 ‘세계화의 원초적 경험’이었다.
5년 전 외환위기가 급습했을 때 지금의 30대는 25∼35세 연령층이었다. 막 노동시장에 진입했거나 회사의 하급 관리직까지 힘겹게 승진했을 때였다. 취업시장에서 입사원서를 들고 이리저리 기웃거렸고, 적령기 연령에 처했던 사람들은 결혼을 미뤘을 터며, 신혼살림을 벗어나 작은 집을 마련하려 했던 사람들은 ‘마이 홈’의 꿈을 접어야 했을 것이다.
세계화의 화려한 구호는 이들에게 이렇게 쓰리고 냉혹한 형태로 다가왔다. 시장을 무시하면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냉철하게 깨닫는 계기가 됐다. 이것이 2030으로 하여금 기성세대보다 더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변모하게끔 만들었다.
기성세대가 왜곡된 형태의 국가개입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면, 2030은 출발선부터 프리드먼(Friedman)을 신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장의 시대가 개막됨과 동시에 2030은 시장주의자로 배양됐다. 20대라고 이와 다르지 않다. 5년 전 15∼25세 연령층에 포진해 있던 20대는 IMF사태로 가정경제의 급작스런 위축, 부모의 파산과 실직 같은 엄청난 사건을 통과했다. 그들의 체험 속에도 시장의 명령을 거스르면 대가를 치른다는, 짧지만 강렬한 교훈이 새겨져 있다.
세계 최고의 정보화 집단
이렇게 보면, 2030의 세계관에는 민주화와 세계화(또는 시장의 절대성)가 두 개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 5060 세계관의 두 개의 중심축, 권위주의와 민족중흥과는 서로 다른 극점에 위치한 대립항들이다. 말하자면 2030은 한국의 역사적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세대를 구성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셈이다.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전개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사회적 분위기는 이들을 세분된 세대 단위로 행동하게 하기보다는 ‘2002년 세대’로 등장하게끔 촉진하는 요인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했던 촉진요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대중교육 : 1980년대 초반 이후 대학교육의 대중화가 시작돼 대학생 100만명 시대가 개막됐다.
▲빈곤과 결별, 그리고 경제적 윤택 : 1980년 초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를 넘어서면서 빈곤과의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고, 이후 20년간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가능해졌다.
▲세계무대로 진출 : 해외여행 자유화조치가 발효되면서 외국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늘었고, 의식과 생활의 준거가 선진국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기성세대가 고립된 섬에 살았다면, 2030은 외국과 잦은 교류에 노출됐다. 1993년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은 2030으로 하여금 세계인식을 촉진시켰다.
▲자유주의 확산 : 민주화의 결과로서 전통과 권위를 내세운 강요는 구속력을 잃었다. 중·고등학생들의 교복이 사라졌고, 외모와 옷차림에 대한 관심이 늘었으며, 자유롭게 개성을 연출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욕망이 증가했다.
▲개인주의 증대 : 집단적 획일주의가 호소력을 잃었으며,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학교, 교도소, 군대와 같은 규율기관에서도 개인적 공간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구속력 하락 : 가정이 담당하던 일차적 사회화 기능이 축소됐다. 부모와의 권력거리가 짧아지고 자식의 인격적 권리가 허용됐다. 이혼율 급증, 결손가정 증대, 독신가정 증가가 점차 두드러졌다.
▲정보화 : 1980년대 초반에 설계된 정보화는 국가의 산업전략이었는데, 이것의 사회적 효과는 경제적 효과를 상회했다. 정보화의 총아인 PC, 인터넷, 휴대전화는 2030의 인프라에 해당한다. 2002년 현재 국민의 60%가 PC를 소지하고, 인터넷 사용자는 2560만명, 국민 1인당 인터넷 사용시간이 주당 평균 14시간에 달한다. 인터넷 콘텐츠와 휴대전화 부가서비스의 주 대상이 바로 2030이다. 한국의 2030은 세계에서 최고의 정보화집단으로 성장했다.
2030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유권자의 2분의 1을 차지하는 대규모 연령집단이다. 신산업이 일차적으로 눈독을 들이는 주요 고객이자 패션과 유행을 창출하는 최고의 패드세력(fad group)이다. 신상품이 출시되면 이들의 검증을 거쳐야 하고, 인기를 얻으려면 이들을 유혹할 줄 알아야 한다. 베스트셀러가 될 것인가, 영화와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와 구식이냐, 신식이냐의 결정도 모두 이 집단의 판단과 기호에 달려 있다.
