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시위와 북핵 위기 등으로 미국 언론에 한반도 관련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상황이 심각함을 말해준다. 미국 언론은 과연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 각 매체의 색깔은 무엇인가.
(‘뉴욕타임스’ 2002년 12월29일자 ‘아시아의 분열이 한반도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부시 대통령에게는 간단하게 보였던 북핵 문제가 꼬이면서 한반도가 미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월28일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 3국으로 지목하면서 이 같은 국가들이 “위험을 초래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겠다”고 선언, 선제공격의 길을 열었다. 그는 지난해 6월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를 방문,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독재자들이 미사일에 이런 무기를 탑재하거나 무기를 테러리스트 동맹국들에 판매할 때에는 단순히 봉쇄정책만으로는 저지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선제공격 독트린을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불량 정권’들에 적용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의 시소 타기
그렇다면 그 대상으로 누구를 지목한 것일까. ‘워싱턴포스트’의 마이클 돕스(Michael Dobbs) 기자는 “누가 봐도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지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고 말했다(2003년 1월6일자 ‘부시의 선제공격론은 약한 국가만 겨냥하고 있다는 걸 북한이 입증하고 있다’). 북한은 이라크보다 훨씬 나은 미사일과 핵무기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에 이 기술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정밀유도장치로 폭탄 한 방만 떨어뜨리면 끝낼 수 있는 일을 주저하고 있는 사이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면서 긴장과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다. ‘칠 테면 쳐 보라’는 북한의 도전에 부시 행정부는 속수무책이다. 그러자 미 언론들이 들고일어나면서 북핵 문제가 미 언론의 전면에 부상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 국가에 포함시켰을 때에는 북한이 최근 들어 테러에 관련된 적이 없다면서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란과 이라크 두 나라가 이슬람권임을 감안, 이슬람권만 표적으로 삼는다는 비난을 의식해 북한을 일부러 끼워넣은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부시 행정부는 북핵 위협을 평가절하하고 언론들은 북핵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마치 정부와 언론이 시소 타기를 하고 있는 양상이다.
미 언론의 초점은 북핵 위협 자체보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다. 전 CBS방송 기자인 버나드 골드버그 씨는 지난해 발간한 저서 ‘편견(Bias)’에서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리버럴한 가치에 경도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리버럴한 언론들이 보수적인 공화당 행정부를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보수적인 ‘월스트리트저널’은 부시 행정부를 전폭 지원하면서 북한에 대한 무력제재를 주장하다가 지금은 대화로 문제를 풀 것을 촉구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미 언론들의 논조가 뒤바뀐다.
여기에다 한국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고와 관련해 반미 감정이 고조된 것과 그에 영향 받은 대통령선거 결과는 미 언론의 관심을 더욱 촉발시켰다. 한국 내 반미 분위기를 전하는 논조도 미 언론의 성향에 따라 갈라졌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 관한 미 언론 보도는 보도하는 기관과 배경에 따라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균형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NYT’는 북한과의 대화와 타협을 선호하지만 내부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협론자 빌 켈러, 실용주의자 토머스 프리드먼, 강경론자 윌리엄 새파이어(왼쪽부터)
유엔 무기사찰단에 무제한 사찰을 허용하고 있는 이라크는 핵무기를 아직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핵무기 한두 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은 IAEA 사찰단원마저 추방했다. 따라서 누가 더 위협적인가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에는 최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언론들은 대량살상무기를 아직 안 만든 나라는 공격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었거나 지금 만들고 있는 나라는 내버려둔다면 선제공격 독트린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면 그만큼 치기 어렵다는 것을 북한이 보여주었으니 이라크가 북한의 예를 따르지 않도록 사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이 같은 이중잣대는 결국 미국의 의심을 받고 있는 이른바 ‘불량국가’들에게 미국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하루빨리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넣거나 개발하라고 재촉하는 꼴이라는 재반론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해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프린스턴대 교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김정일의 관점에서 보자. 부시 행정부가 자신을 비난했다. 취임하자마자 협상을 파기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을 ‘악의 축’의 한 부분이라고 선언했다. 몇 달 뒤 부시 대통령은 ‘피그미’라고 부르면서 ‘나는 김정일을 증오한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이런 친구를 무너뜨리려면 재정적 부담이 엄청나기 때문에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는 나쁜 나라는 먼저 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라크를 향하고 있다. 그럼 김정일은 어떻게 자문할 것인가. ‘왜 나는 놔두고 사담 후세인에게 먼저 매를 들까. 아하, 이라크가 악의 축 3국 중 군사적으로 가장 약한 나라지. 우리가 우라늄 농축방식으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들켰지만 중유 지원을 중단한 것 외에 어떤 조치도 없었잖아. 그럼 예의 바르게 행동할 게 뭐 있어. 어떻게 하든 미국이 도움도 안 주고 때리지도 않을 거니까. 그럼 핵무기나 계속 만들자, 라고 하지 않을까.”(‘뉴욕타임스’ 2003년 1월2일자 ‘국가들의 게임’)
부시의 어설픈 대북정책
‘워싱턴포스트’의 한반도 전문가는 스티븐 머프슨(Steven Mufson). 그는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당시 동행 취재했으며 북한과 인접한 중국 국경지대를 취재, 북한 내 인권 실태를 보도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29일자 ‘부시와 북한 : 큰 채찍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부시 대통령을 비판했다. 역시 신랄하다.
