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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생각해요, 이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세상 끝에 선 희귀·난치병 환자들

  • 글: 정호재 demian@donga.com

“매일 생각해요, 이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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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에는 적어도 10만명, 많게는 100만명에 이르는 희귀·난치병 환자들이 살아간다. 실낱 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지만, 죽음의 너울이 늘 눈앞에 어른거린다. 병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 모자라는 의사, 엄청난 약값, 주변의 따돌림이 이들의 하루하루를 더 힘겹게 만든다. ‘사는 게 죽기보다 어렵다’는 것이 이들에겐 결코 빈말이 아니다.
“매일 생각해요, 이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1.정기 모임을 가진 ‘다발성 경화증’ 환우들<br>2.‘신경 섬유종’ 환우회의 김대호씨(cafe.daum.net/sky399)<br>3.영동 세브란스병원 근육병 클리닉 문재호 교수와 어린이 환자<br>4.‘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앓는 이용우씨(www.crps.co.kr)<br>5.식약청 산하 한국희귀의약품센터(소장 장영수,www.kodc.or.kr)

1월9일 오후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 재활치료실. 100여 명의 근육병 환자와 가족들이 3층 대강당으로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근육병 클리닉이 있는 이곳에선 매달 근육병 환자들의 정기 모임이 열린다. 환자들은 자신의 제2의 삶터인 병원에서 의사, 물리치료사, 자원봉사자들이 들려주는 의학정보를 챙기고, 굳은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진지한 자세로 따라했다. 이날 근육병재단이 휠체어와 보조구를 전달하는 행사도 마련됐다.

모임이 끝난 뒤 환자 부모들은 다과를 함께하며 안부를 묻느라 시끌벅적했다. 언뜻 보면 유쾌한 사교모임 같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환자들을 살펴보면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휠체어를 타고 모임에 참석한 해운이(16)는 근육병의 일종인 근위축증 환자다. 네 살 때 갑자기 장딴지가 딱딱해지더니 이후 전신의 근육에서 힘이 빠져갔다. 처음엔 발육이 늦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문제가 심각해졌다. 부산에 살던 해운이네는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돌아다녀도 뾰족한 수가 없자 아예 생업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11세 되던 해에야 근육병 확진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렵엔 해운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는 24시간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한다.

“잠도 혼자서는 못 잡니다. 한쪽으로만 누워 있으면 답답해지니까 20분마다 한 번씩 몸을 뒤집어줍니다. 온몸에 욕창이 생겨 성한 곳이 없어요. 혀가 굳어 말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옆에서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내기 어렵습니다.”

어린이 근육병이란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난치병이다. 3∼4세 때 발병, 어깨와 엉덩이 근육이 무력해지다가 13∼14세 때는 걸음을 못 걷게 되고, 16∼17세 때는 호흡근육마저 마비돼 죽음에 이른다. 초기에 병을 발견하면 약물치료와 재활운동으로 회복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선천적인 염색체 이상, 태아기의 알콜 및 약물중독, 출생 후 신진대사 이상, 바이러스, 간염 등이 원인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전국에 1만∼1만5000명의 어린이 근육병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들을 위한 이렇다할 대책이 없다.

희귀병·난치병·불치병

해운이는 얼마 전 장애등급이 2급에서 1급으로 올라갔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엄마가 교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함께 생활했다. 지금은 누워서 TV를 보거나 어렵사리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컴퓨터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해운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내장 운동을 담당하는 근육마저 힘을 잃고 있어 소화와 배변까지 힘들어한다. 물리치료로 얻을 수 있는 효과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병원을 오가며 온몸을 만지고 주무르기를 그치지 않는다.

희귀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처음부터 성장과정이 비정상적인 아이도 있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 아이가 고통스러워 하면 부모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병원쇼핑’에 나선다. 그러나 이런저런 검사를 다 받아봐도 결과는 분명치 않다. 병을 모르는 의사는 눈뜬 장님과 다를 바 없다. 의사들은 신경성이니, 체질이 어떠니 얼버무리며 대충 처방전을 써준다. 아픈 것도 고생인데, 왜 아픈지도 모르니 이보다 딱한 일이 또 없다. 그저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귀병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의가 없다. 정하기 나름이다. 인구가 2억 정도인 미국은 환자수가 20만명 이하인 질병을 희귀병으로 본다. 한국에서는 대개 환자수가 2만명 이하인 경우를 희귀질환으로 규정한다.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희귀질환은 5000가지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900여 종의 치료제가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완치가 어려워 평생 약을 끼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귀병이 ‘난치병’이라는 말과 혼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희귀병은 병명은 있지만 원인과 치료방법을 모르는 병, 병명과 원인은 알지만 치료방법이 없는 병, 치료방법은 있어도 잘 치료되지 않는 병들이다. 난치병과 불치병의 구분도 애매하다. 불치병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뜻하지만, 어떠한 병도 치료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난치병과 불치병도 혼용되는 개념이다.

혈우병, 신부전증, 백혈병 등은 환자가 많아 비교적 잘 알려진 난치병이다.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어 관심을 모은 부신백질이영장증(ALD)이나 레트증후군(RETT), 고셔병, 왜소증, 베체트병, 파킨슨병, 모상세포백혈병, 골형성부전증, 백색증, 크론병 등 이름조차 생소한 희귀질환도 많다. 최근 들어 새롭게 발견되는 돌연적 유전병 중에는 환자수가 수백명, 혹은 단 한 명이 보고된 경우도 있다.

희귀병은 극심한 통증, 사회적 고립, 엄청난 치료비 부담으로 환자와 가족을 옴쭉달싹 못하게 옭아맨다. 신경계통의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한 환자는 “어릴 때 조용히 죽어버렸으면 지금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을 텐데…”라며 한탄했다. “어차피 ‘시장’이 해결해줄 수 없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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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호재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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