2002년 6월 한국인의 ‘레드 컴플렉스’를 날려버린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
2030은 자신들만의 독자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가? 한국의 20대와 30대는 세대로서의 소명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는가?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또는 공적 쟁점에 대해 세대적 이념을 표출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 도대체 그들은 세대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내기는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2030의 답은 명백하다. ‘글쎄요’, 또는 ‘아닐 걸요’다. 이 질문들은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20세기적 문제의식이자 냉전시대를 돌파해온 기성세대에게나 익숙한 거대담론적 쟁점이다. 문제의식이나 거대담론은 2030이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그래서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념들이다.
이런 뜻에서 그들은 일찌감치 거대 이념과 결별했다. 기성세대가 ‘사랑과 혁명’ 사이를 방황하면서 최인훈의 ‘광장’과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고뇌의 지침서로 간직하고 있다면, 2030은 ‘가을 동화’에 매료되고 ‘들국화 향기’ 같은 순애보에 눈물 흘리기를 좋아한다.
그래도 이념의 맛을 살짝 보았던 386세대의 대표적 드라마 ‘모래시계’는 운동권의 이념적 고뇌를 이룰 수 없는 사랑 얘기로 흡수해버린 전환기적 영상물이었다. 이념적 투쟁의 마지막 표현이었던 6·10항쟁 직후 공산주의 국가의 도미노적 붕괴를 건너 본격적인 영상시대로 진입했을 때 이미 이들은 20세기의 이데올로기와 작별했다.
자유항쟁의 징표였던 체코의 프라하에 민주국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것을 기성세대들은 숨죽이고 바라봤지만, 386세대는 ‘돌아온 탕아’처럼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자신의 방을 돌아보면서 공허감에 떨었다. 그 공허감은 곧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했다. 1990년대 초반, 386세대가 막 청년기를 막 벗어났을 때, 그들은 비어 있던 자신의 방에 샤갈, 칸딘스키, 마티스의 화려한 그림을 걸었다.
그것이 부르주아적 세계의 상징물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노동의 세계는 끝난 것처럼 보였고, 계급이데올로기는 정보화와 시장의 공세에 무력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념과 속죄의식의 해체
당시의 문학과 예술은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세대였던 386세대의 허무감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청년 소설가 박상우는 광장에서 밀실로 돌아온 운동권 학생의 일시적 허탈감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 형상화했다. 투쟁목표를 잃어버린 친구들과 거대담론의 마지막 자락을 붙들고 하릴없이 입씨름한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온 주인공에게 방에 걸려 있는 샤갈의 그림은 ‘너의 세계는 무엇이었던가’를 묻는다. 주인공은 초췌해진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전환기의 소용돌이에서 20대를 떠나보낸 시인 최영미는 ‘이제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이념적 세계와 절교를 선언했다. 버려두었던 ‘밀실의 자아’를 찾는 여행은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아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사뭇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제목으로 시작됐다. 여행은 시작됐지만, 길은 없었던가?
사실 길은 천지사방으로 나 있었다. 1990년대는 개방의 시대였고 민주화의 시대였다. 이념에의 긴장과 속죄의식이 해체된 자리에 시장(market)이 들어섰다. 시장은 오랫동안 권위주의체제에 의해 차단됐던 자유 선택의 마력을 뿜어댔다. 억압과 규제가 속속 철거되자 길이 아니었던 것이 새로운 길로 등장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선발대였다. 마치 유럽의 세기말에 ‘무서운 아이들(Enfant terrible)’이 그랬던 것처럼 밀려드는 시장의 파도를 타고 개성을 연출했다. 광장과 밀실의 경계는 없어졌다. 광장에서도 밀실의 맛과 멋을 나눴고, 밀실에서도 광장의 패션을 얘기했다. 정보화 시대의 개막은 그들에게 신직종을 선사했다. 인테리어, 건축설계, 디자인, 공간배치, 기획과 광고, 홍보와 영상, 애니메이션, 컴퓨터 프로그래머, 금융과 투자전략가, 자산관리 등의 신직종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IT산업을 생활공간 깊숙이 도입한 20대, 이른바 ‘N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의 감각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직종이 속속 출현했으며, 386세대의 경영마인드는 신감각의 시장 확산을 가능케 했다. 과거에는 직업과 신분이 단단하게 연결돼 직업선택에 개입하는 전통적 가치관의 규제를 거역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길이 천지사방으로 뚫리자 출세와 성공에 적용되던 개념이 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행보를 방해하는 전통적 규제와 가치관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자 그들은 문득 성장시대의 제도와 문물이 자신들의 상상력과 자유로운 행보를 옥죄고 있음을 느꼈다.