“고참 외교관은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당신이 구멍에 빠져 있다면 구멍 파는 것을 멈춰야 한다. 북한과 관련해서 부시 행정부는 외교의 기본 원칙을 재차 삼차 위반했다. 부시 행정부는 원치 않는 외교적 협상에 짜증을 내다가 북한을 ‘악’이라고 불렀고 북한이 (핵합의를) 위반한 것을 안 뒤에는 다시 외교적 협상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지금은 속만 부글부글 끓이면서 위기가 커져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말은 부드럽게 하되 채찍은 큰 것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채찍은 다른 곳에서 휘두르면서 말은 크게 하고 있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북한으로부터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시인을 받았을 때 행정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긴급한 상황이라기보다는 그 전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네바 핵합의를 파기할 기회로 여겼다. 부시 행정부는 여기에 도덕적 명분만 앞세우다 위기를 단속해야 할 기회를 놓쳤다. 이들은 북한과 대화한다는 것 자체를 북한에 양보하는 것으로 여겼다. 부시 대통령의 말대로 ‘악’과 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대화 자체보다 대화의 결과를 가지고 미국이 과연 양보했는지에 대해 판단할 것이다. 북한과 협상해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면 그건 부시 행정부의 승리가 됐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는 과정과 결과를 혼동했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핵계획을 철회하도록 하고 폐연료봉의 해외 이전을 가속화하며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폐기토록 했어야 했다…. 미국은 북한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북한이 모든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는 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평양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선제공격론으로 타격을 입은 쪽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북한 정권교체의 추진은 도덕적 주장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정권을 교체할 전략이 없다면 그런 가공할 정권과의 외교는 필요한 일이다. 현명하고 단호하게 외교를 한다면 일정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북한과 전쟁불사’ ‘주한미군철수’로 맞대응하는 강경보수파 언론인. Fox-Tv의 빌 오레일리, CNN의 로버트 노박, 월스트리트저널 발행인 카렌 하우스(왼쪽부터)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의도적으로 파기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월스트리트저널’ 1월2일자에 상세히 보도됐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6월6일 오랜 침묵을 깨고 북한과의 협상의지를 밝히면서 협상의제에 대량살상무기 외에도 북한이 보유한 막강한 재래식 전력의 감축까지 포함시켰다. 북한 김정일 정권은 협상하겠다는 뜻이 아니라고 판단,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이런 반응은 부시 외교팀의 몇몇 강경파가 원한 것이었다. 이 신문은 한국의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는 “우리가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할 빌미를 만들면서 실제로는 북한이 받을 수 없는 제의를 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한 고위관리는 “우리는 북한이 이 제의를 거부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미국이 의도적으로 북한과의 갈등을 키워왔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대화와 협상은 전희와 섹스의 차이”
북한이 핵 위협을 극대화하자 미국은 뒤늦게 북한과의 대화 방침을 밝히면서 대화(talk)만 하지 협상(negotiation)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도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빌 켈러(Bill Keller)는 1월11일자 칼럼에서 대화와 협상은 전희(foreplay)와 섹스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으로 공격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대화를 안하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기 어려워지자 협상은 아니고 대화만 한다는 행정부의 군색한 논리를 꼬집은 것이다.