거부와 전복의 음모는 이때부터 싹텄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된 인터넷혁명은 거부와 전복의 음모를 촉진한 그들의 무기였다. 마치 빨치산들의 봉화처럼 그들은 사회 각 영역에 깊숙이 숨어 있는 동호인과 미래의 동료들을 찾아 인터넷 신호를 발신했고 익명의 수신자로부터 지지성명서를 받았다. ‘2002년 세대’는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 사이에 오고갔던 송수신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었던가를 해독하는 것, 인터넷 의사소통과 콘텐츠가 어떤 시대적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던가를 해석하는 것, 일상적·공공적 만남에서 어떤 언어를 주고받았고 어떤 의례를 갖추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2002년 세대’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일이다.
피터 볼(P.Wohl)이 관찰한 ‘1914년 세대’는 어찌 보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20세기 초 유럽 젊은 지식인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에 공통적인 논리와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각시킨 개념이다. 이 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직후인 1914년 당시 자신들이 표현한 울분, 분노, 절망, 거역의 정서가 기존 세대와는 구별되는 독자적 세대를 형성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겠지만, 피터 볼이 보기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폭풍을 예고하는 세계관이 바로 그것에서 싹트고 있었다.
‘1914년 세대’는 유럽 국경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개별적 청년 지식인들의 집합적 표상이다. 여기에는 안탈(F. Antal), 벨라 발라즈(Bela Balazs), 벨라 바르톡(Bela Bartok), 포가라시(Fogarasi), 하우저(A. Hauser), 어빈 자보(Ervin Szabo) 등의 젊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가담해 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루카치(G. Lukacs)가 헤겔적 언어로 마르크스주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들은 ‘1914년 세대’의 지적 전위부대, 문학사회학자인 루시엥 골드만(L. Goldman)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아적 개인’이었다. 이들 문제아적 개인들은 유럽의 찬란한 문화와 정신을 파괴하는 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 ‘아버지 세대’의 가볍고 경박한 실증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하고 영혼과 정신의 근엄한 명령을 찾아 모험을 시도했다. 이들의 모험은 곧 아버지에 대한 거역, 즉 인문주의적 정신과 영혼의 순수성을 현상적 지식과 경험과학으로 대치시켰던 기성세대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념론과 주관적 문화(정신과 이념)의 급속한 부활 징후가 전유럽으로 퍼져나간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유럽의 ‘1914년 세대’에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인텔리겐치아가 있었다면, 한국의 ‘2002년 세대’에는 이데올로기라는 무거운 옷을 벗어버린 실용주의적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 전문가들은 유럽의 인텔리겐치아, 아니 더 가까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운동권 지도자들처럼 역사적·시대적 사명감에 투철한 인물들이 아니다. 어느 날 천지사방으로 뚫린 길을 따라 신천지의 새로운 멋을 개척하는 데 만족하는, 그러면서 새로운 체험담을 서로 나누는 것에 만족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아버지에 대한 거역
과거에는 설득과 계몽이 있었다. 지금은 탐험과 공유가 있다. 문화는 외부에서 주어져서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고 느낀 그대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2002년 세대’는 문화의 객체가 되기보다 주체적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고자 했다는 점에서 5060과 본질적인 차이가 난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사회과학계의 늦은 반성과 함께 문화 패러다임이 각광을 받게 된 것도 이렇게 설명된다. 주체적 문화와 의식이 없는 체제는 쉽사리 붕괴한다는 사회과학적 성찰은 허탈감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주체적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은 ‘2002년 세대’가 서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자 거대담론과 논리를 거부하는 그들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앞에서 필자는 그들에게 ‘시대정신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부정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5060이 살아온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다. 2030은 문화의 주체적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고자 한다. 문화를 일단 ‘삶의 양식과 경험의 집합적 표현’이라고 정의하면, 2030은 그들이 직접 생산한 주체적·주관적 문화로 자신들을 키워온 객관적 문화(제도, 법, 규칙, 조직구조)를 길들이고자 한다. 길들인다는 표현은 다소 혁명적이므로, 주체적 문화와 객관적 제도 간 격차를 메우고자 한다는 표현이 더 온건할 것이다.
2030은 그런 의미에서 솔직담백하며, 그런 격차 속에 숨죽이며 살아온 5060을 경멸한다. ‘아버지에 대한 거역’인 것이다. ‘아버지 죽이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공통적 욕망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면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4·19세대는 극단적 허무감과 좌절감에 떨었다. 그것은 곧장 무기력한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으로 나타난다. 가령 최인훈의 ‘회색인’에 나오는 주인공 독고준은 그런 정서를 대변한다. “옅은 졸음에 겨운 초로의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고향의 밤은 어떤 시대의 젊은이에게는 거역하고 싶은 아픔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정지용의 ‘향수’는 곧 아버지세대에 대한 모반으로 표출된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 세대’는 대단히 명확한, 그러나 ‘거역’이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유별나지 않은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이들이 2002년 대선에서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행동할 수 있었던 점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는 확보된 셈이다.
◇ 대통령선거와 ‘世代戰’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엔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들었다.
엘리트 서클의 단단한 성곽
선거결과는 기성세대에게 있어 충격 이상의 것이었다. 어떤 이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호소했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속출했다. 상실감, 허탈감, 무기력증, 불안감이 기성세대를 엄습했다.
어떤 이는 12·19 대선을 혁명적 상황으로 묘사했다. 혁명군은 주로 가족 안에 있었다. 바로 그들이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들, 경제적 궁핍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피와 땀을 흘리며 정성을 쏟았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세대의 피와 땀을 자양분으로 그들을 물리칠 비장의 무기들을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성세대는 설자리를 잃었다는 낭패감에 빠졌다. 선거 전날까지도 긴가민가하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갑작스런 공포로 돌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자리를 잃었다는 표현은 차라리 온건한 것이다. 이제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허탈감, 해방 이후 50년을 가꿔온 자리와 신분과 권리와 권력과 말발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철없이 보이던 아이들이, 젊은 세대가,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강탈해갔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호남정권이라고 해도 5060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老)대통령의 연륜과 경륜은 사회의 원로와 연장자들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듯했으며,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엘리트 서클의 장벽은 더욱 단단해졌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그렇게 중시했던 신 지식인은 단지 엘리트 그룹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중은 상고 출신의 학력이지만 그가 엘리트 서클의 자격요건에 못 미친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보수적 특권계층은 독학과 투지로 쌓아올린 김대중의 경륜과 학식에 자격증을 부여함으로써 엘리트 서클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지난 5년 동안 기성세대와 지배집단은 최고의 학력을 겸비하고 국정운영의 남다른 경력을 쌓은 교양 있는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바랐다. 한국에서 학력은 지배집단으로 진입하는 필수요건인 것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로 이어지는 최고의 학력 소유자인 이회창을 지도자로 맞음으로써 보수적 기득권층은 엘리트 서클의 성곽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상고 출신의 노무현과 상고 중퇴의 퍼스트 레이디 탄생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자수성가는 엘리트 서클의 미덕이었을 뿐이다. 기성세대로서는 그것이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성장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성세대들은, 특히 보수적 기득권층은 성장과정에서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서민적 풍모를 풍기는 새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었다.
기득권층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일수록 위기감은 증폭했다. 분노와 울분이 허탈감을 동반했다. 평생 쌓아올린 연륜과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얼마 남지 않은 말년을 화려하게 불태워보리라는 기득권층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나의 대한민국’이 ‘너의 대한민국’이 됐으며, 그것도 ‘인정할 수 없는 너’의 것이 됐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이민이나 가자는 허망한 탄식이 2002년 망년회를 물들였다. 하지만 역으로 이회창이 이겼다면 2030은 약간 주춤했을 뿐 곧 그들만의 축제를 향해 무엇인가 새로운 공모를 시작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구축했던 거대하고 단단한 대선조직과 정치인·전문가·기업인으로 구성된 막강한 후원조직이 지리멸렬한 민주당과 겨우 백여 명도 못되는 왜소한 조직에 참패했다는 믿기지 않는 현상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우선 한나라당 조직은 경직돼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회창을 둘러싼 인의 장막은 5년이 경과하면서 동심원적 구조를 형성했는데, 당내 386세대 정치인들도 그 중심부로 쉽사리 진입하지 못했다.