리버럴한 언론들은 북핵 위협을 강조하지만 위기 해소방법으로 타협을 강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1월5일자 기사가 대표적이다. 이 신문은 북핵 문제가 위기는 아니라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한두 개의 핵무기를 갖는 것과 예닐곱 개의 핵무기를 갖는 것은 전략적으로 큰 차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여분의 핵무기를 갖고 있다면 선제 핵 공격에다 보복 핵 공격 능력을 구비한 것이며 타국에 판매할 수 있는 재고를 확보할 수 있다”면서 대북 협상에 즉각 착수하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리버럴한 언론들이 북한 정권을 우호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대표적인 외교전문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은 지난해 12월20일자 칼럼 ‘이웃에 사는 정신병자’에서 북한을 ‘제 집 주변에 다이너마이트를 묻고 이웃들에게 음식과 난방비를 주지 않으면 마을을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실업자 건달’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같이 정신나간 중무장 국가를 상대할 때는 점진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식량을 주는 대가로 핵개발을 멈추게 하고, 투자와 무역을 늘려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며 “이러한 방법만이 북한 체제 붕괴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정일 정권이 증오할 만한 정권이기는 하지만 붕괴의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대화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보수 성향의 언론들은 북한 정권의 악을 강조한다. 그런 악의 정권은 어떤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없애버려야 하며 악과 대화하려는 사람도 악이라는 논리다. 더구나 주한미군이 그런 악을 막아주고 있는데도 미군에게 물러가라고 외치는 한국인들에겐 직접 악을 상대하도록 해줘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고 있다.
보수논리를 이끌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을 분석해 보자. 이 신문은 지난해 9월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 정상회담(17일)을 앞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북을 ‘정처 없는 나그네길’이라고 비꼬았다. 이 신문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국내에서 추락하고 있는 인기 만회용일 뿐이며 방북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고 경고, ‘한반도 냉전 구도의 청산 기회’로 본 다른 언론과 시각차를 드러냈다.
이 신문은 이어 10월8일에는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요구에 굴복해 대량살상무기를 만지작거리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전망하면서 따라서 “미국의 가장 좋은 전략은 뒤로 물러앉아 파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한동안 애태우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신문의 전망과는 달리 북한의 핵개발 강행에 애태우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로 드러나고 있다.
24일에는 사설에서 핵개발을 동결키로 한 북-미 기본합의를 깨뜨리고 비밀리에 핵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북한에 중유 제공 등 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를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사설 이후 부시 행정부는 중유 제공 중단 결정을 내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12월12일자 사설에서 미국이 하루 전 스커드미사일을 적재한 북한 화물선을 억류해 조사하다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어준 것과 관련, 오히려 이러한 해상 임검(臨檢)과 무기 압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시 대통령이 주장한 ‘선제공격’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미국은 테러 지원자들이 판매하거나 그들에게 향하는 무기를 압수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더 나아가서 물론 ‘실수’의 가능성도 있겠지만 “(조사원이)10척의 무고한 선박에 승선하는 편이 한 개의 핵무기가 테러분자들에게 전해지는 편보다 더 낫다”는 논리를 폈다.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제재도 불가피하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같은 논리를 주도하는 것은 ‘월스트리트저널’의 발행인인 카렌 하우스(Karen House). 그는 지난해 11월13일자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한국의 힘든 선택(South Korea’s Tough Choice)’이라는 제목의 서울발(發) 칼럼을 통해 남북한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북한과의 대화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있다”며 “외교 정책을 대화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에 고정시키는 것은 미국이 한없이 참으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자진해서 없애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이 아무리 잘못해도 더 많은 대화와 더 많은 원조만으로 대응해온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한국을 지금의 위태로운 상황으로 이끈 거덜난 정책”이라고 신랄히 비난했다. 그는 또 “한국의 젊은이들은 주한미군을 한국의 안보 보장 장치가 아니라 통일의 방해물로 여긴다”며 “한국은 몇 년 내에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대화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믿고 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김정일이 조용히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한을 평화롭게 경제개혁으로 유도하며, 미래의 어느 행복한 시점에 한국과의 통일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은 몽상(pipe dream)”이라면서 “일단 후세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달리 취할 수 있는 길은 “한국의 지지가 없을 경우 그냥 이 문제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해 한국과 일본이 스스로 방어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북한의 위협은 어차피 미국보다는 이 두 나라를 겨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미국과 연대해 북한에 대응하느냐, 아니면 홀로 북한의 위협에 맞서느냐는 어렵고도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칼럼을 끝맺었다.