반면 노무현 조직은 배가 고파 있었으며, 무엇이나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조언자가 중심부와 접촉하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무현이 조언자를 찾아 나섰다. 천 여 명으로부터 쏟아지는 각종 아이디어를 소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이회창은 전문가그룹의 각종 제언과 정책 아이디어를 접하면서 점차 평균적 개념에 접근해갔던 반면, 노무현은 밋밋한 평균적 개념으로부터 오히려 ‘튀는 개념’ 쪽으로 뛰쳐나갔다.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감각 읽기에 나선 것인데, 그를 보좌하는 386세대의 촉각이 2030의 감성과 접선하는 순간 노무현은 그들의 ‘상징자본’으로 전환했다. 연성적·문화적 정치권력을 원하는 2030의 요구와 노무현의 민초적 촉수가 상생관계를 맺은 것이다.
2002년 대선은 민주화 이후 ‘마음의 빚’이 없는 최초의 선거였다. 3김정치의 자연스런 소멸과 함께 민주투쟁의 공적을 보상할 필요가 없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리스마 정치’의 종언과도 중첩된다. ‘카리스마 정치’의 최대 약점은 후계자 양성인데, 김대중은 이 문제를 민주당에 일임함으로써 민주적 절차를 신봉하는 카리스마로 남고자 했다. 유권자에게는 채무감 없는 자유로운 선택 기회가 주어졌으며, 민주당에는 카리스마의 의도가 작용하지 않는 후보 선발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 자유로운 공간을 무엇이 채웠으며 무엇이 밀려들었는가를 분석하는 것, 민주투사들 간 격돌이었던 1992년과 1997년 대선에 비해 무엇이 쟁점화됐고 어떤 기류가 형성됐는가를 분석하는 일은 한국 국민의 가치관 변화를 측정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총선이 지역적 인물과 쟁점에 좌우된다면, 대선은 전국적 기류변화와 의식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2년 대선이 세대전(war of generation)이었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2030의 세대적 감성과 문화적 욕망이 담론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양강 구도의 균형을 깨뜨렸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의 세련된 지적처럼 “386세대와 N세대의 정치적 이질성이 문화적 공감대를 통해 정치적 선택의 폭을 넓혔다.”
이 넓혀진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적어도 친화력이 있음을 보여준 후보, 그래서 그들과의 소통가능성을 확인해준 후보인 노무현이 최종적으로 ‘선택’됐다. 선택과정에서 집권당의 정책실패와 정치인들, 대선 이후 재연될 내부적 권력투쟁과 정책실패의 개연성 등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정치학적 관점에서 체제의 가버넌스(governance)보다는 지도자와의 친화성, 지도자에게 투영된 문화적 욕구의 실현가능성이 더 중시됐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평론가인 이동연이 “2030의 파워는 정치의 동질화가 아니라 문화의 연대에서 나왔다”고 본 것은 본질을 꿰뚫은 지적이다. 말하자면 과거와 단절된 자유로운 정치공간에 2030의 문화적 감각과 욕망이 밀려들었다는 말이다.
캐스팅 보터 노릇
필자는 2002년 대선을 세대론적·문화론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이 일반적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더 세련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2002년 세대’의 변동론적 함의를 분석하는 데에 중요한 사전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대선구도를 지배했던 지역감정이 2002년에는 처음으로 약간 누그러졌다. 95%를 상회하는 호남 몰표와 지지율의 동서분리가 여전히 뚜렷하지만, 다른 균열 요인들의 결정력이 다소 증가한 듯이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예를 들면, 계층과 학력). 지역대립의 약화는 노무현 후보의 정치경력과 직결된다.
▲세대의 중요성은 양강 구도의 균형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나온다. 2030이 모두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은 물론 아니고, 단지 근소한 승리(2.2%)를 만들어낸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대론적 해석이 주시해야할 점이 바로 2030의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서의 역할이다. 캐스팅 보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름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20대, 30대 유권자의 25∼30% 정도에 달한다(출구조사로 추정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추월한 득표수).
▲캐스팅 보터들은 비교적 고학력 소유자들로서 정보화시대의 감성과 감각으로 무장한 문화생산자 또는 소비자로 구성된다. 컴퓨터를 생활화하고 있는 지식노동자, 인터넷을 통해 의사소통과 동호인 모임을 활발히 하는 비판적 시민, 시민단체의 일원이거나 시민운동에 대한 잠재적·명시적 지지자들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른바 정보화시대의 ‘상징 전문가’로 자처하는 비판적 의식의 소유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적 인텔리겐치아와 구별된다.
▲2030이 가장 불만을 느끼는 한국사회의 쟁점은 악화된 소득불평등과 엘리트 서클의 폐쇄성이다. 5060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그 불만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작다. 이 두 가지 쟁점이 하층민 친화적, 노동친화적 정권이었던 김대중 정부에서 더욱 악화됐다는 점에 이들은 분노할 뿐만 아니라, 지배집단이 그것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집권명분으로 활용해왔다는 점에 절망한다. 평등주의적 성향과 반(反)엘리트 정서(민중의식과는 다르다)라는 정치적 비판의식이 2030의 세대론적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문화적 코드와 융합해 대선정국의 담론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정치적 경쟁이 문화적 경쟁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들에게 선거는 문화적 축제이자 욕망표현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적 헤게모니 구축에 가담했다.
▲평등주의와 반엘리트 정서라고 해서 2030의 성향을 반드시 진보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일단 진보와 친화력을 갖기는 하지만 유동성 문화의 와류 속에서 어떤 형태로 바뀌어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회창과 한나라당이 보수의 경계 내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데 대한 2030의 이탈이지, 2030의 사고와 행동의 본질이 진보주의에 고착돼 있는 것은 아니다. 정책공약, 경력과 발언 등으로 미루어 2030보다 훨씬 더 진보 쪽에 위치한 노무현은 보수주의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2030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 보니 자유주의와 유동성을 본질로 하는 2030의 문화적 욕망과 노무현의 정치적 진보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가 노무현 집권 이후 예기치 않은 갈등과 부정합을 촉발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2030은 자신들의 세대적 문화의식을 노무현이라는 상징에 접합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노무현을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 충족과 욕망 실현을 위한 최고의 상징재로 만들고자 했으며, 노무현 상징을 정치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최고의 발판을 만들고자 했다. 2030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보를 결박하고 있는 단단한 전통의 껍질을―무엇보다도 아버지로 집약되는 5060의 허위와 구태의연함을―격파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싸워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2030에게 최고의 상징자본이 됐으며 그를 통해 문화적 연대감을 확산시키고자 한다. ‘정치의 문화화’를 통한 연성적 정치권력이라고 할 이 새로운 현상 때문에 노무현은,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투영됐던 기대심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화적 기대’의 인플레에 직면했다.
권위주의체제의 몰락
유권자의 성향은 가치관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유용한 척도다. 유럽의 경우 유권자의 성향 변화가 정당체제와 정치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두 가지 대립적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기존의 균열구조(cleavage structure)가 변하지 않은 채 결빙명제(freezing proposition)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권자의 가치관 변화에 의해 새로운 구도가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다.
유럽의 정치 변동을 설명하는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그 유효성을 겨루고 있다. 전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투표성향이 유동적이라고 해도 결빙명제의 기본 골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빙명제에서 설정하는 일차적 경계는 보수와 진보인데, 전자에는 중앙당과 자유당이, 후자에는 사민당, 공산당, 농민당, 환경당이 속한다. 각각의 진영에 속하는 계급을 균열동맹으로 표현한다면, 마이어(P. Mair)처럼 결빙명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최근의 투표유동성이 균열동맹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균열동맹 ‘간’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키츠쉘트(Kitschelt)처럼 결빙명제의 골격 자체가 붕괴 내지 변형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탈 물질주의 같은 새로운 가치관의 확산에 따라 유권자의 성향 자체가 이미 변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정치변화를 분석해보면 기본적 정당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전자, 즉 결빙명제가 유효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과 영국 노동당이 과거의 이념적 위상과 성격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자, 즉 유권자의 성향변화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당의 성격변화에 의해 결빙명제가 상정하는 정당체제 자체도 조금씩 바뀌고 있으며, 유권자의 요구와 성향도 계급적·물질적·평등지향적 쟁점에서 시민사회적·자아실현적·질적 불평등의 쟁점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무시할 수 없다.
탈냉전·탈물질·탈전통
한국의 경우는 정당체제가 지역대립 외에 어떤 확고한 균열구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지역정당이라고 할지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대중정당(국민정당)을 자처하고 있기에 두 가지 관점의 상대적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적합치는 않다. 그럼에도 한국사회가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중대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고, 그에 따라 국가-시민사회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후자의 관점, 즉 유권자의 성향이 변화했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을 입증할 근거는 풍부하다. 먼저 권위주의체제의 몰락이다. 정치적 영역을 위시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영역에서 권위주의적 요소가 현저하게 약화됐다. 그 결과 권위주의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전통적 이념은 통제 효율성을 상실했다. 둘째, 시민사회의 성장과 시민운동의 활성화는 그 동안 억눌렸던 시민의 권리의식을 증진했다. 그것은 개성, 취향, 자아실현, 문화의 다양성을 촉진했다. 셋째, 세계화의 영향으로 한국적 특수성보다 세계적 보편성이 강조됐다. 이는 타국의 문물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이 증대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사고와 행동양식에 있어 민족중심적 경향이 약화되고 보편적 기준이 도입됐다.