춧불시위에 민감하게 반응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시사한 대목. 이 같은 경고는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이후 지난해 12월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사설에서 진전됐다. 이 신문은 사설에서 노당선자의 대미 인식을 문제삼으면서 “부시 대통령은 노당선자와 전화하면 미국은 주재국민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통보해야 한다”며 “한국민 보호를 위해 있는 주한미군을 한국민들이 더 이상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우리는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문제를 억제하기 위한 방법의 스펙트럼 치고는 극단적이다. 한때 강력한 군사개입을 통해 북한에 대한 무력제재를 주장하다가 이제 북핵문제를 아예 한국에 내맡기고 미국은 발을 빼자고 주장하고 있다. 논리의 일관성이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한국 내 반미 감정에 대해서는 리버럴한 언론들도 빼놓지 않고 전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지난해 12월26일자 서울발 기사에서 부시 대통령을 ‘전쟁광(war maniac)’이라 부른 한 젊은이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 내 점증하는 반미 감정을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촛불시위에 참여한 수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게재하며 상세히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2월7일자에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솟구치는 원인을 분석했다. 이 신문은 최근의 반미시위가 일과성 유행이나 소요 정도를 훨씬 넘어선 바탕에는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고압적이고 둔감하며, 북한과 관련한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는 생각이 널리 번져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빠른 경제성장이나 지난해 6월 월드컵 4강 진출 등을 통해 확인한 상당한 자신감과 때때로 억압적으로 보이는 동맹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 사이에 격심한 충돌을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수도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미군기지는 미군이 주둔해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충돌을 더해주는 요인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물론 ‘뉴욕타임스’ 기자도 지면 이외 자리에서는 반미 감정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제임스 브루크 ‘뉴욕타임스’ 도쿄 특파원은 1월8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언론과 한·미관계의 인식’이라는 주제의 국제회의에서 “최근 한국 내 반미 움직임에 자극받은 미국 내 여론주도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면서 “가까운 장래에 주한미군 일부가 감축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서울시청 앞의 한 식당이 ‘미국인은 환영하지 않습니다’라는 게시물을 붙여놓았고, 이 내용이 사진과 함께 미국에도 소개됐다”며 “스스로 동북아 중심 허브(Hub)를 추구한다는 한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한국민의 반미 감정이 전해지자 한국에서 예상한 것 이상의 반발을 보이고 있다. 그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역시 보수논객들이다.
보수 성향의 폭스 TV뉴스채널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뉴스 토크쇼 ‘빌 오레일리 팩터(Bill O’Reilly Factor)’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앵커맨 빌 오레일리는 1월6일 “왜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느냐. 당장 주한미군을 빼라”고 말했다. 대표적 보수논객이자 CNN방송의 진행자인 로버트 노박은 같은날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한국인은 미국인에 대해 싫증이 났고 미국인은 한국인에 대해 점점 참을 수 없게 돼가고 있다”면서 “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더그 밴도도 같은날 보수성향의 격주간지 ‘내셔널리뷰(National Review)’ 인터넷에서 ‘한국과 이혼할 때’라는 제목의 글을 싣고 “미국의 보호를 원하는 국가는 미국이 명령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썼다. 그는 여중생 참사사고를 낸 미군의 재판권과 관련,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한 미군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다”며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인 국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울러 한국이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는 한 동등한 한미관계란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노박씨는 “‘과거 좌익 운동가’였던 노무현 당선자가 북한과 미국간에 중재를 제안했다”면서 “사실상 그는 한 때 불굴의 반공 요새였던 한국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스탈린식 국가와 자유세계의 지도자 사이의 중간에 놓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 대통령의 추종자인 노당선자는 한술 더 떠 엉클샘(미국)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은 ‘워싱턴포스트’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보수 논객들의 이 같은 주장에 미 의회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의 브루크 특파원은 “이제 막 회기가 시작된 미국 연방 상·하원의원들은 각 지역구에서 한국 내 반미 움직임에 대한 일반 미국인들의 반응을 직접 듣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며 “미국 내에서는 이미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ABC, NBC, CBS 등 공중파 방송들은 아직 주한미군 철수론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리버럴한 논조를 펴고 있는 이 방송들은 무엇보다 ‘뉴욕타임스’의 논조를 뒤따라가는 성향을 띠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오히려 1월5일자 ‘왜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하는가’란 제목의 기사에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지난해 9월 반미 감정을 촉발시켜 재선에 성공한 이후에도 미국 내에서는 독일 주둔 미군의 철수론이 휩쓸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미국 내 반한 감정의 여파가 얼마나 갈 것인지 역시 지켜볼 대목이다.
‘뉴욕타임스’ 향한 부시 행정부의 구애
‘뉴욕타임스’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대해서도 줄기차게 반대해왔다. 이 때문에 보수 언론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의 신문이냐”고 ‘뉴욕타임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진보적 색채가 강한 아서 셜즈버거 주니어 발행인과 하웰 레인즈 편집국장을 중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행정부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듯하지만 1급 비밀인 이라크 전쟁계획을 대부분 특종 보도했다. 지난해 7월 5일자에서 ‘뉴욕타임스’는 “미국은 이라크 남·북·서쪽 등 3개 방면에서 모두 25만명의 육해공 3군이 동시에 쳐들어가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며 ‘중부사령부의 행동계획’을 최초로 폭로했다. 닷새 뒤 10일에는 미국은 이라크 공격의 전진기지로 요르단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속보를 전했고, 29일에는 바그다드를 먼저 초토화한다는 세부적인 계획을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뉴욕타임스’는 밉지만 이 신문의 영향력은 부러워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 신문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라크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속셈에서 고급 정보를 이 신문에 집중적으로 흘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의 평일 발행부수는 USA투데이(221만100부), 월스트리트저널(182만1000부)에 이어 3위로 119만4000부(지난해 3월말 발행부수공사국 통계). 그러나 독자의 질에서 타지를 압도한다. 연간 소득이 10만달러를 넘는 ‘뉴욕타임스’의 독자는 다른 신문의 평균보다 74%나 많고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독자 비율은 타지 평균보다 60%나 높다. 한마디로 오피니언 리더층이 보는 신문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로서는 ‘뉴욕타임스’가 아무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도 거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뉴욕타임스’가 리버럴 일색만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대표적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는 강경 보수주의자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수석 보좌관 출신인 그는 1970년대 중반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의 리버럴한 경향을 우려한 당시 발행인 아서 오크스 셜즈버거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데려왔다. 입사 초기에 점심을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따’를 당했지만 발행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고정 칼럼을 차지했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뛰어난 문장력과 정확한 단어 구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언어에 관하여(on language)’라는 제목의 칼럼을 30년째 쓰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서는 유일하게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백악관 출입기자 데이비드 생어(David Sanger)의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어는 1998년 한창 문제가 됐던 북한의 금창리 핵개발 의혹을 최초로 특종 보도한 인물로 한반도와 관련해 수많은 특종을 보도했다.
중간을 걷는 ‘워싱턴포스트’
‘워싱턴포스트’의 논조는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저널’의 중간이다. ‘워싱턴포스트’에서 한국 관련 사설을 쓰는 사람은 프레드 하이어트(Fred Hiatt) 논설주간. 그는 최근에는 기명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1월6일자 그의 칼럼은 ‘워싱턴포스트’의 한국에 대한 논조를 대변한다. 그는 칼럼에서 “테러리즘과 장거리 미사일의 시대에 북한의 핵개발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또 다른 모든 국가에 사활이 걸린 문제라면서 이 문제를 한국인들만의 문제로 봐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히 동일한 정책을 세우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미국은 한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와 북핵 문제 해결을 협의하되 그래도 안될 경우에는 미국이 주도적으로 무장해제나 정권교체를 이끌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선협상 후무력제재론으로, 협상을 강조하는 ‘뉴욕타임스’와 무력제재를 강조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중간이다.
그는 한국의 고위급 인사가 워싱턴에 가면 꼭 찾아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하지만 속내를 다 내비쳤다간 망신을 당할 수 있다. 그는 지난해 4월 최성홍(崔成泓) 외교부 장관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칼럼에 소개했다. 이 칼럼에 인용된 최장관은 김대통령이 파견한 대북특사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이렇게 미국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특사)는 김위원장에게 ‘미국이 9·11테러 이후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불법정권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나 지금은 외교를 선호하고 있다. 만약 외교가 실패하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북한도 그 명단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장관은 “때로 미국이 큰 채찍을 휘두르는 게 북한을 나오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공식발표와는 다른 내용들이다. 둘 다 한 나라의 외교 총책임자가 외국의 논설위원에게 털어놓기에는 부적절한 언급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