이런 관점에서 1993년,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유권자 성향변화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가를 비교·분석한 것이 이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가치관 변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요인을 민주화와 세계화라고 한다면, 그것을 대변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설정할 수 있다. X축은 권위주의-자유주의 축이고, Y축은 ‘탈주’ 축이다. 탈주를 편의상 기존 가치로부터의 탈출로 정의하면,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전통에서 탈전통(현대)으로의 전환이라는 세 가지 중대한 변화를 상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993년 대선은 여전히 권위주의/ 냉전·물질·전통에 중심점이 놓였던 상태였으며, 1997년은 X축 위에서 ‘다소’ 자유주의 쪽으로 이동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2002년 대선은 그 이동 폭이 더욱 커져서 자유주의 쪽에 훨씬 가까워졌고, 탈냉전·탈물질·탈전통 쪽으로 비틀어져 올라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이동은 민주화의 자연스런 결과다. 1990년대의 민주화의 공간에서 형성된 자유주의가 공적 이익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가는 중대한 문제지만, 일단 타인의 눈이나 전통의 규제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개인적 권리의식의 증대로 정의해두자.
한편 탈주의 결과는 다소 복합적이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약화는 공산주의권의 붕괴가 초래한 결과이지만, 북한과 대치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에서는 그것의 소멸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오히려 보수기득권층의 지배이념에 따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굳건히 존재해온 것이 한국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과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계기로 대(對)북한 의식은 빠른 속도로 부드러워지고 있으며, 9·11 테러와 미국의 강경책은 오히려 대북정책과 의식의 연성화를 촉진하고 있다. 물질주의(materialism)는 경제성장에 수반된 자연스러운 가치관이다.
대중매체에 무한정 노출
잉글하트(Inglehart)는 개발, 성장, 직업중시, 세속적 성취 등의 물질주의적 가치가 경제적 성장 과정에 있는 산업국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치관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성장지대를 통과하면 사람들은 자아실현, 환경과 생태, 삶의 질, 심미적 가치 등의 항목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잉글하트는 이를 탈(脫) 물질주의(postmaterialism)라고 정의하고,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비교적 높은 유럽에서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가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은 비교국가 중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증가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임이 입증됐다. 그것은 세계화의 외압을 수용하는 개방성이 크고 정보화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잉글하트는 특히 한국에서 20대와 30대의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의 젊은 층에서 탈물질주의 지향이 비교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전통주의와의 작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통주의란 성장시대를 지탱한 이념과 제도를 포함해 한국 고유의 미덕으로 여겼던 제반 요인들에 대한 젊은 층의 반발이다. 우선 가정과 학교에서 아버지와 교사의 자리가 어느 정도 축소됐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버지는 예의범절을 거부하는 자녀를 통제하기 어렵고, 교사는 공교육의 권위를 부정하는 학생을 다스리기 어렵다.
기업에서는 상사의 일방적 지시가 생산성으로 연결되지 않는 지 오래됐다. 학교와 가정이 일차적 규율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면서 그것을 대치할 공적 기제는 새롭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 세대는 대중매체에 무한정 노출됐으며, 그것이야말로 자율적 규율과 자기 통제의 자원을 공급하는 지배적 도구가 됐던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전통은 창조적 사고와 모험을 제어하는 필요악이자 규제자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화는 전통주의로부터의 탈출을 돕는 가장 효율적인 인프라다.
따라서 에서 보듯 유권자 성향의 중심점을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상향 이동시킨 원동력은 2030이다. 이 2030의 성향변화가 문화적 연대감이라는 시대적 구심점을 형성하면서 ‘2002년 세대’의 정치적 에너지로 폭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변화를 읽으려면 20대의 성격을 주시하라는 정치인구학적 교훈은 사뭇 중요하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 헌팅턴(Huntington)은 이슬람문명권에 확산된 반미주의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규명하려면 이슬람국가의 청년들이 현재 미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기르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찰 결과는 극단적 반미, 한마디로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30의 탈주가 지금은 노무현 상징을 만들어내고 한국의 정치 지형에 폭풍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향후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예견하려면 이들의 세계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는 뒷장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제 바뀐 가치관과 (정치)성향이 2002년 대선에서 어떻게 표출됐는지를 분석할 차례다.
김대중 정권 내내 차기 대통령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회창은 여론조사에서 정확히 4년8개월을 노무현에 앞서 있었다. 노무현은 국민경선 기간인 2002년 3∼5월과 마지막 한 달만 이회창을 앞섰다.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집권당 후보가 대권을 가져간 것이다.
이른바 황색돌풍으로 명명된 ‘노풍(盧風)’은 3∼5월에 대마 이인제를 잡고 승승장구하다가 6월의 월드컵을 계기로 지지율이 40% 이하로 떨어졌다. 국민들의 소망이 훤칠하게 잘생긴 귀공자 정몽준씨에게 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11월 중순까지 노무현은 인기하락과 후보교체 압력에 시달렸다. 사후 해석이지만, 6개월 동안의 열세는 차라리 노무현에게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2.2%의 박빙승부와 역전승의 드라마가 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몽준의 흐릿한 행보가 있으며, 그에게 쏠렸던 흐릿한 지지가 작용했다.
물론 박빙의 승부와 역전승을 연출한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2030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2002년 선거가 세대전이었다는 견해에 동의했다. 2030의 행동에 특기할 만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특정 계기에 게릴라처럼 출현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놓고 다시 표면 아래로 사라진다는 점,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에 마치 토네이도(tornado)처럼 강력한 바람기둥을 만들어 지표면을 휩쓸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6∼11월에 나타난 노무현의 인기 하락은 그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갔다는 뜻이지(말하자면 월드컵) 결코 지지도 하락은 아니었던 것이다. 혹은 2030이 정몽준에게로 갔을 수 있다. 노무현과 정몽준이라는 너무나 다른 두 후보가 2030의 문화적 프리즘 속에서는 동질적 인물로 나타나는 이 특성이야말로 우리가 분석해야 할 쟁점이다.
서민과 귀공자, 노동자와 재벌, 상고와 명문대의 전통적 경계가 결코 상충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감각과 감성 속에서는 동형으로 인화됐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이어서 현실정치의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아무튼 6∼11월 사이 노무현의 고전은 정몽준에게 살짝 빌려준 관심의 이동에 의한 것이었다. 후보단일화 요구가 터져나온 것도 이런 모습을 감지한 민주당의 최후 생존전략이었다. 성숙한 민주국가의 게임 룰에 비추면 명백히 반칙에 해당하는 이 전략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노무현의 고문이었던 원로정치인 김원기가 후보단일화가 결정되자마자 눈물을 쏟았다는 얘기도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권영길·정몽준 표가 노무현에게
게임 룰은 어겼지만 드라마로서는 일품이었던 후보단일화는 정몽준에게 잠시 빌려주었던 인기를 되찾아오는 효과를 발휘했다. 후보지지의 분포를 나타내는 을 보면 그러한 사정을 가늠할 수 있다.
은 선거 당일 최종적으로 선택한 후보가 그 전에 지지하던 사람과 다를 경우(응답자의 19.1%가 지지자를 바꿨다고 답함) 그 전 지지자의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20∼40대에 권영길과 정몽준 지지자가 상당히 많이 분포돼 있었다는 점이다(셋째와 넷째 항). 그런데 최초에는 노무현이었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는 비율 역시 크게 나타나는 것은(둘째 항) 선거일 얼마 전까지 이들의 투표성향이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갑작스런 ‘정몽준 사태(선거 전날 밤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권영길과 정몽준 지지표가 노무현에게로 몰렸을 가능성이 짙다. 둘째, 그렇게 노무현에게로 결집된 표가 최초 노무현이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탈한 표를 상쇄하고 조금 남았을 것이다. 20대의 경우 노무현을 이탈한 표가 33%, 권과 정에게서 다시 노무현에게로 결집된 표가 60%다. 30대의 경우 이탈표 28.4%, 결집된 표가 48%다. 40대의 경우 이탈표 34%, 결집된 표 36%라고 보면 대체로 2.2%의 박빙의 승부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층에서 지지율의 이합집산 및 이탈과 결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더욱 정확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지만, 대체로 두 가지 사실은 명백하다. 첫째, 20∼40대가 이회창보다 노무현·권영길·정몽준을 지지하는 비율이 매우 커서, 50∼60대가 이회창에게 던진 표를 상회했다는 점, 둘째, 선거 한 달 전까지 20∼40대가 기성세대보다 투표유동성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다. 가 그것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